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2장, 20-33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밀알

(17:18~끝)

밀알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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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0-33
20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21 그들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22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가서 말씀드리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27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29 그곳에 서 있다가 이 소리를 들은 군중은 천둥이 울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사가 저분에게 말하였다.” 하는 이들도 있었다. 3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 소리는 내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내린 것이다. 31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32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33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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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다 보면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강의에 들어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한 학기의 여정을 함께해 주고, 부족한 강의를 열정적으로 들어 준 이들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한 학기를 총정리하고 요약하면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도 배운 것을 실천하며 살아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당부합니다. 이렇게 마지막 시간에는 감사와 정리와 간절함을 담아 준비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도 마지막을 준비하십니다. 당신께서 돌아가실 때가 가까워짐을 아시고 이제까지 걸어오셨던 당신의 삶을 정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삶이 당신의 죽음으로 완성될 것임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당신께서 이야기하시고 살아오셨던 복음의 삶이 이루어질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삶처럼, 앞으로 일어날 수난과 죽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사람들에게 당부하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도 그 죽음을 두려워하십니다. 그 죽음의 길을 피해 가고 싶으십니다. 그러나 그 희생이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포기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묵묵히 그 두려움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두렵습니다. 예수님처럼 죽음과 두려움의 길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걷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일이고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이며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과 우리가 하나 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어떤 길 위에 서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셨던 그 길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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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예수님의 죽음은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죽음임을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날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느끼며 살고 있는지, 예수님의 은혜에 어떻게 감사하며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목숨을 미워하다”는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 해보고 진정한 하늘의 가치를 위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아직 못하고 있다면 하늘의 가치를 위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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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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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 예수님을 찾아온 그리스 사람들은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며 예루살렘 순례의 여정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좀 더 알고 싶어서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 사도에게 부탁합니다. 그들을 만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소중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 높이 들려 돌아가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모든 이의 구원을 이루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수난의 때는 영광의 때가 됩니다. 하늘의 천사도 이를 보증하며 알려 줍니다. 이 세상의 죄악이 심판을 받으며 악의 우두머리가 쫓겨날 때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가슴에 생명과 사랑의 법, 용서의 법을 새겨 주시는 때가 된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누어지는 사람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생명을 전해 주려고 헌신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사람의 삶은 자신의 전 인생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봉헌하는 길에 머뭅니다. 우리는 날마다 희생의 씨앗을 주님의 포도밭에 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예수님을 섬기며 그분을 닮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류한영 베드로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3799
3월17일[사순 제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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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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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nUQw-x0RLM?si=z3N1g75OivamUVlu
[인천교구 이학노 요셉 몬시뇰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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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운명은 곧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유다인들의 대축제이자 큰 명절이었던 과월절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3년여 에 걸친 공적 활동을 마무리 지으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수난-죽음-영광의 때’가 이르렀음을 아신 예수님의 머릿속은 백 가지 생각이 교차되며, 무척이나 산란했을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당신만을 위해 기획되고 준비된, 끔찍하고 처절한 수난과 죽음의 독무대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을까요?

그러나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세상과 인류의 구원이라는 큰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단 한 발자국도 회피하거나 물러설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또한 잘 알고 있으셨으니, 얼마나 마음이 심란했을까요?

뿐만아니라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단과 당신의 사랑하는 양떼를 남겨두고 떠나셔야 한다는 생각에, 얼마나 걱정이 앞섰을까요? 참으로 두렵고 찹찹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애써 부정적인 감정들을 떨치십니다. 호의적이지 않은 모든 상황들을 모두 아버지께 맡겨드리며, 일반 군중들을 위한 마지막 강연을 펼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이제 지상에서의 과제를 120펴센트 완수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남아 있는 마지막 관문인 수난과 죽음의 길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남기시는 말씀의 핵심 키워드는 ‘밀알 하나’였습니다.

내어놓음이나 희생, 변화나 쇄신, 결국 죽음을 거부하는 밀알은 언제까지나 그저 한 알 밀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기꺼이 자아를 포기하고 길을 떠날 때,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성장과 변화, 열매와 발전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이비 교주들이나 이단자들이 크게 강조하는 바가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고통을 건너뛰는 행복입니다. 희생이나 헌신없는 성공입니다. 말도 안되는 기적의 연출입니다. 십자가 길 대신 꽃길 보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수난과 죽음은 필수라고 강조하십니다. 두렵고 떨렸지만, 점점 다가오는 죽음을 용감하게 수용하십니다. 내적인 갈등이 커질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께 의탁하며, 언젠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드러날 아버지의 영광을 꿈꾸며, 얼마 남아있지 않은 당신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가십니다.

