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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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신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11
1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2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3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6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7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8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9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11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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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사순 시기 첫 번째 주일에 듣는 말씀의 주제는 ‘유혹’입니다. 인류의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처럼 된다.’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저지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에 앞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악마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빵으로 만들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유혹합니다. 또 눈에 보이는 세상의 화려함과 영광으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스스로 드러내시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신원은 복음 선포와 행적 그리고 십자가의 순명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세상의 것처럼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유혹자는 사람들을 나쁜 것으로 유혹하지 않습니다. 좋아 보이는 것으로,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으로, 그리고 마치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처럼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렇기에 유혹을 뿌리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첫 인간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우리 또한 언제나 유혹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유혹에 약하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유혹이 있다는 것에, 자주 유혹을 받는다는 것에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 혼자 충분히 유혹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유혹에 약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주님께 도움을 청할 때, 유혹을 물리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님께 도움을 청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유혹을 통해서도 다시 깨닫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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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지나고 보니 “사탄의 유혹이 아니였나?”라고 생각되는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난 그 유혹에 넘어갔는지, 반대로 유혹에서 벗어났는지 이야기 해보고 유혹에서 벗어나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면 무엇인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에서 나는 하느님을 내가 원하는데로 도구화 한 경험이 있었는지 묵상해 봅시다. 주님을 도구화 하면서 주님이 나에게 해준 경험이 있는지 허락하지 않은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주님 안에서 건강한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 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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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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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508
2월22일 [사순 제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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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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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RiT1gGGboYI
[서울대교구 성기헌 바오로(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사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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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도 성령과 함께 광야로 들어갑시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으로 가득 차 돌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거칠고 황량한 유다 광야로 들어가십니다. 사순절을 시작한 우리도, 스승 예수님을 따라 깊고, 황량한 광야, 조금은 외롭고 쓸쓸하고, 춥고 배고픈 광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이번 사순절, 광야로 들어갈 때는, 다른 해처럼 준비 없이 들어가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가득 차고, 성령에 이끌려, 성령과 함께 광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우리들 생애 안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사순절이 많은 경우 실패로 끝난 이유는, 주님 없이, 성령 없이, 내 힘만 믿고, 나 홀로 광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광야 생활이라는 것,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한낮에는 피할 곳도 변변치 않은데, 엄청난 더위를 온몸으로 견뎌내야 합니다. 밤이 되면 기온은 또 얼마나 내려가는지 모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백 퍼센트 인간 조건을 그대로 지니셨던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허기와 갈증은 또 얼마나 극심했을까요? 어쩌면 그분께서는 언젠가 겪게 될 골고타 언덕에서의 극심한 십자가 죽음의 고통을 광야에서 미리 맛보셨던 것입니다.
올해도 우리의 광야인 이번 사순시기, 여느 해처럼 갖은 고통과 시련, 세찬 모래바람과 극한 체험으로
가득하겠지만, 성령과 함께라면 큰 문제 없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여행길에 밀착 동반하신다면, 광야 생활 결코 외롭거나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맞이한 사순시기 우리 앞에 펼쳐질 광야는 어디일까요? 나와 너무나도 다른 그, 정말이지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용납이 안 되는 그가 득실거리는 우리의 공동체가 광야입니다.
평생토록 혼신의 힘을 다해 한번 벗어나 보려고 그토록 발버둥쳐 봤지만, 그 지독한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반복되는 내 악습과 결함이 광야입니다. 게으름과 나태함, 갖은 유혹 거리로 가득 찬 내 부끄럽고 참혹한 매일의 일상이 광야입니다. 바로 그 광야에서 주님과 함께, 성령과 함께 새출발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40일간 단식해 오신 예수님께서 악마로부터 유혹받으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이기도 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와 똑같은 육체 조건을 지니셨던 인간이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고통과 배고픔을 똑같이 겪으셨던 참 인간이셨습니다.
