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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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28주일(가)
복음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2,1-1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1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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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임금이 종들을 보내 아들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초대받은 이들은 잔치에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은 다른 종들을 보내며 초대를 반복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두 번째 초대에도 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임금이 보낸 종들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어찌하여 이들은 이런 행동을 하였던 것일까요?
이유는 명백합니다. 임금의 아들이 혼인한다는 것은 왕자가 장차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이 이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은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더 나아가 임금의 종들을 죽이기까지 하였다는 것은 반역을 일으켜 왕권을 쟁취하겠다는 생각을 지녔음을 보여 줍니다. 요컨대 오늘 비유에 나온 이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이가 통치하는 나라, 자기들의 뜻대로 국정 운영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꿈꾸었기에 이와 같은 행동을 보였던 것입니다.
임금이 군대를 보내 이들을 없애고 그 고을을 불살라 버린 것은 왕권이 위협받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왕자의 혼인 잔치는 예수 그리스도와 죄 많은 인류의 일치를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받은 이들이 초대에 응하지 않고 종들을 죽이는 행위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이러한 일치와, 그 일치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참임금이 되시는 것을 바라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그들은 입으로만 하느님 나라를 외쳤지, 실제로는 자기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나라, 자기들이 임금이 되는 나라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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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보거나 다음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 임금의 입장에서
– 종들의 입장에서
– 초대받은 이들 입장에서
2.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이 어떻게 천국 잔치에 초대되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복음의 기회가 주어진 것에 나는 어떻게 응답하고 살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나를 잔치에 초대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오늘도 내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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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22,1-14
(강론: 5:05 ~ 끝)
오늘의 묵상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에(21,1-11 참조)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이 다시 시작됩니다(21,23-27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르치시고자 비유를 사용하시는데, 오늘 복음은 앞선 두 개의 비유에(21,28-32.33-44 참조) 이어서 세 번째 비유, 곧 혼인 잔치의 비유를 소개합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잔치’는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표현하고자 상징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의 시온산으로 모이는 날을 종말론적 기다림에서 하느님께서 마련하시는 ‘잔치’라는 표상으로 그려 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로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 시대가 왔음을 알리시며 그 초대에 응답할 것을 요구하십니다(8,11 참조). 오늘 복음의 비유는 하늘 나라의 선포에(4,17 참조) 대한 엇갈린 반응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하늘 나라의 임금이신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과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당신께서 마련하신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셨습니다. 초대받은 이들, 곧 유다 지도자들로 대표되는 ‘선택받은 이들’은 그분의 초대를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이들에게 폭력을 저질렀습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초대받지 않은 이들을 잔치에 초대하셨고, 그들은 초대에 응답하였습니다. 이는 초대를 거부한 자들이 구원에서 배제될 것이라는 경고로 이해할 수 있으며, 소외된 이들로 대표되는 이들도 하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산에서 계약을 맺은 뒤에 하느님 앞에서 음식을 나누었듯이(탈출 24,11 참조), 마지막 날에 우리도 하느님 앞에 모여 음식과 함께 기쁨을 나눌 것입니다. 잔치의 초대에 응답하는 우리 각자의 자세는 어떠한지 살펴봅시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3644
10월15일[연중 제2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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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세례를 받고 보통 1년 정도 뒤에 견진 성사를 받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며 견진 성사를 미루기도 합니다. 세례와 견진을 마치 별개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으면 견진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 예식에 이미 이마에 기름을 바르는 견진 성사 예식이 들어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것을 설명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임금은 아드님의 혼인 잔치에 아무나 초대합니다. 처음 초대했던 이들은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우선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으려 하지 않고 그분을 죽였습니다. 이에 이방인들이 초대받게 됩니다. 그러나 혼인 잔치에 초대 받아 세례를 받은 이들 가운데서도 쫓겨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혼인 예복을 갖추지 않은 사람입니다. 혼인하는 날 잠옷 바람으로 왔다면 그것이 혼인 준비가 안 된 것을 증명해줍니다. 옷은 그 자리에 합당한 준비와 노력을 했음을 알려주는 표징입니다.
혼인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성체 성사를 의미합니다. 그 성체 성사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은 세례 받은 이들입니다. 세례 받은 이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몸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도 하나가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면 자신도 뛰어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믿음이 혼인 예식에 참여하게 합니다.
그러나 기어 다니는 아기가 자기도 부모처럼 두 발로 걸을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바로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과의 오랜 싸움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견진의 과정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는 세례를 받고 40년의 견진을 거칩니다. 그들은 이전의 파라오를 섬기기 위해 노예 살이 했던 본성인 소유욕, 성욕, 지배욕을 포기하고 청빈과 정결과 겸손의 열매를 맺는 자신과의 싸움을 평생 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하지 않는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가 안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의 신부를 찾으라고 종을 하란 땅에 보낸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 부르심에 응답한 여인이 레베카입니다. 레베카는 착한 여인이었고 그래서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었지만, 또한 그의 종이 주는 옷과 장신구로 몸을 꾸며야 했습니다. 이사악은 레베카의 얼굴을 몰랐지만, 아버지 아브라함이 준 옷과 예물은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자기 처소로 맞아 들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종이 선물한 옷과 장신구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는데 피는 세례를 주며 물은 견진을 상징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죄를 끊을 결심을 하고 견진 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에 합당한 옷을 입습니다. 이 과정 안에서 수없는 넘어짐이 발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 뱀에 물렸습니다. 파라오의 종살이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하느님께 불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들에게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방법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상징하는 구리뱀을 장대에 달아 그들이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들도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덴젤 워싱턴은 “앞으로 넘어지라”라고 말합니다. 대학에서 퇴학 당하고 군대에 들어가려고 생각하며 어머니 미장원에서 앉아 있을 때 한 손님이 종이에 이런 말을 적어줍니다. “소년이여, 넌 세계를 돌아다닐 거야. 그리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거야.” 덴젤 워싱턴은 이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이루어질 때까지 수없이 넘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끝을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목적지를 정하는 것은 세례와 같습니다. 그리고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서는 견진의 과정을 거치며 자신이 세례 받은 사람임을 증명합니다. 그 다음은 자신에게 그러한 믿음을 준 이와 결국 하나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체 성사입니다. 같은 죄로 수천 번 고해 성사 하십시오. 이것이 세례 받았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혼인 예복을 만들어 입는 견진 성사를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걸음마를 멈춘 아기는 인간이 되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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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며칠 전에 ‘하느님의 침묵’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북유럽의 어느 성당에 예수님 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상 앞에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상을 찾았습니다. 예수님 상에는 성당을 지키는 문지기가 있었습니다. 문지기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나는 매일 문지기로 있는데 하루만이라도 사람들이 기도하는 예수님 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문지기의 기도를 들은 예수님은 문지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오늘 나와 자리를 바꾸자. 너는 예수님 상이 되고, 나는 문지기가 되겠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사람들이 어떤 기도를 하던지 응답하지 마라.’ 문지기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문지기는 예수님 상이 되어서 사람들의 기도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어느 부자가 돈 가방을 들고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는 도박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오늘 도박에서 큰돈을 벌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 한 후에 돌아갔는데 그만 ‘돈 가방’을 놓고 갔습니다. 문지기는 가방을 가져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예수님과 한 약속이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에는 가난한 농부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아내가 아파서 병원에 가야하는데 치료비가 부족하다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데 ‘돈 가방’을 보았습니다. 농부는 그것이 예수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가져갔습니다. 문지기는 그 가방은 주인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예수님과 한 약속이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농부가 간 뒤로 한 청년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청년은 곧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야 했습니다. 청년은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다녀 올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청년이 막 나가려는데 부자가 돌아왔습니다. 부자는 청년이 돈 가방을 가져갔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자는 가방을 달라고 하였고, 청년은 자신은 가방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부자는 청년에게 경찰서로 가자고 하였습니다. 청년은 시간이 없어서 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참지 못한 문지기는 부자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가방은 가난한 농부가 가져갔습니다.’ 부자는 농부에게 가서 가방을 찾았고, 청년은 바다로 나가 배를 탔습니다. 그렇게 모든 문제가 해결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화를 내시면서 문지기에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모든 일을 망치고 말았다.’ 문지기는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내가 약속을 어긴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잘못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평화를 이루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문지기에게 무엇이 잘못 된 것인지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결국 돈 가방을 가지고 도박했고 가진 모든 돈을 탕진하였다. 농부의 아내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서 죽고 말았다. 청년은 결국 배를 탔지만 큰 풍랑을 만나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부자는 도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내는 치료를 받아 건강을 회복했을 것이다. 