제자인 우리들 역시, 스승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열심히 따라 걸어가야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 배에 승선한 운명 공동체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운명은 곧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우리도 두려움을 떨치고 그분께서 선택하신 수난과 죽음의 길, 그러나 영광의 길을 기꺼이 선택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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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5QWuIgBIK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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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어차피 목숨을 담보로 한 투자임을 알면 인생이 단순해진다>

‘한국 교회사 열전’에 따르면, 정 쁘로다시오는 개성의 명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내려와 신분을 감추고 새끼 꼬는 일을 하면서 미천하게 살았습니다. 30세경에 입교하여 부인과 함께 홍살문 근처에서 성사를 보기 위해 서울로 모여드는 교우들을 돌보았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타인의 밀고로 부인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형벌과 형관의 감언이설로 배교하여 석방되었지만, 바로 후회하고 뉘우치며 다시 형조에 달려가 배교를 취소하고 죽기를 청합니다. 형조의 문지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굽히지 않고 형조판서가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계속 조르는 바람에 결국 41세의 나이로 순교합니다.

가끔 이런 순교자들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죽고 싶어서, 죽기 위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주식 시장에서 수익에 확실한 때에 돈을 빌려 가면서까지 투자하려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은 밀알 하나로 상징되는 당신 목숨을 더 많은 생명을 얻기 위해 투자하셨습니다. 그 투자처는 아버지였습니다. 투자 방식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끊임없는 투자자임을 증명합니다. 유튜브에서 보니 자기가 키운 하마에게 물려 죽은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하마를 자신이 키웠으니 하마가 자기를 물지는 않으리라고 믿었습니다. 또 다른 것에서 보니 개가 호랑이 새끼들을 젖 먹여 키웠는데 그 호랑이들이 커서 어미 개를 지켜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개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개가 되었습니다. 자기 주위에 호랑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투자하지 않고 가만히 두면 어떨까요? 썩습니다. 결국 인간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습니다. 그냥 놔두는 것도 일종의 투자입니다.

영화 ‘인투 더 와일드’(2007)는 맥캔들리스라는 실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무엇이든 잘해야 한다는 부모의 기대에 지쳐있었습니다. 사실 그는 아버지의 외도로 생기게 된 아들입니다. 그는 대학까지 졸업해 가진 돈 모두를 기부하고 자유를 찾아 미국을 횡단하여 알래스카까지 갑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그의 목적지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은 그에게 자유였습니다. 그러나 알래스카에 갇혀 “행복은 함께 나눌 때만 현실이 된다.”라는 글을 남기고 버스 안에서 외로이 생을 마감합니다.

맥캔들리스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유로워지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자유는 없었습니다. 외롭기만 했고 관계를 위해서는 일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투자해야 하는 운명에 놓여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인생이 쉬워집니다. 나의 밀알을 사랑이라는 땅에 묻어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투자는 언제나 손실이 날까 두렵게 합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액을 한꺼번에 투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당신을 위해 버린 것의 100배를 받고 죽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먼저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청년 레지오를 하며 봉사하지 않았다면 사랑에서 오는 생명력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제가 되고 온전히 생을 봉헌하기를 결심하기까지 우리는 충분히 시험해 볼 기회가 있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투자라고 생각하고 내가 투자하는 생명에 가장 많은 열매가 맺히게 하는 대상에 투자합시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투자합니다. 투자법을 압니다. 어른이 되었다면 어디에 투자해야 할까요? 역시 아버지가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은 아드님이 당신을 위해 투자하게 함으로써 그 열매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제 우리 결단만 남았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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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FuQXzlYjMF4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사람의 아들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마르코 복음 10강, 제13장)
◇사람의 아들을 맞이할 때 반드시 일어날 일:
1. 성전의 파괴,
2. 거짓 예언자들의 등장,
3. 전쟁과 환난

구원될 사람이 하고 있을 일
4. 깨어 기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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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무라까미 하루키는 그의 소설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려있다.)”

