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복음5장17_37절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과 달리,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산상설교 (5-7장)
1) 행복선언: 5, 1-16
2) 율범의 완성: 5, 17-37
3) 새로운 삶의 태도: 5, 38-7,29

복음말씀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과 달리,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7-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27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29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0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1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7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
더 나은 의로움 -임성만신부-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금하신 것을 피하는 것, 명하신 것을 따르는 것,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 중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신앙생활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하느님께서 금하신 것을 피하는 것에 대해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전문가로 보인다. 우선 그들은 율법을 613개의 조항으로 분류해 날마다 암기했다. 일주일에 이틀씩이나 금식하며 기도했고, 십일조도 정확하게 바쳤다. 안식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철저히 지키는 열심을 보였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사는 자신들은 언제나 하느님께 인정을 받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에 나가 기도드릴 때에도 자신들의 열심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종교적 공로 리스트’를 펼쳐내는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런 모습을 반어적으로 책망하셨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당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모든 율법을 문자로 해석해 이해하기에 급급했다. ‘살인하지 마라’는 계명은 단지 살인하지 않으면 그 계명을 지킨 것으로 생각했다. 왜 살인을 해서는 안 되는지, 하느님께서 생명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모든 계명 안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포함되어 있고, 그 자체가 복음적 메시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모든 계명과 율법은 단지 문자적인 측면으로만 해석되거나 외형적인 실천의 모습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지키되 먼저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을 먼저 실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마태 23,23) 이들이 겉으로 볼 때는 세밀하게 계명을 지킨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마태 23,5)”으로 하느님께서 원하는 진정한 율법의 정신에서 벗어난 위선적인 사람들이라는 말씀이다.

사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 의롭게 된다고 믿었다. 율법을 통해 의로움을 드러냈고 그것을 자랑했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필리 3,5-6)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7-8)라고 고백하며 자신이 가진 의로움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진 것이며, 그 믿음으로 하느님께로부터 난 의로움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더 나은 의로움’이란 바리사이들이 결코 깨닫지 못했던 하느님의 구원 방식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만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열심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외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구원론적 사실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늘 보여주었던 ‘열심’뿐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를 믿고 그분이 드러내신 사랑을 우리가 행하고 그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예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없으면 율법도, 우리의 열심도 결코 빛을 발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
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율법을 지키며 사는 사람(유대인, 이슬람)들과,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죄를 지으며 사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만약 10계명 이외에 주님께서 다른 계명을(사랑 이외에) 더 만드셨다면 어떤것이 있을지 자유롭게 생각해봅시다.

3.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7-8)”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쓰레기”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왜 우리는 이 “쓰레기”를 버리지 못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밑에 있는 내용은 보충자료입니다.

더 의롭게 살기 -유환민 신부-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행복하기를 바라시지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하느님을 떠나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의 원천인 당신 곁에 머물도록 계명을 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율법, 바로 계명에 대해 말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 다.”(마태 5,20)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는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하 루에도 몇 번씩 때를 지켜 기도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이 정한 613가지의 세세한 규정들을 하나도 어기지 않으려 애쓰며 성실히 지켰습니다. 어떻게해야 그들보다 ‘더 의롭게’ 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율법 준수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일치하는 마음가짐까지 바라십니다.(보다 근본적인 것은 마음가짐이라 생각하셨지요.)

우리가 분노에 굴복해 폭력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려면, 겉으로 행사되는 폭력뿐 아니라 마음속 폭력까지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예 마음 안에 적개심이 자리 잡지 못하게 말입니다. 칼로 찌르는 것만 살 인이 아닙니다. 중상과 비방으로 타인의 인격을 훼손하고, 괴롭힘과 악플로 생기를 잃게 해서도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인격과 생명을 존중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 모든 게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인도 마다 않는 광기와 폭력, 드러나면 죄가 되고 드 러나지 않으면 능력이 되는 부조리한 현상에 개탄하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의 삶은 그런 불합리한 모습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요?

끓어오르는 분노와 적개심을 법이라는 제도 뒤에 감추어 두는 것은 하늘나라에 초대된 제자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좀 억울해도 먼저 나서 용서하고 화해할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우리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핵심인 참사랑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이기에 사랑을 외면한 계명, 사랑 없이 지키는 계명은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 없는 계명으로는 아무도 구원으로 이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에서 우러나 자발적으로 화해하고 절제하고 정직하 기란 그저 규칙을 따르는 것보다 대개 더 어렵습니다. 바보 취급받지 않으려면 일단 목소리를 높이고 봐야 하는 요즘엔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창조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를 살아낼 수 있습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집회 15,15)

2월15일 [연중 제6주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T4quJESD53c
[서울대교구 박정우 후고(도림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화를 내지 않고도 충분히 이 세상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제 마음속에서 자주 머리를 쳐드는 것이 젊은 시절 제 인생 여정 안에서 발생한 실수요, 그로 인한 부끄러움과 회한의 정입니다. 그때 그 순간 왜 참지 못했을까? 왜 하필 그런 부끄러운 행동을 해서 두고두고 후회할까?

