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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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9-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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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사랑은 말이나 혀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하는’(1요한 3,18 참조)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 사랑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에,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주님의 사랑은 하느님을 알게 하고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하는 것임을 알려 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사랑은 수동적이지 않고, 매우 역동적이며 능동적입니다. 어떤 이가 사랑을 얻기 위한 기도만을 부지런히 하며 정작 실천이 없다면, 그 사람의 사랑은 탁상공론일 따름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 충분하다 해도 남을 돕는 데 인색하고 더 가지려고만 하는 탐욕스러운 사람 안에서 사랑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참생명을 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당신과 친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친구가 되고, 사랑의 실천은 우리를 참생명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을 잘 지키려면 우리는 ‘혀’와 ‘배’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곧 혀로 교만하지 않고, 모든 것을 소유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탐욕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혀를 잘못 사용하여 애덕을 거스르고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며, 또한 애덕의 실천을 부풀려 자랑함으로써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만을 위하여 모든 것을 채우려는 탐욕은 마치 배가 부른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음식을 먹어 치우며, 남의 것마저 가로채서 배를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실천은 우리에게 교만과 탐욕과의 전쟁을 끊임없이 치르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치르는 이 전쟁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해 줄 것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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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계명을 지키며 주님의 기쁨이 내 안에 머물러 있는지 묵상해봅니다. 주님의 기쁨이/사랑이 내게 머무르게 하는 방법이 있다면 이야기 해봅시다.
(만약 머무리지 못하고 있다면 주님의 기쁨이 내 안에 머무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3. 신앙생활을 이어가며 주님의 자녀로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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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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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신앙인들의 가장 큰 사명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나와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용서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용서하려 해도 그가 한 일이 떠올라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용서하고 싶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행실을 고치고, 더불어 그가 벌을 받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한을 풀어 버릴 마음이 없습니다.
또한, 용서하고 싶어도, 기회를 놓치고 그저 상처를 마음에 품고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려면 나의 상처를 치유해야만 합니다.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아직도 나에게 깊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면 그 상처는 더욱 깊어질 것이 아닙니까?
내가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내 안에 기쁨과 평화가 충만하기 위함이지요.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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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정성을 다해 오랜 시간 공들여 작지 않은 선물을 준비하면서, 그 안에 담긴 사랑과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경험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마음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면 왠지 섭섭한 마음도 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선물을 받을 때에도 마찬가지겠지요. 또한 별로 가깝지도 않은 사람이 값진 선물을 하게 되면 부담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나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선물을 하게 되면, 그 선물에 자기 마음을 담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아리도록 고맙기까지 합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실 때 펄쩍 뛰던 베드로를 왜 사탄이라고까지 꾸짖으셨는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부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종을 뜻하는 그리스 말 ‘둘로스’는, 사실 성경에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용어만은 아니었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다윗이 주님의 종으로 불린 것처럼 오히려 종은 자랑스럽고 영예로운 칭호이기도 합니다. 동방이나 로마 제국에서도 종은 사적 공간인 임금의 침전까지도 자유롭게 드나들 정도로 그들과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종보다도 더 가까운 당신의 벗,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참으로 사랑하시는 친구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친구라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사랑으로 목숨을 바치시겠다고 하실 때에도 반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치 간이나 신장 이식 수술이 필요한 사랑하는 부모님을 위하여 자녀가 자기 장기의 일부를 기쁜 마음으로 내놓는다고 할 때, 부모님이 자녀의 애틋한 사랑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듯이, 예수님의 친구, 벗인 우리는 친구인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시겠다고 하실 때 그분과 함께 그리고 그분을 위하여 우리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
♣복음말씀의 향기♣ No3848
5월5일[부할 제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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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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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j66hWiBGHio
[서울대교구 오석준 레오(생명위원회 사무국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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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각자와 친구 맺기를 신청하시는 예수님!>
저희 집 근처에 저희 공동체와 마치 한 가족처럼 지내는 아이들의 집이 있습니다. 피정 센터 큰 행사 때도 초대하고, 여름 겨울 캠프 때는 아이들이 저희 집에 와서 마음껏 뛰고 즐기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저희 할아버지들은 그저 마음이 흐뭇할 뿐입니다.
