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복음18장 1_8절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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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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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많은 경우 예수님께서는 대조와 역설을 통하여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도 그러한데,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라는 핵심 내용을,
굳이 다른 설명이 없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불의한 재판관과 하느님이 서로 대비됩니다.

이 둘은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비유 속의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재판관에게 한 과부의 호소는 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과부는 끊임없이 재판관을 찾아가 졸라 댑니다. 그제야 재판관은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하고 마음먹습니다.

비록 귀찮음 때문이지만 계속 졸라 대는 과부의 청은 불의한 재판관마저도 마침내 올바른 판결을 내리게 만듭니다.
여기서 불의한 재판관과 선하고 자비하신 하느님 사이에 차이가 생겨납니다.

불의한 재판관조차 올바른 판결을 내리는데,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분께서는 “지체 없이 판결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이제 비유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인 과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바라는 과부의 간절함은 불의한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간절함이 있다면 하느님께서 분명 우리의 청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간절함으로 주님께 기도하고 청해야 하겠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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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내가 바라는 것을 얻어야 비로소 신뢰를 쌓는 인간관계와는 달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기준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보살피십니다. 내가 원하는 방법은 아니였지만 결과적으로 주님의 신뢰를 얻었던 경험을 이야기 해봅시다.

3) 순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증명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이 나라에서, 많은 특혜가 있는 이 곳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님에게 우리의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우리가 해야 할일은 하느님께서 이 땅의 불의함을 완전히 해결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실 예수님을 보내 주시기를 기도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불의는 어떤것이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같이 기도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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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대화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만큼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내가 기도하고 살 때 그분께서는 내게 응답해 주십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내가 바치는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거나 어떤 이유에서든 기도를 중단하는 것은, 내 지향이 순수하지 못하였거나, 기도의 대상인 하느님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 때문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끈질기게 공정한 재판을 청하는 한 과부의 청원을 들어주는 장면은 인상적입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아무리 불의한 재판관이라도, 끊임없이 매달리고 청하면 귀찮아서라도 그 진실을 밝혀 주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동기가 순수하지는 않지만, 그렇게라도 올바른 판단을 청하는 과부의 진심과 간절함을 비유로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를 가르쳐 주십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에 기초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얻어야 비로소 신뢰를 쌓는 인간관계와는 달리, 하느님께서는 우리 생각과 기준을 넘어 당신의 기준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보살피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성장은 때로 고되고 힘듭니다.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알고 따를 때 확신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올 때”, 곧 하느님을 마주 뵙게 될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하셨을까요. 오늘도 내가 바치는 기도가 하느님의 뜻을 깨닫게 해 달라는 기도로 바뀌면 좋겠습니다.

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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