청년은 바다로 가지 않아서 목숨을 구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도 침묵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도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을 구원하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나가는 ‘부활’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 중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 중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침묵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도 좋지만 배고픈 사람이 언제든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은 어쩌면 우리가 시련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똑같이 감옥에 갇혔지만 어떤 이는 불평과 원망으로 시간을 보내지만, 어떤 사람은 밤하늘의 별을 세며 꿈을 키우기도 합니다. 감옥이라는 환경을 바꾸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런 감옥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용기가 더욱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난 과거의 실패와 잘못을 붙잡고 아직 오지 않는 걱정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 약속의 말씀을 간직하고 희망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비록 유배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처지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기억하신다는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시련과 고통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디딤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머물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힘든 사람들은 모두 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주님의 짐은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인은 삶의 먼지를 헤아리며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 빛나는 한 줄기 빛을 찾아 나서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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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2,1-14: 아무나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해 오너라
오늘 혼인 잔치의 비유는 하느님의 심판이 그리스도의 초대와 말씀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을 초대하시는 잔치를 베푸신다. 이 잔치는 기쁜 구원의 잔치이며 무엇보다 이 초대를 통해. 모든 민족이 시온산을 향해 몰려들고 있다.(이사 25,6-10절) 이제 시온산은 모든 이들의 어머니인 교회가 이사야에 의해 미리 시사되고 있다. 둘째로 그 잔치는 잔치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초대받은 사람들 사이의 친밀한 인식과 우정을 지향하고 있다.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이사 25,7절). 씌워진 너울과 덮인 덮개는 하느님께 대한 무지나 영적인 눈멂이다. 이것은 잔치를 통하여 진정한 친교를 통하여 없앤다는 것이다. 또한, 그 잔치는 기쁨과 생명, 평온과 안정을 이룬다. 즉 죽음이 영원히 없어질 것이며 모든 눈물이 닦아질 것이다.(이사 25,8절 참조) 이사야는 이 잔치의 개념으로 모든 민족에게 베푸실 마지막 구원을 예고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자비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당신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대하신다. 그러나 복음에서는 임금의 관대한 초대를 받은 사람들의 태도를 묘사한다. 즉 임금의 초대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구원을 포기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아들의 혼인 잔치를 마련한 임금은 초대받은 자들을 부르러 간 자기 종들을 학대하고 죽이자 자기의 군대를 보내 그 살인자들을 죽이고 살고 있던 동네를 불살라 버린다. 그런데 동네가 불길에 휩싸였다면(7절) 어떻게 길거리에서(8절 참조) 한가로운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까? 동네의 불은 예루살렘 멸망을 암시하며, 그것은 임금의 초대를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종들을 잡아 죽이거나 학대를 가한(6절) 행위에 대한 벌로서 해석한다. 여기에서 종들은 구약의 예언자들과 예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파견하신 사도들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대되어 첫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자칭 올바르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세리와 창녀들”(마태 21,31)과 이방인들이다.
그러나 초대를 받고 그 잔칫상에 앉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주님의 집의 식탁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복음이 요구하는 행동적인 요구에도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쫓겨난다. 그가 침묵을 지키고(12절) 있다는 것은 자기 잘못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혼인 예복은 잔칫상에 “악한 사람 선한 사람”(10절) 모두 모였다는 데서 발견된다. 혼인 예복은 하느님 나라의 결실로 제시되었던 삶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구체적인 정의이다. 아무런 결실을 내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처럼 잘려져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결실을 내야 할 의무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크면 클수록 더 무거울 것이다. 초대받은 것만으로는 구원받기에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14절) 신앙에의 불림이 곧 구원을 결정적인 보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시는”(1티모 2,4) 하느님의 은총에 인간은 최대한 협력해야 한다. 하느님의 초대는 단순한 잔치에만이 아니라, 예복까지도 요구하는 “아들의 혼인 잔치”(2절)의 초대라는 하느님의 더 큰 사랑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시면서 보여주신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사랑의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필립비인들이 베풀어준 경제적 도움에 감사하면서도 자신의 사도적 사명이 어떤 외적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한다. 사도직의 결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신뢰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다른 모든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겪는 환난에 여러분이 동참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4,13-14.19).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사랑의 결실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신자들이 이루는 결실이다. 그들은 그들의 스승을 큰사랑으로 보살펴준다. 또 하나는 바오로 사도가 이루는 결실로 신자들의 사랑에 감사하면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하게 자신이 적응시켜 나감으로써 자신 사도의 의무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가 하느님의 집에, 그 아들의 잔치에 초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에 합당한 응답으로서 행동적인 열매를 맺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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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혼인 잔치의 비유>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마태 22,2-3)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마태 22,5-6)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 22,8ㄴ-9)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마태 22,10)
여기서 ‘하늘나라’는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이고, ‘혼인 잔치’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 나라에서 누리게 될 행복과 기쁨을 상징합니다. ‘어떤 임금’은 하느님이고, ‘임금의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신랑이시라면 신부는 누구일까? 바로 우리, 또는 바로 나, 즉 신앙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 그러나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2코린 11,2ㄴ-3) 신랑이 예수님이고, 신부가 바로 ‘나’이기 때문에, 그 혼인 잔치는 ‘남의 잔치’가 아니라, ‘나의 잔치’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 잔치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공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버지의 집’이고, 아버지의 집은 자녀의 집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는 우리나라이고, 우리 집입니다.
우리는 남의 집에서 벌어지는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에서 벌어지는 잔치를 가족으로서 함께하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신앙인들이 ‘손님’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비유의 내용에 맞춘 표현일 뿐입니다. ‘초대’라는 표현도 뜻으로는 ‘신부가 되라는 부르심’입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신랑이신 예수님의 신부가 되라는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입니다. 응답한 사람은 신부로서 신랑과 함께 잔치의 주인공이 되지만,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사람은 잔치의 주인공이 될 수 없고, 아예 그 잔치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자기가 응답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비유의 전반부에 나오는 ‘잔치에 가려고 하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 또 하느님 나라와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현세의 삶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살다가 허무하게 사라질 사람들입니다. 비유의 후반부에 나오는, “길거리에서 갑자기 초대받아서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 하느님 나라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비유의 표현만 보고서,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유대인들로, 나중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이방인들로만 생각하면, 뭔가 많이 이상해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유대인들의 ‘대타’인가? ‘대역’인가? 만일에 유대인들이 응답했다면 이방인들은 부르심을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이고, 복음을 선포하신 것도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향해서 하신 일입니다. 비유에는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우리는 ‘아무나’가 아닙니다. 그 표현은 ‘사람들을 모두’ 부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유를 단순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부르셨는데, 어떤 사람은 응답하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응답했다고……. 부르심과 응답의 순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는가?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버려지는 처지가 되었는가?”의 차이만 중요합니다.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혼인 예복’ 이야기는(11절-14절), “믿는다면 믿는 사람답게 살아라.”, “응답했다면 응답한 사람답게 살아라.”라는 가르침입니다.
믿고 응답하는 일은 한 번 하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그리고 끝까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은 더 이상의 기회가 없는가?” ‘혼인 잔치의 비유’는 종말의 심판 상황에 대한 비유를 겸하기도 하니까, 비유 안에서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 말씀을 읽고 있는 ‘지금’이라는 시점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믿고, 응답하면, 그리고 신앙인답게 살면, 누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신랑과 함께 그 나라의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응답하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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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에(21,1-11 참조)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이 다시 시작됩니다.(21,23-27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르치시고자 비유를 사용하시는데, 오늘 복음은 앞선 두 개의 비유에(21,28-32.33-44 참조) 이어서 세 번째 비유, 곧 혼인 잔치의 비유를 소개합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잔치’는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표현하고자 상징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의 시온산으로 모이는 날을 종말론적 기다림에서 하느님께서 마련하시는 ‘잔치’라는 표상으로 그려 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로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 시대가 왔음을 알리시며 그 초대에 응답할 것을 요구하십니다.(8,11 참조) 오늘 복음의 비유는 하늘 나라의 선포에(4,17 참조) 대한 엇갈린 반응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하늘 나라의 임금이신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과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당신께서 마련하신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셨습니다. 초대받은 이들, 곧 유다 지도자들로 대표되는 ‘선택받은 이들’은 그분의 초대를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이들에게 폭력을 저질렀습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초대받지 않은 이들을 잔치에 초대하셨고, 그들은 초대에 응답하였습니다. 이는 초대를 거부한 자들이 구원에서 배제될 것이라는 경고로 이해할 수 있으며, 소외된 이들로 대표되는 이들도 하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산에서 계약을 맺은 뒤에 하느님 앞에서 음식을 나누었듯이(탈출 24,11 참조), 마지막 날에 우리도 하느님 앞에 모여 음식과 함께 기쁨을 나눌 것입니다. 잔치의 초대에 응답하는 우리 각자의 자세는 어떠한지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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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허석훈 루카 신부님(한강성당 주임)]
<뭣이 중헌디!>
초대받은 것 자체가 영광일 때가 있습니다. 초대된 자리가 너무 과분한 영광이고, 그 자리가 불편할지도 몰라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지극히 관심 있던 자리에 초대된 상황이라면, 거절은 쉽지 않습니다. 내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이라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큰 행운이고 가슴 벅찬 초대입니까?