특히 오늘 주님께서 건네시는 말씀 들으니 더 그런 생각이 커집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돌아보니 얼마나 자주 가까운 이웃들에게 불처럼 화를 냈고, 또 그 화를 제어하지 못하니, 그들에게 바보 멍청이라는 표현을 안팎으로 자주 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직도 가끔 화를 내고 있고, 요즘은 겉으로는 그런 표현을 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 여전히 그런 과한 표현들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요즘 화날 일이 있으면 그 감정을 숨기지 말고 솔직히 화를 내고, 분노할 일이 있으면, 있는 그대로 외부로 표출하는 것이 자신을 돌보고 방어하는 노력이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껏이라야지, 틈만 나면 흥분하고, 여기 퍼붓고 저기 퍼붓다가는 주변 사람들 다 떠나가고 철저한 외톨이로 남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화나 분노의 성숙하고 균형 잡힌 발산입니다. 먼저 분노할 일인가 웃어넘길 일인가 식별이 필요합니다. 별것 아닌 일에 목숨 걸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정말이지 억울한 일, 얼토당토않은 오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이 하얗게 됩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저 아래에서부터 뜨거운 그 무엇이 머리끝까지 올라옵니다. 그런 순간은 아이큐가 30퍼센트 급하락하는 순간이니, 절대 어떤 말이나 행동이나 결정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잠시 냉각 기간, 짧게 기도하는 시간을 확보한 후, 이성을 차리고 평상심을 회복한 후, 억울한 일에 대응을 하면 좋습니다. 그런 순간 기도도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 성모송을 천천히 세 번 정도 바치며, 성모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도 아주 좋은 노력입니다.

언성을 높이면 지는 것이니, 일단 편안한 목소리로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사실은 그게 아니라 이런 것이라며 자초지종을 차근차근 설명해줍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나를 나 스스로 변호하고 배려해주는, 반드시 필요한 노력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보니 화를 내지 않고도 충분히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주님께서 우리 내면의 중심에 언제나 자리 잡고 계신다면, 앞으로 남은 인생 여정도 분노 한번 하지 않고 살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화는 상대방에게 발산하지만 머지않아 그 화는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와 또 다른 상처를 입힙니다. 화를 내는 자신을 괴롭힙니다. 고통이 지속됩니다. 결국 ‘마음 바꾸기’ 작업이 필요합니다.

왜 하루종일 내 안에 ‘참 나’가 살지 못하고 그 몹쓸 ‘인간’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까? 자기 내면의 주인공, 내 감정의 주체는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설 수 있도록 언제나 지지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분노의 표출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면 끝도 없는 고통과 상처만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무거울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기도 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겠습니까? 인간관계가 제대로 형성되겠습니까? 건강이나 제대로 챙기겠습니까? 그 상태에 머무는 순간은 결국 불붙는 지옥에서 고생하는 순간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1tnBg0ZNVww

++++++++++++++++++

<성체 성사가 아니면 새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이유>

어느 가난한 청년이 자신이 세계적인 재벌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임박해 할인하는 삼각김밥만 찾아다니며, ‘오늘도 끼니를 굶지 않았으니 참 행복하다’고 자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비서가 찾아와 상속 문서와 함께 엄청난 액수의 통장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청년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첫마디로 이렇게 물었답니다. “우와! 그럼 저 이제 삼각김밥 두 개 한꺼번에 먹어도 되나요?”

어쩌면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 이 청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어마어마한 상속권을 가졌으면서도, 고작 죄 안 짓고 지옥 안 가는 수준의 삼각김밥 같은 행복에 만족하며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들을 보면 숨이 턱 막힙니다. 살인을 안 하는 건 당연하고 화도 내지 마라, 간음을 안 하는 건 기본이고 음탕한 마음조차 품지 마라. 이건 인간더러 인간이기를 포기하라는 말씀 같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이 높은 벽을 넘을 수 있을까요?

문제의 핵심은 내가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에 있습니다. 내가 행복을 바라는 만큼 계명을 지킬 수 있고, 나의 행복은 내 정체성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은 곧 내가 바라는 행복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노예는 주인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고 꿈도 꾸지 못합니다. 그저 주인에게 혼나지 않을 정도로만, 딱 매를 피할 정도로만 계명을 지킵니다. 그래서 노예에게 법은 무거운 사슬입니다. 겉모양만 조심하면 그만이지요. 하지만 자녀는 다릅니다. 자녀는 부모처럼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부모가 누리는 그 깊은 평화와 사랑을 나도 똑같이 누리고 싶어 하기에, 부모의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가 아니라 그 마음의 깊이까지 본받으려 애쓰게 됩니다.

불가의 경허 스님 일화가 이 차이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시냇가에서 아리따운 처녀가 건너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자, 젊은 수도승은 계명에 얽매여 화를
냈습니다. 하지만 노승 경허는 선뜻 처녀를 등에 업어 건너주었습니다. 십 리 길을 더 간 뒤에야 제자가 따져 물었습니다. “수도자가 어떻게 여자를 업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경허 스님이 말했습니다. “이놈아, 나는 벌써 그 처자를 냇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네놈은 아직도 그 처자를 업고 있느냐?”

젊은 제자는 계명에 충실했을지 모르나,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신적인 기쁨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노예는 법을 지키는 데 급급하지만, 자녀는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스스로 행복해지는 데 집중합니다. 하느님은 계명이라는 사슬에 묶여 쩔쩔매는 이들을 따분해하십니다.

