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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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3-17
1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14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15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16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7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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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요한의 세례는 죄를 씻는 일이었고, 죄를 씻는 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일로 이해됩니다. 죄를 씻기 위하여 우리는 죄를 찾아내려 애씁니다. 고해소 앞에서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되돌아보는 일은 꽤나 아픈 일입니다. 고백하건대, 지난 과오를 진정으로 뉘우쳐서 아프기보다 그 과오 때문에 부끄러운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 더 아픕니다.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지만 세례를 받으십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세례는 ‘모든 의로움’을 이루는 일입니다. 예언자 시대부터 ‘의로움’은 하느님과 제대로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그 만남은 대개 계층 간에 벌어지는 갈등의 자리에서, 권력의 다툼 안에 희생된 약자들의 자리에서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집중하시는 곳은 아픔과 슬픔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에서, 신앙인들이 일상에서 만나고 웃고 이야기 나누는 자리를 되돌아봅니다. 의로움을 이루려고 만나는 자리가 있을 수 있고, 죄를 씻기는커녕 서로의 탓을 곱씹느라 죄 속에 허덕이는 피폐한 영혼들을 맞닥뜨리는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오늘 복음의 끝은 이렇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사야서에 따르면 그 아들은 다른 이의 죄를 대신 짊어져도 말 한마디 없이 죽어 가는 고난받는 종이었습니다. 다른 이를 위하여 대신 죄를 짊어지는 희생을 실천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서로에게 죄를 짊어지우는 일만큼은 줄여야겠습니다. 의로움은 특정한 상황에서 이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과 실천으로 실현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평범한 일상에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자신을 비워 내고, 내어 주고, 참아 주는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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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내가 생각하는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삶의 우선순위는 주님의 일을 이루는 일에 맟춰져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아직 맟춰져 있지 않다면 무엇이 방해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인도하는 것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세례자 요한처럼 능동적(자발적)으로 구원사업이나 봉사활동을 기획한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아직 해보지 못하였다면 어떤 주님의 사업을 하고 싶은지, 예수님의 길을 어떻게 ‘의로움’으로 만들지 이야기 해봅시다.
4.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기 어렵다고 고백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무엇이 우리를 겸손의 길에서 멀어지게 하는지, 어떻게 하면 늘 겸손에 길에 머물 수 있게 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5.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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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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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황량한 광야 사이로 잔잔히 흐르는 요르단 강에 고개를 숙이신 채 서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세례자 요한의 표정은 경건하고 감격에 차 있습니다. 그의 손바닥에 담긴 물이 예수님의 머리와 얼굴을 적시고 이윽고 예수님께서 빛나는 모습으로 고개를 드신 채 물에서 나오시자, 하늘에 성령의 표징이 나타나면서 성부 하느님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너무나 생생한 표현의 말씀이어서 그런지,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예전의 많은 영화에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퍽 인상적이고 감동적으로 드러내곤 했습니다.
주님 세례 축일을 맞아 이 장면을 떠올리며 잔잔한 감동을 느꼈다면, 이제 주님의 세례에서 비롯된 우리의 세례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야 할 차례입니다. 성인이 되어 오랜 기다림과 어려움 속에 세례 받은 분이라면 세례를 받는 그 순간의 기쁨과 감격을 생생히 떠올려 보십시오. 유아 세례를 받았다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세례를 받은 신앙인으로 살아온 인생 여정이 어떠했는지 잠시 되돌아보십시오.
무엇보다도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우리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더욱 새롭게 의식해 보면 좋겠습니다. 이 단순한 성찰이 거듭될 때 인생의 방향은 근본적으로 바뀌어 나갈 것입니다. 사랑받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깊이 체험한 이는 더 이상 이름이나 명예 따위에 갈급할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말씀의 향기♣ No4466
1월11일 [주님 세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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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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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SPtwsGPw5_M
[서울대교구 박우준 사도요한(문화홍보국 차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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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례받지 않는 인생은 완결되지 않은 인생입니다!>
오늘날 세례성사 예식이 많이 간소화되었습니다. 세례성사의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단계에 이르면 집전 사제는 예비자의 이마에 세례수를 부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를 줍니다.”