이런 우리의 심성을 고려해서 오늘 복음을 보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사람을 초대한 임금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의 반응이 시큰둥합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초대처럼 보입니다. 다시 재차 초대하자, 초대에 응하기는커녕, 짜증스럽게 반응하며 초대하러 온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초대보다 ‘지금의 자기 것’이 더 중요한 상황입니다.
왕이 베푸는 혼인 잔치에 관심이 없다는 징후가 너무도 뚜렷합니다. 초대에 관심이 없는 것이 뭐가 그리 중죄냐 싶으시겠지만, 우리의 생명은 이미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그 초대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 관심이 없을 수 없듯이, 거부할 수 없는 초대가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부여된 생명력의 목적에 시선을 두지 않습니다. 오로지 눈앞에 보이는 인정과 성취에 목말라 본능에 충실하게 살아갑니다. 근거 없는 자부심에 휩싸여 ‘생명력의 근원’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지금의 ‘현실’에 ‘자만감’으로 콧대를 높입니다. 아니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자신을 망치거나 ‘이 이번 생생은 망 망했다!’라고 한탄하며, 지금을 허비하고 미래를 버려갑니다.
같은 맥락에서 잔치에 입장했어도 예복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 역시 비슷한 의미의 상징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일상, 생각에 사로잡혀, 우리를 생명으로 불러 주신 하느님의 뜻과 삶의 의미, 그리고 생명력을 입고 살 수 없는 모습을 비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매일의 미사는 세상을 위해 하느님께서 초대하시는 성대한 잔치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잔치 음식이 별로라고, 가봐야 별 뾰족한 재미가 없다고 평가하며, 하느님의 초대보다 내가 해야 할 일과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 살아가기 일쑤입니다. 설사 하느님의 초대에 간신히 응한다 해도, 자기가 욕망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여 얻기 위해 하느님 초대에 맞는 예복이 아닌 자기 멋대로의 의복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도 많습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다시 한번 하느님의 초대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 봅시다. 그리고 우리 멋대로 입지 않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사하신 옷으로 단장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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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주보》 말씀의 향기
[대전교구 나봉균 요셉 신부님(솔뫼성지 주임)]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내 마음 밭은 어떤 상태입니까? 길?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 그 상태가 어떤지에 따라 성장 가능성과 열매가 달라집니다. 마음 밭 상태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그런데 마음 밭 상태가 아무리 좋더라도 가라지는 얼마든지 함께 자랍니다. 교회 안에 의인들뿐만 아니라 죄인들도 함께 공존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하나인데 구성원들은 부류가 다양합니다. 교회는 거룩한데 구성원들은 상태가 제각각 다릅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렇게 온갖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사람이 전부 구원되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자유의지로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오늘 복음에서 처음 초대받았던 사람들은 각자 자기 일이 우선이었습니다. 물론 놀러 다니느라 초대에 응답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먹고살려고 밭일이나 장사하러 갔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보면 충분히 억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말씀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은 그게 아닙니다. 먹고사는 문제보다 신앙이 우선이라고 단언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이 다른 그 어떤 일보다 우선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이든 때가 있습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다음으로 미루다가 자칫 가장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분기점에서는 어느 한쪽 길만 선택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이제 초대는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이방 민족에게까지 확대되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초대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절박함이 느껴집니다. 덕분에 이제 하느님 나라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거의 공짜 선물과도 같아졌습니다. 그럼에도 최소한 혼인예복을 갖춰 입어야 한답니다. 그렇다면 혼인예복을 갖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제2독서에서 그 단서를 발견합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나그네 여정인 이 세상 삶에 묶여있지 않은 사람만이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 발을 딛고 살면서 묶여있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야 신앙인입니다. 그것이 예복을 갖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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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주보》 오늘의 말씀
[인천교구 오세찬 스테파노 신부님(주안8동성당 보좌)]
<하느님의 초대장>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혼인 잔치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풀고자 하는 임금의 모습. 얼마나 풍요롭고 다채로운 잔치일까요? 아마도 오늘 제1독서에서 묘사된 잔치의 모습처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이사 25.6)로 가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초대를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을 보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갑니다. 초대받았음에도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마태 22.5) 길을 나섭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임금이 보낸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마태 22.6)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들은 왜 임금의 초대를 거부했을까요? 어쩌면 이들에게는 자신의 밭이 잔치가 준비된 궁전보다 더 풍요로운 장소이고, 장사하러 가는 것이 임금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보다 더 큰 기쁨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을 보여줍니다. 초대에 응답하기는 했지만, 혼인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임금의 종들이 혼인 예복을 갖추지 못한 이의 입장을 막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상하죠. 궁전 입구를 지키고 있었던 종들이나 곳곳에서 손님들을 시중들었던 종들은 임금이 발견하기까지 왜 이 사람을 막아서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혼인 예복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직 임금과 이 사람만이 혼인 예복을 갖추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임금과의 관계 안에서만 혼인 예복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풍요로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느님께 초대받은 수많은 사람의 모습 …. 그런데 초대에 반응하는 이들의 모습은 갖가지입니다.
앞선 사람들처럼. 돈을 모으고 세상 안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는 것, 그리고 취미생활을 하며 즐기는 삶이 하느님께서 건네시는 은총보다 더 기쁘고 풍요롭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 중에는 하느님께서 건네시는 혼인 잔치의 풍요로움을 깨닫고 초대에 응답하긴 하지만, 정작 마음속으로 혼인 예복을 준비하는 것에는 나태한 이들도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성실하게 준비하지 않는 것이죠.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하느님과 관계 맺기를 소홀히 합니다.