축구 선수로서 해외에서 인정받고 많은 기록을 남긴 최초의 선수는 ‘차범근’입니다. 그는 ‘차붐’이라고 불리면서 유럽 축구에서도 인정받았습니다. 강인한 체력과 돌파력은 그의 강점이었습니다. 차범근 선수가 씨를 뿌린 유럽축구에 지금은 많은 한국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박지성 선수가 있었고, 손흥민, 김민재, 이강인 선수가 있습니다. 제가 미처 이름을 모르지만 더 많은 선수들이 유럽 축구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야구선수로서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인정받고 기록을 남긴 선수로는 ‘박찬호’ 선수가 있습니다. 박찬호 선수 덕분에 저도 90년대 중반에 미국 메이저 야구를 보았습니다. 미국의 강타자를 빠른 속도의 볼로 스트라이크 아웃을 시키는 모습은 자랑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뿌린 씨가 열매를 맺어 지금은 많은 한국 선수들이 활략하고 있습니다. 김병현 선수는 투수로서 메이저 리그에서 우승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추신수, 최희섭 선수도 있었고, 지금도 4명의 선수가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1998년입니다. 한국은 IMF의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전 국민이 좌절과 절망 속에 힘들어 하고 있을 때입니다. 미국의 LPGA 골프에서 한국 선수 박 세리는 아주 인상적인 장면을 보여 주며 우승하였습니다. 박세리 선수는 물가에 떨어진 볼을 치기 위해서 양말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힘차게 볼을 쳤고, 그 볼로 인해서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 장면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우리 국민은 위로를 받았고,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 뒤로 박세리 선수는 많은 우승을 하였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박세리 선수가 뿌린 씨는 수많은 박세리 ‘키즈’를 키워냈습니다. 한 때는 한국 여자 골프 선수들이 우승한 골프 대회가 절반을 넘었습니다. 명실상부 한국 여자 골프는 세계 골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최나연, 유소연, 리디아 고, 박인비 선수들이 활약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선수들이 LPGA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골프를 잘 모르는 제가 이 정도를 아는 것은 그 선수들의 실력이 LPGA에서도 알아 줄 만큼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생소한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기까지 선수들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눈물로 씨를 뿌렸기에 기쁨으로 곡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서울대교구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는 학생들과 면담을 하면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신학교에 들어가려고 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이태석 신부님’을 이야기했습니다. 학생들은 어릴 때 이태석 신부님의 다큐 ‘울지마 톤즈’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 영상을 보면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나도 저런 신부님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의사였고, 사제였던 이태석 신부님은 멀리 아프리카 수단으로 가서 선교하였습니다. 그곳 아이들에게 음악을 통해서 꿈과 희망을 키워주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을 방문하면서 그들의 일그러진 발에 맞추어 신발을 제작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열정을 다 한 후에 안타깝게도 40대의 나이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의 뜨거운 삶과 열정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사제가 되어서 신부님이 못 다한 꿈을 이루고 있습니다. 톤즈의 학생들은 신부님의 뒤를 이어서 의사가 되었고, 신부님처럼 사랑을 베풀고 있습니다.

꽃이 되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알의 씨앗이 되어 어두운 땅에서 썩어가는 것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일입니다. 신앙은 꽃이 되기보다는 먼저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좋아하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언제나 잠시뿐, 돌아서고 나면 험난한 구비가 다시 펼쳐져 있는 이 인생의 길./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할 때/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거릴 때/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나는 더욱 소망한다./ 그것들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화사한 꽃밭을 일구어 낼 수 있기를/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도 씨앗이 되었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흘린 땀과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는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친교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씨앗이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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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2,20-33: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의 전례는 파스카에 대해 고통스러우면서도 기쁨에 찬 묵상을 요구하는 사순절의 근본적인 주제들이 들어있다. 낮춤의 신비보다 고양의 신비로 제시되는 십자가 신비와 자아 포기와 성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을 따르라는 권고,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 앞에 우리의 선택에 따라 나타나는 구원과 단죄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시는 사랑의 결정적인 선물인 새로운 계약 등이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하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실 새 계약으로 결정적이고 절대 깨지지 않을 계약이라고 한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생애의 마지막 파스카를 지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계시다. 그것을 보고 그리스인들이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21절) 한다. 여기서 본다는 동사는 예수님을 그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루살렘 입성 때 군중이 알아차리지 못한 그 비밀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향한 독백처럼 말씀하심으로써 그분의 신비스러운 점을 드러내셔서 그리스인들의 갈망을 채워주신다. 예수님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죽어야 하는 한 알의 밀알처럼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우리 삶의 신비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노력이다. 여기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생명을 버린다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만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구원을 전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위한 헌신에의 초대를 말하는 것이지 죽기 위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풍요한 결실 능력을 확장하기 위한 밀알의 죽음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 때, 그리스도께는 최대의 영광이 돌아온다. 그리스도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우선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더욱더 큰 사랑을 표명하는 것이며, 또 이러한 행위가 인간을 구원하고 이끌어줄 능력을 갖추기 때문이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32절)

그리스도를 뵙고자 했던 그리스인들은 구원으로 이끌려 들어오는 이방인의 세계를 나타내는 첫 번째 표현이다. 십자가는 이미 그리스도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 우리는 지난 주일의 복음의 높이 들린다는 말을 만난다. 바로 주님의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고통을 통해서 얻은 영광을 의미하였다. 특히 요한복음에 있어서는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이 되기 전에 이미 높이 들리심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높이 들림이라는 사실이 십자가의 죽음에 있어 예수님의 공포와 거부감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한다. 그래서 그 무서운 상황 앞에 두려움과 마음의 동요를 표현하고 계시다. 그래서 성부께 기도하시면서 당신이 느끼시는 괴로운 긴장감을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함으로써 마음의 분열을 극복하고 이 세상의 역사를 위한 그 결정적 순간의 주인공이 되신다. 그리고는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28절) 기도하신다. 즉, 당신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기도하신다. “내가 이미 내 영광을 드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28절) 아버지의 계시는 예수님의 전 생애에 의미를 부여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확인이다. 즉, 예수님의 지나온 생애, 죽음을 감수해야 할 생애, 부활을 통해 더욱 빛나게 될 생애를 말한다. 이 모든 일을 통해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세상에 대한 심판이 내려진다. 지난주일 복음에서 이미 빛이시며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심판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이 내려지는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신다. 그분을 죽이는 것은 빛을 거스르는 결정적인 죄였다. 이렇게 빛을 거부하고 단죄를 받는 것은 사랑을 주고받을 능력이 없는 것에 대한 심판이다. 우리는 예수님께 자신을 충실히 내맡기고, 그분 사랑의 선물에 우리 자신을 개방하여야 한다. 사탄에 대한 승리는 결정적으로 여기서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에 항상 자유롭게 순종할 수 있는 내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께 일어났던 것처럼 육체적인 정신적인 고통을 수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 예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십자가의 고통 앞에 큰 소리와 눈물로써 기도하고 간구하셨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서 구해주지는 않으셨지만, 그분에게 십자가를 지워야 했던 당신의 뜻을 이룰 능력을 주심으로써 그의 간구를 들어주셨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그 계약을 깨지 않고 무한한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완성하셨다.