그러나 과거의 세례성사 예식은 좀 더 구체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좀 더 생생했고 더 실감났습니다. 본 성전 외에 세례당이 따로 건축되었는가 하면, 성당 한쪽에 세례대가 따로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세례 성사 예식 전 세례 대상자는 대중탕처럼 생긴 세례대 저쪽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순서에 따라 세례 대상자는 입고 있는 세상의 옷을 벗고 계단을 걸어 내려가 세례대에 담긴 물에 온몸을 침수합니다. 그리고 반대쪽 계단을 통해 걸어 나옵니다.
입교자는 세상의 옷을 벗음을 통해 지금까지 걸치고 왔던 낡은 인간, 죄로 물든 인간, 죽을 운명에 처한 인간을 세례대 저쪽 건너편에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통과하듯이 세례수를 통과해 이쪽 즉 약속의 땅, 생명과 구원의 땅으로 건너오게 됩니다. 이러한 건너옴의 예식을 통해 입교자는 새 인간, 영적 인간, 영원한 생명을 지닌 불멸의 인간으로 새롭게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성사, 생각할수록 은혜롭고 감지덕지한 은총의 성사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난 걸로 삶을 마감합니다. 정작 중요하고 진정한 태어남인 세례성사를 통한 새로남 없이 세상을 하직합니다.
그러나 과분하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성사를 통해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태어남으로 초대받습니다. 그야말로 참 생명을 얻고 참삶을 사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세례받지 않는 인생은 완결되지 않은 인생입니다. 이래서 이웃 전교가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 세례 축일을 경축하는 우리에게 큰 의문부호가 하나 다가옵니다. 세례성사는 죄가 많은 우리 인간들, 죽을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우리 인간들에게나 필요한 성사입니다. 그런데 무죄한 하느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러 요르단 강으로 내려가십니다. 그리고 나약한 한 인간(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 세례 사건은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특별한 사건입니다. 인간인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아야 할 일인데 완전 반대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예수님의 지극한 겸손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마구간 탄생으로 참된 겸손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세례 사건을 통해 또다시 자신을 극도로 낮추십니다. 보다 완벽히 인간 세상 안으로 육화하시려는 하느님의 강한 의지 표현이 예수님 세례인 것입니다.
일관되게 자신을 낮추시며 아버지 뜻에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에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크게 기뻐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택하신 지극히 겸손하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할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그분께서 평생토록 일관되게 지니셨던 겸손의 덕을 우리도 청해야겠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용기 있게 고개 숙일 수 있어야겠습니다. 내가 양육하고 있는 자녀들 앞에, 내가 동반하고 있는 학생들 앞에, 내가 사목하고 있는 양들 앞에 더욱 겸손해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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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aiiFtXWF8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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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아지면 보이는 것들>
찬미 예수님!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고 물 위로 올라오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때 굳게 닫혔던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시며 이런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 장엄한 광경은 2천 년 전 예수님께만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던 날, 우리 영혼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영을 모시게 되었고,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와 눈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그 눈과 귀가 잘 작동하고 있습니까? 세례 축일이 되면 성당을 장식했던 성탄 트리를 철거합니다. 제가 이곳 조원동 본당에 온 지 벌써 4년째가 되는데, 올해 유독 성당 안팎의 구유와 트리 장식이 예쁘게 느껴져 치우기가 아깝기까지 합니다. 만약 제가 교만하다면 “신부인 내가 사목을 잘해서 봉사자들이 알아서 잘한 거야” 라고 으스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음을 조금만 낮추면 비로소 보입니다. 추운 날씨에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전구를 달고 구유를 꾸민 봉사자들의 땀과 정성이 말입니다.
하물며 인간의 노력도 낮아져야 보이는데, 하느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은 오죽하겠습니까? 겸손한 눈으로 보면, 세상 모든 것 안에 그분의 피와 땀이 서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분의 숨결인 성령은 비둘기 모양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바람, 이름 모를 들꽃, 심지어 우리가 마시는 물 한 모금 안에도 계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우리 눈에 ‘뱀’이 씌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는 뱀을 바라보느라, 동산 전체에 배어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지 못했습니다. 뱀은 곧 우리 안의 ‘교만’입니다. 세례란 무엇입니까? 내 안의 교만이라는 뱀을 물속에 집어넣어 질식시키는 거룩한 결단입니다.