이번 한 주간, 그동안 나는 예수님의 초대에 어떤 자세로 임했는지 살펴보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그동안 나는 세상의 풍요로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는지, 또 하느님보 다 세상과 관계 맺기를 더 열심히 하지 않았는지 살펴보시고, 만약 그랬다면 이제는 하느님께서 건네시는 풍요로움에 온 마음을 기울이고, 거기에 합당한 복음 실천의 혼인 예복을 지어가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혼인 예복을 통해 나의 희망이 세상의 밭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혼인 잔치에 있음을 세상에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에페 1.17-1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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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제주》 말씀
[제주교구 김석순 마태오 신부님(김기량성당)]
<비행기 표>
서울에서 일을 마치고 본당에 저녁 미사가 있어서 공항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습니다. 그날은 토요일이어서 교통이 혼잡할 것을 예상하고 조금 더 일찍 서둘러 택시를 탔는데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공항으로 가는 길이 막혔습니다. 시간은 째깍째깍 속절없이 흐르는데 택시는 길게 늘어선 차량에 막혀서 앞으로 나아갈 줄을 몰랐습니다. 결국 그날 나는 비행기를 놓쳤습니다. 나에게는 비행기를 탑승할 수 있는 권한인 비행기 표가 있었음에도 그 비행기를 타지 못한 것입니다. 시간이 늦어서 타야 할 비행기를 놓쳐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오늘 복음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비행기 표가 있다고 무조건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세례를 받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자격(=티켓)이 있지만 내 탓으로 하늘나라에 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왕은 아들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이들의 행동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왕의 초대인데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기”(마태 22.5)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 안에서 권세를 누렸고, 그들의 신분과 권위를 빙자하여 백성들 위에 군림하면서 자신들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하늘나라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러 두 번이나 종들을 보냈으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하였으며, 종들까지도 죽입니다.(마태 22.6)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신앙인 대부분이 살아가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매순간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으로의 초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복음의 초대받은 사람들처럼 일상생활에 파묻혀 그 초대를 의식하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례를 받았으니 구원은 당연히 받을 것이라고 방심하고, 사라질 이 세상 것에 목숨을 걸고 매달리면서 영원한 것에 대한 초대에는 등한시합니다. 그러다 내 탓으로 비행기를 놓치는 경우처럼 내 탓으로 구원도 놓치게 될 수 있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초대에 응하지 않자 임금은 거리에서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와 (마태 22,10) 잔칫방을 가득 채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만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당시 사상을 완전히 뒤집고 하늘나라는 유대인이든 이 방인이든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열려있음을 선언하십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잔치에 초대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선물이요 자비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초대에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운 마음으로 응답하는 것, 즉 그에 합당한 예복을 갖춰 입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는 말씀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지만 결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기꺼이 응답하는 사람만이 들어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미사참례, 성지순례, 피정, 교육, 봉사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에 기꺼이 응하는 사람만이 은혜와 기쁨 그리고 영적인 풍요로움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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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 빛의 소리
[광주대교구 윤홍근 바오로 신부님(보성성당)]
<잔치의 초대와 응답>
오 늘 복음은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의 모습으로 하늘나라를 보여줍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을 푸짐한 잔치를 차려놓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누기를 바라시며 간절히 기다리시는 분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하지만 그 초대에 응답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자유이지만, 이 자유로운 선택에 대해서는 책임도 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마련해 주신 그 잔치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구원에 대한 초대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미리 맛보게 하시려고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통하여 드리는 미사로 그 구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계속해서 구원의 잔치에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 초대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요? 초대받은 그 잔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습관적으로 혹은 반복적으로, 귀찮아서 아니면 마음의 정리가 안 되었다는 핑계로 그 잔치를 거르지는 않으셨습니까? 오늘 복음 안에서의 임금은 온갖 정성을 다한 아들의 혼인 잔치에 많은 이들을 초대했지만, 거절한 사람들을 어떻게 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똑같이 처벌하지 않으시고, 처벌 대신 또다시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이제 마련해주신 잔치. 바로 미사에 관한 생각을 하는 데 있어서 초대받은 우리의 입장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준비해 주신 하느님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쉽게 미사를 봉헌할 수 있어서 잊기 쉬운 부분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사람으로 보내 주셨고 아들을 십자가에서 희생시키시고, 그것도 모자라 빵의 형상으로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시려고 합니다. 그렇게 우리를 위한 잔치를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내 입장만 생각했을 때 주일, 혹은 매일 봉헌되는 미사에 참례할 만한 시간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주일에 휴일이 얼마나 된다고 갈 데도 많고 오라는 데도 많은데, 또 세상의 일은 왜 그렇게 나의 발목을 잡습니까! 이렇듯 초대받은 우리의 입장은 늘 핑계의 연속입니다. 이와 같이 나의 입장만 바라보면 초대를 해 주신 분의 모습과 마음은 보이질 않게 됩니다.
이제 우리의 시선을 초대해주신 우리 주님의 마음 안으로 모아보면 좋겠습니다. 구원으로 가는데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의 마음에 머물러 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구원으로의 초대를 소홀히 하는 우리에게 또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께.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며 우리를 위한 구원의 잔치, 미사를 마음 모아 봉헌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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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김현신 요셉 신부님(이동성당 주임)]
<온전한 신앙>
가을! 눈부신 푸른 하늘에 서늘한 바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답고 은혜의 운 시월, 로사리오 성월이자 전교의 달을 지내고 있는 가운데,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성대한 잔치에 비유하는 말씀을 듣는다. 잔치라고 하면 흥겨움과 풍성함이 먼저 떠오르지만, 오늘 말씀에서는 초대받은 사람들이 오려고 하지 않는다. 게다가 초대하는 종들을 반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다는 건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지난 주일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말씀이 떠오른다. 포도원 소작인들이 밭 주인이 보낸 종들을, 심지어 상속자인 아들까지 매질하고 죽었다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오늘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도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한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소작인들은 포도원을 통째로 차지하려는 탐욕을 부렸지만. 오늘 잔치 초대 거부는 좀 다르다. 탐욕이라기보다는 단순한 거부에 가갑다.
이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이나 포도원의 주인이 모든 걸 다 준비했다는 점이다.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한 잔치는 말할 것도 없고, 포도원 주인도 큰일은 다 마친 상태에서 소작인들에게 맡겼다. 이제 그들은 잔치에 가서 먹고 즐기면 되고, 또 포도 열매가 달리길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아주 사소한 준비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소작인이 주인 재산을 노린 것이 탐욕이었듯이,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밭으로 가고 장사하러 가는 것도 욕심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일상적인 경우라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당연한 것들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거나 오히려 앞세운다면 욕심이자 잘못이 될 수 있다.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우리의 첫 자리는 하느님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소작인들이 그 짧은 기다림(수학)을 견디지 못해서, 또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이 예복을 갖추는 그 어렵지 않은 일이 귀찮아서(?)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멀어져 어둠 속에서 헤맨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 생각해 본다.
하느님의 잔칫상은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이고, 그 잔치 초대에 응하는 것은 그 사랑에 참여함을 뜻한다. ‘내 코가 석 잔데 어떻게 한가하게 잔치에나 갈 수 있냐?’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 어렵고 힘들더라도, 희생하고 봉헌하고 버리지 못한다면 온전한 신앙이 될 수 없다.
세상에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일상 안에서 신자답게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산다는 건 사실 배우 어려운 일이다. 오늘 말씀을 차분히 묵상하면서 우리 모두 세속적인 의미의 잔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잔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지금부터라도 ‘복’을 준비하는데 인색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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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빛》 복음 묵상의 향기 ‘말씀’
[원주교구 성호영 다니엘 신부님(서원주성당)]
<가을걷이를 앞둔 농부의 마음으로>
점점 더 깊어가는 가을이라는 계절을 온몸으로 느끼며, 얼마 전까지 연거푸 시원한 물을 마시며 보냈던 뜨거웠던 여름날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시나브로 변화되는 계절의 흐름 속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조심스럽게 발견하게 됩니다. 멈추어 있지 않고 쉼 없이 변화되는 바로 그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하느님의 모습을 말입니다.
이러한 ‘변화의 섭리’에 가장 민감한 이들은 누구일지를 생각해봅니다. 어느 누가 그 섭리와 관계없이 살아갈 수 있겠냐마는, 그래도 땅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농부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됩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것만큼이나, 좋은 날씨와 환경 역시도 농사일에 큰 몫을 차지합니다. 그렇기에 변화무쌍한 날씨에 대응하며, 변화되는 계절의 흐름을 읽어가며 또 다른 생명들을 키워냅니다. 늘 모든 신경을 거기에 두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국 하느님이 주시는 만큼만 욕심내지 않고 얻게 되는 것이 또한 농사일입니다.
본당 건축기금을 마련해보고자 사도회장님과 임원분들을 중심으로 본당 모든 교우가 의기투합하여 밭에 옥수수와 고구마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농사일은 철저히 하느님이 주시는 것에 대한 ‘받아들임’이었습니다. 우박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겨진 망가진 농작물들을 바라보면서도, 이미 많은 것들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었으니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 농부의 마음이었습니다. 열심히 가꾸고 돌보았지만, 날씨와 환경이 좋지 않아 기대했던 것만큼 수확물을 얻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나마 내 손에 쥐여주신 것만이라도 감사하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농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 농부의 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을 생각해봅니다. 한 임금이 혼인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자기 아들의 혼인을 모든 이들이 함께 기뻐해 주기를 바라며 잔치를 열었습니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된다는 우리네 옛사람들의 말씀처럼, 그가 다스리는 나라의 모든 백성이 기쁨을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그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이 왕의 초대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왕이 마련한 이 기쁨의 자리를 거부합니다. 심지어 그들을 부르러 온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염치가 없다’라는 표현이 이 사람들을 더 잘 표현하는 말 같습니다.
‘부끄러움(치)’이라는 한자어를 보면 귀(이)와 마음(심)이 합쳐져 있습니다. 서로의 말과 말이 만나고,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만나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당신의 말과 마음이 아닌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이런 질문을 던지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그대들의 귀와 마음을 언제까지 닫은 채로 살 것인가?’ 하느님의 부르심이 온 세상 모든 이들을 향하고 있지만,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선택되는 이들이 적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건 아닐까요? 이것이 오늘의 나의 모습을 뒤돌아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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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정이》 강론
[전주교구 황규진 세례자 요한 신부님(어양동성당)]
<하느님은 3등입니다!>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1등은 … 내가 하고 싶은 일, 2등은 … 내가 해야 하는 는 일, 3등은 … 하느님 만나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해야 할 일도 다 끝내고, 그 후에 여유가 있으면 하느님을 만나 줍니다.
