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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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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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어떻게 …….’ ‘어떻게 …….’ 토마스는 ‘어떻게’에 묶여 있습니다. 토마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실은 예수님 그분 자체입니다. ‘어떻게’는 토마스가 아니라 예수님의 일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어떻게’를 찾아 나서는 것은, 지도도 없이 미지를 탐험하는 일과 같습니다. 토마스와 필립보는 자기 경험과 지식의 한계 안에서 예수님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실은 자신을 개방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한계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마디가 ‘머물다’입니다. 함께 머무는 것은 경험과 이해의 사전 지식이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말 못하는 강아지나 고양이와도 함께 머물 수 있는 우리 사람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함께 머물기가 그리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자문해 봅니다. 말이 통하고 뜻이 통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 사이에,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통하지 못하는 갈등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뼈저리게 반성합니다.
‘너무 믿고, 너무 의지해서, 너무 미워할 수 있다.’라는 말은 신앙생활 안에서도 되짚어 보아야 할 말입니다. 예수님을 너무 믿고, 너무 의지해서 함께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이 꿈꾸는 예수님, 자신이 갈망하는 예수님이라는 우상을 부여잡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말을 다 들어주신다는 믿음은 예수님께서 이런 죄인 안에서도 자유로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펼치실 수 있을 때 터져 나오는 감사와 감탄의 행위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작 우리의 편협한 뜻을 이루시려고 육화하시고 우리와 함께 머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유로우실 수 있도록 예수님 앞에서 조용히 침묵하는 시간을 가져 보아야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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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해 봅시다
2. 초기 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움은 예수님의 말씀이 삶 속에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대형화되는 가운데, 초대교회의 모습을 어떻게 다시 살아낼지 함께 묵상해 봅시다. 무엇이 참된 교회의 아름다움을 가로막는지 나누고, 우리가 걸어갈 주님의 길을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3. 예수님이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만 필립보는 주님에게 또다른 표징(“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을 요청합니다. 내 힘만으로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묵상해보고, 믿음이 자라지 않는 이유와 우리 신앙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함께 나눠 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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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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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초기 교회 공동체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신자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영원한 가치로 삼지 않은 초기 신자들의 마음에는, 세상의 행복의 가치를 다른 눈으로 보게 해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인간적인 약점은 언제나 드러납니 분배가 공정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이내 불평을 터뜨렸는데, 믿는 이들도 팔이 안으로 굽는 인간적인 편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려고 일곱 부제를 뽑고 그들에게 식탁 봉사의 직무를 맡겼습니다. 영적 교회와 제도 교회의 양면성이 엿보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은사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공동체 질서를 유지할 사회적 제도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제도가 영적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디딤돌이 되어야 하는데, 역사 속에서 제도는 걸림돌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쓸모없는 돌멩이 같은 우리 존재를 하느님께서는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는 살아 있는 돌로 만드신다고 고백합니다. 믿음은 인간적인 나약함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만들지만, 불신은 사람들을 편견과 오해의 걸림돌이 되게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내 인생에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게 하려면, 내 인간적인 약점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수련이 필요합니다. 내가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은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겸손의 용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4578
5월3일 [부활 제5주일(생명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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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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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DM90ERYH_is
[서울대교구 오석준 레오(생명위원회 사무국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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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얼굴을 통해 하느님을 뵙습니까?>
신앙에 귀의한 사람들, 영적 삶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큰 갈망은? 아마도 ‘단 한 번만이라도 하느님을 얼굴을 한번 뵈었으면!’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게 너무 과도한 바람이라면 ‘적어도 하느님의 음성이라도 직접 내 귀로 들어봤으면!’ 하는 것일 것입니다.