휴가지에서 40일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겠지만, 단식하면서 보내는 40일은 정말 지옥 같은 나날입니다. 허기가 져서 거의 탈진상태에 도달한 예수님 앞에 악마가 나타납니다. 갖은 감언이설과 달콤한 유혹거리를 미끼로 내세우며 예수님을 현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유혹들을 의연히 이겨내십니다. 허탈해진 악마는 힘을 잃고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 앞에 끝까지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아버지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과 철저한 순명, 아버지를 향한 지속적 신뢰와 끊임없는 자아포기, 그 결과가 유혹의 극복이란 결실을 가져왔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아버지와 연결된 끈을 끝까지 놓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우리는 나약하지만 아버지 현존 안에 뿌리내림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세상 유혹 앞에 설 때마다 예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음을 기억합시다. 아버지께 대한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그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셨음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걸어가는, 사순절이라는 광야 여정에는 악마로부터의 유혹도 많겠지만, 든든하신 우리 주님께서 언제나 동행하고 계심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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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r-RvEacHkD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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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자궁은 광야다: 이 세상도 하느님의 자궁이다>
교우 여러분, 오늘은 사순 제1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첫 장면은 사실 좀 당혹스럽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그 뜨거운 고백을 듣자마자, 성령께서는 그분을 위로의 장소가 아니라 광야로 내몰아 버리십니다. 왜일까요? 이제 막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은 예수님께, 광야는 그 신성을 단련하고 완성해야 하는 거룩한 자궁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든 자궁은 광야입니다. 태아에게 어머니의 태중은 마냥 편안한 침대가 아닙니다. 좁고, 어둡고, 때로는 숨이 막히는 압박을 견뎌야 하는 고립된 공간이죠. 하지만 그곳에서 수정란은 이전의 모습을 완전히 벗고 부모의 형상을 닮은 인간으로 재창조됩니다. 성령은 마치 거룩한 정자와 같습니다. 우리 영혼에 침투하여 우리의 낡은 인간 본성을 뒤흔들고,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제 그 자궁, 즉 광야 안으로 들어왔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왜 이 세상이 자궁일 수밖에 없을까요? 우리가 저절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서 어떤 자매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이 자매님이 지인의 일을 도와주러 갔다가 영문도 모르고 무당집에 끌려갔답니다. 그런데 그 무당이 겁을 주더라는 거예요. “너 신내림 안 받으면 재수 없는 일만 생길 거다. 절에 가든지 무당이 돼라. 성당이나 교회 가면 너 반드시 병신 된다!” 참 기가 막히죠? 이 자매님은 무시하려고 해도 그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공포 마케팅에 속는 이유는 내가 어디서 에너지를 받아 사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자궁임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탯줄을 통해 오는 에너지를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아기가 자기 힘으로 크는 게 아니라 탯줄로 엄마의 피를 받아 살듯, 우리 역시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에너지를 받아야 합니다.
제 형님은 성당에 안 다녔지만, 매일 밤 가위에 눌려 고생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기 전에 성호를 긋고 자라고 했죠. 형님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성호를 긋고 잔 날은 절대 가위에 눌리지 않았습니다. 기도의 에너지가 실제로 작동한다는 걸 작은 체험으로 알게 된 거죠.
이 세상이 자궁이라면, 자궁 안에서는 반드시 치러야 할 전쟁이 있습니다. 바로 본성의 교체를 위한 이전 본성과의 처절한 싸움입니다. 뱀이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했을 때 썼던 수법은 오늘 광야에서 사탄이 던진 세 가지 유혹과 똑같습니다.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우며, 슬기롭게 해 줄 것 같은 유혹, 즉 소유욕, 성욕, 지배욕입니다. 뱀은 인간을 하느님의 본성에서 동물의 본성으로 타락시켰습니다. 자궁 안에서 태아가 꼬리를 없애고 인간의 형태를 갖추듯, 우리는 광야에서 이 짐승의 흔적을 도려내야 합니다.