영화 ‘블랙’은 헬렌 켈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주인공 소녀는 보지도 듣지도 못합니다. 세상과 단절된 그녀에게는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이 사물마다 이름이 있고 창조 질서가 있음을 가르치려 하지만 소녀는 거부하며 도리어 물을 뿌립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소녀를 거칠게 분수대 물속에 처박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숨이 막히는 그 순간, 소녀의 내면에 있던 고집 센 자아, 즉 ‘삼구(三仇)’가 죽습니다. 물속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영혼의 눈이 열립니다. “아, 워터(Water)!”
그녀는 물에도 이름이 있고, 꽃에도 이름이 있으며, 자신에게도 부모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의 신비입니다. 교만한 자아가 죽어야 하느님 아버지의 존재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세례를 받고 나서도 자주 눈이 멉니다. 영적인 눈도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하기 때문입니다. C.S. 루이스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꼬집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언제나 사물과 사람을 깔보느라 아래만 보고 있다. 아래만 보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저 위에 있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겠는가?”
우리가 다시 눈을 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 잊히지 않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옛날 일본에서는 성을 쌓을 때 무너지지 않게 하려고 사람을 기둥 속에 넣는 ‘인주(人柱)’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천민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사무라이로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스스로 자원하여 성의 기둥 속에 묻혔습니다. 덕분에 아이는 귀족 아이들과 함께 그 성에서 훈련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귀족 아이들의 무시와 괴롭힘이 이어지자, 아이는 도망치고 싶어집니다. 내면의 뱀이 “너는 여기서 못 살아, 도망쳐”라고 속삭인 것이지요. 밤몰래 짐을 싸서 도망치려던 아이의 발길이 멈춘 곳은 어느 기둥 앞이었습니다. 바로 어머니가 묻혀 있는 그 기둥이었습니다.
아이는 발을 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나가면 어머니의 희생은 헛것이 됩니다. 아이는 기둥을 끌어안고 웁니다. 그리고 다시 힘을 얻습니다. 그 후 아이가 힘들 때마다 기둥을 찾아가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성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어머니의 피와 사랑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의 벽돌 하나하나가 어머니의 희생 위에 서 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이 ‘기둥’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몸과 피가 담긴 ‘성체’입니다. 아이가 어머니의 죽음으로 사무라이가 될 기회를 얻었듯,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세례입니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힘들어 도망치고 싶을 때, 우리 안의 뱀이 교만과 절망을 부추길 때, 우리는 다시 기둥 앞으로, 성체 앞으로 와야 합니다.
성체 앞에 머무르며 내 자아를 내려놓을 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아,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나는 단 1분 1초도 숨 쉴 수 없구나.”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면, 성체 안에만 계시던 예수님이 성당 문밖 모든 곳에 계심을 보게 됩니다. 나를 괴롭히는 원수의 얼굴에서도 예수님이 그를 위해 흘리신 피를 보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본래 나병 환자를 끔찍이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회심 후 그는 말에서 내려(지위의 포기) 나병 환자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자신이 낮아져 눈높이를 맞추자 그 환자의 얼굴에서 예수님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인천에서 만났던 한 할머니 자매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분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명문 간호대를 나와 의사 남편과 결혼했고, 개원한 병원은 돈을 긁어모았습니다. 부와 명예가 넘쳐나자 신앙은 뒷전이 되었고, 그 자리에 교만이라는 뱀이 똬리를 틀었습니다. 친구들을 불러 명품을 자랑하는 것이 낙이었습니다.
그러다 대형 의료사고가 터졌습니다. 피해자는 힘 있는 사람이었고, 병원 문을 닫게 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자매님은 병원이 망하는 것보다, 친구들에게 무시당할 것이 더 두려웠다고 합니다. 용한 점집을 찾아다니며 굿을 했지만 허사였습니다.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성당을 찾았지만, 본당은 창피해서 못 가고 먼 성지를
찾아다녔습니다. 미사가 끝나면 2시간씩 십자가의 길을 바쳤습니다. 처음에는 “해결해 주세요”라고 빌었지만, 기도가 깊어질수록 “나 같은 죄인이 감히…” 하며 낮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십자가의 길 4처, 예수님과 성모님이 만나는 장면에서 벼락같은 음성을 듣습니다. “사~ 랑~ 한~ 다~”
그것은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니라, 영혼을 울리는 성령의 파동이었습니다. 자매님은 감실 앞에 엎드려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이 다니던 본당으로 가서 화장실 청소를 시작한 것입니다. 귀한 옷만 입던 병원 원장님이 고무장갑을 끼고 변기를 닦는 모습에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녀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갔을 때, 꼬여있던 문제들도 기적처럼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교만해지면 세례는 힘을 잃습니다. 동굴 속 물고기의 눈이 퇴화하듯, 사용하지 않는 은총은 사라집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영화 ‘아바타’의 인사말처럼, 하루에도 수백 번 주님을 향해 고백하십시오. “I see you (저는 당신을 봅니다).”