예수님의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순명은 당신 자신이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이 됨을 알 수 있다. 그 영광은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심으로써 나타난 것이다. 그 사랑의 결과로 세상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예수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들과 영원히 결합하셨기에 인간은 그분께 결정적인 사랑의 응답을 드려야 한다. 이 결합에 사랑이 없다면 다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분께 결합할 수 없을 것이다. 사순절의 여정은 우리를 하느님과의 만남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여정이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의 사랑 안에서 새로 태어남이 가능하고, 부활을 지내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매 순간 그분에게 사랑의 응답을 드리려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자기를 끊는 아픔을 이겨내도록 주님께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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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바랐을 소망을, 오늘 복음은 그리스 사람들의 입으로 고백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동문서답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은 매우 정확한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뵙고 그분을 알고 싶다면 죽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건너가는 참된 파스카를 이해하여야만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씨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열매를 맺습니다. ‘생명’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으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설의 신비가 온전히 드러난 장소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은 뒤 다시 열매를 맺듯, 십자가의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가는 파스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마지막에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당신을 뵙게 하여 달라는 이방인들의 요청에, ‘땅에서 올려진 십자가’야말로 가장 정확히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장소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뵙고 싶다면, 십자가를 바라보면 됩니다.

사랑이 완전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에게 완전함을 요구하면, 그 자체로 억압이고 폭력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은 서로를 고통스럽게 하지요. 그러나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그 고통스러운 계획이 이제 시작되려고 합니다. 십자가야말로 죽음으로 사랑을 드러내는 완전한 사랑의 장소요 그 약속(계약)의 장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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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4-26)

‘밀알 하나를 땅에 심는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뜻하고, ‘많은 열매’는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뜻합니다. <구원에 대해서 관심이 없거나 복음을 안 믿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일은 많은 열매를 얻으려고 밀알 하나를 심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밀알을 땅에 심는 일’은 그 밀알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만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이고, 밀알은 땅 속에서도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는 밀알에서만 싹이 나오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만 죽음으로 보이는 일이었을 뿐이고, 실제로는 부활로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사도 2,23-24)

“(다윗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며 ‘그분은 저승에 버려지지 않으시고, 그분의 육신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사도 2,31-32)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아침에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을 때, 천사들은 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5-6)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허망하게 돌아가신 그 예수님이 아니라, 그렇게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 또 부활하셔서 늘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뵙고 싶다면 십자가를 바라보면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우리는 우리 안에서, 또는 우리 삶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특히 이웃 안에서, 또 이웃과 나누는 사랑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신앙생활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부활, 생명, 구원이 신앙생활의 목적지이고, 십자가는 그 목적지까지 가는 방법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십자가에서 비롯된 신앙이 아니라 부활에서 비롯된 신앙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우리를 살리려고(구원하려고) 당신 자신이 하나의 밀알이 되신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은 분명히 ‘희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살려고(구원받으려고) 스스로 밀알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희생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희생이란 남을 위한 일입니다. 나의 십자가는 내가 살자고 나 자신이 스스로 지는 것이기 때문에 희생이 아니고, 살고 싶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이고 허무한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것들을 버리는 일은 희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누구나 해야 하는 노력입니다.

<운동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싶어서
열심히 운동하는 것을 희생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1코린 9,25)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2티모 4,7-8) 바오로 사도처럼 ‘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렸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신앙인은 복된 사람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라는 말씀은,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가지려고 욕심을 부렸던 그것들과 함께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은 “누구든지 내가 주는 구원을 얻으려면”이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입니다. 예수님을 섬긴다는 말은 예수님만을 주님으로 섬긴다는 뜻이고, 예수님만을 주님으로 섬긴다는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진리로 믿고 받아들여서 실천하는 인생을 산다는 뜻입니다.

