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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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25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23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2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25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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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성당을 찾았습니다. 머리는 복잡하고 책을 봐도 눈에 들어올 것 같지 않아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성당을 찾게 된 것입니다. 무엇을 청하지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앉아 제대 뒤에 걸려 있는 십자가만 바라보았습니다.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요? 시계를 보니 네 시간이나 흘러 있었습니다.
우리는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하고자 성당을 찾습니다. 때로는 위로받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 성당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아니면 행복과 즐거움을 얻고자 성당을 찾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그런 곳입니다. 하느님을 만나 위로받고 평화를 얻으며, 하느님과 대화하면서 바라고 청하고 두드리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가 성전만이 아닌 당신의 ‘몸’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을 체험하기 전의 제자들처럼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아직도 예수님의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당신의 몸을 제자들에게 내어 주십니다. 빵으로, 포도주로 당신의 사랑과 희생을 그들에게 전해 주십니다. 바로 성체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성체가 바로 성전이며, 하느님과 만나는 곳이며,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 행복과 즐거움이 함께하는 곳입니다. 그 성체를 우리가 모십니다. 그 성체를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십니다. 우리 모두, 또 우리 각자가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집이 됩니다. 여러분은 성체를 모시고 하느님의 집이 된 사람, 눈앞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을 바라보며 하느님을 만납니까? 그 사람의 목소리와 행동이 어쩌면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위로와 평화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17).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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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하느님의 성전인 나의 몸을 나는 어떻게 거룩함을 유지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아직 못하였다면 나의 거룩함을 어떻게 유지하며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싶은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유다인들은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라고 예수님에게 따지듯이 묻습니다. 나의 영적인 무지로 인하여 참된 것을 거절한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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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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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요한 복음사가는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사건을 전하며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사두가이들과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은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정화하고자 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님의 시대를 내다보며 하느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56,7) 하고 말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집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히셨습니다(시편 69〔68〕,10 참조). 말라키 예언자는 메시아가 성전에 와서 레위 자손들을 정화시켜 의로운 제물을 바치도록 할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3,1).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행위로 유다 지도자들은 분노하여 그분을 죽일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예수님을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는 ‘하느님의 모독자’로 단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패와 권력욕으로 만연해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영적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새 성전’으로 만드시고자 하십니다. 그 성전은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 몸 안에 성령께서 머무시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성전이 됩니다(1코린 3,16 참조). 신약의 백성들은 크고 화려한 건물보다도 귀한 하느님의 집인 영혼 안에서 주님을 경배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이기심과 탐욕을 버리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킴으로써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류한영 베드로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3785
3월3일[사순 제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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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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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P3GOSKmcN0w
[서울대교구 손경락 사도요한(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교수) 신부님 집전]
**사순특강**
https://youtu.be/J98QBHBIkMY (최황진 라파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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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더 큰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교회 건설!>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예수님의 성전 정화 작업을 묵상합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남의 말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에둘러 표현하지 않으시고 단도직입적으로,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상거래는 하느님의 집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원래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 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이 상인들과 결탁하여 뒷돈을 챙기면서, 성전에서의 상거래를 허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은 급격히 훼손되고 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사제들과 사제 가문의 귀족들은 성전 경내에서 이루어지던 매매에서 큰 이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대사제는 유다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의 의장으로서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나름 확고한 위치와 권력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최고 의회는 사제 가문의 가족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일반 귀족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니, 당대 나름 잘 나가던 사람들의 집합소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당시 물 좋은 장소, 막대한 목돈이 오고 가던 장소였던 성전에서의 상거래와 뒷돈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놓을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잔뜩 돈독이 올라있던 그들이 최상의 수입원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깡그리 무시하고 모독하는 예수님의 모습에 부들부들 온몸을 떨었으며, 바득바득 이를 갈았을 것입니다. 마침내 더이상 예수님을 그냥 둘 수 없다고 작정하고 없앨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타락하고 부패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상거래가 아니라 새로운 영적 예배와 찬미가가 흘러넘치는 기도의 집으로 복원시키셨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서 성전 정화 작업을 계속되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 성전이 상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시장바닥 같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홀대받고, 음흉한 사람들의 주머니만 가득 채워주는 훼손된 교회의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에 바라시는 바가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성전을 정화시켜야 할까 고민해봅니다.
