22 길 잃은 양

제1독서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3,3-8
형제 여러분, 3 하느님의 영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며 육적인 것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4 하기야 나에게도 육적인 것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가 있기는 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적인 것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5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6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7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10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8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9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다양한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꼽자면 하느님 나라의 선포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가르침을 통하여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던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이런 모습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보여 주신 예수님의 행동입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그 단면을 보여 줍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물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볼멘소리지만, 오히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을 잘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죄를 용서하시고, 죄인을 받아들이시고 그들과 화해하시며 그들도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드러내시려고 함께 음식을 나누십니다.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은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교와 화해를 나타냅니다. 지금 우리가 거행하는 성체성사의 의미와 비슷합니다. 죄인들도 하느님의 식탁에 초대받은 자녀들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동은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죄인을 받아들이고 친교 안에 함께 머무는 것은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자신이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일 수도 은전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나 은전 아홉 닢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한데 모여 친교를 나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식탁에 모두가 모인다는 것은 하늘에서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분명 기쁜 일입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의 행동에 동참하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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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내버려 둬라

-전삼용신부-

오늘부터는 루카 복음에서 말하려고 하는 ‘회개란 무엇인가?’란 주제가 이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고 그들과 음식을 나누는 것을 보고는 못마땅해합니다. 이런 그들을 보며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가 당신이라고 하십니다.

왜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는 광야에 버려둔 채 한 마리 양만을 찾아 나설까요? 그 한 마리 양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양을 광야에 버려둔다는 말은 죽도록 내버려 둔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죽도로 내버려 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 행동을 십계명에 맞게 바꾸기면 하면 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결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압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회개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될 수 있다고 믿는 것에서 그리스도가 아니면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애니멀봐’ 채널 유튜브에 재미있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냥이 초록이와 거위 두두의 이야기입니다. 거위가 알을 낳았는데 거위가 그 알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농장 주인은 그 알을 닭이 품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닭은 부화한 거위 새끼를 자기 새끼가 아니라고 쪼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새끼가 죽어 슬퍼하는 고양이가 있어서 고양이와 거위 새끼를 함께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고양이의 모성애가 발동하였고 이에 거위는 자기를 사랑해주는 고양이를 엄마로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자기를 고양이로 믿는 즉시 거위로 사는 삶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고양이 초록이와 거위 두두는 행복합니다.

또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두두가 자기가 고양이라고 믿는 이상 절대 거위들과 어울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거위들과 한 곳에 넣어두어도 자신이 고양이인 줄 알고 엄마만 찾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찾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 행동을 바꾸려는 노력이 아닙니다. 끝까지 행동에 의존하려 하면 예수님은 그들을 광야에 버려둘 수밖에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갈라 3,10)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로마 3,28) 되기 때문입니다.

‘애니멀봐’에 날지 않고 걷는 독수리가 나옵니다. 독수리인데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해 인간에게 키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인간인 줄 알고 날지 않고 두 발로 걸어 다닙니다. 살아있는 것은 먹지 않고 물고기를 잡아서 찢어 주어야만 먹습니다. 인간의 손 위에 앉을 때다 인간의 손을 다치지 않게 살짝 잡습니다. 경쟁의식을 고취 시기키 위해 다른 독수리가 사냥하는 것을 보여주어도 꼼짝하지 않습니다. 귀엽기는 한데 본성을 찾지 못하는 것이 불쌍하기도 합니다.

또 TV 동물농장에서는 11년 동안 사람과 한집에서 지낸 원숭이 삼순이도 나옵니다. 동남아 여행 중 식자재로 쓰이는 새끼 원숭이가 불쌍해서 사서 풀어주었는데 계속 따라와서 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숭이는 원숭이가 먹는 바나나나 과일을 좋아하지 않고 자장면과 같은 중국 음식을 더 좋아합니다. 사람을 부모로 믿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동물들은 행동을 바꾸려고 하면 절대 바뀌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근간에 자신이 고양이나 사람이라 믿어버린 자기 부모에 대한 믿음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행위를 변화시키는 것은 그냥 흉내만 내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아직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음을 바꿔주러 오신 예수님을 보며 아직도 행위만 바꿔보겠다고 주장하는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광야에 내버려 둔 채 당신을 받아들일 줄 아는 세리와 죄인들에게로 가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분의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이 생각을 바꾸는 과정이 회개입니다.

만약 자신이 키워 자신을 부모로 여기는 독수리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끝까지 자신을 부모로 여기게 만들어 그 독수리를 자신 곁에 놓아두어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이 부모가 아니라 참 부모는 독수리임을 알려주어야 할까요? 위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자기 삶을 찾은 동물은 독수리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독수리임을 조금씩 믿어가기 시작했고 날아보니 인간이 할 수 없는 것까지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도 자녀들을 아버지께로 보내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한 욕심을 부리며 자기 품에만 두려고 한다면 성당에 보내면서도 자신이 부모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자녀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만들려면 하느님만이 유일한 아버지이심을 믿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여 그분의 어깨에 올라타게 해야 합니다. 그분 없이는 그 믿음으로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면 자신도 다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만약 그럴 수 없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어린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시는 그림을 보여주며 예수님이 하시면 우리도 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해주십시오. 이것이 진정 지금까지 나에게 자녀를 맡겨주신 주님께 보답해드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행위만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한다면 우리는 결국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광야에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 안에서도 전반적인 회개의 움직임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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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자비를 믿으십시오

-반영억신부-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의지가 참으로 약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같은 고백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뉘우치고 결심했다면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성찰해 보면 여전히 약점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래서 늘 고해 신부님 앞에 얼굴을 붉힙니다. 때로는 모르는 신부님께 고해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넘어짐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돌아보게도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가15,10). 하시며 죄인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의인 아흔아홉도 소중하지만 죄인 하나도 결코 그 소중함이 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인이 회개하면 기쁨이 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비를 입는 죄인 하나가 바로 나라면 그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옆의 두 강도 중 하나는 구원되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회개하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이었지만 옆에 계신 예수님께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가23,42). 하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가23,43)라는 대답을 얻어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의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하고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시리아의 성 이사악).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언제나 반기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죄인의 모습과 하느님께 드러나는 죄인의 모습은 분명히 다릅니다. 투덜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이사55,7).고 말합니다. 요엘 예언자도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이다”(요엘2,12-13). 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이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가5,32). 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부끄럼 없이 살면 좋지만 혹 부끄러운 모습이 있더라도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허물을 안고 있음에도 우리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으시는 주님을 믿고 그분의 자비를 청하십시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성녀 소화데레사).“하느님께서는 단 한 번도 용서하시는 일에 소홀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도 용서를 구하는 일에 결코 소홀하면 안 됩니다”(프란치스코 꾜황).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확인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나누어 봅시다.

2) 고해성사를 볼때 같은 죄를 반복적으로 고해한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고해를 반복하는게 나쁘다고 이야기 할 수 있나요? 어떻게 하면 같은 고해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3) 살면서 여러분은 99마리 양의 무리중에 있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잃어버린 1마리 양이라고 생각하나요. 주인이 1마리 양을 돌보고 있을때 질투한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우리는 1마리 양을 어떻게 인도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죄인을 대하는 우리와, 죄인을 대하는 하느님과의 차이를 이야기 해봅시다.  죄인이 우리의 가족을 아프게 해도 과연 하느님과 같게 대할 수 있을까요? (예: 신부님이 과거에 죄가 있는 성폭력범이랑 미사가 끝나고 식사를 같이 하고 있다면 이 성폭력범을 우리의 성당 가족으로 인도할 수 있나요 아니면 신부님께 성폭력범과 거리를 두라고 하실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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