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
복음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6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요한 사도는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라고 권고합니다. 실천이 없는 사랑은 알맹이 없는 사랑 곧 껍데기만 남은 가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성경을 펼치면 온통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듯합니다. 신부님들의 강론이나 여러 신앙 강좌의 주제 또한 사랑에 대한 것이 가장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변에서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도 사랑이고 인기 많은 대중가요의 주제로도 사랑은 단골 메뉴입니다. 사랑하고 있을 때 이런 노래를 들으면, 더 가슴이 뛰고 기쁩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이 세상은 온통 사랑이라는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너무나도 흔해 쉽게 휴지통에 버리는 휴짓조각처럼 널려 있기도 하고, 내가 가진 것만 사랑이고 나머지는 아니라고 쉬이 판단해 버리기도 합니다. 요즘 사회에서 사랑은 점점 사라지고 경시되며, 유치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사랑보다는 돈과 명예 그 밖에 많은 물질적인 것에 사랑의 자리를 양보하고 “사랑이 밥 먹여 주니?”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어떤 것인가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음 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예수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시기에 당신과 함께 머무름이 참사랑임을 알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른다면 이 사랑은 머무름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신 자기 증여의 삶 곧 이타적인 삶으로 이어져, 사랑을 말로만이 아니라 직접 실천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신우식 토마스 신부)
—————————–
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내 자신을 제 3자 입장에서 현재 나는 어떤 가지인지 묵상해봅시다. 그동안 신앙생활을 하며 어떤 열매를 맺는 행동을 했는지 이야기 해보고 주위에 생명의 열매를 맺는 “가지” 역활을 하는 형제/자매 이야기를 해봅시다.
3. 기도를 할때 하느님을 내 안에 가두어 버린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현재 어떤 기도제목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주님을 내 안에 가두지 않으면서 기도할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
.
.
.
.
.
.
.
———————————–
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
오늘의 묵상
예수님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참포도나무로 자신을 비유하시는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단순하고 명료한 비유를 통하여 당신 안에 머무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십니다. 어떤 가지도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말라 버리고, 결국 잘려 나가 불에 태워지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뿌리에서 얻은 영양분으로 열매를 맺으며 나무에 더 단단히 붙습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은 먼저 그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상의 순간마다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분의 태도와 판단을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무엇을 말해야 할지 예수님처럼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하느님께서는 주십니다.
예수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일어난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울과 바르나바가 유다인들의 박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대히 설교하며 그리스계 유다인들과 이야기하고 토론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 안에 머물고 계시는 예수님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기억하고 이야기한 것들이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에 찬 실천을 이끌어 냅니다.
요한 사도는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라고 권고합니다. 사랑은 느낌이나 관심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웃을 향해 행동하게 합니다. 그리고 행동에서 부딪히는 많은 문제들 앞에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성령의 은사를 통해 많은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나의 작은 실천이 포도나무에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믿음의 결실이 될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오늘의 묵상
“내 안에 머물러라.” 피정 집이나 성체 조배실 같은 곳에 특히 잘 어울리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곳이 바로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면서 그분께서 주시는 힘과 용기로 양육되고 성장하는 적합한 장소가 아니겠습니까! 시간을 내어 이렇게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무르려는 노력 없이 그저 우리 자신의 힘만 믿고 의지하면서 어떤 일을 추진한다면 그것은 종이로 장난감 집을 짓는 일에 불과할 것입니다.
자신이 한 일을 되돌아보거나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을 곰곰이 살펴볼 때, 그 안에 포도나무의 수액이 흐르고 있는지 아니면 곧 말라 버릴 가지인지 직감적으로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가지에 붙어 있는 생명 없는 열매들을 보게 되면 참 안타깝기도 하고 황망하기도 합니다. 또한 때로는 풍성하고 화려하며 탐스럽기까지 한 포도송이를 발견하고 기뻐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포도 알이 아니라 플라스틱 장식물일 때, 씁쓸함을 느낍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살아 있기 위해서 첫째로 중요한 일은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열매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붙어 있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신 것만이 아니라,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신다.” 하고 경고하셨습니다. 제2독서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문다고 강조합니다. 말과 혀가 아닌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실 것이며, 이때 비로소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가 될 것입니다.
당신 목숨까지 내어 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뽑아 주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도 온 힘을 다해 그 수액을 열심히 뽑아 올려, 누군가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열매들을 주렁주렁 맺는 가지들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말씀의 향기♣ No3841
4월28일[부활 제5주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qbl9iiERjO0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 곽윤식 사도요한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이란 원줄기에 붙어있음으로 인해 우리 삶은 의미를 지닙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예수님의 훈화 말씀을 경청하면서, 참 많은 성찰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 원줄기에 붙어있기는 하지만, 진정으로 붙어있는가? 하는 반성을 합니다.