만약 이전 본성과의 싸움을 하지 않는다면, 아직 성령께서 오시지 않은 것입니다. 난자가 정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보모를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세례 받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을 사는 이유가 없어집니다. 이는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배터리처럼 욕망의 노예로 살다 죽는 삶과 같습니다. 사는 게 아닙니다. 1991년 우크라이나에서 발견된 옥사나 말라야의 사례는 정말 끔찍합니다. 인간의 자궁(가정) 안에서 본성을 바꾸는 과정을 겪지 못해 개가 되어버린 그녀처럼, 우리도 본성을 초월하여 깨어나지 못한다면 이 자궁 같은 세상에서 본성을 초월하는 일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투쟁입니다.
이 세상을 하나의 자궁이요, 광야로 여기게 되었다면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자신의 욕망과 싸워 이기는 훈련의 시기로 봅니다. 우리 나라의 위대한 동정 순교자 부부,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의 삶은 그 절정을 보여줍니다. 두 분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열망으로 동정 부부로 살기로 서약했습니다. 이순이 루갈다 성녀가 1801년 신유박해 때 보낸 『옥중 서한』의 기록은 정말 절절합니다.
“어머니, 저희는 4년 동안 한 방에서 오누이처럼 지냈습니다. 육신의 욕망이 일어날 때마다 십자가를 부여잡고 피눈물을 흘리며 울었습니다. 어떤 때는 하룻밤에 열 번도 넘게 유혹을 이겨내야 했으니, 이것은 하느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성녀는 이 지독한 싸움을 광야의 진통으로 여겼고, 그 결과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고통스럽고 유혹이 많다면, 그것은 아주 좋은 징조입니다. 아기가 걸음마를 연습하다 수천 번 넘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넘어진다는 것은 걷고 싶다는 의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싸우고 있다는 것은 여러분이 이제 막 인간이라는 낮은 본성에서 하느님이라는 고귀한 정체성으로 탈출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나의 배꼽에 탯줄이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이 세상이 아닌 천상에서 오는 힘을 체험해보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광야로 나아가 자신과 싸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비의 고치를 가위로 미리 잘라주면 그 나비는 영영 날지 못하고 죽습니다. 고치를 빠져나오려는 그 처절한 몸부림이 나비의 날개를 근육질로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순 시기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하늘을 날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로 만드시려고 광야의 진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으로 태어나기 위해 준비하는 자궁 속에 있음을 깨닫는 것, 그것이 세례와 성령의 참된 의미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39항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아담이 낙원에서 실패했던 그 유혹을 광야에서 이기심으로써, 인류에게 새로운 본성의 길을 열어주셨다.”
광야는 죽음의 땅이 아니라 생명이 빚어지는 하느님의 자궁입니다. 기도와 자선과 단식이라는 수술 칼을 들고 여러분 안의 짐승을 도려내십시오. 하느님 아버지께서 탯줄을 통해 여러분의 산고를 함께 겪으며 응원하고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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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의 고통을 줄여준 커다란 발명이 4가지 있습니다.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폐렴, 상처 감염, 산욕열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아이를 낳는 일, 수술을 받는 일 자체가 생명을 건 선택이었습니다.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하면서 인류는 처음으로 세균 앞에서 무력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항생제는 단순한 약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끝까지 지키려는 인간의 책임이 가능해진 순간”이었습니다. 저도 1991년 유행성 출혈열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었습니다. 항생제 덕분에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18세기 에드워드 제너가 천연두 백신을 개발했고,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질병을 완전히 사라지게 했습니다. 이는 중요한 신앙적 메시지를 줍니다. 하느님의 뜻은 고통을 참고 견디는 데만 있지 않고, 고통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돌보는 사랑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백신’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취제가 없던 시대의 수술은 치료이기 전에 형벌과 같은 고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수술보다 고통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19세기 중반, 마취제가 도입되면서 의학은 처음으로 분명한 메시지를 선언합니다. “치료는 고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마취제는 말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을 미화하지 않으신다. 고통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가능하다면 덜어야 할 짐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저도 2012년 다리가 골절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척추 마취를 통해 큰 고통 없이 수술을 마쳤고, 이렇게 잘 걸어 다닙니다. 1895년,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은 X선을 통해 인간의 몸속을 처음으로 보게 했습니다. 이후 CT와 MRI는 보이지 않던 병을 드러내고, 조용히 진행되던 죽음을 살 수 있는 시간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이는 신앙적으로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겉모습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항생제는 생명을 포기하지 않게 했고 백신은 공동체를 보호하게 했으며 마취제는 고통을 줄이려는 연민을 가르쳤고 영상의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살피는 책임을 일깨웠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역사를 아주 분명한 한 줄로 요약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영원한 생명이 왔습니다. 