앤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개구리의 기도 1』에 나오는 80세 노인의 풍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 계명을 완벽히 지켰지만 정작 하느님으로부터 “너는 정말이지 따분한 사람이다”라는 대답을 들었던 이유는, 그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행복을 즐긴 것이 아니라 노예처럼 보상만 바랐기 때문입니다.

『루카 복음서』 15장에 나오는 큰아들 역시 아버지 곁에서 한 번도 명을 어긴 적이 없었지만, 스스로를 종(Schiavo)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본성을 공유한 아들이 아니라 보상을 바라는 노예였기에, 동생이 돌아와 잔치가 벌어졌을 때 함께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계명은 지켰으되 행복의 맛은 전혀 몰랐던 불행한 모범생이었습니다.

우리는 더 차원 높은 행복을 욕망해야 합니다. 레스토랑의 일용직 조리사는 주방장이 시킨 레시피의 양만 정확히 지키면 임무가 끝납니다. 하지만 주방장의 아들은 아버지가 요리를 완성하고 손님이 맛있게 먹을 때 느끼는 그 희열을 닮고 싶어 합니다. 노예는 사고가 안 나면 행복하지만, 자녀는 아버지가 만든 최고의 맛을 낼 때 비로소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유튜브에 소개된 한 감동적인 실화는 이 자녀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한 새아버지는 아내와 결혼할 때, 자신이 가장 아끼던 꿈의 자동차를 팔아 결혼 비용을 마련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딸은 수소문 끝에 아버지가 팔았던 바로 그 차를 찾아내 정성껏 고쳐서 아버지에게 선물했습니다. 딸의 마음은 의무감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들을 위해 소중한 것을 포기했을 때 느꼈을 그 아픔과 행복을 자신도 똑같이 느끼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위해 기꺼이 작아지셨으니, 나도 아버지처럼 사랑하며 행복해지겠다는 자녀의
갈망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처럼 행동하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살인을 넘어 분노까지, 간음을 넘어 음탕한 눈길까지 다스리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법은 노예들이 죄에 빠지지 않게 막아주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었지만, 신약의 법은 하느님인 우리가 하느님답게 살 수 있도록 안내하는 본성의 법입니다. 아버지가 화를 내지 않으시기에 영원히 행복하시니, 하느님인 너희도 그 평화를 누리려면 마음속 분노라는 독초를 뽑아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어 주석서 『La Sacra Bibbia』는 이 대목을 노예의 의무에서 아들의 모방으로의 전환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어떻게 감히 하느님처럼 화를 안 내고 하느님처럼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인간의 의지로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바로 성체성사의 신비가 등장합니다.

밀떡이 신부님의 축성 기도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듯, 성체를 모신 우리도 하느님의 본성으로
변화됩니다. 교부 성 아타나시오는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라고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처럼 사랑하고 하느님처럼 행복해질 수 있는 이유는,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에너지가 우리 혈관 속에 흐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가 아니라면, 우리는 결코 오늘 복음의 그 높은 계명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의 힘으로는 가능해집니다.

결론적으로, 계명을 잘 지키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우리가 성체성사로 하느님의 본성을 받은
하느님임을 깊이 믿읍시다.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군에게 붙잡힌 어린 왕자 루이 17세(도팽)가 천박한 욕설을 강요당하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던 이유를 기억하십시오.
“나는 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 천한 말은 결코 내 입에 담을 수 없다.”