혹시라도 떨어져 나갈까봐, 안간힘을 다해 원줄기에 붙어있지만,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꼭 붙어있기는 하지만 일생에 도움도 안 되는 가지로 여겨지지 않을까, 두려움이 큽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구성원들을 만납니다. 소속은 분명 우리 소속이 맞는데, 우리 편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어디 소속이라고 자랑스럽게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만, 그 공동체가 추구하는 정신이나 영성과는 전혀 별개의 삶을 살아갑니다. 무슨 불평불만이 그리 많은지, 입만 열면 자신이 속한 단체나 리더들을 향한 험담을 폭포수처럼 쏟아냅니다.
이런 분들은 증거의 삶이 아니라 반대증거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 표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 표양이 됩니다. 복음적 증거의 삶이 아니라 반복음적 증거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메스컴을 장식하는 사이비 교주들이 그렇습니다. 목소리 높여 성경을 가르친다고 외쳐대지만, 정작 성경을 욕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치를 훼손하고 축소하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예수! 예수! 하지만 정작 예수님을 모욕하고 박해하고 있습니다.
저희같은 사제나 수도자들도 조심해야겠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반대증거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늘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돌아봐야겠습니다. 우리의 악표양으로 인해, 고압적인 태도로 인해, 제왕적 리더십으로 인해, 세상 사람들에게 반복음적 증거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가지는 나무의 원줄기 붙어있음으로 인해 의미를 지닙니다. 잘려나간 그 순간부터 가지는 생명력을 잃을뿐더러 아무런 존재의 의미도 가치도 찾을 수 없습니다. 붙어있는 한 매년 싱싱할 포도송이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잘려나가는 그 순간 1분이면 다 타고 사라질 불쏘시개에 불과합니다.
우리 인간 존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란 원줄기에 붙어있음으로 인해 우리 삶은 의미를 지닙니다. 제 색깔을 찾습니다. 예수님께 붙어있음으로 인해 우리 삶을 가치 있고, 고귀라고, 존엄하고, 빛납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이란 너무도 든든한 지주에 끝까지 붙어있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잠시나마 그분과 떨어져 있었다면 최대한 빨리 그분께로 돌아가 다시 붙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Kq2o2Fe8V4
++++++++++++++++++
<기도의 시작: 네 안의 가난을 찾았는가?>
오늘 복음은 ‘기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이니 당신께 붙어 있어야 성령의 수액이 들어와서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가 맺힌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붙어 있을 필요를 못 느끼게 만드는 우리 안의 교만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188회에 ‘엄마의 말을 따라야 사는 위기의 13세 영재 아들’에서 초등학생 나이에 대학생 수준의 성적을 내게 만든 어머니가 나왔습니다. 아이가 갑자기 게임만 하려고 하고 엄마에게 폭력까지 쓴다고 제보한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문제는 어머니에게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지나치게 아이에게 욕심을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엄마는 자신의 엄마에게 큰딸로서 희생을 강요받아 대학에 가지 못한 설움을 자신은 아들을 잘 키우려 영재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이용 당하는 것 같아서 자존감이 떨어지고 화가 납니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랑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을 때만 열립니다. 그러나 교만은 사랑을 혼자 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2018년 6월 1일, 조선일보에 ‘내겐 짐, 아들엔 힘. 전 남편을 어떡하지?’란 제목으로 실린 사연입니다. 중학생 아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자퇴하겠다며 어머니의 속을 썩입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바닥에 누워 천장만 쳐다봅니다. 아들이 초3 때 이혼하였지만 엄마의 노력으로 아들도 잘 성장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사춘기에 접어들기까지 마음속에 엄마에 대한 원망을 키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울어도 봤지만 본척만척합니다.
