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5장, 1-8절;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특강 (미사에 대해)

부활 5주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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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6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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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요한 사도는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라고 권고합니다. 실천이 없는 사랑은 알맹이 없는 사랑 곧 껍데기만 남은 가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성경을 펼치면 온통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듯합니다. 신부님들의 강론이나 여러 신앙 강좌의 주제 또한 사랑에 대한 것이 가장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변에서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도 사랑이고 인기 많은 대중가요의 주제로도 사랑은 단골 메뉴입니다. 사랑하고 있을 때 이런 노래를 들으면, 더 가슴이 뛰고 기쁩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이 세상은 온통 사랑이라는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너무나도 흔해 쉽게 휴지통에 버리는 휴짓조각처럼 널려 있기도 하고, 내가 가진 것만 사랑이고 나머지는 아니라고 쉬이 판단해 버리기도 합니다. 요즘 사회에서 사랑은 점점 사라지고 경시되며, 유치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사랑보다는 돈과 명예 그 밖에 많은 물질적인 것에 사랑의 자리를 양보하고 “사랑이 밥 먹여 주니?”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어떤 것인가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음 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예수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시기에 당신과 함께 머무름이 참사랑임을 알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른다면 이 사랑은 머무름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신 자기 증여의 삶 곧 이타적인 삶으로 이어져, 사랑을 말로만이 아니라 직접 실천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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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내 자신을 제 3자 입장에서 현재 나는 어떤 가지인지 묵상해봅시다. 그동안 신앙생활을 하며 어떤 열매를 맺는 행동을 했는지 이야기 해보고 주위에 생명의 열매를 맺는 “가지” 역활을 하는 형제/자매 이야기를 해봅시다.

3. 기도를 할때 하느님을 내 안에 가두어 버린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현재 어떤 기도제목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주님을 내 안에 가두지 않으면서 기도할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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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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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참포도나무로 자신을 비유하시는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단순하고 명료한 비유를 통하여 당신 안에 머무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십니다. 어떤 가지도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말라 버리고, 결국 잘려 나가 불에 태워지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뿌리에서 얻은 영양분으로 열매를 맺으며 나무에 더 단단히 붙습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은 먼저 그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상의 순간마다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분의 태도와 판단을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무엇을 말해야 할지 예수님처럼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하느님께서는 주십니다.
예수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일어난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울과 바르나바가 유다인들의 박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대히 설교하며 그리스계 유다인들과 이야기하고 토론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 안에 머물고 계시는 예수님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기억하고 이야기한 것들이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에 찬 실천을 이끌어 냅니다.
요한 사도는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라고 권고합니다. 사랑은 느낌이나 관심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웃을 향해 행동하게 합니다. 그리고 행동에서 부딪히는 많은 문제들 앞에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성령의 은사를 통해 많은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나의 작은 실천이 포도나무에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믿음의 결실이 될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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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내 안에 머물러라.” 피정 집이나 성체 조배실 같은 곳에 특히 잘 어울리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곳이 바로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면서 그분께서 주시는 힘과 용기로 양육되고 성장하는 적합한 장소가 아니겠습니까! 시간을 내어 이렇게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무르려는 노력 없이 그저 우리 자신의 힘만 믿고 의지하면서 어떤 일을 추진한다면 그것은 종이로 장난감 집을 짓는 일에 불과할 것입니다.
자신이 한 일을 되돌아보거나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을 곰곰이 살펴볼 때, 그 안에 포도나무의 수액이 흐르고 있는지 아니면 곧 말라 버릴 가지인지 직감적으로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가지에 붙어 있는 생명 없는 열매들을 보게 되면 참 안타깝기도 하고 황망하기도 합니다. 또한 때로는 풍성하고 화려하며 탐스럽기까지 한 포도송이를 발견하고 기뻐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포도 알이 아니라 플라스틱 장식물일 때, 씁쓸함을 느낍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살아 있기 위해서 첫째로 중요한 일은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열매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붙어 있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신 것만이 아니라,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신다.” 하고 경고하셨습니다. 제2독서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문다고 강조합니다. 말과 혀가 아닌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실 것이며, 이때 비로소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가 될 것입니다.
당신 목숨까지 내어 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뽑아 주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도 온 힘을 다해 그 수액을 열심히 뽑아 올려, 누군가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열매들을 주렁주렁 맺는 가지들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말씀의 향기♣ No3841
4월28일[부활 제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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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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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qbl9iiERjO0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 곽윤식 사도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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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이란 원줄기에 붙어있음으로 인해 우리 삶은 의미를 지닙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예수님의 훈화 말씀을 경청하면서, 참 많은 성찰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 원줄기에 붙어있기는 하지만, 진정으로 붙어있는가? 하는 반성을 합니다.

혹시라도 떨어져 나갈까봐, 안간힘을 다해 원줄기에 붙어있지만,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꼭 붙어있기는 하지만 일생에 도움도 안 되는 가지로 여겨지지 않을까, 두려움이 큽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구성원들을 만납니다. 소속은 분명 우리 소속이 맞는데, 우리 편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어디 소속이라고 자랑스럽게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만, 그 공동체가 추구하는 정신이나 영성과는 전혀 별개의 삶을 살아갑니다. 무슨 불평불만이 그리 많은지, 입만 열면 자신이 속한 단체나 리더들을 향한 험담을 폭포수처럼 쏟아냅니다.

이런 분들은 증거의 삶이 아니라 반대증거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 표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 표양이 됩니다. 복음적 증거의 삶이 아니라 반복음적 증거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메스컴을 장식하는 사이비 교주들이 그렇습니다. 목소리 높여 성경을 가르친다고 외쳐대지만, 정작 성경을 욕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치를 훼손하고 축소하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예수! 예수! 하지만 정작 예수님을 모욕하고 박해하고 있습니다.

저희같은 사제나 수도자들도 조심해야겠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반대증거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늘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돌아봐야겠습니다. 우리의 악표양으로 인해, 고압적인 태도로 인해, 제왕적 리더십으로 인해, 세상 사람들에게 반복음적 증거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가지는 나무의 원줄기 붙어있음으로 인해 의미를 지닙니다. 잘려나간 그 순간부터 가지는 생명력을 잃을뿐더러 아무런 존재의 의미도 가치도 찾을 수 없습니다. 붙어있는 한 매년 싱싱할 포도송이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잘려나가는 그 순간 1분이면 다 타고 사라질 불쏘시개에 불과합니다.