이것이 하느님의 본성을 가진 이의 품격입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인 내 정체성에 맞지 않기에 죄를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먼저 내가 성체로 인해 하느님임을 믿읍시다. 내가 누구인지 믿는 만큼 내가 추구할 행복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처럼 행복해지기를 욕망할 때, 계명은 우리를 가두는 창살이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의 정원으로 날아오르게 하는 눈부신 날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새 그 힘겹게 보이던 계명이 다 지켜지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멘.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얼마 전 사랑하는 남편과 사별한 자매님 두 분을 만났습니다. 두 분 모두 오랜 세월 부부로 살아오며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던 분들이었습니다. 한 분은 딸이 둘이었고, 다른 한 분은 아들이 둘이었습니다. 같은 상실의 아픔 앞에 서 있었지만,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은 달랐습니다. 딸이 둘인 자매님은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아직 돌봐야 할 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집안일과 아이들을 챙기고, 밤에는 일을 하며 가족을 책임졌습니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마음에 담아 두되, 원망이나 후회로 붙잡지 않고 기도로 바꾸었습니다. 하느님을 믿었기에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희망을 품고 살았습니다. 아들이 둘인 자매님은 아직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몇 년만 더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며, 지나간 시간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하던 일과 그 빈자리를 계속 바라보며 마음의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믿음직한 아들이 있으니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고, 남편이 하던 일도 아들과 함께 이어갈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무엇보다 아내가 기운을 내고 살아가는 모습을 하늘에 있는 남편도 가장 기뻐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자매님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직 그 질문 앞에서 완전히 응답하지는 못한 상태였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질문하시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그 질문들은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은 인간이 자기 자신 앞에, 그리고 하느님 앞에 서도록 부르시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질문은 심문이 아니라 초대이며, 단죄가 아니라 회개의 문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아담의 위치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이 동산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르셔서 묻지 않으십니다. 이 질문은 아담의 영적 위치,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죄를 지은 뒤 아담은 하느님 앞에 서지 못하고 숨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찾아 나서시며 다시 관계 안으로 불러들이십니다. 그러나 아담의 대답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아담은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가 벗었기 때문에 숨었습니다.”라고 말하며, 곧이어 그 책임을 여인에게, 더 나아가 하느님께 전가합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그 여자가”라는 말 속에는 회개가 아니라 변명이 있고, 고백이 아니라 자기 보호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은 변명이 아니라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는 진실한 응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은 예수님의 신원을 묻는 질문인 동시에, 제자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 앞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대답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신앙의 고백이며, 관찰이 아니라 관계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고백이 인간의 계산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깨달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의 응답은 예수님이 원하신 응답이었고, 그 응답 위에 사명이 주어집니다. 또 한 번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에게 질문하십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은 누구였느냐?” 이 질문은 정답을 맞히는 시험이 아닙니다. 율법 학자의 사고방식을 바꾸기 위한 질문입니다. 율법 학자는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을 피하지만, 이미 편견을 넘어 진실에 도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즉시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옳은 응답은 곧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질문은 언제나 인간을 살리기 위한 질문이지만, 회피하는 응답은 인간을 고립시키고, 정직한 응답은 인간을 사명으로 이끕니다. ‘하느님 앞에서 숨을 것인가, 아니면 서 있을 것인가. 책임을 피할 것인가, 아니면 사랑으로 응답할 것인가’의 차이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느님은 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는 어디 있느냐?” “너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 “너는 네 형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 구원은 하느님의 질문에서 이미 시작되었지만, 그 구원이 우리 삶 안에서 완성되는지는 우리의 응답에 달려 있습니다. 숨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하느님 앞에 서는 용기 있는 응답이 오늘 우리의 신앙을 살릴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미 응답하며 실천의 길을 걷고 있고, 어떤 이는 아직 주저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초대하십니다. 머무르지 말고, 한 걸음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아담의 길이 아니라, 베드로와 율법 학자의 길을 선택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회피와 변명이 아니라, 응답과 실천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의로움은 하늘나라를 향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 당신의 질문 앞에서 숨지 않고 응답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는 참된 의로움으로 저희를 이끌어 주소서.”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님]

고속도로를 달리던 초보 운전자가 있었습니다. 정속 주행을 고집하던 그는, 앞에 가던 스포츠카가 빠르게 달려 나가자 갑자기 속도를 높여 따라붙었습니다. 옆자리 친구가 당황해하자 그는 말하였습니다. “앞차와 간격을 100미터로 유지하라고 배웠단 말이야.”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규칙을 따르는 듯 보였지만, 통행 속도 제한이라는 법을 어긴 것입니다. 배운 대로 움직였을지 몰라도, 정작 주변 흐름과 안전이라는 근본 목적은 놓친 것이지요.

우리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규칙에 집착하면서 정작 그것이 왜 필요한지 잊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신학교 시절 전례부 활동을 하며 전례 규정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그런데 방학 때 본당에 가면 전례에 관하여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자꾸 눈에 들어왔습니다. ‘초를 왜 저렇게 켜지?’, ‘종은 저렇게 치는 게 아닌데 …….’ 주님을 위한 수단이던 규정이 어느새 주님을 가리는 장벽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의로움은 사랑이라는 가장 큰 계명을 중심에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까요.

차량 간 거리를 지키려다 과속한 운전자처럼, 형식에만 얽매이면 더 본질적인 계명을 놓치게 됩니다. 모든 규정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이 규칙을 이끄는 방향이고, 규칙은 사랑을 구체화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에 참되게 응답하는 삶이며, 우리를 자유와 기쁨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화답송)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17-37: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과 달리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1. 율법과 복음의 관계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율법과 계명에 대해 주신 해석을 전해주고 있다. 율법은 원래 복음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하느님의 뜻을 담은 선물이지만, 형식주의에 매이면 생명을 주는 본래의 정신을 잃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 깊은 뜻을 드러내시며 완성하신다.(17절)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율법은 은총을 찾도록 주어졌고, 은총은 율법을 완성하도록 주어졌다.”(De spiritu et littera 19,33) 즉,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더 이상 짐이 아니라 자유로 이끄는 은총의 길이 된다.

2. 계명의 완성: 사랑 안에서
집회서의 말씀은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집회 15,17)라고 한다. 예수님은 이 선택을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신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단순히 생명을 빼앗지 않는 것을 넘어, 마음속에서 형제를 존중하고 화해하는 사랑으로까지 확장된다.(21-24절)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단순히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욕망까지 정화할 것을 요구한다.(27-28절) “거짓 맹세하지 말라.”는 계명은 단순히 맹세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말이 곧 우리의 진실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33-37절)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부분을 해석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상처 자체만이 아니라 상처의 뿌리를 치유하신다.”(Homilia in Matthaeum 16,4) 예수님은 외적인 행동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사랑과 진실을 요구하신다.