‘내가 있는 곳’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그를 영예롭게 해 주실 것이다.”, 즉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고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해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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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최기홍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자기 자신에 대해 죽는다는 것의 의미>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래도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죽음. 이 묵직한 말은 대부분 사람에게 그렇게 반갑게 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이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죽음은 이 세상에서 다음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때가 하느님의 뜻과 일치할 때 이것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에 온전히 합일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말씀은 죽음의 또 다른 차원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그 잠재력에 도달할 수 있는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 자연스러운 행위로 한 알의 밀알은 비옥한 땅에 심어지고 자라서 좋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연스러운 행위’ 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이것은 자아에 대한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좋은 토양에 심어져 좋은 열매를 많이 맺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삶에서 모든 이기심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선 의지가 담긴 모든 이기심을 버려야 하지만, 그다음에는 의도하지 않은 이기심도 버려야 합니다. 여기서 의도하지 않은 이기심은 단순히 자신이 원하기 때문에 붙잡고 집착하는 삶의 모든 것입니다.

때론 사랑이 넘치는 관계와 같은 좋은 것들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랑의 관계와 같은 인생에서 좋은 것들을 없애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동기로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좋은 것까지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께서 영감을 주신 참된 사랑일 때, 언제나 집착하지 않으면서 초연하고 사심이 없으며, 자기중심이 아니라 오직 상대방의 선익만을 바라봅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자아의 죽음입니다.

이러한 수준의 사랑 곧 완전히 사심이 없는 타자 지향적인 사랑의 삶을 살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으로 그리고 삶의 각 상황 속으로 들어오시어 수많은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신에 대해 온전히 죽음으로써 하느님께서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시켜 주신 밀알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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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임남용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의 삶>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땅에 떨어진 씨앗이라고 다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씨앗들 중에 제대로 잘 죽은 씨앗만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어떤 씨앗은 몇 년이 지나도록 땅 속에 묻혀 있기도 하고, 어떤 씨앗은 죽기는 죽지만 그저 썩으면서 죽습니다. 그런 씨앗들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네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죽어야 합니다. 내 안에서 꿈틀대는 욕심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분노 등 내 영혼을 썩게 만드는 십자가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러한 어두운 감정들을 진정 잘 죽여 내어야 영혼이 순백의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그러한 감정들을 죽여 내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그러한 것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납니다. 아직 진정으로 죽여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완성은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못 박은 이들을 보며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3,34)라고 청하며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겼을 때 완성된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그러한 십자가도 그저 지고 가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매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완전히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나의 십자가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데에만 힘을 쏟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씨앗이 땅에 떨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이제 그 떨어진 씨앗을 잘 죽여내야 합니다. 십자가에 내가 매달리고 나를 죽여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나 또한 주님 십자가의 완성에 동참하고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은 사순시기 내게 주어진 십자가에 매달리고 잘 죽여 내는 시간들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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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명선 사도 요한 신부님]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만나면 고뇌와 절망에 쌓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심지어 세상까지 외면하려 합니다. 나약한 자신의 모습 안에서 자괴감에 쌓여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곤란을 겪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극도의 상황에 처하자 인간적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려주십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어 겪으시는 고통을 이렇게 보여주십니다.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요한 12,27)라는 말씀을 통해 당신의 고뇌와 해결책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극심한 고통을 회피하고 싶은 인간적인 모습에 머무르지만 당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어야 할 구원의 길을 보여주기 위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때’를 놓치지 않고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습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놓음이 어떤 의미인지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라는 말씀으로 설명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 싹을 틔우고 자라나 많은 수확을 얻듯이 당신의 십자가상 죽음으로 인류가 얻게 되는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물질만능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은 자신에게 해가 되거나 상처가 되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희생과 섬김의 삶은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섬김과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세상을 구원하고자 오셨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섬기러 오신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는 기꺼이 다른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으로 자신을 내어주고, 봉사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며 그들의 어려움과 고통에 동참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임을 보여주십니다. 당신이 보여주신 섬김을 실천하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때 영원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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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여인은 칸트가 청혼해 주길 원했지만, 칸트는 데이트 때마다 철학적인 이야기만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먼저 칸트에게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저와 결혼해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칸트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뒤, 도서관에 가서 사랑과 결혼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혼해야 하는 이유 354개, 결혼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 350개를 찾았습니다. 이제 결정했습니다. 결혼해야 하는 이유가 4개 더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칸트는 결혼하지 못했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연구 후에 청혼하러 여자의 집에 갔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 딸은 이미 결혼했네. 아이가 둘이나 있지. 그동안 자네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나?”

결혼의 장단점을 생각하는 동안 3년이나 흐른 것입니다.