우리끼리 만의 폐쇄적인 교회가 아니라 춥고 고달픈 세상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린 교회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전 정화 작업이 아닐까요?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좌지우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자발적인 참여와 구성원 상호 간에 적극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성전 정화 작업이 아닐까요?
상상을 초월하는 건립기금으로 건립되는 성전이 아니라 방황하는 양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목자의 희생과 헌신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전을 건설하는 것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요?
우리 시대 사회적 약자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도 크게 환영받고 아무런 차별도 느끼지 않는 환대의 교회,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따뜻이 보듬어줄 수 있는 치유의 공동체, 나만 혹은 우리 가족이나 우리 본당만 생각하지 않고 더 큰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교회 건설이 시급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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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kVze1t-VRW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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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는 집의 주인과 그에 따른 손님들>
사람은 관계 맺는 동물입니다. 예전에 군대에서 귀신을 본다는 청년에게 전화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귀신 때문에 힘들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건 귀신 때문이 아니라 귀신을 맞아들일 만한 집을 만든 자신 때문이라 말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어 본성상 관계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관계는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저의 어렸을 때 집에 이사 간 지 얼마 안 되어 가 본 적이 있는데 지붕까지 내려앉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쥐나 뱀, 벌레들이 사는 곳으로 바뀝니다. 그러면 사람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집의 주인을 누구로 삼느냐에 따라 관계 맺는 대상이 달라집니다. 관계 맺는 대상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든 나의 집이 결정합니다.
오늘 복음은 성전 정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을 만들어 아버지 집을 장사꾼들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사람들을 쫓아내십니다. 장사꾼이 주인이 되면 그 집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외면하는 곳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성전은 모든 인간을 맞아들일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1970년대에 미국 뉴욕주 아미티빌 한 저택에서 무서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 집에서는 이전에 로널드 디페오 주니어가 자기 가족 여섯 명을 살해한 끔찍한 범죄가 발생했습니다. 그는 엽총으로 일가족 모두를 쏘아서 죽였지만, 각 방에 돌아다니면서 총을 쐈는데도 아무도 총소리에 깨거나 저항한 흔적이 없었습니다. 로널드는 자신이 집에 들어왔을 때 두 명이 자신에게 그러한 일을 하라고 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조지와 캐시 루츠 가족이 싼 가격에 집을 구입하여 들어왔습니다. 루츠 가족은 이사 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이상한 현상들을 경험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집이 귀신 들린 것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사제를 불러 성수를 뿌리려고 할 때 갑자기 정전되더니 날카로운 소리로 “다 나가!”라는 비명이 들렸습니다. 그 이후로도 물건이 움직인다던가 아이가 보이지 않는 것과 대화하고 친구라고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노린다는 말을 듣고는 짐도 챙기지 않고 도망을 쳤습니다. 사람들이 그 아무도 없는 집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밤에도 계속 찍었습니다. 그런데 전에 죽었던 아이와 비슷한 아이의 얼굴이 찍히기도 하였습니다.