혼자만의 싸움에 지칠 때면 가끔 이혼한 남편이 생각났습니다. 무책임하고 무능력하고 무관심한 가장이었지만 그런 남편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남편에게 연락합니다. 아이의 마음이 지독한 감기에 걸렸으니 아들과 자신 사이에 잠시만 서 있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남편이 집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아이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편안함 속에 한 번 결혼에 실패했는데, 이젠 이혼에도 실패하는 게 아닌지 궁금해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랑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을 때 맺히는 열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는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신부가 경남 산청의 나환자촌에서 봉사활동하며 경험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한 번은 손과 발이 뭉툭해진 한 할머니를 도와드리려고 다가서는데, 그 할머니가 “베드로, 괜찮아. 안 도와줘도 돼. 먼저 네 안에 있는 가난을 찾아봐.”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생은 마음속으로 ‘내 안에 있는 가난이 무엇일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산골에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베드로는 걷기에 불편한 그분들을 위해 열심히 눈을 치웠습니다. 무언가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에 어깨가 우쭐했습니다. 그때 뒤에서 그 할머니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베드로, 수고했어!”마치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시는 음성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 뒤로 자신이 쓸었던 눈들이 이미 햇빛으로 다 녹아있었습니다. 해가 뜨면 저절로 녹게 되어 있는 눈인데 헛수고를 한 셈입니다. 헛수고하면서도 자신이 무언가 해 드릴 수 있다는 생각에 우쭐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 또한 신학교에 입학해서 주님께 무언가 도움이 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제가 나무가 되고 그분이 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저에게 “다 ~ ” 주고 계셨습니다. 이 깨달음에 감사하며 제가 주님께 “주님, 제가 이제 목숨까지도 주님을 위해서 바치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주셨던 성경 구절이 당신이 포도나무고 나는 가지이지 당신께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오늘 복음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진정한 성체조배가 시작되었고 다른 이들을 성체조배로 이끌었습니다. 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이것이 사랑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흔들리는 버스에 서서 있으면 사람들은 잡고 있을 손잡이부터 찾습니다. 이것은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혼자 버틸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빈곤함을 알고 기도로 주님께 붙어 있으려는 자세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짧게라도 하루에 50번 정도 기도했다고 합니다. 마치 자신 앞을 지나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소리 쳤던 소경처럼 우리는 겸손해질수록 그분께 더 붙어 있을 수밖에 없어집니다. 마음의 가난을 먼저 찾읍시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순례 중에 ‘개신교회’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분이 있었습니다. 같은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지만, 성모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천주교회는 ‘성지순례’가 신앙의 행위로 익숙하지만, 개신교회에서는 성지순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개신교회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말씀으로 신앙생활을 하기에 성모님에 대한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모님을 예수님의 어머니로 인정하지만,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없고,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없기에 성모님의 발현을 인정하는 성모 성지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합니다. 성지는 대부분 열심한 신앙인들의 땀과 눈물이 있던 곳에 있습니다. 그분들의 놀라운 열정과 헌신이 있던 곳에 있습니다. 성지는 대부분 순교자가 묻혔던 곳에 있습니다. 성인들의 유해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개신교회는 성인들에 대한 공경과 신심이 없기에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없다고 합니다. 대부분 성지에는 가톨릭교회의 성당이 있기에 개신교회에서 성지순례를 올 이유도 없다고 합니다. 개신교회에서 천주교회로 개종하신 분 중에는 열심한 분들이 많습니다. 개신교회의 장점과 천주교회의 장점을 받아들여 신앙이 더욱 깊어졌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은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고 있었습니다. 목이 마른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물을 한 잔’ 달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은 서로 상종하지 않는데 물을 청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네가 주는 물을 마시면 곧 다시 목이 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여인은 예수님께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물’을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남편’도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과거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여러 남자가 있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지난날을 모두 아시는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참된 예배는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참된 예배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참된 예배는 개신교회나 천주교회라는 장소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참된 예배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개신교회에 다니다가 개종했어도, 행실이 바르지 못해서 비난받았을지라도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따른다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과거라는 안경을 쓰고 상대방을 쉽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와 이해라는 안경을 쓰라고 하십니다.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이끌었던 덩샤오핑이 있습니다. 10억 중국이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이끌었던 덩샤오핑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검은 고양이든, 하얀 고양이든 쥐만 잡을 수 있다면 상관이 없다.” 이는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중국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의미였습니다. 덩샤오핑의 개혁과 개방으로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될 수 있었고,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사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울은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체험했던 사울은 이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했던 사울을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교회는 사울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사울은 이제 바오로가 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초대교회의 교리와 신학을 정립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참된 예배는 예루살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참된 예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어떤 사람이 열매 맺는 가지가 될까요? 개종했을지라도, 지난날의 허물이 있었을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을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4월28일 [부활 제5주일]
오늘 복음의 내용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에 관한 내용이다. 복음의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는 잘 알려진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평범한 내용 같지만, 그것은 훨씬 더 풍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교회는 “주님께 대한 두려움”과 “성령의 역사”로 성장한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보다도, 주님께 대한 성실성, 즉 주님께 대한 두려움과 성화하시는 성령의 힘, 즉 성령으로 가능하다. 포도나무의 비유는 역시 이것을 말한다. 바오로 사도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복음을 전했지만 예루살렘 교회와 일치하려고 한 것은(1코린 9,1), 성령의 특은이 교회 밖에서나 교회를 거슬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모든 카리스마를 다 해도 그 그늘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위대한 바오로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에 대한 삶의 모습은 ‘말로서가 아니고 행동과 진실에 의한 상호신뢰와 참된 사랑으로’ 사는 모습(1요한 3,18)이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가지도 자기 탓이든, 타인의 잘못이든 간에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가서는 안 된다.