우리 인간 존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란 원줄기에 붙어있음으로 인해 우리 삶은 의미를 지닙니다. 제 색깔을 찾습니다. 예수님께 붙어있음으로 인해 우리 삶을 가치 있고, 고귀라고, 존엄하고, 빛납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이란 너무도 든든한 지주에 끝까지 붙어있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잠시나마 그분과 떨어져 있었다면 최대한 빨리 그분께로 돌아가 다시 붙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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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Kq2o2Fe8V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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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시작: 네 안의 가난을 찾았는가?>

오늘 복음은 ‘기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이니 당신께 붙어 있어야 성령의 수액이 들어와서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가 맺힌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붙어 있을 필요를 못 느끼게 만드는 우리 안의 교만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188회에 ‘엄마의 말을 따라야 사는 위기의 13세 영재 아들’에서 초등학생 나이에 대학생 수준의 성적을 내게 만든 어머니가 나왔습니다. 아이가 갑자기 게임만 하려고 하고 엄마에게 폭력까지 쓴다고 제보한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문제는 어머니에게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지나치게 아이에게 욕심을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엄마는 자신의 엄마에게 큰딸로서 희생을 강요받아 대학에 가지 못한 설움을 자신은 아들을 잘 키우려 영재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이용 당하는 것 같아서 자존감이 떨어지고 화가 납니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랑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을 때만 열립니다. 그러나 교만은 사랑을 혼자 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2018년 6월 1일, 조선일보에 ‘내겐 짐, 아들엔 힘. 전 남편을 어떡하지?’란 제목으로 실린 사연입니다. 중학생 아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자퇴하겠다며 어머니의 속을 썩입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바닥에 누워 천장만 쳐다봅니다. 아들이 초3 때 이혼하였지만 엄마의 노력으로 아들도 잘 성장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사춘기에 접어들기까지 마음속에 엄마에 대한 원망을 키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울어도 봤지만 본척만척합니다.

혼자만의 싸움에 지칠 때면 가끔 이혼한 남편이 생각났습니다. 무책임하고 무능력하고 무관심한 가장이었지만 그런 남편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남편에게 연락합니다. 아이의 마음이 지독한 감기에 걸렸으니 아들과 자신 사이에 잠시만 서 있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남편이 집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아이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편안함 속에 한 번 결혼에 실패했는데, 이젠 이혼에도 실패하는 게 아닌지 궁금해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랑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을 때 맺히는 열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는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신부가 경남 산청의 나환자촌에서 봉사활동하며 경험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한 번은 손과 발이 뭉툭해진 한 할머니를 도와드리려고 다가서는데, 그 할머니가 “베드로, 괜찮아. 안 도와줘도 돼. 먼저 네 안에 있는 가난을 찾아봐.”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생은 마음속으로 ‘내 안에 있는 가난이 무엇일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산골에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베드로는 걷기에 불편한 그분들을 위해 열심히 눈을 치웠습니다. 무언가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에 어깨가 우쭐했습니다. 그때 뒤에서 그 할머니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베드로, 수고했어!”마치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시는 음성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 뒤로 자신이 쓸었던 눈들이 이미 햇빛으로 다 녹아있었습니다. 해가 뜨면 저절로 녹게 되어 있는 눈인데 헛수고를 한 셈입니다. 헛수고하면서도 자신이 무언가 해 드릴 수 있다는 생각에 우쭐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 또한 신학교에 입학해서 주님께 무언가 도움이 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제가 나무가 되고 그분이 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저에게 “다 ~ ” 주고 계셨습니다. 이 깨달음에 감사하며 제가 주님께 “주님, 제가 이제 목숨까지도 주님을 위해서 바치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주셨던 성경 구절이 당신이 포도나무고 나는 가지이지 당신께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오늘 복음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진정한 성체조배가 시작되었고 다른 이들을 성체조배로 이끌었습니다. 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이것이 사랑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흔들리는 버스에 서서 있으면 사람들은 잡고 있을 손잡이부터 찾습니다. 이것은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혼자 버틸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빈곤함을 알고 기도로 주님께 붙어 있으려는 자세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짧게라도 하루에 50번 정도 기도했다고 합니다. 마치 자신 앞을 지나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소리 쳤던 소경처럼 우리는 겸손해질수록 그분께 더 붙어 있을 수밖에 없어집니다. 마음의 가난을 먼저 찾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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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순례 중에 ‘개신교회’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분이 있었습니다. 같은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지만, 성모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천주교회는 ‘성지순례’가 신앙의 행위로 익숙하지만, 개신교회에서는 성지순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개신교회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말씀으로 신앙생활을 하기에 성모님에 대한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모님을 예수님의 어머니로 인정하지만,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없고,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없기에 성모님의 발현을 인정하는 성모 성지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합니다. 성지는 대부분 열심한 신앙인들의 땀과 눈물이 있던 곳에 있습니다. 그분들의 놀라운 열정과 헌신이 있던 곳에 있습니다. 성지는 대부분 순교자가 묻혔던 곳에 있습니다. 성인들의 유해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개신교회는 성인들에 대한 공경과 신심이 없기에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없다고 합니다. 대부분 성지에는 가톨릭교회의 성당이 있기에 개신교회에서 성지순례를 올 이유도 없다고 합니다. 개신교회에서 천주교회로 개종하신 분 중에는 열심한 분들이 많습니다. 개신교회의 장점과 천주교회의 장점을 받아들여 신앙이 더욱 깊어졌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은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고 있었습니다. 목이 마른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물을 한 잔’ 달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은 서로 상종하지 않는데 물을 청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네가 주는 물을 마시면 곧 다시 목이 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여인은 예수님께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물’을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남편’도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과거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여러 남자가 있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지난날을 모두 아시는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참된 예배는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참된 예배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참된 예배는 개신교회나 천주교회라는 장소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참된 예배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개신교회에 다니다가 개종했어도, 행실이 바르지 못해서 비난받았을지라도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따른다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과거라는 안경을 쓰고 상대방을 쉽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와 이해라는 안경을 쓰라고 하십니다.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이끌었던 덩샤오핑이 있습니다. 10억 중국이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이끌었던 덩샤오핑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검은 고양이든, 하얀 고양이든 쥐만 잡을 수 있다면 상관이 없다.” 이는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중국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의미였습니다. 덩샤오핑의 개혁과 개방으로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될 수 있었고,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사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울은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체험했던 사울은 이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했던 사울을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교회는 사울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사울은 이제 바오로가 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초대교회의 교리와 신학을 정립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참된 예배는 예루살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참된 예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어떤 사람이 열매 맺는 가지가 될까요? 개종했을지라도, 지난날의 허물이 있었을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을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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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4월28일 [부활 제5주일]