한번은 거룩한 부활 성야 미사 때였습니다. 막내가 꽤 만만치 않았는데, 그 긴 전례 동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이리저리 다니면서 소음을 발생시켰습니다. 그러나 미사를 주례하는 저는 하나도 괴롭거나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이 존재 자체로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아이들이 저희와 함께 있다는 그 자체로 행복했습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하느님의 시선도 똑같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이리저리 좌충우돌하고, 하느님께서 원치 않는 길을 가고, 그분을 불편하게 만드는 행동을 하더라도, 하느님께는 살아있는 우리 존재 자체로 기쁘고 감사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아무리 큰 허물과 상처투성이어도, 하느님께서는 그저 넉넉한 미소와 너그러운 가슴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우리를 당신 품에 꼭 안아주실 것입니다. 살아있는 우리 존재 자체가 하느님께는 기쁨이요 행복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해 친구 맺기를 신청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내가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친구는 그저 그런 친구가 아닐 것입니다. 친구 중의 친구, 진정한 친구, 절친을 의미합니다. 절친의 의미에 대해서 과거 인디언들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
진정한 친구 관계는 절대로 그냥 맺어지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동고동락함을 통해 진정한 친구 사이로 발전합니다. 모든 것을 서로 공유함을 통해 우정은 깊어갑니다. 눈빛만 봐도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와 그 사이의 모든 벽이 허물어집니다. 내 것이 네 것이 되고, 내 것이 네 것이 됩니다.
진정한 친구가 된다는 것은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장점, 강점, 경쟁력, 건강 등등 긍정적인 측면도 받아들이지만, 상대방의 약점과 상처, 고통과 결핍, 실패와 좌절까지도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친구가 되는 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물의 창조주, 자비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께서 오늘 이 부당한 죄인, 결핍투성이인 우리 각자를 향해 친구가 되자고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다가오십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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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2RkXgV1rW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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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가 나무에 붙어있기 위해 꼭 필요한 것 하나는?>
사람이 우울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관계’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관계는 왜 안 될까요? 나의 교만을 누군가가 꺾어주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교만이 있으면 관계에 있어서는 무능력자가 되고 그 때문에 슬퍼질 수밖에 없습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에 ‘57세 아빠의 머리 꼭대기에 앉은 초4 아들’ 편에서 아이는 “난 왜 이렇게 나쁘게 태어났을까? 난 왜 태어나서 고통받을까?”라는 생각을 글로 썼습니다. 자기의 교만이 꺾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손찌검하는데도 엄마는 아이를 믿어주고 공감해주려고만 합니다. 아버지는 집에서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아이를 훈육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방송국에 창피함을 무릅쓰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호전됩니다.
엄마는 아이를 키울 때 아빠 없이 자기 힘만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빠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아빠도 또 누군가에게 의존합니다. 아이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이렇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가 실천됩니다. 가지가 가지인 줄 알려면 반드시 어떻게 해서든 이 아이, 이 사람을 사랑하고야 말겠다는 사명을 가져야 합니다. 이 때문에 포도나무 비유에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당신께 붙어있는 방법이라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성모 꽃마을 박창환 가밀로 신부의 『하늘 아래 첫 동네: 말기 암 환자 호스피스 사목일기』에서 ‘정을 떼려고’라는 글의 내용입니다. 넉 달 전 초등 5학년 아들, 3학년 딸을 둔 아빠가 간암 치료 불가 판정받았습니다. 그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무료 호스피스 시설인 성모 꽃마을로 들어왔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끝까지 남편 노릇, 아빠 노릇 해주지 못하고 가는 것이 제일 가슴이 아픕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업 실패로 자살 시도까지 했지만, 아이들 때문에 다시 살아보기로 하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술 때문에 간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환자의 여동생으로부터 아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오빠가 100만 원을 주며 착한 일 한 번 안 해 봐서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고 맡겼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자신을 믿지 못하고 시누이에게 그 돈을 준 것에 서운해했지만, 아내에게 주었다면 분명 자식을 위해 쓸 수밖에 없었음을 알고 그렇게 한 것에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남편은 자기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며 하느님께 자기 아내와 자녀들을 맡긴 것이었습니다. 환자는 이것으로 무언가 큰 숙제를 끝냈다고 느끼고 편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사랑은 능력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려고 시도해 본 사람은 자기 능력만으로는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겸손하게 자기가 나무가 아니라 ‘가지’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랑을 사명으로 삼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 ‘더 보이’(2019)는 슈퍼맨의 또 다른 버전입니다. 자녀가 없었던 한 부부는 우주에서 떨어진 아이를 자기 아이로 키웁니다. 아이는 자신이 왜 세상에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알려줄 수 없었습니다. 우주에서 떨어진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게 되면서 지구를 파괴하는 자가 됩니다. 그 힘을 어디에 써야 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반면 진짜 ‘슈퍼맨’은 자기 아버지가 이 지구를 지키라는 사명으로 자기를 지구에 보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지구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가 준 힘과 지식을 배웁니다. 그렇게 지구인들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됩니다.