필립보 사도는 이런 갈망을 아주 강하게 표출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 14,8) 아직도 갈 길이 멀었고, 아직도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은 그의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웠던 나머지 예수님의 큰 탄식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합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요한 14,9-10)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예수님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는 신앙 여정 안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 머릿속에, 마음속에, 삶 속에 명료하게 자리 잡아야 하는 화두(話頭)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파악하고 있는 바처럼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하느님은 일심동체입니다. 두 분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찰떡궁합, 불가분의 관계 안에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아는 것과 하느님을 아는 것은 따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십니다. 예수님을 뵙는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뵙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는데, 그분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100퍼센트 하느님의 의중을 반영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말해서 복음서를 통해서, 하루에 몇 번이고 하느님을 만나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 두 분은 언제나 상호 내재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신다.’는 그 단순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진리를 겸손한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 오늘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 명제입니다.
돈보스코를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했던지, 모든 측면에서 모방했던 후계자 필립보 리날디 신부에게 후배 살레시안들이 별명을 하나 붙여드렸는데, ‘제2의 돈보스코’, ‘목소리 빼고 돈보스코와 똑같았던 살레시안’이었습니다.
저희 후배 살레시안들은 필립보 리날디 신부를 통해 돈보스코를 봤습니다. 또한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는 돈보스코를 통해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돈보스코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뵈었습니다.
한 무신론자가 택시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한 여인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단순하고 어눌했지만, 진심과 사랑으로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에 큰 감동과 매력을 느꼈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 듣는 동안 온몸은 전율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즉시 방송국으로 전화를 걸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그 여인은 콜코타의 성녀 마더 데레사였습니다. 곧바로 찾아갔고, 그녀의 소박하면서도 강렬한 영적 조언을 들은 그는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는 마더 데레사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오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오늘 우리의 얼굴, 우리의 말투,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 뵙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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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h4AFJ5EV8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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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두려움 없애는 법: 더 큰 생명 안에 머물러라>
찬미 예수님! 부활 제5주일입니다. 부활 시기라 부활을 말해야 하는데,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가득합니다. 3년 동안 모든 것을 걸고 따랐던 스승님이 이제 곧 떠나신다니, 그들에게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 공포였을 것입니다. 이는 부활이 곧 나의 부활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주님 부활은 우리에게 의미가 없어진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람은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그건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내 존재가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 수 없기에 본능적인 공포를 느낍니다. 반대로 말하면 두렵지 않으려면 ‘알면’ 됩니다. 그렇다면 아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세상과 생명을 관통하는 ‘법칙’을 발견하면 됩니다.
우리가 처음 가보는 낯선 다리를 건널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 다리가 무너질까 봐 벌벌 떨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수많은 사람이 그 다리를 건너다니는 것을 보았고, 설계자가 부실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내가 살아오는 동안 깨닫게 된 ‘법칙’에서 옵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은 안전하다’는 원리를 경험했기에 처음 건너는 다리라도 두려움 없이 건널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죽음이라는 처음 가보는 길 위에서 두려움을 없애려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 세워놓으신 ‘관계의 법칙’을 깨달아야 합니다.
첫 번째 법칙: 모든 생명은 더 큰 생명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사과 하나를 보며 “맛있다”라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과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외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사과는 ‘땅’이라는 거대한 생명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람들은 땅을 죽은 흙덩어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 영양분 없는 모래밭에서는 사과나무가 자랄 수 없습니다. 땅은 수많은 미생물과 생명체가 태어나고 죽으며 형성된 하나의 거대한 ‘살아있는 유기체’입니다.
그렇다면 땅의 그 생명력은 어디서 왔을까요? 바로 태양입니다. 태양이 빛을 보내 광합성을 하게 하고, 태양이 비를 만들어 내려주어 땅을 적셨기에 비로소 땅은 비옥해질 수 있었습니다. 태양이 없으면 땅이 죽고, 땅이 죽으면 사과는 맺히지 않습니다. 결국 사과 하나를 베어 문다는 것은, 사과 속에 들어있는 태양의 빛살과 땅의 영양분을 내 몸으로 흡수하여 에너지를 만드는 행위입니다. 사과 안에 태양과 땅이 이미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생명의 연쇄 고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라는 생명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태양과 땅에 전적으로 속해 그 생명을 받아 우리에게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미 우주의 근원인 아버지를 소유한 것입니다. 출처를 알면 죽음은 더 이상 고립된 소멸이 아닙니다.(출처: 리처드 도킨스, 『지상 최대의 쇼』)
◇탯줄의 법칙: 어머니의 품에 머무는 유일한 방식
태중의 아기를 보십시오. 아기가 엄마라는 더 큰 생명 안에 존재합니다. 아기가 엄마에게서 양식을 공급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엄마가 더 큰 세상으로 나가 아빠가 벌어오는 양식을 공급받아 아기에게 전달해주어야 합니다. 엄마는 아기를 위해 아빠라는 근원에 철저히 속해야 하고, 아기는 엄마라는 통로에 철저히 머물러야 합니다.