아담의 죄는 단순히 금지된 열매를 먹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죄는 하느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판단을 더 신뢰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의 결과로 인간은 생명의 근원에서 자신을 떼어 놓았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의 역사에는 병과 고통, 그리고 죽음이 함께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죽음의 역사 안에 그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의 불순종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한 분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편안한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유혹을 받으셨다고 전합니다. 그 유혹은 세 가지였습니다. 빵의 유혹, 권력의 유혹, 그리고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아라.” 이는 배고픔 앞에서 하느님보다 물질을 먼저 선택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이는 십자가 없는 영광, 책임 없는 권세의 유혹이었습니다. “나에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 이는 하느님을 이용하거나, 하느님 말고 다른 것을 절하며 쉽게 목적을 이루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유혹을 기적이나 힘으로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말씀을 붙드는 순종이 죽음을 넘어 생명을 여는 길임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유혹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더 조용하고, 더 일상적입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남들보다 부족한 것 같아.” 이 말은 겸손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존엄을 부정하는 열등감의 유혹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셨다는 사실보다, 남과 비교하는 기준이 더 커질 때, 우리는 이미 유혹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또 이런 말도 자주 듣습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잖아.” 작은 거짓, 작은 편법, 작은 타협 앞에서 우리는 자신을 이렇게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죄는 늘 다수결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다수가 한다고 해서 옳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유혹은 양심을 무디게 하고, 죄를 평범한 일상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리고 가장 흔한 말이 있습니다. “다음에 하면 되지.” 기도도, 고해성사도, 화해도, 결단도 미루게 만드는 게으름의 유혹입니다. 이 유혹은 우리를 단번에 넘어뜨리지는 않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게 만듭니다. 회개를 미루는 동안 마음은 점점 굳어 갑니다. 이 유혹들은 우리를 크게 흔들지 않습니다. 대신 조금씩, 조용히, 하느님과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아담은 유혹 앞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내려놓았고, 그 결과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혹 앞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붙드셨고, 그 결과 영원한 생명이 열렸습니다. 우리도 매일 유혹 앞에 섭니다. 그때마다 무엇을 붙들 것인지가 우리의 길을 결정합니다. 말씀을 내려놓으면 죽음의 방향으로 가고, 말씀을 붙들면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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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님]
한 사람이 붕어빵 가게에 들렀다가, ‘3개 1,000원, 1개 300원’이라는 가격표를 보고 의아해하였습니다. 보통은 많이 살수록 저렴한데 이 집은 오히려 낱개가 더 쌌던 셈이지요. 주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붕어빵을 하나씩 사 먹는 사람이 더 가난하거든요.” 천 원이 없어 한 개만 사는 사람을 위한 배려였던 것입니다. 물질 중심인 세상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가난한 이를 중심에 두고 생각하면 자연스럽고, 오히려 감사할 만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점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요? 무엇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우리는 유혹을 물리치기도, 그 유혹에 무너지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보여 주는데 이는 우리 인간들이 겪는 유혹과 같습니다. 비유와 상징으로서 드러난, 예수님께서 받으신 유혹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아무런 노력 없이 불편함을 쉽게 해결하려는 유혹입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의 기적을 기대하며 시험하고자 하는 유혹입니다. 마지막은 세상의 권세와 영광, 곧 세상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특권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 유혹들을 물리칠 때, 우리는 악마가 아닌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세상의 관점이 아니라, 하느님의 관점, 사랑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에만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 앞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마태 4,4).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4,7).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4,10).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우리가 사순 시기 유혹을 물리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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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4,1-11: 예수께서는 40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셨다.