구약의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 사람들을 회개시키라는 하느님 명령에서 도망칩니다. 그 결과 큰 물고기 배 속에 갇히고 맙니다. 빛에서 도망치면 어둠뿐입니다. 사랑의 계명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저절로 지옥으로 갑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인 줄 모르고 나무인 줄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당신께 붙어있게 하시기 위해 서로 사랑하라는 단 하나의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음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붙어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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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파티마와 루르드에서 매일 ‘묵주기도와 행렬’이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여러 나라에서 오기 때문에 특정한 언어를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성지에서는 순례자들에게 신청을 받아서 묵주기도를 진행합니다. 이번 성지순례 중에 파티마에서도 루르드에서도 ‘한국말’로 묵주기도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파티마에서는 영광의 신비 4단을 하였고, 루르드에서는 환희의 신비 2단을 하였습니다. 시작은 한국어로 하지만 후렴은 모두 자신의 언어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도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언어는 다르지만 기도를 통해서 하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체험으로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언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피부색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계층과 세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내려 주신다.” 그렇습니다. 선한 마음이 있으면 진흙탕 속에서도 예쁜 꽃이 피기마련입니다. 악한 마음이 있으면 예쁜 장미 밭에도 가시가 돋기 마련입니다. 성모님의 전구함으로 가정과 본당에 사랑의 꽃이 활짝 피면 좋겠습니다.
오늘 부활 제6주일을 지내면서 지난 5주 동안 있었던 복음 말씀의 주제를 정리해 보고 싶습니다. 부활 제1 주일의 주제는 ‘갈망’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무덤을 찾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갈망을 아셨고,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그렇게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서 이곳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올 수 있었던 것도 저의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주권을 신청했고, 2년 전에 나왔습니다. 주교님께 보고를 드렸고, 주교님께서는 저를 이곳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보내셨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미사에 함께 하는 것도 주님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 제2주의 주제는 ‘믿음’입니다. 토마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만져보고, 그분의 옆구리에 있는 창 자국을 만져보아야 믿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만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검증과 사실의 차원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은 믿음과 신비의 차원입니다. 제가 지난 2월 14일에 이곳에 왔을 때, 여러분은 제게 서류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달라스 교구와 서울대교구에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제가 선하게 생겨서 일수도 있습니다.)