3. 성령 안에서의 율법 실현
사도 바오로는 복음을 “하느님의 지혜”(1코린 2,7)라 부른다. 그 지혜는 성령을 통해 드러나며, 우리 안에서 율법을 실현할 힘을 준다.(1코린 2,10)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덧붙인다. “글자가 아니라 은총의 성령께서 가르치시고, 움직이시며, 도와주신다.”(De gratia Christi et de peccato originali 25) 율법은 외적인 명령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내적으로 변모된 삶을 통해 실현된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생명 성령의 법”(로마 8,2)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4. 교회의 가르침과 오늘의 적용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계시 헌장에서,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시어 하느님의 뜻을 충만히 드러내셨음을 강조한다(참조: 4항). 또한 교회 헌장은 교회의 삶 자체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증거한다고 가르친다.(참조: 9항) 따라서 오늘 복음은 단순히 도덕적 명령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존재 방식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 길은 ‘형제를 용서하는 사랑’, ‘마음을 정결히 하는 순결’, ‘진실하게 말하는 충실성’으로 구체화한다.

5. 결론과 신자들을 향한 권고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율법은 우리를 속박하는 짐이 아니라, 은총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길이다. 형제를 존중할 때,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완성한다. 마음의 정결을 지킬 때, 우리는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완성한다. 진실한 삶을 살 때, 우리는 “거짓 맹세하지 말라”는 계명을 완성한다.

우리는 성령을 받았기에, 이 율법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산상설교의 참된 행복으로 초대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이 되어, 율법의 완성을 삶으로 증거하는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하겠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더할 나위 없이>

마태오 5,17-37 (예수님과 율법, 화해하여라, 극기하여라,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 정직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비록
그럴 수
없다 해도

더할 나위 없이
맑게

더할 나위 없이
착하게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하게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게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게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더할 나위 없이
진실하게

더할 나위 없이
의롭게

더할 나위 없이
곧게

더할 나위 없이
믿으며

더할 나위 없이
희망하며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해요

그리 하는
그만큼
그리 되리니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진심으로,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 쏟아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 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0-22ㄴ)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3-34ㄴ)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1) 이 말씀들은, “하느님의 계명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너희의 의로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라는 말씀은, “너희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가 되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계명의 제5계명, 제6계명, 제8계명을 언급하신 것은, 당신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하신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실제로 살인을 하지 않으면 제5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속에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살의와 증오심과 분노가 가득 차 있어도,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니까 죄를 안 짓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살의와 증오심과 분노도 제5계명 위반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제6계명의 경우에도,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든지 간에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면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음욕을 품고 있는 것 자체가 제6계명 위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살인의 경우, 세속 법정에서는 실제 행동만 처벌하고, 생각만 한 것은 처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계명’을 ‘세속의 법률’과 같은 급의 법률로 취급한 셈이 됩니다. 그것은 신성 모독죄가 됩니다.>

2) ‘저녁기도’에 들어 있는 ‘반성 기도’를 보면,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 그리고 ‘의무를 소홀히 한 죄’를 반성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 때문에, 나쁜 생각도 죄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 하느님은 ‘숨은 생각’도 모두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고해성사를 볼 때, 행위로 지은 죄는 당연히 고백해야 하고, 생각으로 지은 죄도 고백해야 합니다.

3) 루카복음에 있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0-14ㄴ)

세리만 의롭다고 인정받고, 바리사이는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했다는 예수님 말씀을 근거로 해서, 그 바리사이가 ‘행위’로는 강도짓, 불의, 간음죄를 짓지 않았지만, ‘생각’으로는 죄를 지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바리사이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내적 욕망을 억누른 사람이 아니라, 행동으로는 죄를 짓지 않아도 생각으로는 자신의 욕망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4) 예수님의 가르침은 신앙생활 전반에 넓게 적용됩니다. 신앙생활은, 또는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겉으로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진심으로,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 쏟아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미사 참례를 예로 들면, 몸은 성당에 앉아 있었어도 생각과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면? 남들이 보기에는 미사 참례를 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것은 미사 참례가 아니라 예수님께 죄를 지은 것이고,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십일조는 잘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는 실천하지 않는 것을 꾸짖으셨습니다.(마태 23,23) 십일조를 내는 일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일입니다.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천하는 일은 ‘사람들의 눈에 잘 안 보이는 일’입니다. 보이는 일만 잘하고 보이지 않는 일은 안 하는 것, 그것은 위선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을 보면, 그 행위와 헌금 액수만 보면서 열성적인 신앙인이라고 판단할 때가 많은데, 예수님의 판단 기준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행위가 아니라, 마음과 정성을 보시는 분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의 생각이 밖으로 나온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 이 시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사제 생활 하면서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사람의 속을 본다는 것’이다. 속을 빤히 들여다보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고, 때를 기다려 주어야 한다. 사람인 사제가 이렇게 안타까워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더 큰 안쓰러움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실까?