1. 사순절: 구세사의 광야로의 초대
재의 수요일로 시작된 사순절은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향한 영적 순례의 시간이다. 교리서는 사순절을 이렇게 규정한다. “사순 시기는 신자들이 세례나 회개의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돌아가고,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더욱 깊이 묵상하며 참여하는 시기이다.”(540 참조)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위한 정화와 시련의 상징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며 하느님 백성으로 정화되었고(신명 8,2-4), 모세는 40주야를 산 위에서 머물며 율법을 받았으며(탈출 34,28), 엘리야는 40일 동안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1열왕 19,8) 사순절은 침묵과 비움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다시 만나는 시간이다. 이 여정은 “우리의 과월절 양이신 그리스도”(1코린 5,7)를 향해 나아가는 순례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나기 위한 준비다.
2. 광야의 유혹: “너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요르단에서 세례를 받으신 직후, 성령께서 그분을 광야로 이끄시어 사탄에게 유혹을 받게 하신다. 이것은 단순한 시련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 시험이었다. 사탄은 두 번이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3.6절)이라고 말하며,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세속적 방식으로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즉, 돌을 빵으로 바꾸고, 스스로를 과시하며, 세상 권세를 차지하라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적 해방과 권력을 가져올 세속적 메시아를 기대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통받는 종의 길(이사 52–53장), 곧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묵상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유혹을 받으셨다. 그분이 이기셨기에 우리도 그분 안에서 이길 수 있다.”(Sermo 2 de Tempore, 2) 그리스도의 유혹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겪게 되는 내적 싸움의 모형임을 드러낸다.
3. 하느님의 말씀으로 승리하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에 세 번 모두 하느님의 말씀으로 응답하신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 8,3)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신명 6,16) “주 너의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명 6,13)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통해 인간적 유혹의 모든 차원을 넘어선다. 그분의 결정은 하느님의 구원계획(salutis consilium) 안에 철저히 근거해 있다. 교리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께서는 아담의 유혹을 거슬러 이기셨으며, 자신의 완전한 순종으로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셨다.”(538항) “그분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대표로서 사탄을 이기셨고, 이로써 우리도 그분의 순종 안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되었다.”(539항)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강조한다.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사탄을 물리치셨다. 그러니 너도 네 광야에서, 말씀으로 그를 물리쳐라.”(Homiliae in Matthaeum, 13,2) 말씀은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과 생명 자체이다. 따라서 “말씀으로 산다.”(4절)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완전히 내어 맡기는 순종의 신앙을 의미한다.
4. 두 아담: 불순종과 순종의 대조
창세기의 원죄 이야기에서 사탄은 인간에게 “너희가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창세 3,5)라고 속이며, 그 결과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죄를 짓게 한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대조시킨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인이 될 것입니다.”(로마 5,19) 그리스도께서는 “새 아담”으로서 인류를 다시 하느님의 자녀로 회복하셨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류가 죽음에 빠졌듯이, 마리아의 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생명이 회복되었다.”(Adversus Haereses, III,22,4) 예수님의 순종은 단순한 도덕적 복종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완전한 응답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절정에 달한 구속적 순종이다.
5. 오늘 우리의 광야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일의 광야를 걷는 여정이다. 우리도 물질적 안락, 명예, 자아확립의 유혹 속에서 “돌을 빵으로 바꾸는” 시도를 반복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이기셨고, 우리에게도 그분의 승리를 나누어 주신다. 성 바실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금식은 음식보다 마음을 절제하는 것이다. 진정한 금식은 악에서 떠나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채워지는 것이다.”(Homilia de Jejunio, 1) 사순절은 금식과 회개의 외적 표징을 넘어,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내면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순종의 길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자유를 되찾는 길이기도 하다.