심사숙고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미루기만 하는 것은 큰 후회를 남길 뿐입니다. 특히 사랑이 그렇습니다. 사랑은 먼 훗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겠다. 사랑하겠다.”라며 뒤로 미루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 사랑한다.”라며 지금 당장 말하고 또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사랑은 미뤄지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지금 사랑해야 함을 주님께 배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계약을 맺으시려고 돌아가실 때가 되었으며,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해 드릴 순간이 다가왔음을 말씀하십니다. 그 순간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겪는 하나의 사건이 아닌, 이 세상의 삶을 모두 거는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구원을 위한 사랑 때문에 또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높이는 사랑을 위해 지금 당장 결심하시고 이행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당신 사랑으로 많은 열매가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라고 고백하듯이, 주님의 사랑이 모든 구원이 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은 어떠해야 할까요?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지금 곧바로 실천할 수 있는 적극적인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미루는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남의 사랑을 먼저 받아야 나도 실천하겠다는 이기적인 사랑도 금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듯이, 어떤 조건도 없이 베풀 수 있는 사랑만이 예수님을 온전하게 따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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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밀알 하나>

요한 12,20-33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찾다. 사람의 아들은 들어 올려져야 한다)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그들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가서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 서 있다가 이 소리를 들은 군중은 천둥이 울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사가 저분에게 말하였다.” 하는 이들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 소리는 내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내린 것이다.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 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밀알 하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밀알 하나
땅에 떨어져
죽습니다

마침내 맺을
많은 열매

믿고
바라고
사랑하기에

그 열매 가운데
단 하나라도

비록 제 품에
담을 수는
없지만

밀알 하나
기꺼이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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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 사람, 바로 내가 중요하다>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시간 구원으로 초대받은 우리의 축복된 삶을 감사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루의 일상을 보내면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뿐 아니라 하느님께도 말입니다.

사실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숨을 쉬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을 때 감사의 표현을 구체적으로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당신 생명을 나누어 줄 것이라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밀알이‘땅에 떨어져 죽는 것’은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을 낳기 위해 뿌리내림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위의 죽음은 열매를 맺는, 새로운 생명을 위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아버지 하느님 안에 온전히 묻히신 결과입니다. 사실 씨앗도 온전히 묻히지 않으면 새에게 쪼아 먹히든 햇볕에 타버리든, 길바닥에서 밟혀 으깨어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안에 온전히 죽어서 마침내 부활의 영광을 통해 그 죽음이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사랑이요, 부활은 그 사랑의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죽음을 통해 생명을 살리는 신비를 머리로는 헤아리기 힘들지만, 신앙 선조들의 열정과 사랑을 통해, 순교 신앙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세상에 생명을 주는 모범을 이어가는 신앙인이 되길 기도합니다.

지금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한 알의 밀알이 될 때입니다. 사랑의 승리를 위해 투신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일상 안에서 밀알이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상대를 위해 배려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부자간에 이웃 간에 공동체의 구성원 간에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을 절제하고 상대의 삶과 생명을 거룩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미사참례 하실 때 앞자리부터 앉아주시면 늦게 오시는 분이 덜 미안합니다. 늦는 사람이 매일 늦기도 하지만 그래도 주님과 함께하시려 부랴부랴 오시는데… 어떤 사정이 있어서 늦기도 하는데…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아봐요… 이것도 배려입니다.

그러나 그 배려와 존중이 온전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그것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베품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17,10)하는 것입니다.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성 프란치스코)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정도 했으면 됐지 뭐’, 또는 ‘이렇게 해줬는데 너는 나에게 해 준 게 뭐 있니?’ ‘너도 이만큼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하는 마음이 든다면 온전히 묻혔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랑 자체가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밀알이 되어 썩는다는 것은 또한 ‘내가 먼저 미안해’하는 것입니다. ‘염소 두 마리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났습니다. “너 비켜”, “안돼, 네가 비켜”하며 한참을 옥신각신하다가 한 마리가 말했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나도 생각이 있어”. 그러자 다른 한 마리가 놀라서 물었어요. “무슨 생각?” “여기서 늙어 죽을 생각이야.”(이규경)

이렇게 고집을 피우는 것을 뭐라 하죠? “똥고집!” 살아가면서 서로 다른 의견과 생각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내 뜻을 관철하려고 엉뚱한 고집을 피우면 서로가 피곤하고 힘이 듭니다. “네가 언제까지 그러고 있나 보자” 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야말로 ‘지옥’입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미안해’ 한다면 그것이 밀알처럼 썩는 것이고 그래야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곳이 천국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까롤로 까레또)

서로 자기의 이익에 매달리는 오늘날, 밀알이 되어 썩는 이가 없다면 사회는 점점 더 각박해지고 힘들어질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들이 스스로가 밀알이 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하는 삶을 추구한다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의 주장만으로 온 가족을 휘두르고 싶어 하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야 하느냐고 불평하며, 자녀들은 무조건 요구만 하고 서로 양보하지 않는다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정에도 이 세상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세상이 악한 기운, 이기심, 두려움에 지배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인류에게 주님은 용서와 화해, 희망을 가능케 하는 사랑을 선물로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가진다면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하는 마음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바위와 마주선 느낌이다’ (참으로 답답하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를 때 쓰는 표현)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큰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요한사도는 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밀알이 되어 썩고자 하는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귀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짊어지는 십자가는 귀찮고 번거로운 생고생이 아니라 주님과의 더 깊은 사랑에로 고양되는 축복의 초대”(홍승모)입니다.