겉으로 드러난 행동은 마음에 쌓아 놓은 것을 밖으로 드러내놓은 것이다. 따라서 드러난 행동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음에 가득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꺼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꺼낸다.”(마태 12,35)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미워하고 성내는 마음이 뿌리라면 살인 행위는 가지다. 그러므로 참으로 다스리고자 한다면 뿌리를, 다시 말하면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시고, 미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손발이 아니라 마음을 단속하라는 말씀이다. 마음을 단속하되 단호하게 다스려야 한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 5,29)

참으로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르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이다.”(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러므로 누가 보나 안 보나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 하십시오.”(필리 4,8: 2,5)

내 생각과 행동에도 질서가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질서를 지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 질서가 어디 있는가? 성경 안에 있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 말씀의 삶이 이루어질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시며 우리의 의향에 따라 열매를 맺게 해 주신다. 겉으로는 한 번도 죄를 범한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철저한 위선일 수도 있다. 선량하고 깨끗해 보이는 겉모습 뒤에는 더러운 것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내면과 외면, 생각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 이러한 일치 속에 사는 사람은 그의 눈빛과 거짓 없는 말, 가식 없는 행동으로 알아볼 수 있다.

매일 매 순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가꿀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빈 수레가 요란하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사랑으로 충만하면 조용하다. 그러나 비어있으면 시끄럽다. 마음을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길 성령께 청해야 하겠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바로 서있어야 한다. 세상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항상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면서 지킬 것을 지켜야 한다. 매 순간 하느님의 마음에 들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활을 가지고 과녁을 겨냥할 때 조준을 잘해야 한다.
과녁에 정확하게 맞추지 못한 것은 잘 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조준을 잘못한 탓이다. 조준을 잘못하면 설사 화살이 시위를 떠나지 않았어도 이미 과녁을 벗어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선이 주님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이미 죄를 범한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죄의 결과물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부터 이미 탐스러운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먹기로 결심했으니, 그것이 죄다. 지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 마음이 언제나 진리를 향해 조준되었을 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마음에 품은 생각이 넉넉하고 사랑으로 가득 차 언제나 그것이 쏟아져 나오기를 기도한다.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임 가밀로 신부)
“주님, 저희가 주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

[춘천교구 원용훈 스테파노 신부님]

<큰 사람>

일찍이 남들보다 키가 커서 ‘큰 사람’ 대접을 받아왔습니다. 유치원 때는 또래 친구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커서 ‘형’ , ‘오빠’ 소리를 들으며 ‘큰 사람’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후에도 큰 덩치 때문에, 온갖 허세를 잡고 작은 사람들을 업신여기며 ‘큰 사람’인척해왔습니다. 예, 하늘나라는 ‘이 큰 사람’ 때문에 폭행을 당하고 있었습니다.(마태오 11,12 참조)

가장 낮고 겸손한 모습으로 이 땅에 나신 주님은, ‘작은 사람’을 좋아하셨습니다. 큰돈을 내며 허세를 부리는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 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첫째가 아니라 꼴찌의 자리를 눈여겨보셨고, ‘작은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어린아이’가 기꺼운 마음으로 주님께 드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의 ‘큰 사람들’을 배불리셨습니다. 그리고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하늘나라에 합당하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며 ‘작은 것’을 업신여기어, 쉽사리 성을 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반성해 봅니다. ‘작은 것’을 업신여기어, 쉽사리 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작은 것’을 업신여기어, 마음으로는 마음껏 죄를 짓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작은 것’을 업신여기어, 내 앞의 당신을, ‘작게(하찮게)’ 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한 자 한 획’의 업신여김… 그것이 쌓이고 쌓여 ‘하느님의 계명과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작은 것’에 대한 업신여김… 그 또한 습관이 되어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의 모습이 되어 갑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엔 하찮은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생명 가운데 하찮은 생명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날 중에 하찮은 날도 없습니다.

곧, 사순 시기가 시작됩니다. 보속과 회개의 시간, 그간 작은 계명에 소홀했던 우리들의 부족함까지 반성해 봅시다. 그간 내가 소홀히 대했던, 함부로 대했던 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아파해 봅시다. 부활의 언덕에 ‘작은 사람’의 모습으로 올라봅시다. ‘부족하고 나약한 나’를 참 소중히 여겨주시기에, 너무 나 사랑해 주시기에, ‘하늘나라의 큰 사람’으로 초대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 뵐 수 있을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김문희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의 제1독서 집회서 말씀은 계명을 지키는 충실성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사람의 행위를 낱낱이 아시는 하느님 앞에서,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우리는 선택과 책임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게 된다는 말씀은, 결국 충실한 신앙인의 삶에 관한 우리 자신의 책임감을 되새기게 만듭니다.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은 지혜를 말합니다. 그 지혜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우두머리들은 알 수 없는, 세상에는 감추어져 있는 지혜입니다. 참 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와 만남으로, 우리는 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오 5,17) 5장의 행복 선언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당신 자신을 알려주십니다. 이는 율법이 우리를 옥죄기 위한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에 관한 충실성을 외적으로만 잘 지키게 하는 것이 율법의 존재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에 내재해 있는 깊은 의미 들을 헤아리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과 함께 지혜 안에서 비로소 가능합니다. 우리는 지혜 안에서 율법의 바탕에 존재하는 것이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또한, 율 법이 참행복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리게 되고,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성취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완전하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참 의미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온전하지 않고 부족하며,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올바른 길을 선택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지혜에서 멀어집니다. 죄를 짓고,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합니다. 이번 주 우리는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머리에 재를 얹고 사제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우리가 가야 할 참 행복의 길을 위해 성령께 지혜를 청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회개의 사순 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대구대교구 김병수 루카 신부님]