6. 결론: 순종 안에서 완성되는 구원
오늘 복음은 단지 유혹의 이야기로 머무르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 구원의 전 모형이다. 예수님의 광야 체험은 세례로 받은 우리의 소명을 되새기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유혹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의 말씀에 의지할 때 사탄의 속삭임을 이길 수 있다. 교리서는 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예수의 순종은 우리의 불순종을 대신하는 것이며,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한다.”(615)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기셨다. 그분의 승리는 곧 우리의 희망이다. 사순절의 여정 안에서 우리도 그분과 함께 “하느님의 아들답게” 살아가도록 초대받고 있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이기셨듯이 저희도 세상의 유혹에서 당신 말씀에 굳건히 서게 하소서. 순종으로 구원을 이루신 당신의 사랑을 본받아 사순의 여정 안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부활을 기다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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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아들>
마태오 4,1-11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하느님의 아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마태 4,3ㄴ.6ㄴ)
하느님만을
하느님으로
바라보니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하느님만을
하느님으로
들으니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하느님만을
하느님으로
느끼니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하느님만을
하느님으로
믿으니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하느님만을
하느님으로
희망하니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하느님만을
하느님으로
사랑하니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하느님만을
하느님으로
경배하니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하느님만을
하느님으로
섬기니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하느님만을
하느님으로
따르니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하느님만을
하느님으로
닮으니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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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타협의 여지가 없는 단호함으로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태 4,1-11)
1)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 그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 텐데, 복음서 저자들은 그 일을 어떻게 알고 복음서에 기록했을까? 예수님께서 직접 그 일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경험담’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주시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일을 겪었다.”가 아니라, “너희는 유혹을 받을 때 이렇게 대처하여라.”라는 가르침.>
유혹을 물리치는 첫 번째 방법은 ‘기도’이고(마르 9,29), 그 다음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타협의 여지가 없는 단호함’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탄의 유혹’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유혹을 물리칠 때 하신 ‘말씀’입니다.
2)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한 6,27)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누구에게나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긴 하지만, ‘일용할 양식’이 신앙생활의 목적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이 말에 대해서,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공동체가 나서야 합니다.>
3)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말씀에 연결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아마도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을 들었을 때,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반박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까’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면’과 ‘같은 말’입니다.>
어떻든 베드로 사도의 말은, 예수님께 ‘사탄의 유혹’이 되었는데, 사실 베드로 사도 자신에게도 ‘사탄의 유혹’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아주 엄하게 꾸짖으신 것은, 그를 사탄의 유혹에서 지켜 주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4)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라는 말씀은, ‘빵의 기적’ 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일에(요한 6,15)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적의 빵’을 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은, 예수님이 임금이 되시면 날마다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일은 예수님을 믿고 섬긴 일이 아니라, ‘빵’을 섬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의 부귀영화만을 원한 것과 다르지 않고, 사실상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일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유혹한 일이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은 ‘이리 떼 가운데에 있는 양들’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마태 10,16), 온갖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 또한 모든 신앙인이 참고 견뎌야 할 고난과 시련에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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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유혹을 물리치는 길>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동안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고 그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우리에게 악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다. 악을 지배할 수 있는 주님의 힘과 능력의 은총이 함께하길 희망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 근심 걱정이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님께서도 악의 유혹을 받으셨고 더군다나 악의 세력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음기회를 노리며”(루카 4,13) 물러갔다.
예수님께도 이러한 어려움이 생겼는데 하물며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유혹이 있겠는가? 따라서 근심 걱정이 없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어떠한 유혹과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이 지상의 순례 생활에는 유혹이 없을 수 없다.
우리의 진보는 유혹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유혹을 당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아우구스티누스)
유혹에 넘어지면 보통 사람이고, 이기면 그야말로 큰 사람이다. 예수님은 친히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다.”(히브 2,18) 그러나 그 길을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예수님께서 겪은 첫째 유혹은 생계 문제다. 먹고 사는 문제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고 말씀하셨다. 분명, 빵이 중요하지만, 빵보다 사랑이 중요하다. 물질적인 것 위에 영적인 것이 있다.
두 번째는 명성에 대한 유혹이다. 악마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의 능력인 기적을 남용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하셨다. 인정받으며 찬사를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 마음에도 있다.
세 번째는 권력에 대한 유혹이다. 사탄을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하셨다.