부활 제3주의 주제는 ‘말씀’입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는 안토니오 가우디가 시작한 ‘성가정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에는 탄생의 문과 고통의 문이 있습니다. 이제 곧 영광의 문이 완성될 것이라고 합니다. 고통의 문 정면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는 가시관 대신 ‘성경’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성경에 다 있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성경 말씀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들려 주셨을 때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저의 서품 성구는 시편 126장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는 말씀입니다. 말씀과 가까이 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부활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부활 제4주의 주제는 ‘착한목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목자의 기준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는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한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착한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소경의 목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나병환자의 목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중풍병자의 목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이방인 여인과 백인대장의 목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착한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여주셨습니다. 착한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부활 제5주일의 주제는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싱싱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말라서 버려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전원이 연결되어야만 세탁기도, 냉장고도, 텔레비전도 작동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연결되어야만 비로소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 본당 공동체도 구역 공동체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신심단체들도 본당 공동체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는 사목회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 관계의 중심은 성체성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미사입니다. 오늘 부활 제6주일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오늘 성서말씀을 미리 읽고 오셨거나 귀담아 들었다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오늘 성서말씀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온갖 심오한 진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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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5,9-17: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오늘의 주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나타나야 하는 형제적 사랑이다. 그 근거는 요한에 의한 서간에 있다. 하느님의 성령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들어오는 데 있어서 어떤 차별을 두시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대우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도 사람을 차별대우해서는 안 된다고 사도행전은 말하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 모상을 닮았으므로 사랑의 모상이다. 이 사랑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니, 우리가 사랑한다면 우리는 삼위 일체적 삶으로 들어가게 되고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난다(1요한 4,7). 바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사랑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그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본 모습이다. 이 사랑의 계명은 주님의 “명령”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의 “지침”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생활을 한다. 그것이 신앙인들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즉, 사랑이신(8절)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늘의 복음은 지난 주일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결속과 공동체적 차원에서 그리스도께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9절)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하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우리가 사랑을 산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사랑이 없이는 은총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비록 떠나시지만, 사랑으로 가지와 포도나무처럼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기에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그분과 튼튼히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1절)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이란 그분과 친교를 나눈다는 의미이다.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은 은총이다. 이 기쁨은 우리 신앙인 모두가 언제나 간직해야 할 기쁨이다. 우리의 기쁨은 하느님 안에서만 가질 수 있다. 그 기쁨을 가지려면 사랑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사랑하면서 가질 수 있기에 우리는 계속 나 자신과 싸워야 한다. 나를 이길 때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이것이 당신의 계명이라고 하신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로마 13,10)이라 하였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다른 모든 계명도 지키게 될 것이다. 이 사랑의 계명 안에 모든 계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라는 말씀은 바로 서로를 위해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 그리스도께서는 친구들만이 아니라, 원수들을 위해서도 목숨을 내놓은 위대한 사랑을 보여 주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14절)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그분의 친구가 되어 친교를 가질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종에서 친구가 되게 해 주셨고 마지막으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단계적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기에 우리의 삶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그분과 아름다운 친교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15절) 제자들은 하느님의 친구가 되었다. 이것은 당신이 하느님의 말씀이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따랐던 말씀이며, 그가 “하느님의 벗”(야고 2,23)으로 불렸던 말씀이다. 지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지혜가 사랑에 도달하면, 그 지혜는 우리를 하느님의 친구로, 자녀로 만든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7절) 사랑은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이다.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셨다. 가지가 나무와 떨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우리가 그분과 떨어져서는 맺을 수 없다. 이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 두 사랑의 계명이 우리의 열매이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이런 친교가 그 이유이다. 우리가 당신을 따르기 때문에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따름으로써 우리가 영광스러워졌다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삶이다. 우리의 행실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 열매로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인도하여 그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고, 열매를 맺는 이가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때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여 새 계명을 실천하는 삶을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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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사랑은 너무나 막연하고 다양하며 개별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바라시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한 것처럼’이라는 예를 들어 알려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배워야 할 사랑은 ‘아버지께서 하신 사랑’이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입니다.
제2독서는 그 사랑이 ‘이렇게 나타났다.’고 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소개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살게 하는 사랑’이고, 이를 위하여 당신의 소중한 존재를 ‘내주는 사랑’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사랑은 ‘무상성’이라는 특징을 가지는데, 이를 오늘 독서와 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그래서 이 사랑의 수혜자인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불리게 됩니다.
친구라고 해서 언제나 우리를 외롭지 않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숨을 내주는 사랑이 아니면 사랑은 늘 의심스럽거나 불충분하고, 타인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사랑은 언제나 외롭고 두렵습니다. 사회 곳곳에서 ‘묻지 마 범죄’가 일어나고, 사회적 고립과 소외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요즘의 현실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오늘 복음이 보여 주는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받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데에 급급하기보다, 거저 내주고 상대를 살리려는 진심에 충실할 것,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상대의 사랑이 가식이나 위선이 아닐까 하는 의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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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