집은 이전 죽은 이들을 주인으로 선택하였습니다. 그들은 죽은 존재들입니다. 죽은 존재는 살아있는 존재들을 시기하여 죽이거나 쫓아내려 합니다. 그러면 산 이들은 그 집에서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사람을 미워하는 어떤 것이 주인이 되면 그 사람은 타인과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담과 하와처럼 뱀이 아니라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성전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웃을 받아들이는 집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인도의 ‘타지마할’은 39세에 아기를 낳다가 사망한 여왕 뭄테츠 마할을 위한 무덤입니다. 왕은 여왕을 그리워하여 그녀의 집을 그녀가 살기를 원할 만하게 아름답게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은 수많은 사람이 와서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듭니다. 만약 뭄테즈 마할이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였다면 사람을 받아들일 만한 집이 지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반면 피라미드를 생각해 봅시다. 피라미드는 죽은 왕을 매장하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게 만들어놓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왕이 저승에서 살 수 있는 금은보화를 많이 저장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만 아는 죽은 인간이 왕이 되면 그 공간에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탈리아 오르비에또나 피렌체에 가면 아름다운 두오모 성당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양이 좀 특이합니다. 이슬람식의 문양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은 터키를 점령하고 성 소피아 성당을 부수기가 아까워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대성당들을 지을 때도 당시 이슬람 세력이 강력할 때 혹시 점령당하더라도 이슬람 사원으로 쓸 수 있도록 성당을 만든 것입니다.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신 성전은 이렇듯 종교가 달라도 인종이 달라도 모두를 포함할 수 있는 집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모든 존재의 창조자를 모실 성전이 되어야 모든 이를 사랑할 존재로 구원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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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Failure is a part of life. If you don’t fail, you don’t learn. If you don’t learn, you will never change.(실패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만일 당신이 실패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배울 수 없습니다. 당신이 배울 수 없다면 당신은 결코 바뀔 수 없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제 삶에도 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실패와 좌절은 제 삶의 새로운 변곡점이 되곤 했습니다. 33년 전에 저는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처음 본당으로 가서 보좌신부로 지내는 중에 ‘유행성 출혈열’에 걸렸습니다. 중환자실에 있었고, 당시 교구장이셨던 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병원엘 찾아 왔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병원에서 입원하고, 퇴원할 때까지 잠시도 제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이 있었기에 저는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저는 하느님의 크신 은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덤’으로 주어진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늘 감사합니다. 그러기에 늘 새롭습니다.
30년 전에 주교님께서는 제게 미국에서 사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준비를 하면서 영어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그래야 했습니다. 저는 매일 송별식을 한다고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입니다. 주교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제가 술을 가까이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교님께서는 미국으로 가는 것을 취소하였습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제가 술을 가까이 한다는 것을 주교님께 전한 사람에 대해서 원망의 마음도 생겼습니다. 돌아보면 주교님의 따끔한 질책이 제게는 좋은 약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뒤로 술에 대한 절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술자리가 있어도 10시 전에는 사제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새로운 습관이 생겼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산보하고, 책을 읽으니 하루가 즐거웠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변화 시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내가 습관을 하나 가지면, 그 습관이 나를 변화 시켜주는 것을 알았습니다.
25년 전에 주교님께서는 제게 적성성당으로 갈 수 있는지 저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저는 주교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제 손을 꼭 잡고 본당신부로 잘 지내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적성성당은 땅은 넓었지만 교우들의 수는 적었습니다. 평일미사에 나오는 교우는 10명 미만이었습니다. 주일 미사에 나오는 교우도 100명 미만이었습니다. 당연히 주일헌금도 적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3년을 지냈습니다. 33년에 3년이니 그리 긴 시간은 아닙니다. 저는 그곳에서 행복했습니다.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고, 농산물 직거래도 하였고, 서울에서 오는 학생들의 농촌봉사 활동도 받았습니다. 차가 없어서 성당에 못 나오는 분들을 위해서 차량 봉사단을 만들었습니다. 4대의 봉고차가 교우들의 집으로 가서 모셔왔습니다. 여름에는 전 신자들과 함께 바닷가로 여름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처음에는 서울에 큰 본당에 있는 동창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공기 좋은 곳에서 자연과 함께 지내는 것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혈압도 있었는데 적성성당에 있으면서 모두 좋아졌습니다. 저의 건강을 위해서 배려해 주신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정화’를 하십니다.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마음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신앙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바로 주님께서 머무시는 감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켜야 합니다. 사순시기는 바로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은혜로운 회개의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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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13-25: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의 가장 중요한 말씀은 계약과 정화를 통한 해방과 자유이다. 계약을 통하여 받은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과 자유를 주기 위한 것이었고, 그를 위해 인간이 행하여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십계명은 자유의 표현이며, 종살이를 벗어났다는 보증이다. 이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정신적인 해방과 정화를 끊임없이 요청하신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은 진정한 해방을 자유를 위한 것이다. 그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다. 습관이나 율법주의 혹은 순전히 의미를 잃어버린 외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다. 성전 정화의 의미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지 못하고 성전을 더럽히는 잘못을 바로잡아 주시는 것이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전이 하느님께서 머물러 계시는 거룩한 곳이며,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곳으로, 그 안에서 구원의 은총을 체험하며, 하느님 안에 진정한 자유를 느껴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타성적이고 습관적인 것으로 변해버린 그 가치관을 바꾸어놓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과의 결정적 만남의 장소인 성전의 예식 기능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 옛 예식과 당신 자신을 교체해 놓으신다.