아브라함은 멸망의 위기에 처한 소돔을 위하여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리고 롯의 구원을 이끌어 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순명으로 구세주를 잉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 한 사람의 순명, 한 사람이 짊어진 십자가를 통해 모든 이가 구원을 얻게 됩니다.

결국 밀알이 되어 썩는 나를 통해서 우리 이웃의 구원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의 손발을 구원의 도구로 써 주심을 감사합시다.

한 사람, 바로 내가 중요합니다. 그를 사랑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누구나 자기 좋은 것을 찾지 말고 남에게 좋은 것을 찾으십시오!(1코린 4,10) 남에게 좋은 일을 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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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새 계약의 예수님, 순종과 섬김의 예수님,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
“보고 배워 닮아갑시다!”

“들어라”만 중요한 말마디가 아니라, “보라” 역시 참 중요한 말마디입니다. 잘 들어라 있는 두 귀요, 잘 보라 있는 두 눈입니다. 무엇을 봐야 합니까? 믿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봐야 할 분은 예수님입니다. 모두가 눈여겨 잘 보라고 제대 뒤 중앙에 높이 걸려있는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

기후위기 시대에 생명 살림 운동에 전념하는 정성헌 선생의 귀띔 40가지중 맨먼저 나오는 충고가 “보고 싶은 사람이 돼라”입니다. 과연 보고 싶은 분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을 보고 싶어 하는 분은 있으십니까? 아마 제가 제일 많이 보는 분은 프란치스코 교황 얼굴일 것입니다. 날마다 교황님 홈페이지를 볼 때 마다 예수님을 뵙듯 만나는 교황님 얼굴입니다.

또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참 좋아하는 장면이 셋입니다. 자비의 집 숙소문을 열었을 때, 또 집무실문을 열었을 때 활짝 열려 한눈 가득 들어오는 하늘과 산 그리고 아름다운 수도원 전경에 마음도 환해지고 넓어지는 느낌입니다. 또 하나는 성전에서 공동전례기도시 한눈 가득 들어오는 늘 봐도 늘 새로운 형제들 얼굴입니다. 특히 지금도 자비의 집 숙소문을, 집무실 문을 활짝 열었을 때 전개되는 풍경과 더불어 생각나는 “당신이 그리울 때”라는 시가 있습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
당신이 보고 싶을 때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푸른 하늘, 흰구름, 빛나는 별들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그리운 당신, 보고 싶은 당신”-1998.11.22.

무려 26년전 1998년 여기서 썼던 시입니다. 물론 그리운 당신, 보고 싶은 당신이 상징하는 바, 하느님 얼굴, 예수님 얼굴입니다. 늘 곁에 있어도 늘 그립고 보고 싶은 주님 얼굴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시편 42장 앞부분 두 구절입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하느님을 그리나이다. 내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시편 42,2-3)

믿는 영혼들 누구나의 갈망이 이런 하느님의 얼굴을, 예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며 바로 이런 마음으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늘날 위기의 시대라 칭하며 혹자는 셋을 꼽습니다. “1.기후위기, 2.인공지능, 3.쓰레기”로 모두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합니다. 날로 예측 불가능하게 변화되는 기후요, 곳곳에 넘처나는 쓰레기들이요, 날로 들어나는 스마트폰 중독자들이 현재의 추세입니다.

스마트폰을 볼 것이 아니라, 특히 신자들은 하느님을 뵙듯, 예수님을 뵙듯, 눈을 들어 하늘을 자연을 무엇보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는 눈의 훈련이 참으로 절실한 시대입니다. 스마트폰을 볼수록 시력은 나빠질 것이고 예수님을 볼수록 시력은 좋아질 것입니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내가 형성됩니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깊이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 예루살렘 축제때 예배를 드리러 온 사람들 몇이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청합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 합니다.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정말 영성생활에 참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뵙는 것입니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깊이 전체를 꿰뚫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뵙는 것 역시 능력이요, 똑같은 눈이 아니라 영적 시력의 차이도 클 것입니다. 노화와 더불어 육안의 시력은 약해져도 영안(靈眼)의 시력은, 심안(心眼)의 시력은 날로 좋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날로 깊어지는 자비와 지혜, 온유와 겸손, 찬미와 감사의 영안(靈眼)이요, 이런 눈으로 평생 깊이 보고 배워 닮아가야 할 예수님입니다. 분별의 지혜도 이런 눈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이 예수님입니다.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평생 보고 배워 닮아가야 하는 예수님이요 날마다 예수님을 보고 배워 닮으라고 매일미사가 있습니다.

첫째, 새계약의 예수님을 보고 배워 닮아가야 합니다.
제1독서 예레미야서의 말씀이 참 고맙고 은혜롭습니다. 하느님은 신실하신 분이며 변함없이 당신 약속에 충실하십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한 새계약의 약속이 마침내 예수님을 실현되었습니다. 새계약의 이 은혜로운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계약을 맺겠다…내가 맺어줄 계약은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의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그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새계약은 예수님을 통해,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구원의 행복은 없습니다. 주님의 법은 우리 마음에 새겨지고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됨을 확인하는 새계약의 미사은총입니다.

