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3장,16-18절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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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6-18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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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제 부모님을 잘 알고 있는 교우분들 가운데 어느 분이 말씀하십니다. “신부님은 아버지를 참 많이 닮으셨네요.” 옆에 있는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은 어머니를 쏙 빼닮으셨어요.” 저는 이 두 분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였습니다. “제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닮으셨어요.”
사실 생각해 보면 제 어머니와 아버지가 태생적으로 닮았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 분이 서로 사랑하고 한 가정을 함께 책임지며 살아가는 동안 습관, 식성, 생활 방식, 가치관 등을 공유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까지도 비슷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비단 제 부모님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본당 주임 신부 시절, 수많은 부부를 바라보며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라는 말이 떠오를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닮은 정도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를 이루시지 않겠습니까? 유한한 사랑을 하는 이들이 서로 닮는데,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영원무궁토록 무한한 사랑을 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세 위격은 서로의 존재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에리히 프롬이 말하였듯이 사랑은 본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는 상대방을 자기 방식대로 끌어들이지 않고, 상대방의 존재 방식을 있는 그대로 잘 간직하도록 애써 줍니다. 그리하여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서로 일치하시는 가운데서도 성부의 위격이 다르고 성자의 위격이 다르고 성령의 위격이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외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 사랑의 신비 안에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매 순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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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를 해봅시다.

2. 신앙생활을 하며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교리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이해하기 힘들어도 주님의 가르침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3. 신앙생활을 하며 “성령이 나에게 오셨나? 성령이 충만하다. 주님과 가까워졌다”라는 느낀 경험이 있는지 묵상해 보고 어떻게 하면 성령님이 내 안에서 그리고 나를 통해 더욱 일하실 수 있도록 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떻게 생활해야 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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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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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하나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삶 안에서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우리는 잘 압니다. 서로 사랑해서 하나가 된 부부도 계속 하나가 되어 그 행복을 유지하며 살려면 수많은 수고를 겪고 위기를 극복해야 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강력한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도 수많은 갈등과 질곡을 넘어서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 다른 위격을 지니시면서도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시고, 유일한 실체로서 존재하신다는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이면서도 인간의 머리로는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입니다. 세 분이시면서 동시에 한 분이시라는 존재론적 모순의 논리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신비는 존재론이나 논리학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끝없는 애정으로 성자를 바라보시고, 성자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을 향해 끓어오르는 사랑으로 보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분 사이에 흐르는 그 뜨거운 사랑 자체가 바로 성령이시라는 어느 신부님의 설명이, 세 분이 동시에 한 분이라는 이 교리를 가슴으로 느끼게 해 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이 가장 뜨거운 신비에 참여하는 행복한 존재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와 사랑에 푹 빠진 기쁨의 잔치가 될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4606
5월31일 [지극히 거록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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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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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TqEU8bUIdgE
[서울대교구 김준휘 토마스데아퀴노(청소년국 중고등부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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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랑의 화신(化身)인 예수님께서 어찌 가련한 인간을 멸망시키시겠습니까?>

세례를 받고 신앙 생활을 한 햇수는 점점 늘어나지만, 그에 비례해서 신앙의 깊이가 그리 깊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학교에 입학하고 수도회·수녀회에 입회해서, 오랜 양성 기간을 끝내고 봉헌생활자로 살아가지만, 목표했던 바처럼 영성 생활이 일취월장하지 않고, 지지부진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출발점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의 대상이요, 우리 영성 생활의 기초이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가 어떠한가? 하는 것을 성찰하는 작업입니다. 은연중에 우리는 꽤 두렵고 경직된 하느님 상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언젠가 도래할 종말을 하느님의 결정적인 심판이 이루어질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날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는 유다교 묵시문학의 영향 탓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신 예수님을 무지막지한 심판자로만 생각하는 것, 우리 신앙생활에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니, 언제나 경계해야 할 태도입니다. 바리사이계 유다 최고위원이었지만, 진리를 향해 열려있던 신앙인이었던 니코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 유다인들 대부분은 무서운 심판자로서의 메시아 사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조만간 나타날 메시아를 정의로운 심판자이신 하느님의 엄격한 집행자로서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측면이요 신앙의 대상이신 하느님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를 지니고 있으니, 유다인들의 신앙생활이 부담스럽고, 힘겨울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그릇된 하느님 상, 왜곡된 메시아 상을 바로잡기 위해 목청이 터지도록 외치셨고, 공생활 기간 내내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온몸으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6-17) 이 명문장은 하느님 아버지의 인류 구원 사업의 목적, 방법, 결론을 짧게 요약하고 있는데 이를 더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멸망이 아니라 영생, 심판이 아니라 구원!”

우리는 기도할 때, 언젠가 세월이 흘러 그분 대전으로 나아갈 때, 그간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의 대대적인 전환 작업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과 인간 각자를 심판하러 오신 것이 절대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분 육화 강생의 목적은 멸망과 심판이 아니라 영생과 구원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 3위로 똘똘 뭉쳐 우리를 구원에로 초대하십니다.

은혜롭게도 멸망을 피하고 구원을 얻는 방법, 누워서 죽먹기 보다 더 쉽습니다. 눈을 들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을 보내신 분은 하느님 아버지이심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외아들,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현존과 동반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으며 일체의 다른 모든 우상 숭배를 끊는 것입니다.