하느님은 3등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도 하느님은 3등입니다. 내 힘으로 한 번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하고, 그나마도 안 될 때 하느님을 부릅니다.
하느님은 3등입니다. 거리에서도 하느님은 3등입니다.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나 자신, 다음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그다음에야 저 멀리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3등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나는 1등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부르기만 하면 도와주십니다. 내가 괴로울 때는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오십니다. 아무도 내 곁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 홀로 내 곁에 오셔서 나를 위로해 주십니다.
하느님께 나는 언제나 1등입니다. 나도 하느님을 1등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고비 때마다 손을 꼭 붙잡은 내게 1등으로 가까이 계신 하느님이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1등으로 생각하시는 하느님을 나도 1등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사는 게 바쁘면, 사는 게 힘들면, 사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이것저것에 관심을 두다 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기도하는 것, 성당에 가는 것은 뒷전이 됩니다. ‘바쁜 일이 끝나면 성당에 가야지!’ 하지만 바쁜 일은 끝나지 않습니다. ‘이 힘든 일이 마무리되면 가서 성사도 보고 다시 기쁘게 살아야지!’ 하지만 힘든 일은 계속해서 밀려듭니다. ‘이것만 하고 기도해야지! 하지만… 나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세상의 유혹은 여전히 나를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갑니다.
우리는(자칭) 천재입니다. 이래저래 생각하고 재면서 나름대로 1등부터 순번을 매겨놓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게 최고의 선택인 것처럼 자부하며 살아가지요. 그런데 그 순번이 어그러져 내 삶이 실타래처럼 제대로 꼬인 후에야 그 선택의 순번을 고치기 시작합니다. 그럴 바에야(남들 보기에) 바보처럼 하느님을 1등으로 해 놓으면 어떨까요? 왜? 하느님에게는 만사를 제쳐놓고 내가 1등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느님은 대체 몇 등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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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주보》 말씀
[군종교구 윤가훈 미카엘 신부님(백두산성당 주임)]
<“무엇을 꾸며야 하나”>
바람이 선선한 가을 날씨입니다. 선선해서 어디를 가도 좋은 날씨가 바로 이때쯤이죠. 사실 이맘때쯤에는 사제품을 준비하는 부제님들이 첫 제의를 맞추기 바쁩니다. 서품식과 첫 미사 때 입고 한생 입을 거라서, 신경을 많이 씁니다. 저는 좀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음… 좀 많이요.
제의에 이렇게 저렇게 의미 부여도 많이 하고 싶고, 또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이것도 저것도 해야 한다고 말도 많고, 너무 호들갑을 좀 떨었나 봅니다. 그때쯤에 한 동기 부제 친구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야. 네 마음과 영혼을 좀 그렇게 예쁘게 꾸며라.”
아, 냉정하고 합당한 통찰이었습니다. 동기의 입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시나 봅니다. 어떻게 꾸밀까 하는 외적인 것에만 집증하고 있었던 제게 아주 신선한 충격이 되었습니다. ‘그래 … 진정 무엇을 꾸며야 할까.
오늘 복음의 혼인 잔치에는 여러 사람이 초대됩니다. 잘난 이나 부족한 이나, 가난한 이나 부유한 이나 상관없이 모두를 부릅니다. 모두에게 열려있었지요. 그러나, 단 한 사람을 내쫓습니다.
바로 혼인 예복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었죠. 어찌 됐든 다른 이들은 모두 각자의 예복을 입고 왔다는 말입니다. 갖춰야 할 것을 갖춘 것이죠. 그렇습니다. 하늘나라에 우리가 모두 초대받았지만, 동시에 갖춰야 할 각자의 몫, 각자의 예복이 있는 겁니다. 자, 그럼 물어봐야지요. 우리의 예복은 어떻게 꾸미고 있나요.
주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믿음’이라는 고운 천 위에, 그분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선행’의 보석도 달아보고, ‘기도’로 수도 놓아보고, ‘희생’의 띠도 두르고, 그렇게 하늘나라를 위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아름다운 예복처럼 꾸몄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하느님을 마주 뵈올 때 그 수많은 선행과 희생과 기도와 사랑들이 반짝반짝 아름답게 빛나길 바랍니다. 그렇기 위해선 이 땅에서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지금 그 예복을 꾸며야겠지요.
“우리 마음과 영혼의 예복은 어떻게 예쁘게 꾸미고 계시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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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부산》 강론
[부산교구 김성규 안드레아 신부님]
<“어서 잔치에 오시오.”>
10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단풍 나들이와 함께 잔치가 많습니다. 혼인 잔치도 빼놓을 수 없죠. 그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초대장을 받았을 때의 기분으로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그것은 그 기쁨의 잔치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억해 준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초대하는 사람, 특별한 잔치일 때는 그 기쁨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초대는 세상 기준에서 볼 때 부담이 많습니다. 모르고 사는 게 더 편할 때가 많다고들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편하고 욕망에 부합하는 생활, 계율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우상에 빠져 모세의 법을 외면한 이야기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쁘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마련하신 찬양, 말씀, 성찬의 식탁인 미사를 기다리기보다는 귀찮아하고 못 들은 체하지는 않습니까?
오늘 복음 말씀을 다시 묵상해 봅시다.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어서 잔치에 오시오.’ 그러나 초대받은 이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불렀으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래서 초대받은 자들이 마땅하지 않아,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하여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와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그러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고는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14 참조)
하느님 나라의 임금이신 하느님께서 예언자들과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마련하신 잔치에 묵시록 저자는 전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자. 어린양의 혼인날이 되어 그분의 신부는 몸단장을 끝냈다. 그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고운 아마포 옷을 입는 특권을 받았다.” 고운 아마포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입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몹시 19.7-9) 예복을 갖추는 것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입니다. 잔치의 예복은 구원의 신비를 누리는 것이며, 예복을 갖추는 것은 사랑과 봉사와 나눔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선택된 사람이 되는 쉬운 방법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잔치에 사랑 을 실천하며 기쁘게 참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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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주보》 말씀 담기
[수원교구 조윤호 윤호요셉 신부님(봉담성당 주임)]
<고해성사가 어렵다고?>
연중 제28주일인 오늘 복음은 ‘혼인 잔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혼인 잔치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커다란 의미가 있었습니다. 손님도 아무나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심사숙고하여 초대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에 거절한다는 것은 초대자에 대한 무시이며 존중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초대를 받으면 응당 응해야 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혼인의 주최자는 혼인 잔치를 위해 최고의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참석하는 이들도 그에 걸맞은 예의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혼인 예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처음 초대받은 이들은 임금의 청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너그러운 임금은 또다시 그들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가관입니다. 다시 한번 임금의 청을 거절한 것도 놀라운데, 개인적인 일을 하러 떠납니다. 임금이 재차 요구한 사항을 가볍게 무시하며,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는 분위기를 풍기는 것입니다. 그에 진노한 임금은 그들을 처형하게 됩니다.
복음의 ‘혼인 잔치’는 이런 배경을 담고 있습니다. 초대받은 이들은 유다인이며 혼인 잔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임금이신 하느님께서 수차례 혼인 잔치에 초대하는 것은, 수많은 예언자를 통해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느님의 초대를 의미합니다. 자비로운 하느님의 수많은 부름에 응답하지 않은 이들은 누리기로 약속되었던 천상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불타는 불구덩이에 던져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후 임금의 행보는 놀랍습니다.
이제 임금은 혼인 잔치 초대 대상자를 ‘아무나’로 확대합니다. 유다인에게만 유보되었던 구원이 ‘모든 이’에게로 확대되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때 임금은 참석한 사람들 각자와 인사를 나누다 어떤 이를 만나게 되는데, 그 사람은 혼인 예복을 갖추지 않았습니다. 모든 이가 초대받았지만, 최소한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그 사람은 이전의 초대를 거부한 이들과 같은 처사를 받게 됩니다.