이 ‘머무름’에는 반드시 ‘법칙’이 있습니다. 아기가 엄마의 자궁이 싫다며 탯줄을 이빨로 물어뜯거나, 배고프다고 엄마의 가슴을 물어뜯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엄마 품에 머물 자격을 잃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모든 계명은 우리를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분의 품 안에서 튕겨 나가지 않게 하려는 ‘사랑의 안전벨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법칙)을 완벽히 지키심으로써 그분 안에 머무셨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의 모든 생명이 아드님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이 나라의 법을 지켜 국가가 제공하는 모든 안전과 연금을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순종할 때, 주님은 우리 안에 사시게 되고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거대한 복지 시스템 안에서 보호받습니다. (출처: 에리카 라카르트, 『태내 기억』)
◇수명의 법칙: 하느님께서 살과 피를 주신 진짜 이유
여기서 우리는 소름 돋는 두 번째 법칙을 마주합니다. “나보다 더 큰 생명력을 지닌 존재가 나에게 얼만큼을 주느냐가 나의 생존 기간을 결정한다”는 법칙입니다.
사과는 땅보다 훨씬 수명이 짧습니다. 그 이유는 땅으로부터 자신의 형체를 유지할 아주 일부분의 에너지만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고기가 수천 개의 알을 낳지만, 대부분 일찍 죽는 이유는 어미가 그 많은 새끼에게 자기 생명력을 똑같이 나누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새끼들의 평균 수명은 부모의 발치에도 못 미칩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부모는 자녀 하나를 위해 자신의 전 생애와 전 재산, 심지어 목숨까지 바칩니다. 부모가 자신의 생명을 통째로 자녀에게 이양할 때, 자녀의 수명은 부모의 수명과 맞먹게 됩니다. 부모가 가진 만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고, 그분의 ‘살과 피’를 통째로 내어주셨다는 것은 무슨 표징입니까?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수명을 우리에게 그대로 수혈하셨다는 선언입니다! 하느님이 영원하시니, 그분의 살과 피를 먹은 우리도 그분만큼 오래 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사람은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않을 것이다” (요한 11,26)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 이유는 우리가 먹은 양식의 ‘수명’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출처: 『가톨릭교회교리서』 1213-1274항 참조)
◇정체성의 신비: “나는 하느님이다”라고 믿어야 사랑이 나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위대한 선물을 받고도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내가 ‘누구’인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욕구는 자신의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개라고 믿는 존재는 짖고 싶어 하고, 사람이라 믿는 존재는 말하고 싶어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법칙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보잘것없는 인간’이라고만 믿으면, 그 사랑은 불가능한 고역이 됩니다. 하지만 내가 성체를 통해 하느님의 유전자를 수혈받은 ‘진짜 하느님’임을 믿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내가 하느님인데, 고작 이 정도 자존심 때문에 미워하는 게 격에 맞는 일인가?”라는 어색함과 부끄러움이 생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만큼의 사랑을 하고 싶은 ‘거룩한 욕구’가 터져 나옵니다. 그 정체성이 우리를 그리스도처럼 살게 하고, 그분 안에 영원히 머물 자격을 확정 짓습니다. 그분처럼 사랑할 수 없다면 그분 안에 머물 수 없습니다. 사랑이 유일한 법칙이기 때문입니다.(출처: 성 아타나시오, 『말씀의 강생』)
◇진짜 죽음의 정의: 잎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뽑히는 것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죽음을 다시 정의합시다. 사과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는 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기 위한 변화일 뿐입니다. 진짜 죽음은 ‘뿌리가 뽑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는 이와의 연결이 끊기는 것이 유일한 죽음입니다.