사랑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 그 사랑의 화신(化身)인 예수님께서 어찌 연약하고 가련한 인간을 멸망시키고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 사실 하느님이나 예수님께서 심판하신다기보다는 우리 인간 각자가 스스로 심판을 초래한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해 결단을 촉구하셨고, 그 결단이 우리의 구원 혹은 멸망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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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는 삼위일체 교리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

찬미 예수님!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가톨릭 신앙의 가장 핵심적이고도 심오한 신비를 기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계시는데, 이 세 분이 완벽하게 하나의 하느님이시라는 교리입니다. 많은 신자가 이 교리를 수학적인 공식인 ‘1+1+1=1’로 이해하려다 보니 골머리를 앓습니다. 도무지 머리로 이해되지 않으니 그냥 덮어놓고 맹목적으로 믿어야 하는 어려운 숙제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여러분께 아주 발칙한 고백을 하나 하고자 합니다. 저는 삼위일체 교리가 억지로 믿어야 하는 골칫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제가 ‘하느님이 진짜 나의 창조주이심’을 확신하게 만든 가장 완벽하고 과학적인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삼위일체 교리 때문에 하느님을 믿습니다. 이 교리가 아니었다면 저는 하느님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우주의 에너지 보존 법칙에 따르면, 어떤 물질도, 어떤 생명체도 무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법은 없습니다.
반드시 생명을 주고 에너지를 불어넣은 ‘창조주’가 존재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수많은 신들 가운데 누가 나의 진짜 창조주인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오늘 저는 논리적이고도 완벽한 4단계의 법칙을 통해, 왜 삼위일체 하느님만이 우리의 진짜 창조주일 수밖에 없는지 파헤쳐 보겠습니다.

1. 창조자라면 구원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최고급 인공지능을 탑재하여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로봇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날 이 로봇이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걸려 시스템이 붕괴하며 죽어갑니다. 로봇은 살기 위해 묻습니다. “누가 나를 만들었을까? 나를 만든 자만이 내 시스템을 알고 나를 고칠 수 있다.” 그때 수많은 IT 기업이 다가와 서로 “내가 널 만들었다”라고 주장합니다. 로봇은 진짜 주인을 어떻게 가려낼까요?

단순히 “내가 널 만들었다”고 우기는 자가 주인이 아닙니다. 로봇의 시스템이 붕괴하였을 때, 그 내부 운영체제의 오류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백신을 깔아 완전히 고쳐줄 수 있는 자만이 진짜 창조주입니다. 만들었다고 큰소리치면서 정작 고장 났을 때 고쳐주지 못한다면 그는 참 주인이 아닙니다. 아이를 낳기만 하고 젖을 주어 키우지 못한다면 참부모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2. 구원 계획이 구원 이전에 미리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류 역시 죄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걸려 죽음의 늪으로 떨어졌습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내가 세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신들을 먼저 찾아가야 합니다.

이슬람교의 경전 꾸란 제39장 5절을 보면 “알라께서 하늘과 땅을 진리로 창조하셨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힌두교의 경전 춘도기야 우파니샤드 제6장 역시 절대자 브라흐만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고장 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합니까?

이슬람교의 구원 방식은 율법에 대한 철저한 복종입니다. 신은 하늘에 머물며 율법이라는 밧줄을 툭 던져줍니다. “이 밧줄을 꽉 붙잡고 네 힘으로 기어 올라와라. 그러면 살려주겠다.” 불교나 힌두교는 어떠합니까?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카르마를 끊어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신이 밧줄조차 내려주지 않으니, 자기 스스로 우물벽을 맨손으로 기어 올라가야 합니다.

과연 이것이 완벽한 창조주의 구원입니까? 갓난아기처럼 똥통에 빠져 힘이 다 빠진 인간에게, “알아서 기어 올라와라”라고 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방관입니다. 아기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머릿속에 설계하지도 않고 무작정 아기부터 낳는 부모는 없습니다. 무언가를 만들었다면,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고칠지 미리 ‘계획’을 세워두는 것이 창조주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참된 창조주라면, 인간이 죄에 빠지기 전부터 성경이라는 ‘설계도’에 그 완벽한 구원 메커니즘을 미리 적어두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참된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이 무책임한 다른 종교의 신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느님은 메시아를 통해 어떻게 인간을 구원할 것인지 구약성경에 치밀하게 예언해 두셨습니다. 큰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지내며 죽음과 부활의 시간표를 보여준 요나의 표징을 보십시오. 또한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이사 53,5)라고 명시한 이사야서의 고난받는 종의 예언을 보십시오. 이 수많은 구원의 설계도와 예언들이 수백 년 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실현되었습니다. 진짜 창조주만이 고장 난 피조물을 고칠 완벽한 설계도를 미리 가지고 계시며, 그 계획대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3. 구원하는 과정에서 삼위일체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좁고 어두운 우물에 아이가 빠졌을 때, 진짜 부모는 위에서 “율법을 지켜라”, “스스로 깨달아서 올라와라”라고 소리치며 책을 던져주지 않습니다. 참된 창조주의 구원은 철저히 ‘삼위일체의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유튜브에 올라와 전 세계를 울렸던 외국의 한 실제 구조 현장 영상이 이를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걸음마를 갓 뗀 어린 아기가 지름이 수십 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좁고 깊은 우물 구멍 속으로 추락했습니다.
우물 입구가 너무 좁아 덩치 큰 어른들은 도저히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어른들은 무작정 뛰어들지 않고 먼저 ‘계획’을 세웁니다. “우리가 위에서 밧줄을 꽉 잡아당길 테니, 체구가 가장 작은 소년을 밧줄에 묶어 거꾸로 내려보내자.”

이 기가 막힌 구조 방법에 따라, 마을에서 가장 작은 일곱 살짜리 소년의 발목에 굵은 밧줄을 묶어 우물 속으로 거꾸로 매달아 내려보냈습니다. 캄캄한 우물 밑바닥에서 소년은 울고 있는 아기를 두 팔로 꽉 끌어안습니다. 그리고 지상을 향해 소리칩니다. “당기세요!” 지상의 어른들이 일제히 밧줄을 끌어당겨, 소년과 아기를 무사히 구출해 냅니다.

여러분, 이 눈물겨운 구출 작전 안에 하느님의 삼위일체 신비가 완벽하게 담겨 있습니다. 우물 밖에서 계획을 세우고 밧줄을 당기시는 어른들은 ‘성부 하느님’이십니다. 압도적인 거룩함을 지니신 아버지가 죄악의 좁은 우물에 직접 닿으면 세상이 타버립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인간이 껴안을 수 있는 ‘인간의 작은 체구’를 입은 소년을 내려보내십니다. 그분이 바로 강생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물 밑바닥까지 거꾸로 내려오시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두 팔을 벌려 우리를 꽉 끌어안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당기시는 생명의 힘을 아들에게 끊어지지 않게 전달해 준 그 ‘밧줄’은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이라면, 나를 구원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부모가 아기를 키울 때 보여주는 이 절박하고 헌신적인 모습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이르러 우리를 살리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이 그토록 확연하고 눈부시게 드러난 것입니다.