교회는 이것을 미사에 비유해 설명합니다. 혼인 잔치는 미사이며 혼인 잔치의 주최자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최소한의 약속인 혼인 예복은 고해성사를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초대해주시고, 부족한 모든 부분을 채워주십니다. 하지만 단 하나, ‘혼인 예 복’만은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그 혼인 예복은 고해성사입니다. 어쩌면 가장 작은 약속이지만 신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이 고해성사이고, 반대로 가장 쉽고도 최고의 준비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고해성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죄인이 되어 판사 앞에 나아가는 마음보다는, 기쁜 마음으로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고해성사에 임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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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안동》 말씀의 샘
[안동교구 이희정 요셉 신부님(울진성당 주임)]
<성실히 응답하는 삶이 되길…>
1. 오늘 복음 말씀은 <혼인 잔치의 비유> 말씀입니다. 그야말로 한 나라 왕자의 혼인 잔치이고, 왕이 준비하는 잔치이니, 성대할 수밖에 없고,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왕자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면,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고, 만사를 제쳐두고 잔치에 참여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초대받은 사람들은 저마다 왕의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어떤 사람들은 왕이 보낸 종들을 매질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왕은 화가 났습니다. 군대를 풀어 살인자들을 죽이고, 그들이 사는 동네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리고 혼인 잔치는 거리를 다니던 다른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왕이 손님들을 보러 나갔더니,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임금은 그의 손발을 묶게 하여,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쫓았습니다.
2. 초대받은 사람들은 왕의 초대에 냉담했지요. 그들은 왕의 초대보다도 세상의 일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평소 하던 대로 밭에 일하러 가고 장사하러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에는 왕에게 적개심을 가져 왕이 보낸 종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한편으로 왕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내쫓은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리를 지나가다 초대를 받고 잔치에 참여했기 때문에, 미처 예복으로 갈아입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초대를 받은 사람은 그에 합당한 자세가 요구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왜 부르신 것일까요? 우리가 당신께 대한 믿음 안에서 당신의 뜻에 따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세상일에만 관심을 가지며 산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왕의 초대를 받고도 일상생활의 바쁨 때문에 초대를 거부한 냉담한 이들과 같을 것이고, 하느님의 초대를 거부한 사람들의 말로는 뻔한 일일 것입니다.
4. 삶이 저마다 힘들지만, 신앙이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지요. 우리가 바쁘게 정신없이 살아가는 동안 세월 또한 빠르게 흘러갈 것이고, 우리의 몸 또한 약해져만 갈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는 뻔한 사실 아닙니까? 내가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내 생명과 내 삶과 이 세상의 주인은 바로 하느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감사의 마음으로 성실히 응답하는 은혜로운 우리의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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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 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혹시 오래된 영화(1967년 발표)이지만,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란 영화를 보신 분 계시겠지요. 평범하고 쾌활한 백인 처녀 조이는 여행 중에 만난 존과 사랑에 빠지게 되지요. 존은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젊은 의사이지만 전처와 아이가 사고로 죽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그가 흑인이라는 점입니다.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조이의 부모는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 결혼한답시고 데리고 온 존을 보고 기겁합니다. 그런 갈등 속에 저녁 식사에 존의 부모도 초대받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결혼하겠다는 며느리가 백인 처녀임을 안 존의 부모 반응도 조이의 부모와 마찬가지입니다. 대화를 통해 결혼 문제를 이성적으로 해결하고자 고심한 끝에 결혼하느냐 마느냐는 결정은 두 사람의 사랑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를 통해 이들은 모두 유쾌하게 저녁 식사를 시작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영화 제목처럼 애당초 초대받지 않은 손님과 같았지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초대받은 손님이 된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인 응답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에 기꺼이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진정 초대받은 손님으로써 혼인 잔치에 적당한 예복을 입고 있나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잔치에다 비유하신 것은 하느님이 거저 베푸시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잔치는 베푸는 사람이 있어야 잔치는 열립니다. 귀중한 분이 베푸신 잔치에 초대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고,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 요즘도 청와대에서, 아니 이젠 용산에서 사람들을 초대하겠지요. 초대받은 사람은 가문의 영광이라 생각하고 떠나올 때 선물로 준 대통령 휘장이 새겨진 시계 등등을 자랑하잖아요.)
그런데 복음에 보면, 처음 초대받은 사람들은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음에도 오지 않았습니다. 왜 그들은 오지 않았지요? 초청을 받은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자기 밭으로 일하러 갔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갔고, 또 어떤 사람은 아예 심부름하러 온 종들을 잡아 때리기도 하고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2,5참조) 처음 초대받은 사람들은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했지요. 그들은 혼인 잔치에 초대받음에 감사하고 감격하기보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하찮은 일로 생각하여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하느님의 일보다는 자신들의 일상사가 더 우선이었고,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더 많은 흥미와 무게를 두고 있었기에 천상적인 일에 등한시했던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부류는 더 심하게 초대를 귀찮게 여기거나 불쾌하게 생각했으며, 심지어 적대감에서 초대하러 부르러 온 일꾼을 죽이기까지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양심을 속이며 신앙적인 가치를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일상적인 생활과 삶에 충실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일 때문에 영적인 일이 무시당하거나, ‘최선’이 아닌 ‘차선’이 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일에 충실함 때문에 영적인 일을 등한히 하거나, 신앙이 내 삶의 우선순위에 있어서 차선이 되어버린다면 신앙생활은 형식적인 차원에 머물거나, 취미 활동에 머물게 되고 주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은 ‘능력을 주시는 하느님으로 힘입어’ 무슨 일이든 더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충실히 자기 일에 몰두할 것입니다. ‘한량없이 풍요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첫 부류는 소수의 특정 대상을 초대했다면 두 번째로 초대된 부류는 불특정 다수인 점이 차이가 있습니다. 신분 여하, 선인과 악인 등 구분하지 않고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초대받았고, 초대받은 모든 사람은 여하튼 그 잔치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된 예복을 입고 입장했었나 봅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 중에서 유독 한 사람만이 혼인 잔치에 적합한 예복을 입고 있지 않아 내어 쫓김을 당했다고 합니다.(22,11참조) 물론 성서는 “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22,12)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것은 느닷없는 질문에 당황한 나머지 말문이 막혀 버렸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의문은 ‘왜 그 사람만이 예복을 입지 않고 참석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 사람에게 맞는 옷이 없었거나, 게을렀거나, 아니면 그 옷이 싫어서 입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문제는 잔치에 걸맞은 옷을 갈아입고 잔치에 참석한다는 것은 초대받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초대한 임금에 대한 마지막 예의의 표시라고 봅니다. 자기 자신 좋을 대로 혹 마음 대로가 아니라 초대한 임금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표시라고나 할까요!! ‘재미있는 것은 가수 ’이효리‘가 예전 결혼식장에 가죽으로 된 치마를 입고 참석해서 입방아에 올림 당했다고 하더군요. 예복이란 무엇을 상징하며, 왜 그토록 예복이 중요할까요? 예복이란 단지 외적인 옷이 아닌 신분이나 역할을 표시하기에 장소나 모임의 성격에 맞추어 옷을 입어야 하며, 예복은 때론 그 사람의 의식과 마음 상태를 상징한다고 봅니다. 성 아오스딩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거짓된 사랑을 지닌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초대하신 분에 대한 사랑을 감사하기보다 마지못해 거짓된 사랑으로 응답하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갈 때 우리는 어떻게 하지요!!! 가장 예쁜 옷으로.