「사례 1: 영화 ‘그래비티'(Gravity, 2013) – 생명줄을 놓친 자의 공포」 영화 ‘그래비티’에서 우주 비행사 라이언 스톤(Sandra Bullock 분) 박사는 지상에서 어린 딸을 사고로 잃고 삶의 의지를 놓아버린 ‘걸어 다니는 시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거부한 채 고독의 진공 속에 자신을 가두고 살았습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죽음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 그녀가 우주선 밖에서 작업을 하던 중, 갑작스러운 파편의 습격으로 우주선과 자신을 잇던 ‘생명줄(Tether)’이 끊어지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산소는 떨어져 가고, 통신은 두절되었습니다. 광활한 우주 한복판에 홀로 던져진 그녀는 우주 전체를 소유한 듯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가장 비참한 죽음으로 빨려 들어가는 우주 미아였습니다. 이때 베테랑 비행사 맷 코왈스키(George Clooney 분)가 나타납니다. 맷은 끊어진 라이언의 생명줄을 대신하여 자신을 그녀와 연결합니다. 그리고 더 큰 생명의 원천인 ‘지구’로 그녀를 돌려보내기 위해, 자신을 묶고 있던 연결 고리를 스스로 해체하며 우주 저편으로 사라집니다.
맷 코왈스키의 희생을 통해 라이언은 깨닫습니다. 죽음은 소중한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생명의 원천에서 뽑혀 나가는 것임을 말입니다. 그녀가 다시 살기로 결심하고 구조선의 해치를 열었을 때, 그녀는 비로소 ‘더 큰 생명’인 지구의 인력과 연결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생명줄을 놓치고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고집하는 순간, 우리는 화려한 우주복을 입었어도 영적 질식 상태에 빠집니다. 연결됨이 생명이고, 단절됨이 죽음입니다. (출처: 알폰소 쿠아론 감독, 영화 ‘그래비티’ 2013)
◇결론: 마음의 평화는 생명을 주시는 분 안에 머물 때 옵니다
살려면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 안에만 머물면 됩니다. 그러면 그분만큼 삽니다. 그분이 안 보일 때도 있는데 이는 그분이 더 큰 생명을 얻으러 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리를 마련하러 가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어라.” 이 믿음은 막연한 낙관이 아닙니다. 사과가 땅에 속하고 땅이 태양에 속하듯,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그분께 속하고 그분이 지니신 영원한 생명을 그대로 상속받았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속함을 믿고 주저 없이 우리에게 당신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이는 엄마가 아버지에게 속해있음을 믿고 자녀에게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영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수명을 살고 있습니다. 죽음은 마치 태아에게 탯줄이 끊기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오는 ‘출산’과 같습니다. 뿌리가 박혀 있는 나무에게 겨울(죽음)은 휴식일 뿐이듯, 주님께 정박한 우리에게 죽음은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축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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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요즘 뉴스를 통해 전쟁의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4년째 이어지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벌써 2달째 이어지는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있습니다. 미사일 한 발이 발사될 때마다 수백만 달러가 사라집니다. 하루 작전에 수천만 달러, 많게는 수억 달러가 사용됩니다. 항공모함 한 척을 움직이는 데에도 하루 수백만 달러가 들어갑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숫자이지만, 그것은 분명 사람들의 땀과 세금입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미사일 한 발의 비용이면, 가난한 이들의 치료비를 얼마나 도울 수 있겠습니까? 하루 전쟁 비용이면, 얼마나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겠습니까? 항공모함 하루 유지비면, 얼마나 많은 공동체를 살릴 수 있겠습니까? 전쟁은 막대한 돈을 태워 버립니다. 그러나 그 불꽃은 생명을 살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생명을 무너뜨립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는 전혀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음식 나누는 일이 소홀해졌습니다. 그때 사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을 세워 그 일을 맡깁니다.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에 전념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고, 제자들의 수가 많이 늘어났다.” 초대교회는 ‘모든 일을 다 잘하는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을 분별한 공동체’였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 교회에도 조용히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어디에 힘을 쓰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디에 돈을 쓰고 있습니까? 물론 교회에 행사도 필요하고, 건물도 필요합니다. 공동체를 위해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향한 나눔보다,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눈에 보이는 것과 외적인 확장에 더 많은 마음과 재정을 쓰고 있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초대교회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교회의 중심은 구조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이 되어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십시오.” 