복음: 요한 15,1-8: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절) 아들은 우리가 아들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우리에게 참 포도나무가 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포도나무라 하시며 그분과 성령 안에서 결합한 이들은 가지라고 하신다. 가지들은 포도나무와 연결됨으로써 포도를 맺는다. 우리는 삶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아가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마음에서 사악한 씨앗을 없애고, 말씀의 쟁기로 우리 마음을 갈아엎고, 계명의 씨앗을 뿌리시고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신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2절) 가지들은 열매를 맺고 자라는 데 필요하다.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가지들은 모두 잘리고 만다. 예수님의 복음이라는 포도나무도 세상 곳곳으로 심어졌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예루살렘은 그래서 버려지고 말았다. 사랑에서 나오는 선행으로 우리가 단단히 결합하지 못하면 우리가 가지라고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죽은 가지가 될 것이다. 그런 가지는 잘릴 것이고, 농부는 잘린 가지들을 쓰레기처럼 태워 버릴 것이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아버지의 세심한 보살핌으로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3절)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각 사람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 그 사람의 숨겨진 뜻을 하느님 앞에 드러내어, 성령을 통해 인간의 헛된 욕망에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어 깨끗하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덕에 도달하게 할 것이다. “내 안에 머물러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4절) 가지가 포도 줄기로부터 생명의 수액을 받지 못한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도 우리를 기르시는 분과 결합하여 있다면 생명을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분 안에 확고히 머물러야 한다. 왜냐하면 가지는 자신 생명의 수단이 되는 것을 줄기에서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안에 머무시는 것은 제자들을 위한 것이다. 가지가 잘려도 줄기에서 새로운 가지가 움터 자라지만, 잘린 가지는 뿌리와 떨어져 죽고 만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5절) 가지가 줄기에서 생겨나듯, 주님으로부터 우리도 그분의 은총을 받아 부활과 구원의 뿌리로 지닌다. 아버지께서는 농부로서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육체인 포도나무를 보살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나약하기에 선을 하려 해도 선을 베푸시는 분 없이는 아무것도 완성에 이를 수 없다.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다. 그때 그는 많은 열매도 적은 열매도 맺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은 모자람이 없는 자산이며 모든 풍요로움의 근원이다. 그분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삶 속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다. 뿌리로부터 생명을 끌어 올리지 않는 죽은 가지와 같다. 우리는 언제나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8절)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그 영광은 하느님의 영광이지 사람의 영광이 아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여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것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다.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영광을 나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그 영광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복음에서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하신 것이다. 그런 선행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은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에페 2,10)라고 한다.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알 수 있는 것은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즉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하는지에 달려있다.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려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때 가능하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내용이 우리의 삶 속에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그래서 초기 교회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러러보았던 것 같이 사랑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고 늘 기쁨을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오늘 복음에서도 요한 복음서의 특정 문구 “나는 -이다.”가 등장합니다. 좀 특별한 점은 “너희는 -이다.”라는 문장도 함께 등장하여 ‘나’와 ‘너희’의 ‘상보성’이 강조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이후 ‘당신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제자들에게 “너희가” 앞으로 하여야 할 일을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이 당부의 핵심은 “내 안에 머물러라.”입니다. 이 표현은 ‘열매를 맺다.’라는 표현과 함께 연결되어 ‘머무름’의 결과가 ‘열매 맺음’이라는 것까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독서의 본문들 또한 주님 안에 머물러서 맺게 된 열매에 대하여 묘사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불신을 감수하여야 하였던 바오로는 예수님 안에 머무름으로써 그러한 의혹과 소외의 상황을 이겨 냅니다. 그 결과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고”, “교회는 …… 굳건히 세워지고, …… 그 수가 늘어나게” 되는 찬란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도대체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수도자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기에 늘 제 마음에 담고 있던 물음입니다. 주관적 판단일 수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그 일차적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머문다는 것은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 곧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다시 말하여,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일단 ‘떠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런 확신이 들지 않고, 하느님께 버려진 듯하며, 잔인하게 느껴지는 도전들이 연이어 다가온다 하여도, 그분을 떠나거나 공동체(나무)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가 먼저 할 수 있는 ‘머물기’가 아닐까 합니다. 붙어 있는 가지는 언젠가는 열매를 맺습니다. 다만 그 때와 방법을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