여기서 예복은 하느님께서 입혀 주시는 ‘구원의 빛나는 옷’ (이 61,10)이며,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선포하신 ‘회개와 믿음’ (로 10,9-10)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예복을 입은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수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구원은 곧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 은총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구원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며, 이를 위해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참된 신앙인이며 회개의 삶을 사는 사람임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 덧붙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22.14)라고 결말짓습니다. 임금이 처음에 손님들을 초대했지만, 초대받은 대다수 사람은 거절하여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이 임금의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무관심했으며 심지어 적개심과 함께 경멸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길 원한다면 자기를 버리고 주님의 초청에 응하는 감사하는 마음과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낡은 옷을 버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새 예복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 예복은 은혜로운 이 땅에서부터 갈아입어야 잘 맞게 되고 어울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복음환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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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저희의 빛이신 주님, 찬미받으소서>
성경은 “인간은 살아서 하느님을 뵐 수가 없다”는 말을 반복하여 선포합니다. 하느님의 빛 앞에 인간은 감출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때문에 스스로의 어둠에 절망한 인간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외칩니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이사야 예언자가 뵙고 엎드려 떨었던 하느님, 길 가던 바오로 사도를 땅바닥으로 내리꽂으며 두 눈을 멀게 했던 그 강력한 하늘의 빛은 모두 하느님의 위용 앞에 선 인간의 허약함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하여 인간은 다만 주님 앞에 꿇어 고백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거꾸러지고 엎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비할 데 없이 강력한 빛 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어둠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는 시커먼 어둠밖에 없다는 사실에 진저리치며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지난달, 주님 앞에 벌거숭이가 되어, 오직 자비에 기대야 했던 며칠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 제 안의 어둠은 두려움이었고 그에 따른 떨림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겁먹은 제 초라함을 아프게 바라보며 마음이 꺾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볼품없는 죄인을 향한 하느님의 약속이 힘이 됐습니다. 친히 그분께서는 제 모든 죄의 너울을 찢어주셨고 환한 빛으로 인도해 주고 계심을 절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진정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5)는 말씀에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처럼 “죄인”임을 상기하되 “하느님께서 굽어 살펴주시는 죄인이며 또한 주님의 돌봄을 받는 죄인”임에 감격하는 복된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이유만으로 갖은 비판을 감내해야 했고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결국 죽임을 당하는 순교자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바란 것은 오직 자신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 훼손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힘을 잃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말과 행동을 단속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희생시키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1베드 2,9)인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이 분명해집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기쁨을 느꼈습니다. 왕족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오직 하느님의 뜻에만 집중하였던 사람, 마침내 처참하게 순교를 당했던 이사야 예언자에게 건네는 ‘선물’로 오늘 독서말씀을 건네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사야 예언자가 살아낸 믿음의 삶이 너무나 고마워서, 그날 회당에서 세상을 향해 선포하신 첫 말씀으로 이사야서를 고르셨던 것이라는 생각마저 했습니다.
또한 오늘 제2독서를 고르시면서 얼마나 신바람이 나셨을까 싶었습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이 다만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임을 가르치는 바오로 사도의 지혜로움에 박수를 치셨을 것만 같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로써 우리는 빛이신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빛의 자녀가 됐습니다. 어둡고 죄 된 마음은 주님의 빛으로 환해졌습니다. 세상의 맹목적인 욕망을 주님께서 주신 빛으로 밝혀 이겨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곳에서 뵙는 주님께서는 내 얼굴의 눈물을 손수 닦아 주실 것입니다. 손수 내 얼굴의 너울을 찢어내고 환히 웃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주님께서는 하늘 잔치에 어울리는 언어와 행동과 표정을 요구하십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잔치에 참석하는 이들이 그 자리에 걸맞도록 자신을 치장하는 것은 마땅한 예의이니까요. 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주인과 하객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처되는 것이 맞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삶이란 잔치의 주최자이신 하느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의 삶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가꾸고 단장할 수 있는 절호의 때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잔치에 합당하도록 자신을 치장하는 시간이 곧 인생임을 감지하게 됩니다.
감사하게도 생명의 빛이신 하느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 삶의 문제가 지닌 실체를 낱낱이 밝혀주고 계십니다. 그 말씀을 알고 있는 우리이기에 죄로 얼룩진 옷을 벗을 수 있습니다. 변명에 급급하고 책임을 남 탓으로 돌리던 궁색한 삶에서 돌아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향해 큰 걸음을 내디딜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이정표가 되어주신 모든 성인의 도움으로 우리는 천국을 향한 길에서 헤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당당하게 천국 잔치에 초대된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날 그 자리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며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았으며 모든 것이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음에 환호하고 소리 높여 찬미를 드릴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의 심지는 천국에서 아버지를 뵙고 성모님과 예수님을 만날 때를 기억하여 살아가라는 당부라 믿습니다. 늘 말씀에 빗대어 삶을 돌아보며 고쳐 살라는 부탁이라 새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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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행복한 사람>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처지, 상황에 행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주변 환경에 있지 않고 오히려 내면에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멀리 부산에서 충북 음성까지 올라온 여자 친구에게 ‘힘들었겠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올라오는 동안 너무도 설레고 기뻤습니다. 친구를 만난다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어디에 두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는 것이 행복이고 보상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 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성 요한 비안네는 “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행복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 안에 있음이 행복입니다.“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큰 소리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참된 행복은 말씀을 행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채워져서 행복하기보다는 행하는 그 자체가 곧 행복입니다.
성모님이 모든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것은 훌륭한 아들을 낳아 젖을 먹여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속에 간직하며 되새기고 순종하며 지켰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고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실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들이 이룬 영광이 어머니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머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주지시켜 주고 있습니다.
말슴을 듣지 않고서는 성모님도 올바로 공경할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일생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사신 분입니다. “성모님은 경청의 달인이셨습니다. 또한 성모님은 그 말씀의 기쁨을 몽땅 전달해주십니다.”(교황 프란치스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수고와 땀도 기쁨입니다. 어렵고 힘든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는 일을 할 수 있음이 곧 행복이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시련 중에라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그치지 않는 한 행복이 거기에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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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경외과의사가 쥐를 가지고 행복 중추에 관한 연구 실험을 했습니다. 먼저 쥐의 행복 중추에 전극봉을 삽입했습니다. 그리고 쥐들이 앞의 레바를 누르면 자기의 행복 중추를 자극할 수 있게 했습니다. 즉, 자기 행복(쾌락)을 스스로 선택하게 한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기 조절을 하면서 레바를 눌렀을까요? 쥐는 계속해서 레바를 눌렀습니다. 그런데 조금도 쉬지 않고 계속 누르는 것입니다. 결국 정신 없이 누르느라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쾌락에 사로잡혀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인간은 다를까요? 쾌락에 빠져서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합니다. 쾌락이 주는 기쁨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 역시 계속 쾌락 레바를 누르고 있습니다.
계속 행복감을 느낄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지독한 우울감에 빠지게 됩니다. 행복 중추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우울 중추가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 중추의 자극이 계속 강하게 주어지면, 바로 옆의 우울 중추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100% 행복으로 보이는 쾌락을 목표로 삼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쾌락에서 벗어나는 삶이 중요했습니다. 순간의 만족뿐인 것을 계속 가지기 위해 행복 중추 레바를 계속 누르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참 행복을 가르쳐주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의 뜻인 사랑에 집중하며 부작용 없는 진짜 행복을 만들어야 합니다.
임금이 종들을 보내서 왕자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초대장은 미리 보내는 것이 당시 풍속이었고, 임금의 손님이니 그 지위는 전혀 낮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잔치에 오지 않습니다. 임금이 다른 종을 보내서 다시 초대했지만, 이 초대에도 응답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 종들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임금의 권위를 부정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왜 그들은 있을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된 것일까요? 임금의 뜻이 아닌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살아야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임금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는 하느님과 사람들이 맺는 새로운 계약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초대에 응답하지 않는 것은 계약을 맺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임금이 군대를 보내서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리게 됩니다.
우리도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것이 더 좋다면서 이 초대를 무시하고, 하느님의 권위를 무시했던 것이 아닐까요? 또한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은 예복을 입고 와야 하듯이, 하느님 나라의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고자 성실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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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 오시어 잔치가 이미 열렸네>
마태오 22,1-14 (혼인 잔치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그분 오시어 잔치가 이미 열렸네>
그분 오시어
잔치가 이미 열렸네
믿음을 사는 이가
한데 어울리는
믿음의 잔치가 열렸네
그분 오시어
잔치가 이미 열렸네
희망을 사는 이가
함께 꿈 이루는
희망의 잔치가 열렸네
그분 오시어
잔치가 이미 열렸네
사랑을 사는 이가
맘껏 사랑하는
사랑의 잔치가 열렸네
그분 오시어
잔치가 이미 열렸네
기쁨을 사는 이가
더없이 기뻐하는
기쁨의 잔치가 열렸네
그분 오시어
잔치가 이미 열렸네
살림을 사는 이가
더불어 살아가는
살림의 잔치가 열렸네
그분 오시어
잔치가 이미 열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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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관심과 무관심>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을 위해 잔치를 베푸시리라.”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오늘 독서는 주님께서 산 위에서 잔치를 베푸시고 민족들을 초대하는 얘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비유입니다.
이 둘을 하나로 묶으면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혼인 잔치를 산 위에서 차리고 모든 민족의 사람들을 초대하신다는 얘기인데 복음에서는 이 잔치에 먼저 정중히 초대받은 사람은 오지 않아 벌을 받고 길거리에서 불러온 뜨내기는 예복을 입지 않아 벌을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오늘의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이런 상상을 해봤습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와 죽음을 앞둔 늙은이가 있는데 누가 이 잔치에 응하고 누가 거절할까?