살아 있는 돌은 벽을 높이는 돌이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는 돌입니다. 서로를 지탱하고, 생명을 이어 주는 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맡기셨습니까? 미사일이 아닙니다. 권력이 아닙니다. 복음입니다. 사랑입니다.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다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는가? 우리 공동체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는가? 우리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우리의 삶이 따라갑니다. 우리의 재정이 흐르는 곳에 우리의 가치가 드러납니다. 전쟁은 돈을 태우지만, 사랑은 생명을 살립니다. 전쟁은 폐허를 남기지만, 복음은 공동체를 세웁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살아 있으려면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살리는 열매를 맺으려면,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생명을 선택하게 됩니다. 나눔을 선택하게 됩니다. 사랑을 선택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선택의 자리 앞에 서 있습니다. 파괴인가, 생명인가. 소비인가, 나눔인가. 확장인가, 사랑인가. 마지막으로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쓰는 돈이 우리의 믿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길이 우리의 신앙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그곳에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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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아버지께 가서 그들이 머물 곳을 마련하고 꼭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필립보가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요한 14,9)이며,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14,10)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시는데, 어떻게 하느님께 가셨다가, 다시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는 말씀이실까요?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의 첫사랑인 제니는 가정 폭력으로 상처받고, 진정한 사랑을 찾아 떠돌다가 세월이 지나서야 주인공 포레스트에게 돌아옵니다. 포레스트는 두려움에 대하여 말하는 제니에게 달리기로 미국을 돌면서 본 애리조나의 아름다운 장면을 전해 줍니다. 그러자 제니가 말합니다. “나도 거기 너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포레스트는 대답합니다. “너는 나와 함께 있었어.”
여행의 진정한 가치는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에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과 하느님의 관계가 바로 이러합니다. 떠나지만 언제나 다시 돌아오고, 그런 관계 속에서 아드님 안에 아버지께서 계시고 아버지 안에 아드님께서 계십니다.
요양 병원에 병자 봉성체를 갔을 때, 한때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졌던 이들도 돈도 명예도 다 남겨 두고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간다는 것과 우리는 하느님과 떨어진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이 우리를 속이고 실망시키더라도, 마음이 산란해지지 맙시다. 결국 우리는 이 긴 여행을 마치고 모두 아버지께 돌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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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1-12: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1. 말씀의 초대
“너희는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절) 예수님은 이제 곧 수난과 죽음을 맞으실 것을 아시며 제자들에게 마지막 위로를 건네신다. 제자들은 두려워했고,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때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아버지께 가는 길”이라고 밝히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2. 그리스도: 아버지께 이르는 길
토마스가 물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5절) 그의 질문은 우리 신앙의 질문과도 같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께 이르는 ‘길’을 찾으려 하지만, 정작 그 길이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잊곤 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길을 보여 주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이 곧 길이신 분이다. 그분이 진리이시며, 곧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길이시다. 또한 그분이 생명이시며, 죄와 죽음 속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길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시다. 그분 안에서만이 죄의 저주로 죽은 우리가 다시 살아난다.”(I. De La Potterie, La verité dans St. Jean, vol. II, Roma 1977, p. 1009) ‘진리’는 단순한 교리적 개념이 아니라,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드러나는 계시의 선물이다. 그것은 인간의 지식이나 논리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 안에서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