구원의 과정에 이 완벽한 부모의 양육 방식, 곧 삼위일체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가짜 신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삼위일체의 모습으로 다가오신 그분만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진짜 창조주임을 굳게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4. 구원될 수 있다면 구원자도 될 수 있게 만들어야 참 창조자입니다

마지막 4단계입니다. 참된 부모는 아기를 구원하고 젖을 먹이는 데서 끝내지 않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나서 자신과 똑같이 생명을 낳고 구원하는 ‘부모’가 되게 만듭니다. 참된 창조주는 피조물을 그저 불쌍히 여겨 살려두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똑같은 본성을 수여하여 ‘구원자’로 격상시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모습대로 인간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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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늘은 5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본당에는 이번 5월에 많은 행사가 있었습니다. 5월 2일에는 ‘성모의 밤’이 있었습니다. 성모님께 우리의 사랑과 존경을 드렸습니다.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본당 공동체가 영적으로 풍성해질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5월 3일에는 ‘제2회 생활 성가 대회’가 있었습니다. 작년에는 웨스트플래이노 구역이 ‘나는 꽃이야’라는 노래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올해는 울림 중창단의 ‘인생’이라는 노래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5월 10일에는 ‘Mother’s Day’가 있었습니다. 작년처럼 올해도 ‘어머니 은혜’를 함께 불렀습니다. 5월 5일은 아버님의 15번째 기일이기도 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사시도록 기도했습니다. 5월 16일에는 ‘다문화 미사’가 성 안나 성당에서 있었습니다. 본당에서도 ‘사물놀이’ 팀과 ‘K Pop’ 팀이 참가했습니다. 5월 17일에는 ‘제8회 청소년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꿈과 재능을 보는 것은 기쁨입니다. 5월 24일에는 ‘견진성사’가 있었습니다. 5월 29일에는 주일학교 여름 캠프가 시작되었고 오늘 돌아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함께한 5월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수고해 주신 사목회와 봉사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사제는 미사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과 함께” 그러면 교우 여러분은 이렇게 응답합니다.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무엇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일까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믿고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무엇이 하느님 나라입니까?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복음입니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말씀과 표징이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땅에 묻히셨지만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들 부활의 확증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사랑일까요? 하느님께서는 그 사랑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랑으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감성과 이성 그리고 오성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문화와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제8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 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 49, 15)” 그리고 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한 까닭에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무엇이 성령의 친교입니까? 사도행전은 성령의 친교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성령의 친교는 여러 은사로 나타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은사가 하느님의 은총에 따라 각 사람에게 다르게 주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어떤 이는 믿음에 맞게 예언하는 은사를, 어떤 이는 봉사하는 은사를, 또 어떤 이는 가르치는 은사와 권고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또한 나누어 주는 이는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이는 열성으로, 자비를 베푸는 이는 기쁜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이처럼 바오로 사도는 다양한 은사가 있지만 모두가 공동체를 살리고 세우기 위해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임을 강조하며, 각자가 받은 은사를 충실히 실천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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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이시면서 동시에 한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 이성으로는 완전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압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요한 3,16). 외아들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 다른 누군가가 대신할 수 없는 하나뿐인 아들을 뜻합니다. 그 외아들을 주신다는 것은 당신 자신을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자신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아드님께서는 아버지 뜻대로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내어놓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시고, 하느님의 영께서는 세례로 우리를 하느님의 품으로 이끄십니다. 서로 자신을 내어놓고 받아들이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일치를 이루시는 분이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삼위일체는 수학 공식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입니다. 홀로 계시지 않고 늘 함께 계시며, 서로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위하여 작은 것이라도 기꺼이 내어놓을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아 갑니다.

우리는 미사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큰 선물인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십니다. 이 사랑의 선물을 받고, 우리도 서로에게 사랑의 선물로 자신을 내어놓읍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도 사랑의 공동체를 이룹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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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16-18: 외아들을 보내주신 하느님의 사랑

1. 삼위일체의 신비: 구원의 중심에 계신 하느님
오늘 우리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낸다. 교회가 이 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과 수난,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원의 모든 신비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하기 위함이다.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우리 구원의 주체이시며, 동시에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분이시다. 바오로 사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2코린 13,13)라고 인사한다. 이 인사는 단순한 축복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내적 생명과 인간의 구원 역사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고백이다. 교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 신비는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신앙의 모든 진리는 삼위일체에서 나오며, 그 삼위일체를 향해 나아간다.”(234항) 삼위일체는 단지 하느님의 존재 방식에 관한 신비가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는 실재의 중심이다.(사도 17,28 참조) 우리의 몸은 “성령이 계시는 궁전”(1코린 6,19)이며, 삼위일체의 내적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무른다.

2. 하느님 아버지: 사랑으로 외아들을 내어주신 분
요한 복음은 이렇게 선언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16절) 여기서 ‘내주셨다.’는 말은 단순히 ‘보내셨다.’는 뜻이 아니라, ‘넘겨주셨다, 죽게 하셨다.’는 깊은 의미를 지닌다.(로마 8,32 참조) 곧 아버지께서는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 아들을 사랑 안에서 내어주신 분이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묵상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게 하셨다기보다, 우리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그 아들을 우리 손에 맡기셨다. 그분의 죽음 안에 우리의 생명이 있다.”(Tractatus in Ioannem, 12,12) 이처럼 삼위일체의 첫 번째 신비는 하느님 아버지의 절대적인 사랑이다. 아버지는 단죄가 아니라, 구원을 원하시며(17절), 그분의 심판은 항상 사랑의 정의, 곧 ‘생명을 위한 심판’(요한 12,47)이 된다.