오늘 복음의 내용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에 관한 내용이다. 복음의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는 잘 알려진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평범한 내용 같지만, 그것은 훨씬 더 풍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교회는 “주님께 대한 두려움”과 “성령의 역사”로 성장한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보다도, 주님께 대한 성실성, 즉 주님께 대한 두려움과 성화하시는 성령의 힘, 즉 성령으로 가능하다. 포도나무의 비유는 역시 이것을 말한다. 바오로 사도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복음을 전했지만 예루살렘 교회와 일치하려고 한 것은(1코린 9,1), 성령의 특은이 교회 밖에서나 교회를 거슬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모든 카리스마를 다 해도 그 그늘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위대한 바오로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에 대한 삶의 모습은 ‘말로서가 아니고 행동과 진실에 의한 상호신뢰와 참된 사랑으로’ 사는 모습(1요한 3,18)이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가지도 자기 탓이든, 타인의 잘못이든 간에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가서는 안 된다.

복음: 요한 15,1-8: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절) 아들은 우리가 아들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우리에게 참 포도나무가 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포도나무라 하시며 그분과 성령 안에서 결합한 이들은 가지라고 하신다. 가지들은 포도나무와 연결됨으로써 포도를 맺는다. 우리는 삶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아가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마음에서 사악한 씨앗을 없애고, 말씀의 쟁기로 우리 마음을 갈아엎고, 계명의 씨앗을 뿌리시고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신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2절) 가지들은 열매를 맺고 자라는 데 필요하다.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가지들은 모두 잘리고 만다. 예수님의 복음이라는 포도나무도 세상 곳곳으로 심어졌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예루살렘은 그래서 버려지고 말았다. 사랑에서 나오는 선행으로 우리가 단단히 결합하지 못하면 우리가 가지라고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죽은 가지가 될 것이다. 그런 가지는 잘릴 것이고, 농부는 잘린 가지들을 쓰레기처럼 태워 버릴 것이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아버지의 세심한 보살핌으로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3절)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각 사람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 그 사람의 숨겨진 뜻을 하느님 앞에 드러내어, 성령을 통해 인간의 헛된 욕망에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어 깨끗하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덕에 도달하게 할 것이다. “내 안에 머물러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4절) 가지가 포도 줄기로부터 생명의 수액을 받지 못한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도 우리를 기르시는 분과 결합하여 있다면 생명을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분 안에 확고히 머물러야 한다. 왜냐하면 가지는 자신 생명의 수단이 되는 것을 줄기에서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안에 머무시는 것은 제자들을 위한 것이다. 가지가 잘려도 줄기에서 새로운 가지가 움터 자라지만, 잘린 가지는 뿌리와 떨어져 죽고 만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5절) 가지가 줄기에서 생겨나듯, 주님으로부터 우리도 그분의 은총을 받아 부활과 구원의 뿌리로 지닌다. 아버지께서는 농부로서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육체인 포도나무를 보살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나약하기에 선을 하려 해도 선을 베푸시는 분 없이는 아무것도 완성에 이를 수 없다.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다. 그때 그는 많은 열매도 적은 열매도 맺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은 모자람이 없는 자산이며 모든 풍요로움의 근원이다. 그분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삶 속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다. 뿌리로부터 생명을 끌어 올리지 않는 죽은 가지와 같다. 우리는 언제나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8절)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그 영광은 하느님의 영광이지 사람의 영광이 아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여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것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다.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영광을 나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그 영광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복음에서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하신 것이다. 그런 선행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은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에페 2,10)라고 한다.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알 수 있는 것은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즉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하는지에 달려있다.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려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때 가능하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내용이 우리의 삶 속에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그래서 초기 교회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러러보았던 것 같이 사랑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고 늘 기쁨을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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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오늘 복음에서도 요한 복음서의 특정 문구 “나는 -이다.”가 등장합니다. 좀 특별한 점은 “너희는 -이다.”라는 문장도 함께 등장하여 ‘나’와 ‘너희’의 ‘상보성’이 강조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이후 ‘당신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제자들에게 “너희가” 앞으로 하여야 할 일을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이 당부의 핵심은 “내 안에 머물러라.”입니다. 이 표현은 ‘열매를 맺다.’라는 표현과 함께 연결되어 ‘머무름’의 결과가 ‘열매 맺음’이라는 것까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독서의 본문들 또한 주님 안에 머물러서 맺게 된 열매에 대하여 묘사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불신을 감수하여야 하였던 바오로는 예수님 안에 머무름으로써 그러한 의혹과 소외의 상황을 이겨 냅니다. 그 결과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고”, “교회는 …… 굳건히 세워지고, …… 그 수가 늘어나게” 되는 찬란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도대체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수도자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기에 늘 제 마음에 담고 있던 물음입니다. 주관적 판단일 수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그 일차적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머문다는 것은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 곧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다시 말하여,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일단 ‘떠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런 확신이 들지 않고, 하느님께 버려진 듯하며, 잔인하게 느껴지는 도전들이 연이어 다가온다 하여도, 그분을 떠나거나 공동체(나무)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가 먼저 할 수 있는 ‘머물기’가 아닐까 합니다. 붙어 있는 가지는 언젠가는 열매를 맺습니다. 다만 그 때와 방법을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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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요한 15,1-8)

1) “예수님 안에 머무르다.”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뒤의 10절에,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라는 예수님의 설명이 나옵니다. 요한 사도도,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1요한 3,24)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주님이신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율법주의자들처럼 계명만을 지키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서 온 삶으로 실행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산상설교에 있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라는 말씀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일’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생활,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생활이 곧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2) ‘머무르다.’를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붙어 있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라는 2절의 말씀은, 붙어 있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신 ‘경고’입니다. <여기서 ‘붙어 있으면서’는 뜻으로는 ‘붙어 있으면서도’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떠나지 않고, 또는 떨어져 나가지 않고, 붙어 있기만 하면 언젠가는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고 오해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저절로 되는 생활이 아니라, 열매를 맺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붙어 있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예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입니다.(루카 10,31-32) 그 두 사람은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할 상황에서, 아무것도 실천하지 않고 그냥 가버렸는데, 가버린 뒤에도 여전히 사제와 레위인으로 잘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 모습은 나무에 ‘잘 붙어 있는 모습’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한 죄를 지은 모습’일 뿐입니다.>

3) 여기서 ‘열매’는 신앙생활의 열매, 즉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해서는, 또는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구원도 영원한 생명도 얻지 못합니다.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와, 붙어 있지 않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둘 다 똑같이 불에 던져져 타버릴 ‘쓸모없는 가지’일 뿐입니다.