낮아져야 높이 볼 수 있다는 의로움을 오늘 예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요르단 강물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 겸손의 물에 우리의 교만을 씻어냅시다. 프랑스의 로랑 수사가 부엌에서 설거지하며 하느님의 현존을 연습했듯, 우리도 일상의 작고 낮은 자리에서 주님을 찾읍시다.
우리가 낮아지면, 세상은 하느님의 ‘진리와 은총’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정원임이 보일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죄를 짓지 않고, 미소 지으며 주님을 찬미하는 참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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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노트르담의 꼽추’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인간의 죄와 희망이 함께 울리는 거대한 삶의 무대입니다. 그 안에서 세상의 조롱을 받던 콰지모도는 흉한 겉모습과는 달리 누구보다 순결한 마음을 지닌 이로 그려집니다. 영화에서 콰지모도를 연기한 앤서니 퀸 역시 멕시코 이민자 출신으로, 가난과 차별 속에서 성장한 사람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콰지모도의 고독과 내면의 깊이를 누구보다 진실하게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에스메랄다를 성당의 성역 안으로 품어 안으며 지키던 장면은, 약한 이를 감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그대로 비추는 듯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외모와 조건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마음의 깊이를 보신다는 진리가 콰지모도와 앤서니 퀸의 삶을 통해 다시 드러납니다. 어릴 때 옆집에 살던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할머니는 고양이를 키우면서 살았습니다. 할머니의 등은 꼽추처럼 굽었습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무서웠는데, 할머니는 무척 자상하였습니다. 가끔 먹을 것도 주셨습니다. 할머니의 집 문에는 영화 포스터를 붙였습니다. 극장에서는 할머니에게 초대권을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가끔 영화 초대권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 초대권으로 만화영화도 보았고, 성웅 이순신 같은 영화도 보았습니다. 할머니의 등이 굽은 것은 삶의 파도와 고난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주교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주교님은 ‘꼽추 아버지’의 사연을 전해 주었습니다. 결혼을 앞둔 딸에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남편의 집안은 부유했고, 품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인의 집은 가난했고, 아버지는 등이 굽은 꼽추였습니다. 딸은 결혼식에 꼽추인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큰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오빠는 동생을 크게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요즘 허리가 아프다고 하면서 결혼식에는 큰아버지와 가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프지도 않은 허리를 핑계로 하나밖에 없는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딸은 임신했습니다. 임신하니 입덧이 심했고, 어머니가 해 주던 음식이 생각났습니다. 어느날 남편과 함께 슈퍼엘 가는데, 손에 가방을 든 아버지가 슈퍼로 들어갔습니다. 딸은 아버지를 모르는 척했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슈퍼 사장이 전화했습니다. 어떤 분이 물건을 전해 달라고 했다는 전화였습니다. 딸이 슈퍼에 가니 주인이 가방을 전해 주었습니다. 가방에는 어머니가 만들어 준 청국장과 겉절이가 있었습니다. 가방에는 아버지가 쓴 메모가 있었습니다.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엄마가 청국장과 겉절이를 만들었단다. 감기 조심하고 건강학 잘 지내기를 바란다.’ 딸은 아버지가 부끄러워서 결혼식에 함께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임신한 딸을 위해서, 입덧이 심한 딸을 위해서 먹을 걸 가져다주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인이 젖먹이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 설령 여인이 젖먹이를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절대 잊지 않겠다.” 하느님의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한 이야기입니다. 그 하느님께서 하느님을 멀리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뜻보다는 세상의 것을 더 먼저 찾았던 우리를 위해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심을 기억하는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면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들 또한 세례를 받으면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사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가브리엘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본명(本名)을 줍니다.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도 있지만 세례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이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어르신들이 ‘본명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시면 저는 ‘가브리엘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오늘 제2독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변화된 삶을 살았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이름이 예뻐서, 부르기 좋아서, 생일에 가까운 축일이 있어서 세례명을 정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명을 정하는 것은 이미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성인과 성녀들의 삶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분들의 도움을 청하며 세상이라는 험난한 파도를 이겨내기 위해서 세례명을 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나의 세례명을 한번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아직 세례를 받지 못한 분들은 죄의 용서를 받으며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를 잘 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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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이철구 요셉 신부님]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것도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 3,14)라고 말하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받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3,15)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17)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도 듣고 싶은 말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이마에 물을 맞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는 영원한 생명을 향한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마에 바른 축성 성유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징표이며, 흰옷은 깨끗해졌다는 외적 표지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내게 숨을 불어넣으시어 생명을 주셨듯이 세례를 통해서 다시 영원한 생명을 향하게 하십니다.