3. 하느님 아들: 사랑의 얼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들은 아버지 사랑의 선물이며, 동시에 그 사랑의 계시이시다. 성 아타나시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아들은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셨으며, 아버지를 드러내시는 살아 있는 말씀이다. 아들을 본 이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Oratio contra Arianos, I, 20)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살아 있는 얼굴로서,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하신다. 그분 안에서 하느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분, 우리의 고통과 죽음에 참여하시는 분이 되셨다. 교리서는 이렇게 밝힌다. “성자는 인간을 하느님께 이끌고, 하느님을 인간에게 드러내신다.”(240항)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삼위일체의 사랑이 가장 완전하게 드러난 자리이며, 그곳에서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1요한 4,8)의 실체를 본다.

4. 하느님 성령: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시는 분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영원한 사랑의 관계이시며, 동시에 우리를 그 사랑 안으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시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졌을 때, 우리는 하느님과 일치한다.”(De Trinitate, XV,17,31) 성령의 친교는 단지 개인적인 신심의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치와 사랑의 원리다. 그분 안에서 교회는 하나 되고, 신자들은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실현할 수 있다. 따라서 삼위일체는 단순한 교의가 아니라, 삶의 모델이다.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삼위일체는 모든 인간 공동체가 닮아야 할 최고의 모범이다. 각 사람은 자신이 다르면서도 사랑 안에서 일치할 수 있다.”(1878항)

5. 삼위일체의 사랑 안에서 사는 삶
프랑스 신학자 이브 드 몽슈이유(Y. de Montcheuil)는 말한다. “교회는 삼위일체의 교회이다. 교회는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의 계획이 성취되는 곳이다.” 삼위일체의 삶은 사랑의 순환 속에 있는 관계의 삶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을 주시고, 아들은 아버지께 자신을 내어드리며, 성령은 그 사랑의 흐름 안에서 모든 이를 하나로 묶는다.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도 이러한 ‘삼위일체적 사랑의 구조’를 닮아야 한다.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삶을 이 세상 안에 드러내는 길이다.

6. 결론: 삼위일체의 삶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은 우리
우리는 세례로써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새로 태어났다.(마태 28,19)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 전체는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머무는 삶이다. 이 신비를 믿고 고백하며, 그 사랑 안에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자, 삼위일체의 살아 있는 성전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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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음 희망 사랑으로 우리>

요한 3,16-18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믿음 희망 사랑으로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는 나이되 너이고
너는 너이되 나이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는 너에게 스미고
너는 나에게 스미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를 너에게 건네고
너를 나에게 건네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너를 나처럼 보듬고
나를 너처럼 보듬으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는 너만큼 있고
너는 나만큼 있으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는 너처럼 있고
너는 나처럼 있으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는 너와 다르되 같고
너는 나와 다르되 같으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와 너 둘이되 하나이고
너와 나 둘이되 하나이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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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신정훈 미카엘 신부님]

<닮은꼴>

‘함께 먹다’, ‘함께 놀다’, ‘함께 살다’는 띄어 쓰지만 ‘함께하다’는 붙여 씁니다. 인간(間)이라는 말은 사람들 사이 혹은 사람이 함께하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이를 보면 함께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모습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과 함께하는가가 문제입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꼴 보기 싫은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지옥일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함께하기 어려운 이들과 함께하는 지도자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얻으 려 산에 올라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느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슬렀습니다. 하느님은 이에 백성을 버리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서 나게 될 새 로운 민족과 동행할 의향이 있으시지만, 이 백성과는 더 이상 같이 가고자 하지 않으십니다. 이때 모세가 말합니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길 바랍니다.”(탈출 34,9) 모세는 자신을 못살게 구는 백성과 자신을 구분하지 않고 “저희”라는 말로 함께 묶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접고 다른 이들의 편에 서는 중재자의 전형이자 장차 오실 예수님의 예형입니다.

바오로는 코린토 공동체에 보낸 첫 편지에서 “형제 여러분”이라는 말을 16번이나 쓰지만 둘째 편지에서는 두 번만 씁니다. 맘이 편치 않습니다. 바오로는 이미 그들에 게 눈물로 쓴 편지를 보냈고, 그들이 그릇될까 노심초사 하며 자신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그들을 비난합니다. 하지만 오늘 독서인 편지 말미에 화해를 청하며 서로 뜻을 같이하여 평화롭게 살자고 제안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2코린 13,13)라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지극히 아름다운 표현이 나옵니다. 바오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은총과 사랑과 친교만이 자신과 코린토 공동체 사이를, 또 분열된 공동체 자체를 화해시킬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곳, 화해와 공존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모세처럼 예수님께서는 성부와 인류 사이의 중재자가 되십니다. 세찬 바람이신 성령께서는 우리 사이의 불목과 분 열을 몰아내십니다. 예수님처럼 타인 편에 섭시다! 편 가르는 옹졸함에 사로잡힘 없이 하늘에서 오는 기운에 마음을 활짝 엽시다! 한 마음으로 서로를 성화시키면서 하나가 되는 부부 안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사 목현장> 52항 참조) 다투지만 화해하는 부부에게서 하느님이 보이고 골치 아픈 세상 안에도 하느님의 외아들이 계십니다. 이 사실을 신뢰하며 그분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가 가장 인 간답게 되는 길이자 그분의 사랑을 받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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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학생을 대상으로 인터넷 게임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수용될 때와 배제될 때 기능적자기공명영상(fMRI)을 촬영하여 뇌의 어느 부분이 활성화되는지를 보았습니다. 게임에서 자기를 따돌리는 배제를 경험하면 스트레스가 일어나며, 뇌에서도 내측 대상 피질과 전성엽이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이 부위는 신체적 통증이 있을 때 활성화되는 곳입니다.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누군가에게 거절당하거나 집단에서 소외를 경험하는 것을 뇌에서는 신체적으로 몸이 아픈 것과 똑같이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절이나 소외로 심한 스트레스를 느낄 때, 진통제인 타이레놀 먹는 것도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함께한다는 것 자체로 매우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체적 통증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편하다, 귀찮다’ 등의 이유를 붙여서 혼자 있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는 경우를 봅니다. 오히려 함께함으로 얻는 스트레스가 크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삶은 함께함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홀로’에서는 자기 몸에 계속 통증을 주게 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함께하시길 원하십니다. 통증 없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께서 하나를 이루는 신비를 직접 보여주시면서, 우리 역시 함께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삼위일체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은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요한 3,16)