4)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라는 말씀도, 우리가 ‘능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셔 들여서 머무르시게 하는 일은, ‘능동적인’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묵시록 3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문을 두드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그 문을 열어 드리는 것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만일에 다른 소리를 듣느라고 문 두드리는 소리를 못 듣거나, 듣고도 관심이 없거나, 그래서 문을 열어 드리지 않으면, 예수님께서는 그냥 떠나실 것입니다.

5) ‘내가’ 최종적으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면, 그 일은 예수님과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 되는데, 가장 크게 영광스럽게 되는 이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영광’을 ‘기쁨’으로 바꾸면,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나의 구원’은 예수님께도 기쁜 일이고, 아버지께도 기쁨을 드리는 일이지만, 구원받은 당사자인 ‘나 자신’이 가장 크게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살고 싶어서, 내가 원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생활입니다. 그러니 더욱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애써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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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김혜종 요한 세례자 신부님]

<포도나무에 ‘잘’ 머물기>

성경에는 여러 식물들이 비유와 함께 등장합니다. 가령 무화과나무라든지, 포도나무 같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그중에서도 포도나무는 여러 비유에서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포도나무가 가진 특징 때문이기도 합니다. 포도나무는 무더위를 잘 견디며 뿌리를 땅속 깊숙이 내리는 식물로 팔레스타인같이 무덥고 건조한 기후나 산악 지역과 같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식물입니다.

이렇게 포도나무는 안 좋은 환경에서도 잘 자라지만, 끊임없이 가지치기를 필요로 하는 나무이기도합니다. 농부의 손길을 항상 필요로 하면서 제때에 가지치기를 해줘야 그만큼 포도 열매가 많이 열립니다. 그래서 포도나무를 재배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외부 환경 변화에 따른 방해 없이 제때에 농부가 가지치기를 해 줄 만큼 안정된 시간을 영위하였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포도나무는 히브리 사회에서 안정된 생활, 평화와 번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식물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참 포도나무에 비유하시며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로 다가옵니다. 첫째는 ‘생명의 근원으로서 포도나무’ 입니다. 그 어떤 풍성한 가지일지라도 원줄기에서 떨어져 나오면 그 푸름과 생명력을 잃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지 못하면 아무런 삶의 생명력도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둘째는 ‘심판의 근거로서 포도나무’ 입니다. 만약 어떤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농부에 의해 그 가지는 잘려져 버려지고 맙니다. 쓸모없는 가지 때문에 열매를 맺는 다른 가지가 자라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포도나무 가지에 그냥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잘’ 머무는 것이 필요합니다. 포도나무에 ‘잘’ 머물기 위해 오늘 제2독서 요한 1서 3장 24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줍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즉,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주님께 잘 머물 수 있는 방법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1요한 3,23)

그러니까 포도나무 가지인 우리가 우리의 푸름과 생명력을 얻기 위하여, 그리고 열매 맺지 못하는 쓸모없는 가지가 되지 않기 위하여, 무엇보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일상 안에서 사랑을 살아가는 것이 포도나무에 ‘잘’ 머무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단지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잘’ 머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같은 하루를 살아가더라도 그냥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을 ‘잘’ 믿으며 살아가는 모습인지 고민할 수 있는 것, 그냥 사랑하며 살아야겠다가 아니라, 어떻게 사랑을 실천해야 ‘잘’ 사랑하며 살아가는지를 찾을 수 있는 것, 이러한 모습들이 우리를 참된 포도나무인 주님께 ‘잘’ 머물게 하고 결국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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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오용호 세베리노 신부님]

<나는 포도나무요.>

가톨릭 성가 35번 <나는 포도나무요>는 제가 애창하는 성가 중의 하나입니다. 이 성가를 부를 때마다 신학교 시절이 떠오릅니다. 왜냐고요? 이 성가를 부를 적마다 꼭 사제가 되어서 주님 포도밭의 일꾼이 되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사제를 양성하는 신학교는 사제가 되기 전까지 군대의 사관학교처럼 꽉 짜인 시간표에 따라 기도하고 학습하며 생활하는 곳입니다. 신학교에서 규칙을 어기는 것이나 개인적 일탈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곧 신학교를 떠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생들은 매 학기 학습과 생활을 평가받습니다.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면 사제의 길을 중도에서 포기해야 됩니다. 저는 <나는 포도나무요> 성가를 부르면서 신학교 공동체에 머물기를 강하게 소망하며 기도드렸습니다.

“주님! 부족한 저를 당신의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으로 불러주십시오!”

그 소망이 이루어져서 제가 사제가 되었습니다. 모든 나무는 ‘원 나무’에서 순이 나고 그것이 커서 가지가 됩니다. 그리고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만이 나무의 진액과 수분을 빨아들여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포도나무로, 사람들은 가지로, 하느님은 ‘포도 농사를 짓는 농부’로 비유하십니다. 그리고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첫째, 길이신 주님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십자가 길에 동행하며 희생과 사랑으로 따라 걷는 것입니다. 둘째, 진리이신 주님 말씀을 학습하고 연구하며 선포하는 것입니다. 즉, 시대의 징표를 잘 읽고, 주님의 말씀을 최고의 진리로 여기며 살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셋째, 생명이신 주님을 본받아 모든 피조물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자연 안에서 함께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농부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 지상에 사는 동안 많은 포도 열매를 맺는 가지가 되길 바라십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꼭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거짓된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가지가 될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성가를 부르며 다짐해 봅니다. 생을 다하는 마지막 그날까지 주님 포도나무 가지로 머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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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주영돈 토마스 신부님]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다 쳐 내신다.>

오늘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면서 하신, 마지막 당부의 말씀이다. 어쩌면 우리 신앙인에게 하시는 마지막 당부의 말씀이기도 하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신다.”(요한 15,1 참조)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지만, 너무 무서운 말씀이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시고,(루카 13,25-26 참조) 주님의 이름을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며(마태 7,21-23 참조) 살았지만, 주님은 이렇게 살아온 우리를 ‘모른다.’라고 외면하신다. 껍데기와 입으로만 그렇게 살았고, 즉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는 했지만, 열매를 맺지 않는 삶을 살게 되면, 모두 쳐 내실 것이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말라버린다. 그렇다고 붙어 있으면서, 자신이 왜 그곳에 붙어 있는지, 자신의 신원을 분명히 깨닫지 못해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 포도나무가 주는 생명력을, 열매를 맺는 힘을 줄 때, 가지는 <능동적으로> 그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 신앙인이 구원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 말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랑의 삶을 게으르게 산다면, 그 가지는 잘려져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힘쓰고 살아가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한 15,7)라고 구원의 약속을 해 주신다.