3.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필립보가 말한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절) 이 말은 인간의 영원한 갈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신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9절)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단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아버지의 현존을 인식하는 것이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아버지를 안다.”(Adversus Haereses IV,6,6)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덧붙인다. “길을 걷지 않고 목적지에 이르기를 바라는 자는 미혹된 자이다. 그리스도가 길이시다. 그 길 위에서 진리를 배우고 생명을 얻는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34,9)
4. 살아 있는 돌로서의 교회
제1독서(사도 6,1-7)에서는 일곱 부제를 세우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교회가 단순한 제도나 조직이 아니라, 봉사와 사랑 안에서 자라나는 살아 있는 공동체임을 보여 준다. 그리고 제2독서(1베드 2,4-9)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이루십시오.”(1베드 2,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버림받은 돌이셨지만, 머릿돌이 되셨다. 우리 각자는 그 머릿돌 위에 자신을 쌓아 올리며, 하느님께 드리는 신령한 제물이 되어 간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해석한다. “그리스도께 결합하지 않은 자는 아무리 돌처럼 단단해 보여도 교회의 집에 속하지 않는다. 그분 안에 있는 자만이 생명의 집 일부가 된다.”(Homiliae in Epistolam I ad Petrum, 5)
5. 신앙인의 하루: 신령한 제물로 사는 삶
우리는 매일 아침 하루를 선물로 받는다. 그 하루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하신 구원의 여정이다. 그분은 우리가 그 하루를 단순히 ‘지나가는 시간’으로 살지 않고, 신령한 제사로 바치길 바라신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1베드 2,5) 이 사제직은 세례를 받은 모든 신자가 부여받은 왕다운 사제직이다. 우리는 봉사와 사랑, 희생을 통해 자신의 하루를 제물로 드리는 사제적 존재이다. 예수님은 단지 길을 보여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길 자체이시다. 진리와 생명이신 분이기에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 되신다. 그분과 믿음으로 결합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 드리는 살아 있는 제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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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을 걷는 이>
요한 14,1-12 (아버지께 가는 길)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길을 걷는 이>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길이 부르시니
길을 따라
길을 걷는 이
부르시는
길에게
길을 묻지 않으니
길이 부르시니
길을 따라
길을 걷는 이
부르시는
길과 함께
이미 길이기 때문입니다
길이 부르시니
길을 따라
길을 걷는 이
부르시는
길에게
그 끝을 묻지 않으니
길이 부르시니
길을 따라
길을 걷는 이
부르시는
길과 함께
늘 거기 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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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생명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시고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도 가르쳐 주신다. 이 시간 주님을 차지하는 은총이 함께하길 기도한다.
성가 34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를 불러보자.
주님은 내가 걸어가는 삶의 길인가? 하느님 아버지께 다다르는 천상 행복의 방법을 예수님에게서 찾는가?
주님이 걸으신 길, 십자가의 길, 그 희생의 길이 남이 걸어야 할 길이 아니라 내가 걸어야 할 길이 되길 희망한다. 이웃을 사랑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며 당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셨던 예수님,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길이 나의 길임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고 하셨다. 아버지와의 만남을 이루는 방법은 예수님을 통할 수밖에 없다. 그분은 우리의 중개자이시다.
주님은 진리 같은 분, 진리와 비슷한 분이 아니라 진리 자체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고(요한 17,17),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다.(요한 1,14) 그렇다면 그분의 말씀도 진리다. 믿는다면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라야 한다. 진리라고 하면서 왜 따르지 않는가? 아마도 지금 당장은 화려하지 않고, 다른 것이 더 매력적이고 마음을 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가 아닌, 거짓이라면 그것은 영원할 수가 없다. 진리는 영원하다.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다. 다수결에 의해 변할 것 같으면 진리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깨우치는 진리, 사람이 알아야 하는 진리다. 또한 아버지를 알려주는 계시자로서 진리이시다.
주님은 생명이시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다. 주님을 차지하면 곧 영생을 얻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계시하고 그 진리를 믿음으로써 받아들여 실현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한 17,3).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삶으로 바뀌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곧 그 삶이 영원한 생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생명이시다. 사실 영생은 예수님과 함께 지금 여기서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 오늘 영생을 살아야 한다.