삼위일체 하느님은 그 자체로 성부, 성자, 성령의 완전한 사랑의 친교 안에 계십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사랑에 머물지 않고, 이 세상을 향해 흘러넘칩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을 내어주셨다는 것은, 우리를 위해 당신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온전히 내어주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자는 성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세상에 오십니다. 성부와 성자는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구원의 역사 속에서 성자는 파견되는 자로서의 역할을 취하십니다. 죄 많은 세상이 심판받아 마땅해 보이지만, 삼위일체 하느님의 목적은 치유와 회복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즉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십니다.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은 성부 성자 성령이 나누는 신적 사랑의 사귐 안으로 우리가 초대받아 그 사랑을 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에 응답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벗어버리고, 함께하는 기쁨 안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머물면서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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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6-18)

1) 성모님의 예수님 잉태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잘 드러내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성모님의 예수님 잉태는, 아버지 하느님과 성령과 예수님이 분명히 구분되어 있어서, 각각의 일을 하신 일로 보이지만, 사실 그 일은 인류 구원이라는 하나의 목적으로, 메시아 강생이라는 하나의 일을 함께 하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온 몸으로 받아들여서 그것을 온 삶으로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일어난 일도 삼위일체의 신비를 잘 드러냅니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1-22)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아버지와 성령이 함께 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류 구원 활동은 예수님 혼자서 하시는 일이 아니라, 아버지와 성령이 함께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 일에 참여하는 생활입니다. <그것은 ‘나’를 구원하기 위한 일이니 ‘나의 일’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3-16)

신앙생활은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누구나, 의식을 하지 않더라도, 성부, 성자, 성령의 일치와 사랑에 동참하고 있고, 성부, 성자, 성령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모든 신앙인은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고, 자신의 삶으로 그 신비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은사’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일러둡니다. 하느님의 영에 힘입어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할 수 없고,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코린 12,3-7)

바오로 사도가 성령, 주님, 하느님으로 구분해서 말한 것은 삼위일체를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된 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도우심과 예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물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모른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당신을 삼위일체이신 분으로 계시하셨는가?” 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사랑하니까.”입니다.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보살피시는 아버지의 사랑과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우리 안에서 항상 살아 계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령의 사랑이, 셋으로 구분되면서도 하나인 사랑이라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성체성사처럼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이 말에서 ‘알다.’는, ‘일치를 이루다.’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묵상할 때, ‘삼위’보다는 ‘일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는 것은 삼위일체의 ‘사랑의 일치’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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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윤대건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하나를 위한 다채로움>

예비자교리를 하며 교리를 준비하기 가장 어려운 과를 정하라고 한다면 역시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일 것입니다. 저는 삼위일체 교리를 시작하기 전에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학부 3학년 삼위일체 수업을 들었을 때, 담당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교수님께서는 당시 첫 수업 때 “저는 삼위일체를 30년 이상 공부했고 가르쳤지만, 아직도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해하는 것이 아닌 믿음의 영역이기에 신비라고 불립니다.”라고 하셨는데 당시 그 말씀이 너무나 인상 깊었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언어, 지혜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창조주의 신비는 이해가 필요한 것이 아닌 믿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신앙을 키워가며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신비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체험은 일종의 앎 또는 지식을 통한 ‘경험’에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에는 우리에게 다양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랑이 있습니다.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사랑이 뭘까?’라는 질문에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 사랑을 정의 내리고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신비 역시 그 의미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정의 내리기란 어려우며, 그 위대함을 받아들일 준비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모양이 다양한 건지도 모릅니다. 다양함 안에서 주님의 다채로운 사랑을 느낍니다. 다양한 사랑은 큰 사랑을 준비하게 하며 주님의 그 위대한 사랑을 조금씩 알아가게 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이해하기 쉽지 않으나 ‘사랑’으로 경험하고 준비될 수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보여주신 창조, 인류 구원, 교회의 존재까지 이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하나의 이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도 시기가 있고 준비가 필요하듯 주님의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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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 우리가 고백하는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위격으로 세 분이시나 본질과 실체로는 한 분이시라는, 모순처럼 보이는 존재론적 명제를 이성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신학자들과 설교가들이 여러 가지 비유를 사용했지만, 저는 별로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너무 단순한 비유들은 오히려 그냥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 듯 느껴지기도 하여 이제는 그런 시도를 피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것은, 이성으로 이해되고 설득되는 까닭이 아니라 주님께서 직접 알려주셨고 교회가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비롯하여 우리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말씀해주신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살펴봅시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가장 짧고도 명확하게 고백하는 기도인 성호경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태 28,19)라는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따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4~17장)에서는 ‘보호자’, ‘진리의 영’으로도 불리는 ‘성령’을 약속하시고, 성령께서 하실 일을 설명하십니다. 이 말씀의 맥락 안에서 삼위일체 신앙의 바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먼저 강조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전제요 목적이며 근거입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알고 믿어야 그분의 길을 따를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요한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순종하고 서로를 영광스럽게 하는 관계이고 이를 통해 하나가 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는 그대로 제자들에게, 그리고 믿는 이들에게 열려있는 관계입니다. 믿는 이들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아들이 아버지와 누리는 관계에 모두 참여하게 됩니다. 그들과 아들과 아버지는 서로 사랑하고(요한 14,21 참조), 그들이 계명에 순종하면 아버지는 그들이 청하는 것을 다 주실 것이며(요한 16,23 참조), 그들은 아들을 증언할 것이고 아들은 아버지께서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요한 15,27. 17,22 참조) 이 사랑의 관계로의 초대가 예수님의 본론입니다.