신앙인이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가지가 나무에 붙어서 수액을 먹으며 하나가 되듯이, 신앙인도 주님께 붙어 있는 삶은 기도로 하나가 된 삶이어야 한다.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 만나고, 힘을 얻고, 생명을 얻으며,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렇게 기도로 주님께 붙어 있다면, 우리는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고,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기도의 수액이 사랑을 실천할 힘을 주고,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이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1요한 3,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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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22년 6월 초, 기상청에서는 곧 올 장마를 예고했습니다. 이번 장마는 7월이 아닌 6월에 시작할 것이라면서 이른 장마로 큰 피해가 있을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 예고에 농가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예정보다 이른 시기에 작물을 수확해야 했습니다. ‘혹시’라는 마음에 버티다가 정말로 비가 와 버리면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기에 가치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서둘러 수확하는 쪽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6월 장마 예고는 어긋났습니다. 비가 조금 오기는 했지만, 장마 수준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이에 수확을 미리 앞당겼던 농부들은 큰 피해를 봤다면서 항의했습니다. 기상청 예보는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이 과잉 예보가 훨씬 낫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비가 온다고 했다가 오지 않으면 경제적 피해를 보는 데서 그치겠지만, 비가 오지 않는다고 했다가 퍼부으면 준비하지 않아서 재산 피해뿐 아니라 인명 피해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상청은 비가 올지 안 올지 모를 때는 비가 온다고 예고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준비는 중요합니다. 더 큰 피해를 막는 데 꼭 필요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준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할까요? ‘과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는 잘하고 있는가?’라는 준비가 아닐까 싶습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 지금 상태가 계속될 것이라는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서는 큰 후회를 남기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계속해서 ‘늘 깨어 있어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라면서 포도나무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그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고 하시지요. 이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결정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지는 포도나무와 언제 붙어 있어야 할까요? 내가 어렵고 힘들 때만 붙어 있으면 될까요? 아니면 기분 좋을 때만 붙고, 그렇지 않으면 떨어져 있어도 될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살 수 있고, 붙어 있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는 것은 여유가 있고 마음이 평안할 때가 아닙니다. 또 어렵고 힘들어서 부탁할 때만 붙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붙어 있어야 할까요?

단 한 순간도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확실한 준비가 됩니다. 따라서 매 순간 주님과 붙어 있으면서 주님의 뜻을 세상에 실천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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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안에 머물러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당신 안에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이 시간 주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아울러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시는 15분 모두에게 언제나 주님 안에 붙어있는 굳건한 믿음을 주시길 청합니다.

흔히 하는 말입니다. “기는 놈 위에 뛰는 놈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아무리 능력 있고 똑똑하다고 해도 그보다 위인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는 놈 위에 붙어 다니는 놈 있다”고 합니다. 정말 똑똑하고 잘난 사람은 실세가 누구인지 파악해서 그 옆에 꼭 붙어 다니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소위 줄을 잘 서는 것이지요.

우리는 꼭 붙어있어야 합니다. 누구에게? 주님께 꼭 붙어있어야 합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풍성한 열매를 맺는 비법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입니다. 꼭 붙어있어야 뿌리로부터 생명의 수액을 받아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주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이루어 보겠다고 애쓰는 신앙생활은 실패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증언합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1코린 5,6-7) 그러므로 자만을 버리고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온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치시켜야 합니다. 주님께 모든것을 내어놓고 항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4,6)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커가는 만큼 주님의 도움과 멀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신 말씀은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이 청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먼저 믿음으로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하고, 믿음으로 청해야 소망을 이룰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하느님께 빌면 무조건 이루어지리라는 자기중심적이고 맹목적인 신앙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는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예수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대로 실천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그 의미를 깨닫고 그분과 일치하는 삶을 말합니다. 2독서를 보면,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3,24)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4,12-13)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나무에서 가지가 영양을 공급받는 것이지, 가지가 나무를 풍요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는 가지에 달리지만 가지가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잘려진 가지는 뿌리에서 분리되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가지는 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인 주님 없이 가지인 제자는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 안에 머물지 않으면 결코 주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혹 무엇인가에 성공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내일일 뿐 주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에 머물러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4)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고달픔만 더하고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내 뜻을 먼저 찾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무엇이든 청하여라.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말씀에는 관심이 있지만, 바로 그 앞부분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하는 말씀을 간과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이 먼저입니다.

오늘은 주님 안에 머물러 꼭 풍요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 안에서, 일터에서, 삶의 자리에서 주님 안에 머물러 기쁨을 누리시길 빕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 머물지 못한 일은 헛수고임을 일찍 깨우쳤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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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과 함께한다는 것>

요한 15,1-8 (나는 참포도나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당신과 함께한다는 것>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2)

참으로
당신과
함께한다는 것은

그저
당신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당신처럼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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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예수님
신학교 고학년 어느 여름날의 이야기입니다. 성당에 모여 교사들과 함께 여름행사를 준비하는데 한 여교사의 전화기가 울렸습니다. 그 교사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더니 한숨을 쉬고는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다시 전화기가 울리고 교사는 받지 않고. 이 상황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 본 저는, 계속해서 전화가 오는데 왜 받지를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동네에서 설문조사에 응했고 번호를 적었는데, 그 이후로 사이비 종교에서 자꾸만 전화가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완고하게 거절했고 그 이후 전화를 받지 않았는데도 자꾸만 만나자는 문자와 전화가 와서 난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저는 전화를 받으라고 했고, 그 교사와 함께 동네 아파트 단지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곳에는 재차 전화를 했던 여자 청년 둘이 서 있었고 그들은 한 명이 아닌 두 명인 저희를 보자 반색을 하며 기뻐했습니다. 저는 간단히 제 소개를 했고 곧이어 상호간의 뜨거운 설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대부분 흔히 우리가 받고 있는 뻔한 오해들,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 종교이며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다’ 혹은, ‘성경구절을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있는데 천주교는 잘못된 믿음을 지니고 있다’는 억지였고 저는 하나하나 반박하며 올바른 교리를 알려주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점점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고 지옥에 떨어지리라는 저주를 제게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반응을 보며 대답했습니다.