예수님의 이 격렬한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징표를 요구하는(18절) 유다인들에게 당신 자신이 새로운 성전임을 말씀하신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19-21절) 이는 징표를 요구하는 유다인들에게 당신의 몸을, 즉 사람들이 수난의 비극을 통해 짓밟은 당신을 하느님의 권능으로써 사흘 후에 부활시킬 당신의 몸을 징표로 제시하신다. 그 징표는 당신 자신과 연결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분 자신과 동일시되는 징표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하고 적개심만 드러내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하느님과의 절대적인 관계를 표현하시기 위해 먼저 “내 아버지의 집”(16절)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들이 성실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분이 메시아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나중에 가서야, 부활을 체험한 후에 깨달았다(22절). 여기서 이 성전 정화가 십자가와 수난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즉 그리스도는 사람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하느님의 권능을 통해 부활하시어 하느님의 성전이 되신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라는 것과 같이 예수께서는 육화의 신비를 통해 이미 성전이 되셨다. 이 성전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느님의 현존 자체를 실현한다. 이것은 구약성서의 꿈인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새로운 성전을 통해서 영원히 실현되었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은, 우리도 그 성전으로 들어가 하느님의 현존 신비로 우리의 삶을 감싸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그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항상 우리 자신의 정화가 필요하다.
이제 하느님의 계명과 십자가, 성전의 정화에 대한 것을 어떻게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은 모두 우리의 진정한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의 표시는 계명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4,15; 15,14) 만일 우리의 신앙이 성전 앞에만 머물러 있고 고통과 영광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희생제물을 바쳐야 하는 지성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착각 속에 빠져있는 신앙이다.
지난 주일의 복음에서도 나타났듯이 그리스도의 영광이 수난과 죽음이라는 커다란 고통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 같이 우리가 진정으로 해방되고 끊임없이 정화되어 그리스도라는 성전에 머물러 살기 위해서는, 구원을 차지하려면 주님께서 내려주신 계명을 잘 지키면서 나 자신이라고 하는 이 십자가를 잘 지고 감으로써 지성소로 들어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나 자신이 또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성전이 되고 모든 것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삶이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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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고 그분을 만나는 곳입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 그의 집으로 간다는 것은 그만큼 친밀하다는 뜻이며, 서로 긴밀히 나누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고르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집’은 무엇보다도 안전하고 조용하며 개인적인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조용하고 안전하게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여야 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이를 방해하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을 보십니다. 이것들은 ‘제사’를 드리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었고, 제사는 하느님과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절대적인 자리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이르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사실 예루살렘 성전의 문제는 각종 동물과 장사꾼들로 지저분해지고 혼잡해진 외적 환경에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심각하였던 것은 구원을 사고파는 ‘내적 타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루살렘 성전에 오신 것처럼, 파스카를 준비하는 우리 자신의 성전(마음)에도 오십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을 보신다면 과연 예수님께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타락과 위선과 죄를 보시겠지만 그다지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구원을 사고파는 우리 자신, 구원으로 장사하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이러한 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순명한다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부활로 우리를 다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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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