성령의 파견에 대한 약속과 그분이 하실 일에 대하여는, 이 두 주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습니다. 성령께서는 아들이 그러셨듯이,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앞으로 올 일들을 알려주실”(요한 16,13) 것입니다. 그분은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시고 보내어지신 것처럼(요한 17,8 참조), 아버지에게서 나오시고(요한 15,26 참조) 보내어지실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증언하실 것입니다.(요한 15,26 참조) 이것은 앞에서 언급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령께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제자들과 믿는 이들, 교회와 영원히 함께 하시며(요한 14,16 참조) 그들이 하느님과 믿음의 일치를 이루도록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십니다.

사실 부활 이전의 제자들에게 성령은 세례성사나 주님의 말씀 안에서 간접적으로 체험된 분이었을ㅠ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신 그분은 세상 끝까지 교회와 함께하시는 협조자가 되셨습니다. 사도행전에 잘 묘사된 그 체험은 사도들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깊고 뜨거운 것이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사랑과 일치에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경륜 안에서 우리가 체험한 하느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우리가 체험한 하느님은 우리를 늘 곁에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고 우리가 서로 그렇게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사랑의 모델이십니다. 세상에 오신 아드님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은 살아계신 사랑이 되셨고, 교회와 함께 계시는 성령을 통해 아버지와 아드님의 사랑은 영원히 살고 일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언제나 현재형의 사랑이 되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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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어느 날 학부모가 찾아와 저에게 자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는데 그곳에서 화장실에 가지 않고 참고 참다가 얼굴이 노래져 집에 돌아와서야 가까스로 큰일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부끄러워서’, 혹은 ‘뒤를 닦아줄 사람이 없어서’ 라고 하는데 밖에서 볼 일을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어떻게 교육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고민이었습니다. 저는 그러한 아이가 귀여워 깔깔대고 웃으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급해서 어쩔 수 없이 몇 번 화장실에 가게 되면 정신 차릴 거에요.”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너무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참고 있는 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하고 힘들까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이 아이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당연히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선생님들이 도와 줄 텐데 엄마 아빠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그 마음. 다른 사람에게 나의 치부를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사실 부모의 사랑만이 부끄러운 나의 모습을 덮어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막 유치원에 간 아이들은 부모님이 자신을 두고 어디론가 간다는 사실에 초조해 하며 목 놓아 웁니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으면 버려지는 기분이 들고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까 두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활이 반복되다보면 곧 괜찮아 지는데, 분명 언젠가 부모님이 자신을 데리러 온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부모님의 사랑과 애정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제자들의 마음 역시 이러한 어린 아이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동안 많은 가르침을 주시며 사랑을 일깨워 주셨던 예수님. 나아가 죽음에서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제는 자신들과 함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영영 하늘로 올라간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매우 혼란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모든 치부를 알고 있지만 사랑으로 이를 덮어주신 분. 죽음에서 부활하셨으므로 메시아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했다는 확신.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은 이제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이 하늘 위로 올라가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자신들을 핍박하는데 이제 예수님이 영영 모습을 감추셨다는 것이 꽤나 두려웠을 법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두려움을 얼마 지나지 않아 용기로 바뀌고 그들은 예수님의 부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 때문입니다. 이 성령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체험하게 되고 그러므로 오히려 충만한 확신으로 전 지역을 향해 선교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를 알고 있는 우리에게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조금만 더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대한 기적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해 달아났던 제자들이 어느 하나 빠짐없이 크나큰 용기를 가지고 한 목소리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합니다. 각 지역에서 여러 가지 언어로 주님을 선포하며 그리스도교는 퍼져 나가게 되고 그것은 세상에 깊이 뿌리박혀 수 천 년이 지난 현재, 지구의 반대편인 이곳에서도 그 가르침을 전해 받아 같은 모습으로 우리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지 2020여년이 지났습니다. 2020년. 얼마나 길고 긴 시간입니까? 물론 이 시간동안 우리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평온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총과 성령의 친교가 우리와 함께 해 왔지만 이것을 담아내는 우리 인간은 부족하고 나약하기에 여러 가지 실수와 한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중세의 마녀사냥, 십자군 전쟁, 면죄부 등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른 끔찍한 잘못 혹은 그릇된 판단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오류와 한계 속에서도 수많은 성인 성녀들의 모범, 성직자들의 헌신, 신자들의 믿음과 정성으로 이 교회가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돌보심”과 “그리스도의 은총” 그리고 “성령의 움직임”이라는 연결고리가 없이는 설명될 수 없는 실재하는 거대한 기적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기적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끝까지 함께 계시지 않고 그 모습을 감추었는가? 물론 제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언제까지나 함께 하셨으면 좋았겠지만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자기의 힘으로 화장실을 가 버릇해야 부족한 모습을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한계와 오류를 반복하면서도 스스로 성장하고 하느님께 나아가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아이에게 필요하듯 제자들과 인류에게도 이러한 것이 필요했고 그리하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성령이 곧 예수님의 마음이고 하느님의 정성입니다.

그리고 이 성부 성자 성령은 같은 본질을 이루는 영원하고 무한하며 불변하는 실체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러한 교리, 즉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의 위격을 가지나 동일한 본질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기념하는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오늘의 대축일을 기념하며 언제나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느님, 그 사랑을 드러내시며 모범이 되어주신 예수님, 이를 우리에게 전달해주심과 동시에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주는 성령께 감사하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 우리가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이 기적입니다. 그리고 이 모두는 삼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찌 이 삼위일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복음 환호송을 통해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 오실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은 영광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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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 떨리는 신비입니다. 알아듣기에는 어려워도 참으로 벅찬 사랑의 신비입니다. 너무 깊어 헤아려지지 않아도, 오히려 다 헤아려지지 않기에 더 깊이 매료당합니다. 다 이해되지는 않아도, 그 사랑은 충분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는 이 신비의 내용을 알아듣는 데는 한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중요한 것은 이 신비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듣는 일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라는 이 용어가 생겨난 역사적 배경은 3세기~5세기입니다. 이때, 교회에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하느님이 ‘실제 하느님과 다르고’ 또 ‘성령과 하느님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이런 주장들 앞에서 신앙인들은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삼위일체”란 이 용어를 통하여 신앙인들이 고백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알아듣는 하느님은 실제의 하느님이고, 또 신앙인들 안에 숨결로 일하시는 성령도 실제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는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에서,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전에 이미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길 빕니다.”(2코린 13,13)

이는 사랑의 하느님과 은총의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의 성령께서는 같은 하느님이심을 말해줍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삼위일체”에 대한 의미를 잘 드러내줍니다. 곧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가운데 나타났는지’를 드러내주며,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말해줍니다. 따라서 이 신비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축복을 깨우쳐줍니다.