“성경 구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분들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따르지 않고 저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군요. 저는 믿음이 다르다고 해서 당신들을 미워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할 말이 없는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어서 말했습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모두가 지옥에 가리라는 교리를 우리는 배척합니다.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모두가 지옥에 간다면, 태어나서부터 다른 종교를 믿으며 자라게 된 이들은 너무 비참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는 종교를 알 기회가 아예 없는 다른 종교 문화 안에서 태어난 이들은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매님들은 자매님들의 교리를 믿으며 선하게 살아가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종교를 믿으며 선하게 살아갈 테니 그렇게 살다 보면 하늘나라에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제가 알려드린 교리가 마음에 남아있거든 언젠가 한 번 쯤 천주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그들은 할 말이 없는지 뒤돌아섰고 본당의 교사에게도 더 이상 전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이 논박에 의문을 제기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를 믿어도, 혹은 아예 믿음이 없더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실제 우리가 믿는 천주교의 교리입니다.

정식 교리로는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것인데, 이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선포된 교리로, 그 이전 “천주교를 믿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교리를 뒤집는 새로운 교의입니다.

즉, 비록 하느님을 알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인 “양심”을 따라 살면 하느님께서 하늘나라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이 떠오릅니다. “천주교를 믿지 않아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면 왜 굳이 성당에 나와야 하는가? 선교는 필요 없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종교를 믿고 선교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교리, 말씀, 성체성사, 고해성사 등이 구원으로 가는 지름길을 알려주기 때문이며 우리의 여러 죄들을 용서해주고 그로부터 보호해 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척박한 자본주의의 세상 안에서, 타인보다 내 자신의 이익이 중심이 되는 본성 안에서 아무런 이정표 없이 선하게 살아가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쾌락이 절대적 즐거움이 되는 이 세상 안에서 양심은 점차 무뎌지기 마련이고 선과 악을 식별하는 능력 또한 느슨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이는 마치 제가 앞서 말씀드렸던,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교리와 대치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를 연결시켜 묵상해보면 놀라운 예수님의 뜻이 드러납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단순한 외적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종교의 유무에 상관없이 예수님의 가르침, 즉 이웃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냐 하지 않느냐에 관한 기준을 새롭게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종교를 갖고 있지 않아도, 다른 종교를 믿고 있어도 사랑을 실천하며 참 그리스도인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당에 나와 열심히 봉사를 하면서도 혹은 성직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비 그리스도교인들보다 못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한들, 미사에 성실히 참석한다고 한들 그러한 사람은 건강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수도, 예수님을 믿는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내 마음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없다”라고 생각하며 당시의 유다인들처럼 나와 다른 생각의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미워하지는 않는지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나의 힘으로만 하느님께 다다를 수 있는 것처럼 평소에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하느님께 이르는 길은 그리고 그 자리는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 길을 우리가 따라가는가 혹은 따라가지 않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이를 명심하며 우리는, 주변의 이웃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찾으며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러한 작은 노력들이 언젠가 우리를 주님의 거처로 이끌어 줄 것이며 그것은 타인에게 모범이 됨으로써 세상에 선포되는 진정한 선교가 될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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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제가 학생이었던 시절, 어머니께서 저에게 자주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놀지 말고 공부 좀 해라. 공부해서 남 주냐?” 그 땐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공부를 열심히 안하고 자꾸 놀 생각만 하는 철 없는 아들에게 하시는 ‘잔소리’ 정도로만 여겼지요. 그런데 이제는 제가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똑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남 좋은 일’로 여기는 모습이 답답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위해 대신 공부를 해 주는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나중에 더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꿈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하는 것이 공부인데, 그놈의 공부 때문에 자꾸 부모님께 짜증을 내고 당연한듯 대가를 요구하며 수동적으로 학업에 임하는 모습이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주도적으로 공부하여 학업에 진전을 이루면, 결국 거기서 오는 좋은 점은 자신이 누리는 것이지요.

그런 점은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먼저, 자기가 더 많이 사랑하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내 안에 있는 사랑을 다 퍼주다보면 결국엔 내 안에 아무 것도 남는 것 없이 공허해질거라고 여기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참된 사랑을 하면 오히려 내가 그 사랑으로, 그 힘 덕분에 충만한 기쁨과 행복으로 차오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신비’입니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나를 충만하게 채워주는 그런 참되고 완전한 사랑은 오직 하느님께로부터만 나옵니다. 사람에 기대고 의지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맺고 그분 사랑 안에 깊이 머물러야, 참된 사랑을 할 힘이 생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 안에, 당신께서 하느님과 맺고 계신 사랑의 친교 안에 머무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작업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마음의 ‘가지치기’입니다. 나무는 가지에 생명수인 수액을 공급하고 가지는 그 수액을 받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이 포도나무이신 주님과 그 가지인 우리 사이의 관계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수액을 충분히 주시는 분이지만 결코 낭비는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받은 수액을 열매 맺는데에 써야지,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데에 혹은 잔가지와 잎을 무성하게 늘리는데에 낭비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그런식으로 열매를 위해 써야 할 시간과 노력을 엉뚱한데다가 쓰면 수확철에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그 겨울에 하느님께서 심판의 가위로 우리를 주님 사랑으로부터 잘라내 버리실 겁니다. 하느님은 당신 피조물들이 더 많은 열매를 맺기를 바라시는 참된 농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은총이 무의미하게 낭비되는걸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계속 주님 곁에 붙어있고 싶다면, 내 뜻대로 마구 자라는 욕심과 고집이라는 잔가지를 잘라주어야 합니다. 틈만 나면 나를 크게 부풀리고 꾸미려 드는 교만이라는 잎파리들을 떨궈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은총의 양분을 그분께서 원하시는 일에 온전히 사용하며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지요.