<율법의 새로운 가르침>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하고 그 율법의 참뜻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시작은 이렇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오 5,20)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보다 더 의롭게 살 아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5.48)로 끝이 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새롭게 가르치신 6가지 율법 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의롭게 사는 방법이고 또한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 완전한 사람이 되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의로움은 단순히 겉으로 법을 지키는 것, 형식주의, 위선자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율법의 준수를 넘어 마음의 의로움, 마음이 선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와 같은 율법을 단순히 법을 준수하여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만이 의로움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욕하고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마음, 그런 마음이 있으면 겉으로 살인은 하지 않았지 만, 하느님 앞에서는 결코 의롭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의로움은 겉으로 드러나는 의로움이 아니라 외적인 법의 준수를 넘어 우리 마음의 의로움, 마음의 선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마태오. 5,34)

오래전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 집에서 두 살 많은 형과 이것저것 이야기하면서 놀다가 가끔 말하는 것이 의심스러울 때는 정직성을 확인하는 간단한 우리들만의 비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이지? 그러면 성호 긋고 이야기해 봐~”라는 말이었습니다.

‘성호 긋고 이야기해보라’는 말은 형제간에 서로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최후의 방법 었습니다. 성호를 긋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진실의 선을 넘어서서 거짓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문율이었습니다.

성호를 긋고 뭔가를 말할 때는 반드시 정직하고 진실만 말해야 한다는 절대 규범은 마음 깊이 새겨져 있었지만, 자라면서 사람들이나 공동체나 세상은 항상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가치를 지키려고 애쓴 만큼 아픔도 맛보아야 했습니다.

기대했던 신뢰가 무너지면서 맛본 배신감은 생살을 도려내는 듯이 아팠지만, 그 아픔은 새로운 계명에 눈을 뜨는 성장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성호를 긋고 진실을 말해야 하는 가치는 지켜져야 하지만, 그 규범을 지키지 못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이제라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은 다행으로 여겨집니다.

누구든지 절대로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되고, 거짓을 말하면 인간으로 취급도 하지 않으리라는 분노 섞인 매몰찬 태도가, 거짓말과 허위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우리들의 모습에 대한 가여운 마음으로 조금씩 변하는 것은 지난날 아픔이 가져다준 은총인 것 같습니다.

성호를 긋는 이상 항상 진실해야 한다는 어린 마음속에 새겨진 절대적인 규칙은 여전히 내 맘에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지만, 진실과 거짓을 넘나드는 사람일지라도 규정보다는 그 사람을 먼저 사랑하리라는 다짐을 오늘 다시 해 봅니다.

“정말이지? 그러면 성호 긋고 이야기해 봐~”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우리가 들은 긴 복음 말씀에서, 마태오는 유대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밝혀주시면서, 제자들이 문자가 아니라 그 정신에 순종하고 살아갈 때 율법은 완성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율법을 삶에 적용해야 하는지 실례를 들어 말씀해 주는 여섯 가지는 모두 인간의 내적 태도와 동기를 들여다보라는 초대인데, 무엇보다도 화해를 위해 일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가슴 깊이 와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십계명 중 제5계명(=살인해서는 안 된다)과 제6계명(=간음해서는 안 된다), 제8계명(=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계명을 잘 실행해야 하겠지만 그중에서 제8계명을 묵상해 봅시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5,33)라는 계명은 말로써 이웃을 해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말로써 이웃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나라 왕이 신하 두 명을 불러 서로 정반대되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한 신하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을, 또 다른 신하에게는 가장 악한 것을 가져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임무를 맡은 신하들은 온 세상을 두루 돌아본 후에 답을 찾아왔는데 똑같은 답이었습니다. 둘 다 사람의 ‘혀’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왕은 두 신하의 열띤 논쟁을 들어본 후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도 혀요, 가장 악한 것도 ‘혀’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예화는 인간의 혀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선한 사람도 될 수 있고, 악한 사람도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 치밖에 되지 않는 혀는 온몸을 다스릴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갖고 있어서, 혀를 통해 만들어 내는 말 한마디는 행복과 불행의 열쇠가 될 정도입니다. 무심코 내뱉은 말은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큰 영향을 주듯이 살아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혀를 삼가라고 권하면서, 아무리 신심이 깊다고 한들 “제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아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사람의 신심은 헛된 것입니다.”(1, 26)라고 강조합니다. 이처럼 혀로, 말로 이웃을 해치는 것은 살인보다 더 큰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살인은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이지만, 험담은 한꺼번에 여러 사람을 해칠 수 있습니다. 험담하는 자신을 해치고, 험담하는 말을 듣고 동조하는 사람을 해치고, 그 험담의 대상자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혀를 조심하지 않고 함부로 말해서 이웃을 해치는 사람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보다 더 어리석고 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건을 훔친 죄는 훔친 물건을 되돌려주면 보속이 되지만, 말로써 끼친 피해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한번 뱉은 말은 쏜 화살이요, 엎질러진 물이므로 주워 담을 수 없고 기워 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을 해치려는 악의가 없이 무심코 한 말이라도, 지나가는 말로 그냥 한 말이라도, 심지어 도와주려고 한 말이라도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큰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무심코 던진 돌에 지나가던 개구리가 맞아 죽을 수 있기 때문이죠. 진실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이 말로써 상대를 해롭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을 잘 실행하려면, 이웃에게 해로운 말을 하지 말고 이로운 말을 하도록 합시다.