길을 걷다 보면 공사장이 많이 있다. 그곳에는 보통 푯말이 붙게 된다. “공사 중! 통행에 불편을 들여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런데 흔히 보게 되는 이 푯말 밑에는 낙서가 쓰여있다. 뭐라고 쓰여 있을까?
“잘 알면서 왜 그래.”
불편을 주는 걸 알면서 왜 그러냐고?
인생 여정에서 잘 알지만 생각처럼 안 되는 것이 참 많다. 그야말로 선한 결심을 해도 작심삼일이고 마음이 흔들비쭉이다. 어떤 이는 성격의 문제로, 인간관계의 문제로 인하여, 그리고 질병이나 경제적인 문제로, 술, 도박 등 잘못된 습관으로 인하여 고민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좋은 것 같은데 속을 보면 누구나 자기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들을 한 가지 이상은 가지고 있다. 그러한 문제들로 좌절하고 낙담하며 슬퍼하고 힘에 겨워한다. 그러나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그런 문제들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며 우리를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기회가 된다.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면 주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는 은총이 된다.
자신의 지혜와 삶의 방법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게 되면 놀랍게도 주님은 우리의 힘이 되신다.
우리가 약할 때 오히려 주님은 우리의 능력이 되어 주신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주님을 믿고 믿는 대로 행하게 되면 “주님의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된다.”(요한 14,12)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 여정은 모두 공사 중이다.
잘 알지만 안 되는 것들을 고치는 중이다. 아무쪼록 그 공사가 마무리될 때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우뚝 설 수 있길 희망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하나 되어 아버지 집에 거처할 수 있는 기쁨을 차지하길 바란다.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을 통하여 진리요, 생명을 만나길 기도하며 최민순 신부님의 ‘오늘 나의 길에서’ 라는 글로 정리한다.
“주여 오늘의 나의 길에서 험한 산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고갯길을 올라가도록 힘을 주소서. 내가 가는 길에 부딪히는 돌이 저절로 굴러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넘어지게 하는 돌을 오히려 발판으로 만들어 가게 하소서. 넓은 길 편편한 길 그런 길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좁고 험한 길이라도 주와 함께 가도록 더욱 깊은 믿음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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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7세기 영국에서 여왕이나 궁정 사람들은 차를 즐겨 마셨습니다. 차 마시는 것은 고상해 보였고, 품위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한 세기가 지난 18세기에는 어떤 사람이 차를 많이 마셨을까요? 여전히 여왕이나 궁정 사람들이 마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이 시기의 임금 노동자들의 양식이 ‘차’였다고 합니다. 노동자들은 잠을 깨우기 위해 차를 마셨고, 곧바로 일터로 가야만 했습니다. 즉, 밥을 챙겨 먹을 시간이 없어서 차를 마셨던 것입니다. 차를 끓여 마시는 것이 빵을 굽거나 수프 만드는 것보다 시간이 적게 들었고, 또 돈도 적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시대에 따라 다른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귀하다고 하는 것도 얼마 후에는 쓸모없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순간의 만족을 위한 삶을 지향하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영원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중요했고,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는 삶이 중요했습니다. 이런 삶이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도 귀하고 중요합니다. 특히 이 세상 삶을 마치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가 되기에 더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당신을 배신하는 제자가 있다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요한 13장 참조)을 듣고 마음이 산란해지지요. 그런데도 토마스는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라면서 세상의 방식으로 물어보고, 필립보는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라면서 눈에 보이는 기적을 요구합니다. 3년 동안 함께 했는데도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에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그런데도 인내심 있게 가르치시면서 당신을 통해 하느님을 바라보도록 시선을 교정해 주십니다.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요즘 사람들은 운전할 때 대부분 내비게이션을 이용합니다. 이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적으면, 다양한 경로가 나옵니다. 추천 길, 빠른 길, 짧은 길, 무료 길 등의 경로가 나와서 직접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진리요 생명으로 가는 길은 단 하나의 길, 유일한 길입니다. 이렇게도 갈 수 있고, 저렇게도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고,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만이 진리이며 생명인 하느님 나라에 제대로 갈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주님을 믿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레스티나 지역에서만 활동하셨지만, 이제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서 성령을 보내주시면, 제자들은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해서 땅끝까지 주님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할까요?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세상의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영원한 만족을 위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사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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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인생은 나그네 길’(Homo viator)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길을 걷는 이에게 우선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가야 할 곳으로 가고 있는가?’ 