<제1독서>에서, 모세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구름에 싸여 내려오셔서 모세와 함께 그곳에 서시어,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셨다.”(탈출 34,5)
“주님,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주시기를 바랍니다.”(탈출 34,9)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2코린 13,1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길 빕니다.”(2코린 13,13)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네 인간들과 함께 사시기를 원하셔서 당신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 아들 예수님을 인간의 동행자로 삼으시고 벗이 되어 “함께 있게” 하시고 당신의 생명으로 이끌게 하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느님의 ‘참 사랑’입니다. 곧 아들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는 사랑입니다. 이 ‘참 사랑’을 단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함께 있음”이며, “함께 한다”는 것의 복음적 의미는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있음”이 사랑입니다. 이 “함께 있음”이 곧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성입니다. 따로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아니하고,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귐으로 친교를 이루며, 상호 교제하고 상호 교환하며, 상호 내재(내주)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내어주어 타자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자신 안에서 타자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와 연대의 관계 맺음이요, 우애와 형제애로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사랑으로 서로 함께 있고, 서로 속해 있고, 서로의 것이 되는 참으로 아름다운 결합의 일치요,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사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얼마나 밀접하게 관계 맺고 계시는 지를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께서 인류 역사 안에서 얼마나 다양하고, 얼마나 은혜롭고, 그리고 얼마나 깊게 일하시는 지를 드러내주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시라는 의미는 “하느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며, 지금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우리와 동행 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참으로 하느님은 삼위로 함께 계시기에 사랑이십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이렇게 “함께 있음”이 바로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기 이 수도가정에서, 이 성당에서 “함께” 만나 한 분이신 주님을 찬미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서로 사랑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되는 거룩한 일. 그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성 안으로 쏙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은 이토록,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자신을 바로잡으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 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2코린 13,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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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면서도
죽기까지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죽기까지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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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전에는 세례성사를 받기 전에 까다로운 교리문답 시험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교리문답을 하면서 지금으론 상상할 수 없는 에피소드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본당 신부님이 세례성사를 베풀기 전에 예비자인 할머니에게 몇 가지 교리, 특히 삼위일체에 관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몇 분이십니까?”, “한 분이십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좋습니다. 그럼 한 분이신 하느님은 몇 개의 위격이십니까?”, 한참 생각하던 할머니는 거침없이 이내 대답하였습니다. “두 개의 위격입니다.” 당황한 신부님에게 할머니는 씩씩하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가끔 성당에 들어갔었는데, 그때 벽에 걸려 있는 하느님 그림을 봤거든요. 거기에 긴 흰 수염이 있는 할아버지(=성부)가 젊은 청년 예수님(=성자)을 안고 있고, 가운데 비둘기 모습(=성령)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벌써 죽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나도 나이를 먹어서 죽을 때가 되었는데 어렸을 때 본 그 할아버지가 여태 살아 있을 리가 없잖아요.”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성령강림 대축일 후, 이어지는 삼위일체 대축일은 성령을 받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누리게 되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밝혀 줍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하느님을 막연한 신비로 알아듣는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는 방식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찾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시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은 사랑함으로써만 배울 수 있습니다. 수영을 배우려면 물에 들어가야 하듯이, 사랑을 배우려면 사랑의 삶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랑은 체험으로써만 깨닫게 되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됩니다. 「나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라고 고백한 류시화 시인의 『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라는 노랫말처럼 사랑은 서로를 하나로 묶어주는 신비스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신비, 그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사랑은 결코 혼자서 하는 독자적인 행위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과 함께 나누는 관계입니다. ‘너와 나의 관계’, ‘너와 우리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 안에서 사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의 완성은 관계의 일치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삼위일체인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진 관계의 일치, 친교의 일치가 바로 구원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의 완성을 통하여 이제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은총을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 8,14-15)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하느님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이십니다. 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즉,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때가 차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이신 당신을 내어주신”(3,16참조) 아버지십니다. 이 아버지께서 또한 한량없는 사랑으로 우리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도록 당신의 거룩한 영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랑 안에 머무는 일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을 볼 수 있고 성령을 통해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나누시는 온전한 사랑에 참여하도록 우리가 초대받았다는 확신에서 선포된 신앙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분명 삼위일체인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 안에서 그분들의 모습을 닮아 창조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그 오묘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더욱 알 수 없습니다. 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조차도 이 삼위일체의 신비에는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삼위일체의 위대한 하느님 신비를 헤아려 깨닫고 알 수는 없지만 실천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관계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하느님 사랑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신비를 알 수는 없지만, 그 사랑의 일치에 우리는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명령하신 것,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가르치라 하신 것도 바로 이 사랑과 일치의 신비를 닮은 삶을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신앙은 삶입니다. 성령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모든 권한을 물려받았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능력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일은 사랑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며 실천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모든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미약한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는 우리의 욕심에 사로잡혀 있지만 작은 나눔을 통해서라도 사랑의 기쁨이 무엇인지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죄책감으로 말미암아 주춤거리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사랑의 손길을 내밀 때 얻게 되는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사랑이 무엇인지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주님이신 예수님을 통해 보여 주신 사랑의 길을 따라 걷노라면 우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나누시는 사랑의 일치에 도달하게 되리라 믿으며 오늘도 사랑에 빠져 봅시다! 사랑하면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감사송에서 이렇게 삼위일체인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 아버지께서는 아드님과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 한 위격이 아니라 한 본체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시옵니다. 주님의 계시로 저희가 믿는 주님의 영광은, 아드님께도 다름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위격으로는 각각이시오 본성으로는 한 분이시며, 위엄으로는 같으심을 흠숭하오며, 영원하신 참하느님을 믿어 고백하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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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17)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심판은 오직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오직 사랑만 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보내진 이유입니다. 우리가 사랑보다 심판하기를 좋아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교만 때문입니다.