성경을 보면 거짓과 맹세는 어떤 것의 속과 겉처럼 묶어서 하나로 언급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거짓과 맹세에 대해 구별하여 살펴볼까, 합니다. 거짓은 사실과 다른 것이나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말하거나, 사실처럼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거짓은 ‘하느님보다 자신을 더 높게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을 뜻합니다. (시 59, 12~13) 또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속여서 예언하는 사람들도 거짓을 말하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레 29, 9) 신약에서도 거짓은 구원의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며 사탄에 속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요한은 악마를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이고 살인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8, 44)

그러나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그리고 신약에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던 때에 산파 시프리와 푸아 그리고 또한 창녀 라합 역시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거짓말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죽을까 봐 두려워서 거짓말로 그 상황을 모면하려는 경우, 산파 시프리와 푸아 그리고 라합처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경우, 야곱처럼 자기 유익을 위해 남을 속이는 경우,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람을 속이는 경우 등이 있습니다. 제 소견으론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악한 요소가 없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같은 경우와 산파 시프리와 푸아 그리고 기생 라합의 경우처럼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경우에는 이해될 수 있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시프리와 푸아처럼 언제나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자기 기준에 따른 것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여 남에게 피해를 주며, 거짓으로 남을 깎아내리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거나, 거짓말로 증언하고, 거짓 맹세하는 것은 모두 삼가야 합니다.

맹세는 고대 근동 사회에서 약속을 보증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당시 맹세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증인으로 하거나 특별한 상벌 조항, 특히 ‘맹세를 어기는 경우에는 저주를 받아도 좋다’는 규정을 정하여 맹세를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맹세가 하느님 앞에서 약속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맹세의 엄중함과 신성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맹세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출20:16, 신5:11) 여러 가지 이유에서 예수님 역시 맹세의 오용을 막기 위해 맹세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더욱이 말할 때, 예와 아니요, 를 분명히 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율법에서 가르치는 바에 대해 조건을 붙이지 말고,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5,37)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삶의 문제는 예와 아니오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라고 해야 할 때 예라고 하지 못하고, 아니오 라고 해야 할 때 아니오 라고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예라고 해야 할 때 예라고 말하고 아니오 라고 해야 할 때 아니오 라고 말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순교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느님께 맹세한 것을 지키려고 죽은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 는 이 한마디 말 만하면, 그 무서운 처형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는데도 하느님과의 맹세를 지키려고 죽어간 사람들이 순교자입니다. 로마의 통치자는 로마의 주교 풀리카리포 성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면 자유를 주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86년 동안 그분의 종으로 살아왔지만, 그분은 나에게 결코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는가?』라고 하며 죽어갔습니다. 예수님 이름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 복음을 전하다 죽어간 사람들, 순교자들, 그들은 거짓 맹세를 하지 않으려고, 맹세한 것을 지키려고 죽은 사람들입니다. 맹세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께 예배드리며 사는 사람은 거짓을 버리고 맹세한 바를 신실하게 지켜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거짓말하는 혀와 거짓말을 퍼뜨리는 거짓 증인을 미워하신다고 했습니다. (잠6:16~19)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앞에, 사람 앞에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진실한 사람, 정직한 사람, 약속을 지키는 사람, 맹세를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 때 하느님 앞에 맹세한 사람들입니다. 세례 때 우리는 사제와 많은 신자 공동체 앞에서, 이제부터 예수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며 하느님의 말씀대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삶을 살겠다는 의미로 믿습니다! 끊어버립니다!, 라고 고백했고 맹세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겠다고 예라고 응답한 사람들로 죽음이 아닌 생명을 선택하였습니다. 맹세한 바를 끝까지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께 지혜를 청합시다. “주님, 당신 계명의 길을 가르치소서. 저는 끝까지 그 길을 따르오리다. 저를 깨우치소서. 당신 가르침을 따르고, 마음을 다하여 지키오리다. 아멘.”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의 의로움이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의로움은 먼저
관계의 올바름이며
관계의 충실성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끊어진 관계가
다시 이어지고,
사랑이 올바른 방향으로
흐르는 사건입니다.

의로움은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참된 의로움은
공동체를 살리고,
상처를 감싸며,
화해를 먼저 선택하는
실천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그들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과 간음,
맹세의 계명을
행위의 차원을 넘어
마음의 차원으로
확장하십니다.

이는 윤리의 강화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 정화를
요구하시는 선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더 엄격한
기준의 나라가 아니라
더 깊은 사랑의 나라입니다.

진실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정직하면
말도 단순해집니다.

과장과 변명, 이중적 태도는
내적 분열에서 비롯됩니다.

의로움은
잘못을 피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선을 창조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통합의 삶은
다름을 지우는 데
있지 않고
다름을 품어
하나로 살아내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넘어
사랑으로 완성되는
삶의 변화를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넘어
의로움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평화로운 주일 되십시오.

의로움은
하느님과 이웃과
자기 자신 앞에서
관계가 바로 서는
건강한 삶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