부, 권력, 명예의 3가지 유혹을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물리쳤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에페 6,17)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유혹을 이기려면 성경을 읽고, 말씀에 나를 비추어 새 삶을 살아야 한다.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만해서 그렇다. “네가 실컷 나쁜 짓을 하면서도 ‘나를 감시할 눈이 없다.’하고 자신만만이구나. 너는 지혜로운 체, 세상일을 다 아는 체하며 ‘이 세상엔 나밖에 없다.’고 하다가 제 꾀에 넘어가리라.”(이사 47,10)
우리의 뱃속까지 환히 들여다보시는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 데 하느님을 의식하지 못한 탓이다. 자기 욕심에 끌려서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온다.”(야고 1,14-15)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욕심이 우리를 병들게 한다. 예수님은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무엇보다도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와 함께 단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단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한탄 하셨다.(마태 26,40-41)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기도 하라 하셨다.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하면 유혹은 은총이다. 자신을 확실히 볼 수 있는 기회이다.
예수님은 소유와 지배, 명예, 현세적인 권세, 정치적인 유혹으로부터 끝까지 지켜줄 수 있는 것은 하느님 말씀뿐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말씀이 능력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길 바란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주님, 고난을 겪으면서도 희망을 키우고, 유혹을 받으면서도 덕행을 쌓아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소서.”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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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오상민 마르코 신부님]
<부활하신 예수님께 드릴 선물 – 기쁨의 삶>
재의 수요일에 사제는 신자들의 머리에 재를 얹으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라는 말씀을 전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며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인지 안심도 되고, 위로도 받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매순간 유혹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기로에 선 순간,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여러분들의 선택이 하느님 보시기에도 좋은 선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셨을까요?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다른 쉬운 방법도 있지 않으셨을까요? 이러한 생각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아둔한 인간의 머리로 접근하는 것이 한없이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저는 이 성경 말씀이 참으로 좋습니다. 저를 사랑하시어 오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를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살아야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인지를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지금은 그분을 닮으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됩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자캐오는 키가 작고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던 세관장이입니다. 부족함을 많이 가 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캐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위로가 필요했던 자캐오. 그러나 애석하게도 키가 작아서 군중에 가려져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무에 올라갑니다. 이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예수님 을 만나기 위한 노력과 행동입니다.
우리도 자캐오처럼 부족함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신자분들은 “나는 죄인이오.”라고 외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나약한 부족함이 죄를 짓게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일지 먼저 생각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가기를 바라시지 않을까요?
이번 사순시기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드릴 좋은 선물을 준비해 봅시다. 유혹이 많은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선물이었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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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기범 시몬 신부님]
<하느님의 자리를 악마에게 내어 주지 맙시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악마한테 유혹을 받으시는데,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럼 성령께서 악마를 만나게 하신것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로 나가셨는데, 하느님과 더 깊은 만남을 가지기 위하여 외딴 곳으로 가셨고 바로 그곳에서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하는 것이지요!
성령은 하느님의 영이십니다. 하느님의 영은 늘 우리에게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자비와, 무한한 은총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성령을 받았고, 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늘 우리의 삶이 기쁘고 행복해야 하는데…어떠신가요? 늘 기쁘고 행복한가요? 그렇지 않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왜? 하느님의 영은 늘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고 있지만 우리는 자꾸만 세상의 물질에, 인정과 명예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유혹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달콤하고도 확실한 유혹이 있습니다. 바로 행복이라는 아주 확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잃어버리게 되면, 물질은 욕심으로 변하고, 명예와 인정은 자만으로 변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내가 이룬 삶이 되어 버리고, 내가 더 높은 사람이 되고야 맙니다. 독서 말씀에서는 이 부분을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분열과 불행이 남게 되는 것이 악마의 교묘한 유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믿음으로 하느님을 공경하고 섬기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길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악마가 유혹을 하고 우리가 나약해서 그 유혹에 넘어가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리가 없는 우리가 불행의 길을 선택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끄심보다는 나의 의지와 생각이 그 하느님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어디에 계십니까? 바로 내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내 안에 있는 꺼지지 않는 불입니다. 언제든 내가 하느님의 자리를 마련할 때, 공기가 순환되어야 불이 활활 타듯이 그렇게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삶이 광야 같지요?