우리 함께 그때의 마음, 세례 때의 첫 마음을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 그때 내가 하였던 기도와 청원과 다짐은 무엇이었는지요? 아마도 순수한 영혼의 신앙 고백이며 사랑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그때의 첫 마음을 떠올려 보며, 그 어떤 상황에서도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 우리의 신앙과 사랑을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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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3,13-17: 예수께서 세례받으시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세례 축일을 지내고 있다. 이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 시작을 드러내며, 동시에 우리 각자가 받은 세례의 의미와 사명을 다시 묵상하게 한다.
1. 세례 받으신 예수님: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
세례자 요한은 죄 없는 분께서 세례받으려 하심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단지 요한의 놀라움만이 아니라, 초기 교회 신자들 또한 느꼈던 신비일 것이다. 세례는 본래 회개의 표지였지만,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서 인간과 완전한 연대를 이루시기 위해, 또한 십자가에서 세상의 죄를 짊어지실 그 사명을 미리 드러내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당신 죄 때문이 아니라, 당신 모범으로써 우리를 세례로 초대하시기 위함이었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5,3) 즉, 그리스도의 세례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세례 원형이며 초대이다.
2. 하느님의 뜻에 대한 철저한 순명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모두 이루어진다”(15절)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아버지 뜻에 대한 온전한 순명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주석하고 있다. “그리스도께는 세례가 필요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모든 의로움을 완성하시기 위해 그분께서 친히 받으셨다.”(Homiliae in Matthaeum, Hom. 12,1) 이처럼 그분의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아담의 불순명을 치유하고 하느님과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는 순명의 시작이다(로마 5,19 참조).
3.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시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자 “하늘이 열리고”(16절),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임하신다. 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닫혀 있던 하늘이 다시 열리고, 인류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교부들은 이 장면을 삼위일체의 계시로 이해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삼위일체가 나타났다. 아버지는 음성 안에, 아들은 인간의 모습 안에, 성령은 비둘기 안에 드러나셨다.”(Sermo 2 de Epiphania, 6)
4. ‘사랑하는 아들’: 메시아적 사명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7절) 이 말씀은 이사야서의 ‘야훼의 종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이사 42,1 참조). 메시아는 단순히 정치적 해방자가 아니라, 고통을 통하여 백성을 구원하는 겸손한 종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세례와 우리의 세례를 연결하며 이렇게 가르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온 교회를 같은 성령으로 채워, 모든 신자가 왕적·예언적·사제적 사명을 가지게 하신다.”(교회 12항) 따라서 예수님의 세례는 곧 우리의 사명 시작이기도 하다. 우리는 세례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세상 안에서 복음을 증거하며 사랑과 정의를 실천할 책임을 지니게 된 것이다.