마음의 가지치기를 마쳤다면, 그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주님 안에 머무르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안에 진정으로 머무르면, 당신께서도 우리 안에 머무르겠다고 하십니다. 참된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속한 그분의 진정한 가지가 되려면, 주님께 물리적으로 붙어있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단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저 말로만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낸다고 해서 주님께서 바라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게 아니지요. 주님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모든 일에 앞서 그분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서 선택의 순간마다 그것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주님은 내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기를 바라실까?’를 먼저 생각하며 그 기준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내 안에 머무르시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를 올바르게 식별할 참된 지혜를 주십니다. 결국 주님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그분이 나를 통해 원하시는 뜻을 이루시도록 내 안에 가득한 욕심과 자아를 비워내는 일입니다. 또한 내 뜻이 아니라 주님 뜻이 이루어지도록 내 삶의 주도권을 그분께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바오로 사도가 그랬듯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상태, 주님께서 누리시는 참된 생명과 행복을 그분과 함께 누리는 상태가 됩니다. 주님과 내가 ‘한 포도나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착각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열매에 가지가 달린다고 해서 가지가 그 열매를 만드는게 아닙니다. 가지는 나무가 내어주는 수액을 나무가 만들어준 꽃눈에 ‘전달’하는 역할을 할 뿐, 열매는 나무가 만드는 것이지요. 그것은 주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살면서 큰 성공을 이룬다고 해서, 풍성한 결실을 얻는다고 해서, 그것을 마치 내 능력으로 이룬 것인양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착각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듭니다. 루카 복음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가 많은 소출을 얻은 것이 자기 능력 때문이라 착각하여 그것을 자기 혼자 소유하고 누리기 위해 더 큰 창고를 지으려 드는 겁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겠지요.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그러니 우리는 주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항상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며 거기서 얻은 좋은 것들을 그분 뜻에 맞는 일에 잘 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포도나무의 가지인 우리에게 맡겨진 소명입니다. 양분을 제 안에 저장하는건 가지의 역할이 아닙니다. 가지는 나무로부터 받은 수액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어야 하지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은총과 사랑에 감사를 더하여 기꺼이 이웃에게 전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삶에 참된 기쁨과 행복이라는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억울해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결국 남 좋은 일만 시키는거 아니냐는 것입니다. 나도 먹고 살아야 하는거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받는 족족 다 내어주고 나면 나한테는 뭐가 남느냐는 것입니다. 열심히 해봐야 ‘인건비’도 안 남는 게 신앙생활이라면 그런 일은 굳이 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이신 주님의 가지로 사는 일은, 그분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사랑의 통로가 되는 것은 결코 ‘남 좋은 일’만 시키는게 아닙니다. 내가 포도나무의 참된 가지가 되면, 다시 말해 주님과 내가 ‘하나의 나무’가 되면, 그분께서 바라시는 뜻이 내가 바라는 뜻과 같아집니다. 그런 상태에서 주님께 청하는 것들을 그분께서는 그대로 이루어 주시지요. 내가 주님께 드리는 기도가 ‘언제나 100% 열매 맺는 기도’가 되는 겁니다. 그런 영적인 성공 체험이 나를 훌쩍 자라게 만듭니다. 그렇게 나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그러니 주님 안에 머무르는 참된 가지가 되는 일은 나와 너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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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 안에 머물러라”>
-행복은 선택이요 선물이요 발견이다-

기대반 설렘반 마음으로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만세칠창과 더불어 시작하는 행복한 하루입니다. 저는 늘 만세칠창과 더불어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만세칠창과 더불어 선사되는 행복입니다. 그리고 다음 시편 구절을 되뇌입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과연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누구나의 소망이 행복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우리에게 바라는 유일한 소원도 우리 하나하나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행복의 미사잔치”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요즘 신록의 기쁨으로 빛나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파스카의 축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파스카의 기쁨, 신록의 기쁨, 파스카의 행복, 신록의 행복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신록과 파스카 봄꽃들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기대반 설렘반 마음으로 수도원 자비의 집 문을, 집무실 문을 열때마다, 가슴 가득 안겨오는 신록과 파스카의 봄꽃들, 아름다운 환경이 흡사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행복의 초대장”처럼 느껴집니다.

행복한 사람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힘겨운 삶을 고달프게 살아갑니다. 도대체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기다려서 언젠가 행복하기로 하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요 책임이요 권리입니다. 언젠가의 행복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할 행복이요 하늘나라 천국입니다. 지금 행복을, 하늘나라 천국을 못살면 내일도, 죽어서도 못삽니다. 행복은 선택이요 선물이요 발견입니다.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있는 행복의 문입니다. 2018년부터 시작된 제 행복기도를 다시 나눕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희망과 기쁨, 평화와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정말 마음을 담아 끊임없이, 한결같이 바치시면 행복은 선물처럼 주어질 것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행복은 선물입니다. 행복은 발견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부활 제5주일 말씀도 행복의 비결을 알려 줍니다.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는 “행복의 문”입니다. 소개해 드립니다.

첫째,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참 명쾌하여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참 행복하게 합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복음 서두 말씀부터 마음에 듭니다. 아마 직업중 가장 하느님을 닮은 분들이, 하느님의 인내와 겸손을 닮은 분들이,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분들이 농사를 짓는 농부일 것입니다. 성당에서 성사(聖事)요, 식당에서 식사(食事)요, 농장에서 농사(農事)이니 참 중요한 삼사(三事)중 하나가 농사입니다. 농사짓는 분들의 고백을 들어보면 80% 하느님께서 하신다 고백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의 행복의 소재를 알려줍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네 안에 머무르겠다…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행복의 우선적 조건이 바로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사랑의 관상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과의 친교를, 관계를 깊이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오늘 복음에 머무른다는 말마디가 9회 나옵니다.

그러니 늘 주님 안에 머물러 사는 기도의 훈련, 사랑의 훈련이 얼마나 행복에 절대적인지요! 장소와 전혀 무관합니다. 언제 어디나 계신 주님이기에, 언제 어디서나 주님 안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이 진짜 사랑의 관상가들이요 누구나에게 열려있는 가능성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과의 관계를, 친교를 깊이하는 영적훈련시간이기도 합니다.

둘째,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제대로 머물러야 열매를 맺습니다. 냉담으로 주님 안에 제대로 머물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머무르다”와 “열매맺다”가 하나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다음 주님 말씀에 절대적으로 공감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무슨 열매입니까? 두말할 것 없이 사랑의 열매입니다. 부부간 사랑의 열매가 자녀들입니다. 참으로 부부가 사랑의 열매인 자녀를 갖기를 원한다면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관상기도에 힘쓰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사랑의 주님 안에 머무름에, 사랑의 관상에 충실했느냐는 그 사랑의 열매로 검증됩니다.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 사도 요한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름의 관상은 사랑의 계명을 지킴으로 완성됩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의 부족한 사랑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안에 머무르십니다.”

주님 안에 사랑의 머무름과 사랑의 실천은 함께 갑니다. 마치 사랑의 관상과 사랑의 활동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의 관상 정도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울을 두둔하고 보호하는 바르나바의 형제애가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사울을 두려워하여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바르나바는 사울을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가서 자초지종 사울의 일화를 들려주면서 이들의 불신과 두려움을 말끔히 해소시켜 줍니다. 바르나바의 사랑의 변호에 감격한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합니다. 바르나바의 사랑의 열매가 바로 사울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오늘 참행복의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늘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살아있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포도나무에 가지들로 붙어있어야, 주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그리고 끊임없이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고, 참으로 행복하다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정말 살아있는가? 죽어있는가?”