영적 교만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지나친 우월감이나 지나친 열등감에서 나오는 영적 고통 중 하나입니다. 다른 사람을 심판하려는 욕망은 우리의 불안에서 나오고 그 불안은 주님 안에서 안식을 취하지 못하는 영혼의 울부짖음입니다.

주님보다 세상에 더 의존할수록 우리는 더욱 불안하게 됩니다, 자신이 커져야 세상에서는 안식을 누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상대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해 생기는 불안입니다.

지나친 경쟁 속에서 치열한 삶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함께 공존하며 더불어 사는 지혜보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여 우위에 있어야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착각 때문입니다. 불안하기에 사람들에게 구원의 자유를 주기보다, 조종과 통제로써 심판하며 자신의 불안을 해소시키기에 바쁩니다.

불안과 교만의 영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나약한 죄인인 자신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낮은 자존감의 표출이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인정하는 성숙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건강한 영적 징표입니다.

주님 앞에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람에 대한 심판을 멈추고, 하느님께 심판을 맡기며, 오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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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총력으로 사랑하시는>

저는 올해 삼위일체 대축일을 성부 성자 성령께서 총력으로 우리는 사랑하심을 기리는 축일이라는 면에서 보고자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를 그렇게 총력으로 사랑하셨음에 무한 감동하고 무한 감사드리는 축일이 되어야겠지요.

제 생각에 삼위일체 대축일은 두 가지 신비를 기념합니다. 삼위의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신 신비를 기념하고, 삼위의 하느님께서 합작으로 우릴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신비를 기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축일을 지내며 두 가지 신비를 기념하지만, 이 두 신비는 서로 아주 밀접합니다. 삼위 간의 내적인 사랑과 일치로 우리가 창조되고 구원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부부간의 내적인 사랑이 자녀를 생산하고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부부간의 사랑이 없다면 자녀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고, 부부간의 사랑이 끊어지면 자녀를 함께 키우지 않겠지요.

이런 면에서 자녀의 행불행은 부모의 사랑과 밀접합니다. 부부간에 서로 사랑하며 자녀도 같이 사랑하면 자녀도 계속 행복합니다.

그런데 부부간에 사랑이 식어 헤어진 다음 자녀를 각기 사랑하면 자녀의 행복은 그만큼 많이 불완전해질 텐데 그러나 이것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만일 부부간의 사랑이 깨져 자녀에 대한 사랑도 깨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랑받지 못해 불행할 뿐만 아니라 사랑을 배우지 못해 사랑할 수 없게 되겠지요.

이런 부부간의 사랑과 비교했을 때 성삼위 사이의 완전한 사랑은 삼위 간의 일치일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창조된 우리에 대한 완전한 사랑이고 우리 행복의 원천입니다.

그렇습니다. 삼위일체의 사랑은 서로 간에 완전한 일치를 이룰 뿐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에 있어서도 일치를 이룰 것이고 합력하게 할 것이며 총력적으로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의 사랑을 받아 자녀도 사랑을 지니고, 부모의 사랑을 보고 자녀가 사랑을 배우듯 삼위일체의 합작 사랑은 우리 사랑을 풍요케 하고, 그 사랑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와 같아지는 육화의 사랑이고, 다 내려놓는 비하(卑下) 또는 비허(卑虛)의 사랑이고, 십자가 위에서 다 내어주는 무화(無化)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또한 성령의 사랑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 인도하는 사랑이고,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여 풍요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진정 사랑하고픈 사람들이고, 사랑하지 않으면 너무나 불행하기에 성자처럼 성령처럼 사랑하고픈 사람들입니다.

사랑만 해도 부족한 짧은 인생, 먼저 하느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고, 하느님 사랑 안에서 이웃도 사랑하는 삶을 살다가 한 생을 마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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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하나가 되려면!>

오늘 복음(요한3,16-18)은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 대화하시는 말씀’인데,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오늘은 ‘위격으로는 각각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본성상 온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삼위일체대축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은 ‘삼위일체 신앙’입니다.
우리는 ‘성호’를 그을 때마다, ‘영광송’을 바칠 때마다, ‘사도신경을 바칠 때마다, ‘미사’에 참례할 때마다, 삼위일체 신앙을 확인하고 다시금 기억합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신앙을 삶의 자리에서 살아낸다는 것이 참으로 힘들고 어렵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해 놓으신 성 아우구스티노는 해변가에서 만난 천사 소년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는 것보다, 이 조개 껍데기로 바닷물을 이곳으로 퍼담는 것이 더 쉽다.”

삼위일체 교리는 ‘사랑의 교리’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온전한 내어줌의 교리’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십자가 교리’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느님께서는 사랑 안에서, 온전한 내어줌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계십니다.

“아버지,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하나가 되려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죽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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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삼위일체의 신비는
관계의 신비이며
사랑의 신비이며
일치의 신비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느님의 본질이
사랑임을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서로 사랑하며
하나 되어 살아가는
하느님의 삶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일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주고
받아들이는 사랑의 존재이십니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선물로
건네시는 분이십니다.

삼위일체는
이해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먼저 살아야 할
사랑의 현실입니다.

성부는 성자를 영원히 사랑하시고,
성자는 성부께 온전히 내어드리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결합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우리 또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삶은
삼위일체 신비의
반영이며 체험입니다.

일치와 나눔
사랑과 친교
봉사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삼위일체적 삶은
관계를 회복하는
관계의 삶입니다.

사랑하고 섬기고
일치를 이룰 때
우리는 이미
삼위일체 하느님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일치와 친교를
나누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되십시오.

내어줌과
받아들임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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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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