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엉뚱한 곳에 가 닿는다면, 애초에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가야할 곳으로 간다할지라도 갈 수 있는 길을 모른다면, 가야할 곳에 도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구와 함께 가느냐?’는 참으로 중요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주시고, 무엇이 ‘참된 삶’인지를 깨우쳐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교회에서 일곱 부제를 뽑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가는 ‘믿음의 길’을 제시해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믿고 주님께 나아가는 이들’, 곧 그분의 소유가 되는 백성에 대해 말해줍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 하신 <고별사>중 일부입니다. 곧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는 ‘유언 말씀’입니다. ‘유언’이란 남는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가장 귀중한 가르침이라는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그러니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과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겠다.”(요한 14,2-3)
이는 당신이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 ‘그곳이 어떠한 지’, 그리고 ‘그곳을 왜 가시는지’를 밝히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먼저 ‘아버지 집’ 가시어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시고, 그것은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이 세상이 ‘나그네살이’이지만, 궁극에서 ‘이별이란 없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벅찬 ‘유언 말씀’입니다.
여기서, “거처”(μονη)는 ‘마련해(정해진) 둔’, ‘예비 된’이란 의미로, <요한묵시록>에서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21,2)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그분과 함께 거처할 자리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말씀하신 ‘시노달리따스의 실행의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분명 우리는 ‘길 위에 있는 교회’(ecclesia viatrix)입니다. 그리고 ‘함께 걷는 길’의 ‘여정’을 갑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와 필립보에게 알려주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았으면서도 보지 못함은 ‘믿지 않은’ 까닭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그렇습니다. 참으로 믿음이 ‘길’입니다. ‘길’은 진리를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믿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참된 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사실, 당신께서 “길”이라는 이 말씀은 황당하고 당혹스런 발언이요, 혁명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길”의 표상은 본디 이집트 탈출의 상징이요, 해방의 길을 표상했고, 점차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영원한 보상을 위해 제시하는 삶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율법”에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길”의 의미가 ‘율법’에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신이 “진리”(áληθεια)라 함은 원어의 뜻이 ‘감추어진 보물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듯이, 당신이 성부를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생명”이라 함은 당신께서는 단순히 구원에 인도하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체가 구원의 원천인 살아있는 ‘생명’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인격적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증언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진리를 알고자 하면서도, 막상 그 진리를 따르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그 진리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버리는 데는 ‘믿음’이 따릅니다. 그렇게 믿는 바를 따라 몸소 살 때라야 ‘자유’는 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는 알게 될 때가 아니라, 그 ‘진리를 믿음으로 따를 때’ 자유롭게 됩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하는 일 안에서, 당신의 진리가 이루어지도록 그 일을 믿음으로 실행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생명, 당신의 자유를 얻어 누리게 하소서. 저의 길이신 주님! 당신께서 길이 되어 제 발 아래에 밟혀가며 저를 이끄셨듯이, 저 역시 형제들 발아래 기꺼이 밟히는 길이 되게 하소서! 저의 생명이신 주님! 당신께서는 제 이빨에 씹혀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 역시 형제들에게 씹혀 부서지는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저의 진리이신 주님! 당신께서는 제 주장에 밀려 옳고도 져주셨듯이, 저 역시 형제들에게 밀려 저를 태워 진리의 빚을 밝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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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요한 14,9)
주님!
당신은 저를 용서하셨지만, 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희망했지만, 저는 절망했습니다.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하소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희망하게 하소서.
함께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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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