5. 우리의 세례: 빛과 사랑의 불꽃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의미한다. 우리는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소명을 받았다. 그러나 이 소명은 힘과 권세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겸손과 나약함을 통하여 드러나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권고한다 “그리스도인이여, 기억하라. 너희가 받은 성사는 빛의 표징이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라.”(Sermo 272)
6. 맺음말
오늘 주님의 세례를 기념하면서, 우리 각자가 받은 세례의 은총을 새롭게 묵상하자. 세례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은총의 원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고, 겸손과 사랑으로 형제들을 섬길 때, 세례받은 이들의 빛은 세상을 밝히고, 하늘로 향하는 길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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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
마태오 3,13-17 (세례를 받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미약하더라도 쉼 없이 들려오는
하느님의 감미로운 부르심에
마음을 여는 정갈한 다가섬입니다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나를 온전히 살아 숨 쉬게 하시는
성령의 따스한 이끄심에
나를 맡기는 자연스러운 끌림입니다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희미할지라도 결코 끊어질 수 없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랑의 관계에
나를 묶는 거룩한 속박입니다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나를 버려야 하는 아픔 속에서도
벗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고결한 희생입니다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은
탐욕과 죄로 나락에 떨어진 나를 살리시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듯이
세상의 불의와 고통에 신음하는 하느님께
벗이 되어드리는 따뜻한 동행입니다
세례 받은 이로 산다는 것은
나를 버림으로써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을 모심으로써 나를 살리는
아름다운 순환입니다
일생의 단 한 번 하지만
생의 마지막 날 하느님 품에 안길 때까지
지금여기에서
새롭게 기억되어지고
새롭게 살아져야 할
생명과 사랑 가득한 성사
바로 세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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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3-17)
1) 이 이야기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 즉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과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신원을 직접 보증하고 선포하신 일을 전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는 증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라는 말씀은, “내가 세례를 받는 것은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라는 뜻이고, 그 뜻과 계획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의로움’이라는 말은, 인류 구원에 대한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를 씻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일은,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에 곧바로 연결되는데, 두 일은 사실상 하나의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세례’는 십자가 수난의 서막과도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주신 일입니다.
2) 하늘에서 들려온,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은, “이는 내가 직접 보낸 메시아다.”라는 하느님의 공식 선포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의 선포를 직접 들었다는 제자들의 증언입니다. 그때는 아직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이었으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없었지만,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고(요한 1,33), 또 요한의 제자였다가 나중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들도 그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중에 한 번 더 똑같은 선포를 하셨습니다. 높은 산에서 예수님께서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을 때, 하느님께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7,5) 그 말씀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도가 들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일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2베드 1,16-18)
<이 말은, 자신의 증언은 지어낸 말이 아니라, 직접 보고 직접 들은 것에 대한 증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3)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성령이 내려오셨다는 증언은, 하느님의 구원사업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증언입니다. 즉 인류 구원사업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로 일치해서 하시는 일이라는 증언입니다.
4)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을, 우리는 보통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신 일”이라고 해석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그대로 뒤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당신이 먼저, 또 당신이 직접 걸어가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죄를 씻는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죄 없으신 분’인데도 당신이 먼저 그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5)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세례’로 표현하신 적이 있는데(루카 12,50),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때 이미 십자가 수난을 생각하셨을 것이라고(십자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도 ‘십자가의 길’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세례성사의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까지 가는 방법입니다.(마태 16,24)
우리가 세례를 받은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십자가는, 운동선수들이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 열심히 수행하는 훈련 같은 것입니다.(1코린 9,25)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다고 표현할 때가 많은데, 원래 모든 사람은 다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따라서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드는 성사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상태로 살고 있는 사람을 하느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는 성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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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세례성사로 구원받는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셨다. 세례의 의미를 생각하는 가운데 주님의 은총을 입으시길 희망한다.
‘저는 어려서 세례를 받았다. 태중 교우다. 요즘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생활이 바쁘다 보니 하느님도 잊고 지냈다. 이제 다시 시작 한다’ 하는 분들을 종종 만난다. 사실 세례를 언제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세례의 의미를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여러 어려움이 있어도 하루 끼니를 몽땅 거르고 지나는 사람은 없다. 혹 그렇게 한다면 몸의 기운이 떨어져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 마찬가지다. 신앙의 영양을 섭취하는 기도와 미사를 소홀히 한다면 신앙의 맛을 느낄 수 없고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 밥맛이 없어도 기운을 차리려면 밥을 먹어야 하듯이 기도가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면, 무미건조함을 극복할 수 있고 더 큰 은총을 입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철저히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오셨다. 그래서 죄가 없으신 분이 죄인의 틈에 끼여서 세례를 받으셨고 어둠에 빛으로 오셨다. 사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물로 씻는다’, ‘물에 잠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물에 잠긴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세상의 욕망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물에 잠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잠겼다가 씻고 다시 나온다. 다시 나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