이런 상상을 하다 보니 또 제가 자주 하는 질문이 생각났습니다. 천당 가고 싶으신 분 있으면 손드시라고 하면 모두 손을 드는데 지금 당장 가고 싶으신 분 있으면 손을 드시라는 질문 말입니다.
이때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창창한 젊은이와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 중 누가 선뜻 손을 들겠습니까?
젊은이일까요? 늙은이일까요?
오늘 마태오 복음과 같은 내용의 루카 복음을 보면
초대에 거절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방금 장가들어서 갈 수 없다고 하는데 지금 자기 연애 사업이 한창인 젊은이가 남의 결혼 잔치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앞으로 행복하게 살려면 취직해야 하고 그래서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데 이미 취직하고 결혼도 하는 다른 사람의 행복한 결혼 잔치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자기는 취직 못해서 결혼도 못하고 있고 그래서 이미 화가 나 있는데 다른 사람의 행복한 결혼 잔치에 오라고 하면 더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남의 행복한 결혼 잔치에 관심이 없고 오히려 화가 나는 젊은이는 늙은이보다 하늘나라의 임금님 아들 결혼 잔치에는 더욱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젊은이가 이런 것은 그래도 이해해줄 수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젊은이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초대받은 늙은이가 관심이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초대가 아직도 달갑지 않고, 아직도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들 걱정도 좀 더 하고, 손주도 좀 더 봐줘야 하고, 나는 아직도 이 세상에서 쓸모가 있으니 더 일해야 하고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문제지만 초대에 응하려고 해도 준비가 안 된 경우도 문제입니다. 갑자기 초대받고 얼떨결에 거절하지 못하고 가긴 갔는데, 혼인 잔치에 갈 예복이 준비되지 않아 그냥 간 경우입니다. 부조금은 없더라도 예복은 걸치고 가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하늘나라 혼인 잔치의 예복입니까?
돈입니까? 공로입니까? 이 세상 업적입니까?
제 생각에 마음입니다. 무관심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관심이란 무엇에 관한 마음인데 하늘나라에 관한 무관심이 아니라 관심입니다.
그래서 초대에 감사하는 마음이고, 더 나아가서 사랑과 갈망입니다. 하느님을 늘 사랑하고 하늘나라를 늘 그리워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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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 나라 잔치에 초대 받은 삶>
– “하느님의 자녀답게!”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23,1)
오늘은 연중 제28주일 전례력을 봐도 이제 한해가 서서히 저물어 가는 듯 싶습니다. 삶은 저물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물어가는 것이요, 노화의 여정이 아니라 성화의 여정이란 말이 고맙게 떠오릅니다.
“준비가 다 되었으니 잔치에 오라고
초대 받은 사람들에게 전하여라.”
어제 저녁기도 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이자 오늘 아침기도 성무일도 즈카르야의 노래 후렴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 잔치가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 언젠가 죽어서 가는 하늘 나라 잔치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초대 받은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석관동 성서 백주간 공부하는 팀 23명이 오전 피정을 하고 떠났습니다. 미사중 퇴장 성가는 애국가 1절을 청했습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가사 내용이 있어 부를 때 마다 기도와 같고, 성가와 같은 느낌입니다. 또 예외없이 내 삶의 여정을 일년사계로 압축했을 때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점검톡록 해봤습니다.
거의 예외없이 가을 인생에 걸친 분들이었습니다. 이런 확인이 하루하루 선물같은 인생을 소중히, 환상이나 거품을 걷어내고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 잔치의 삶을 살게 합니다. 자주 즐겨 고백하는 예닮기도중 한 연이 생각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그렇습니다. 눈만 열리며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하늘 나라 잔치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으로 시작되는 복음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바로 임금이 상징하는 바는 하느님이고 그의 아드님의 혼인잔치가 상징하는 바, 이 거룩한 미사잔치입니다.
이미 하늘 나라 잔치를 앞당겨 살라 선물로 주어지는 성체성사 미사잔치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일상의 평범한 삶의 자리에서 하늘 나라 잔치의 삶을 살게 합니다. “고해인생”중에도 “축제인생”을 살게 합니다.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하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을는지요. 셋으로 나눠 묵상했습니다.
첫째,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오늘 지금 내 삶의 자리가 하늘 나라요 초대받은 삶임을 자각하여 초대에 응답하여 기쁘게 감사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기 달랐습니다. 새삼 하늘 나라 잔치의 행복은 초대에의 응답이자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갑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임금이 보낸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니 무지의 극치입니다. 정말 무지에 눈먼 사람들이요 그 좋은 절호의 기회를 선택하지 못하고 놓쳐 버립니다. 그대로 무지한 인간의 실상을 보는 듯 합니다.
초대 받았다 하여 구원이 보장된 것은 아닙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참으로 감사하고 은혜롭게도 주님께 초대받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초대 받은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요?
둘째, 늘 하늘 나라 꿈을 희망을 생생히 지니고 사는 삶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를 사는 이들은 꿈의 사람들이요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모든 예언자들이 성인들이 바로 하늘 나라의 꿈과 희망을 생생히 앞당겨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실현하며 살았던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하늘 나라 꿈의 정체를 보여 줍니다.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차려주신 하늘 나라 잔치이니 세상 모든 의인들에게 활짝 열려 있는 구원의 하늘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풍성한 하늘 나라 잔칫상의 모습입니다. 이어지는 묘사도 얼마나 고무적이요 위로와 힘이 되는지요!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 치워 주시리라.”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하늘 나라를 앞당겨 실현시켜주십니다. 무지의 너울을, 덮개를 치워주시고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회개한 우리의 수치를 치워주십니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든 성전에서 미사드릴 때 마다 다음 이사야 예언자의 가르침대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주님의 손이 여기 머무르신다.”
얼마나 멋진 고백인지요! 오늘 지금 여기 하늘 나라 삶의 자리에서 앞당겨 희망의 하느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하늘 나라 꿈의 실현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런 하늘 나라의 꿈이, 희망이 우리 삶의 원동력입니다.
셋째, 늘 깨어 하늘 나라 잔치에 맞같는 삶을 사는 노력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있는 삶입니다. 한두번 초대가 아니라 날마다 죽을 때까지 초대에 응답하는 삶이요 늘 예복을 갖춰입은 삶입니다. 초대받았다하여 구원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선한사람 악한사람이 함께 공존하는 우리 삶의 자리요 하늘 나라 잔치의 교회 공동체입니다. 판단은 주님의 몫이고 우리는 각자 하늘 나라 잔치에 맞같은 삶의 예복을 입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던 자는 불행하게도 쫓겨납니다. 이는 자업자득 스스로 자초한 재앙이니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지요! 유비무환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내 삶의 예복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무슨 삶의 예복입니까?
진선미眞善美의 예복이요 신망애信望愛의 예복입니다. 산상수훈의 모든 가르침입니다. 죽을 때까지 늘 깨어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전우애戰友愛를, ‘주님의 학인’으로 학우애學友愛를, ‘주님의 형제’로서 형제애兄弟愛를 발휘하며 경천애인敬天愛人과 지구사랑의 삼중계명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멋진 모범이 제2독서 바오로입니다. 참으로 언제 어디서나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늘 나라를 앞당겨 살았던 참 멋진 대자유인 바오로가 우리의 영원한 하늘 나라 삶의 롤모델입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바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살만한 세상입니다. 주님이 계시고 교회 공동체가 있고 매일미사 하늘 나라 잔치가 있고 좋은 도반들이 있으니 살 만한 세상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하늘 나라의 행복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의 초대에 응답해 하늘 나라 잔치의 예복을 갖춰입고 다시 새롭게 하늘 나라 천국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께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시편2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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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22,2)
<초대와 응답!>
오늘 복음(마태22,1-14)은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종 함께 먹고마시는 잔치에 비유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인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초대’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어떤 임금이 혼인 잔치를 준비해 놓고 사람들을 초대하는데, 사람들이 이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일 핑계를 대며 초대에 응하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파견된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입니다.
혼인 잔치를 준비한 임금은 이 모습을 보고 진노하며 말합니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22,8-9)
그래서 종들은 거리로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고,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임금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모질게 꾸짖으면서 말합니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22,13)
참으로 이해가 안 되는 대목입니다.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라.’고 해 놓고서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다고 모질게 야단치니 말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나라와 미사(Missa)라는 잔치를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그 잔치에로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초대에 응하라는 것’이고, ‘혼인 예복’, 곧 ‘하느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데 꼭 필요한 우리의 구체적인 사랑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