그러나 그 광야와 같은 삶은 활활 타오르는 하느님의 영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유혹에 늘 쓰러지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늘 새롭게 일어서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리를 악마에게 내어 주지 말고, 말씀과 믿음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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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두진 가브리엘 신부님]
“유혹”이라는 단어를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검색하면, “꾀어서 정신을 혼미하게 하거나 좋지 아니한 길로 이끈다.”라는 뜻이 나옵니다. 본래의 길에서 벗어나 다른 길, 좋지 않은 길을 택하게 만들려는 “유혹”이 사순제1주일 미사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예수님에게 다가온 첫 번째 유혹은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입니다. 사십 일의 단식을 통해 하느님과 하나 되는 체험 속에서 하느님만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 예수님께 이 유혹은 하느님에게로 향한 시선을 돌려 다른 쪽에서 만족과 기쁨을 찾으라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을 예수님은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라는 말씀으로 거부하시며, 하느님께로 자신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계속해서 걸어가려 하십니다.
첫 번째 유혹을 물리치고 길을 제대로 잡아 걸어가시려는 예수님께 두 번째 유혹이 다가옵니다. 바로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 유혹을 예수님은 오늘 복음의 장면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걷는 내내 계속해서 받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니 세상의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그래서 자신 앞에 있는 고난의 쓴 잔을 치워달라고 예수님께서는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뜻이 아닌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으며, 그 마음으로 하느님에게로 다시 시선을 맞추고 계속해서 걸어가려 하십니다.
하지만 유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느님과 세상에서 누리는 명예와 재물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세 번째 유혹을 받으십니다. 하느님과 재물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는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명예와 재물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 하느님께 경배와 감사를 드리면서 지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라는 말씀으로 스스로를 다잡으시며, 하느님께로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가십니다.
우리는 사순 제1주일을 지내면서 예수님과 함께 광야로 난 길을 사십 일 동안 걸어 하느님께로 다가가고자 하는 다짐을 합니다.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우리 시야에서 놓친다면 그 순간 우리 삶은 온갖 유혹으로 가득 찬 광야가 될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을 둔다면, 이 광야는 우리를 살리시는 주님을 만나는 은총이 가득한 곳이 될 것입니다.
이번 사순 시기의 여정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을 두고주님의 은총이 가득한 부활의 길로 이어지는 여정이 길 바라며, 유혹을 이기신 주님의 단호함과 굳건함을 청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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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우리와 똑같은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
오늘 복음의 유혹 사화를 통해 에수님께서는 유혹의 본
질이 무엇인지. 무엇이 참된 행복의 길인지 몸소 보여주십니다. 먼저 유혹자는 빵으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여기서 빵은 음식, 집, 돈. 직업, 건강 등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물리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빵만으로”라는 말씀을 봉해 삶을 위한 물질적 필요를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그 필요가 삶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유혹은 단호히 거부하십니다. 우리는 물리적 생명으로만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 삶을 의미 있게 하고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은 참된 생명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 안에서 온전히 채워실 수 있습니다.
악마는 두 번째로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운 뒤,
밑으로 몸을 던져보라고 유혹합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니, 곧 하느님께서 너를 사랑하신다고 하니, 어디 한번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율 시험하지 마라.”라고 대답하십니다. 사실. 신앙생환을 하다 보면 가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 그러면서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징표를 받고 싶어 하기도 함니다. 때론 응답을 받지 붓할 때는 “그분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섣부른 결론을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징표 없이도. 심지어 시련이 있다 해도 그분의 사랑을 굳게 믿는 것이 참된 자녀의 길임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도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 27,40)라고 유혹을 받으셨지만 끝까지 침묵하시며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데 머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유혹자는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에수님께 주겠다고 합니다. 악마는 무척 영리합니다. 에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이끌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나 예수님은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라는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힘과 지배라는 세상과 사탄의 방식이 아니라. 섬김과 존중이라는 하느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고히 하십니다. 아무리 목적이 선해도 그 과정이 선하지 않으면 참으로 선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느님의 방식으로만 사람들을 얻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