둘째, 순종과 섬김의 예수님을 보고 배워 닮아가야 합니다.
값싼 구원은 없습니다. 값싼 새계약의 축복은 없습니다. 새계약이 실현되기까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뇌와 시련과 고난, 죽음과 부활의 일련의 과정을 깊이 들여다 봐야 합니다. 순종과 섬김으로 요약되는 히브리서의 예수님의 평생 삶의 묘사가 큰 깨우침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새삼 우리의 현세 삶은 고난을 겪음으로 순종을 배워가는 순종의 학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일상의 모든 고난을 순종을 배우는 계기로 삼을 때, 오히려 전화위복의 축복이요 주님을 닮아가는 영적성장과 성숙에 좋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어 요한복음은 우리 모두 예수님의 섬김의 삶을 배우도록 격려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완전히 죽어 무(無)로 없어지는 죽음이 아니라 내적변형을 이뤄주는 죽음입니다. 뿌리가 나고 싹이 트고 꽃이 피고 풍성한 열매의 수확이니 그대로 새생명의 부활 축복으로 이어지는 죽음입니다. 죽음의 상징하는바 섬김의 사랑, 섬김의 비움입니다. 주님은 섬김과 추종을 명쾌하게 요약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섬김과 추종이 하나입니다. 새삼 우리 삶은 예수님을 따라 닮아가는 순종의 여정이자, 섬김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순종과 섬김의 롤모델인 예수님을 보고 배워 따라 닮아가는 우리 삶의 여정이 참 자랑스럽고 영광스럽습니다.

셋째,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의 영광스런 예수님을 보고 배워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보고 배워 닮아가야 할 분은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바로 파스카의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자 기쁨이 되고 끊임없이 샘솟는 내적 활력의 원천이 됩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은 순종의 여정에 항구함으로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다음 예수님의 고백과 기도가 마음 깊이 와 닿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주님은 부활 영광의 승리로 끝나는 죽음임을 예고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단히 당신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으로 이끄시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님을 보고 배워 닮아가는 파스카의 여정에 항구하도록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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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길 떠나는 인생>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영원한 구원’, ‘영원한 생명’을 얘기합니다. 그러니 오늘 사순 제5주일은 ‘영원한 구원/생명을 얻는 길’이 주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의 길은 요한복음에서 아주 선명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에 예수님이라는 길을 따라가면 진리의 길을 가고 생명의 길을 가게 되기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저 김찬선을 따라오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제가 주님을 프란치스코나 성인들처럼 잘 따르는 사람이면 저를 따르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 되기에 저를 따라도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저를 따라오시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주님을 잘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 봐야 합니다. 어떤 것이 주님을 잘 따르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떠나야 길입니다. 떠나지 않는 길이란 없습니다.

문제는 길 떠나는 인생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황천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가기보다 이집트에서 사는 것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십계명 가운데서 제4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 지켜야 한다고 하신 다음, 모든 걸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자 따르지 않습니다.

그가 생각한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주님을 따라야 하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있던 곳을 떠나야 하며, 죽음이라는 강도 건너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홍해가 있었습니다. 홍해는 죽음의 강이기도 하고 생명의 강이기도 합니다. 이집트의 목숨은 잃고 가나안의 목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이 싫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이 싫습니다.

자기 부정이기 때문인데 그러나 자기 목숨을 미워함은
작은 자기는 부정하고 큰 자기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소아(小我)는 죽고 진아(眞我)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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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한 알의 밀알!>

오늘 복음(요한12,20-33)은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찾는 말씀’과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요한12,22)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는데, 그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있었던 이방인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12,25-26)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를 위해 죽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신앙인의 참모습’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요한12,27-28)

하느님의 뜻은 아들 예수가 십자 나무에 달리는 것이었고, 이 십자가 죽음을 통해 하느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서 간절하게 기도하십니다.

오늘 제2독서(히브5,7-9)는 ‘하느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과 그분을 믿고 따라가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5,8-9)

예수님처럼 나도 ‘너를 위해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됩시다!

“주님, 세상을 떠난 서석빈(바오로) 형제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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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xOAF0SU9V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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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열매에
새겨져 있는
밀알의
여정입니다.

죽어야만
맺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열매를 맺는
밀알이
진짜 밀알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생명의 길이
열리는
생명의
참된
순리입니다.

하느님과
멀어질수록
멀어지는
열매의
길입니다.

삶의 방향을
잡아주시는
생명의 말씀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생명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우리에게
심어주십니다.

하느님을 긍정하는
사람만이
하느님께 자신을
맡길 수 있습니다.

죽어야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죽어야
비로소
살아있음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죽어야 할
생명이
살아야 할
생명이 됩니다.

죽어야
부활하는
삶입니다.

땅이 밀알을
받아들이듯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할
부활의 삶입니다.

밀알을
많은 열매로
구원하듯
우리를
십자가로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믿는
뜻깊은 사순입니다.

열매의 길이
생명의 길이며
부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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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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