예전에 읽은 “나이 30에 죽어 70에 묻힌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옛 사막수도자들의 공통적 화두는 ‘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뒤돌아 보면 참으로 살았던 날들은, 참으로 행복했던 날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살아 있다 하나 실상 주님을 떠나 세상 안에 머무름으로 죽어 있는 것이 아닌지 성찰해 봐야 합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 속에 머물러 살 때 죽어있는 인생이요, 생명과 빛이요 사랑이신 주님 안에 머물러 살 때 비로소 살아있는 삶,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안에, 무지와 허무 안에 머물러 살다보면 자기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모르고 사는 사람도 참 많을 것입니다.

참 자주 물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정말 살아 있는가? 죽어있지는 않은가?”

주님 안에 머물러 끊임없이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삶이야 말로 참행복한 살아있는 삶이요, 세상 안에 머물러 자신만을 위한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한 이기적 삶이라면 죽은 삶임에 분명합니다.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의 임종어는 “주님, 사랑합니다.”였고, 바로 참 행복한 삶이었음을 반영합니다. 제 아는 어느 분의 임종어는 “주님, 감사합니다.”였습니다. 역시 참 행복한 삶이었음을 반영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아닌 기쁨은 믿지 마십시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신비가는 말합니다.

“당신의 삶을 통해 바치는 유일한 기도가 ‘하느님 감사합니다.’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미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어제 읽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는 누구나를 위한 방이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언제나 한 장소가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일 교구내 본당신부가 환영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가서 보십시오(go and look). 거기에는 언제나 한 장소가 있습니다. 결코 교회로부터 떠나지 마십시오. 교회는 매우 큽니다. 교회는 성전보다 많이많이 큽니다…당신은 교회로부터 떠나선 안됩니다.”

옛 어른의 다음 말씀을 보면 역시 참행복의 경지에 도달한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어떤 특별한 순간도 일상만큼 반복하지는 못한다.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는 일만큼 비범한 것은 없다.”<다산>
“평소에는 공손하고, 일을 할 때는 경건하며, 다른 사람에게는 진실해야 한다. 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논어>

이처럼 평범한 일상을 한결같이 살아가는 이들이 참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행복은 선택이요 선물이요 발견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십시오.
사랑의 열매를 맺으십시오.

참 행복의 비결입니다. 교회 안에 머무르는 것이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이 참으로 살아있는 참행복한 삶입니다. 교회의 품은 예수님의 품이요 하느님의 품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 안에, 교회 안에 머무르는 우리에게 주님은 당신과의 일치를 굳게 하시고, 참행복을 선사하시며, 참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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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화수분 같은 주님 사랑>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부활 제5주일 주제는 이런 것일 겁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라! 주님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라!

그리고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고, 주님 사랑 안에 머묾이 없이 사랑을 실천하려 하면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오늘 해야 할 모든 얘기를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을 좀 더 풀어서 얘기하면 이런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 사랑은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도 되겠습니다.

이것은 주님 품 안에 안겨 있는 것과도 같고, 주님 사랑 안에 푹 잠겨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안겨 잠자고 나면 옛날 엄마 품에서 잠자고 난 것처럼 다시 기운이 나고, 그렇게 사랑 안에 오래 잠겨 있다가 나오면 충전된 건전지처럼 힘이 넘치겠지요?

그렇긴 한데 우리가 엄마 품도 아니고 주님 품도 아니고, 연인의 품에 안겨 잠자고 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힘을 얻을 수도 있고 뺏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오래 가지 못할 수도 있고 아무튼 주님 품보다 불완전하고 불충분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딱 보조 배터리입니다. 주님 사랑의 보조 충전기이고 보조 배터리입니다. 그리고 그나마 주님께 충전 받아야 충전해줄 수 있는 충전기이고 배터리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영원한 사랑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주님의 보조 배터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우리가 직접 주님 사랑 안에 머물고 잠겨야만 합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이고, 이래야 주님 말씀대로 열매를 많이 맺는 가지가 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주님 사랑 안에 머물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주님의 계명인 사랑 실천을 잘하고 그래서 사랑의 열매를 많이 맺는 길입니다.

우리 사랑이 열매 맺지 못함은 우리 사랑이 주님 사랑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얼마 안 남은 우리 사랑으로 이웃 사랑을 하려고 하니 사랑하다가 그만두게 되고 사랑한다면서 사랑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사랑하다가 미워하게도 되고 분노하게도 됩니다. 한두 번 물 준 것으로 나무가 계속 싱싱하고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없습니다.

사랑 나무와 사랑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떨어지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 하느님 사랑에서 물을 길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화수분 같다고 하는데 주님 사랑만이 화수분 사랑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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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4)

<머물다!>

오늘 복음(요한15,1-8)은 ‘참 포도나무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4-5)

‘하느님 아버지는 농부’이시고, ‘예수님은 참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그 가지’입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떨어짐 그 자체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있는 가지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단순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계명)을 믿고 따르면,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되면,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서 ‘성령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1요한 3,24)

내가 예수님 안에 머물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머무시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 열매가 바로 ‘성령의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사랑과 용서와 화해 그리고 회개’는 내가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가지들, 예수님께 붙어있는 가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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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vDFUVj4Bp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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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 4)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머무름의
은총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머무름의
지혜입니다.

우리를
머무름으로
끌어당기시고
머무름으로
우리의
오늘을 받쳐줍니다.

머무름의 목적은
머무름에 있습니다.

머무름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온전한
머무름으로
온전한 열매가
맺어집니다.

열매가 열리고
열매가 자라나는
모든 시간이
머무름의
시간입니다.

머무름 안에는
말씀이 있고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머무름으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머무름이
믿음이고
머무름이
사랑입니다.

머무름으로
다시 태어나고
머무름으로
자라납니다.

결코
떠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
머무름입니다.

입구와 출구가
되는
머무름입니다.

머무름의 숨결이
제대로된
머무름의
본질입니다.

참된 머무름에는
떠남과 배신이
없습니다.

사랑을 완성하는
머무름은
깊어만갑니다.

머무름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오직 머무름만
있을 뿐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관계는
열매를 맺는
머무름의
관계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가장 좋은
주일입니다.

주님께
머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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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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