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복음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3-20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20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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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의 다양한 견해를 전해 드립니다. 세례자 요한으로, 어떤 이들은 용맹한 예언자 엘리야로, 또 어떤 이들은 고통받은 예언자 예레미야라고 한다고 말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 시대에 물으신다면 사람들은 더 유식한 언사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설명할 것입니다. 수난받는 하느님의 종, 하느님의 사랑에 불타 성전을 정화하신 메시아,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답변이나 의견을 설명하면서 답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저러한 핑계나 학설을 대며 자신의 의견을 치장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 고백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는 개인적 체험과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메시아 신원을 밝히지 않도록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서 사도들의 믿음이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와 같은 신앙 고백을 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을 따를 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는 십자가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열두 사도처럼,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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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 어디에서 왔는가?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니케아 콘스탄티노포리스 신경) 그 신앙을 지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만약 예수님이 신자인 우리에게 묻는다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고백하는 방법은 다 다릅니다.
성인: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8/24),
성녀 모니카 기념일(8/27),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8/28),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8/29)
[다른 고백–> 같은 목표]–> 성인들은 각기 다른 삶을 살았지만 모두 다 신앙을 증거해
모니카 성녀: 끊임없는 기도와 인내로 남편과 시어머니를 입교시켜, 이단에 빠진 아들(아우구스티노)을 위해 오랜 세월을 기도함.
아들이 세례 받는 해에 모니카 성녀는 하느님 품으로 갑니다.
이후 아들 아우구스티노는 사제–> 주교–> 최고의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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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하느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을 변화. 기도 그 자체로 신앙고백.
성호: 짧은 신앙고백
신앙을 증거하는 용기 필요
기도하는 사람은 늘 신앙을 증거하는 사람. 신앙인은 물러나지 않고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 주님께서 응답하시고 힘을 주신다는 굳은 믿음 가져야 (신성근 야고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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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복음/묵상/동영상 강의에서) 이야기 해봅시다.
예) 저는 “XXX”단어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상입니다” 조원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저는 “XXX”단어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상입니다” 조원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2.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성실히 지키는 것입니다 (1요한 2,3-6). 예수님에 대해 알게된 계기(체험)가 있다면 이야기 해보고 주님이 주신 경건함을 어떻게 유지하며 신앙생활을 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주님이 우리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다면 우리는 주님의 집에 어떤 분들을 인도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을 인도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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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595
8월27일[연중 제2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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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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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KLNqX1DjFew
(박규흠 베네딕토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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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끝도 없이 긴 어두운 터널 속에서도 오직 예수님만을!>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던지시는 두 가지 질문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질문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예수님 시대 당시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 그분이란 존재는 많은 경우 호기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들 그분께로 몰려갔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무료한 시간을 달래줄 심심풀이 땅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들 그분께로 다가갔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 그분은 자신이 부딪친 현실적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줄 해결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들 그분께로 다가갔습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두 번째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에 베드로 사도가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언제나 부족했던 제자, 그래서 흔들리던 베드로 사도였지만,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정답을 꼭 집어 말합니다. 그에게 있어 예수님은 그토록 학수고대해왔던 메시아였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분은 당신 아들 메시아를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분은 베드로 사도 안에 늘 살아 숨 쉬고 계시며, 그와 늘 동행하시던 스승이었습니다.
어쩌면 베드로 사도의 마음 안에 예수님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예수님은 이미 가족보다 더 친밀한, 연인보다 더 가까운 그런 존재였습니다.
이런 베드로 사도였기에, 그가 그리도 나약했지만, 그가 그리도 과격했지만, 그가 그리도 부당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막중한 사명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의 처신은 납득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마구 흔들렸습니다. 늘 불안했습니다. 실수도 많이 저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나약한 존재 그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예수님을 따라나선 길에 숱하게도 갈팡질팡했습니다. 오락가락했습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십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지닌 다양한 인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토록 잦은 실수와 방황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서 제대로 꿰뚫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사도는 열렬히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거듭되는 배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선택하고 있었습니다. 끝도 없이 긴 어두운 터널 속에서도 오직 예수님만을 죽기살기로 붙들고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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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PJBYFsKx7Co?si=6tUOjV3tZ6TgarJ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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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믿으려 하는데 잘 믿어지지 않아요? 그 이유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보는 눈을 지닌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하늘 나라 열쇠를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알아보는 눈, 곧 믿음은 우리 능력이 아닌 성령의 선물이라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하늘나라 열쇠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쫓겨난 이유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고 죄가 용서되면 다시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는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씻겨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곧 성령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령이 주님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예고를 하십니다. 베드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시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고 하십니다. 곧 내가 죽지 않으려 하는 이는 성령을 받아도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마르틴 루터도 “인간이 어떻게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라며 죽기를 거부하여 교회에 주어진 죄를 사하는 권한을 자신을 따르는 많은 이들이 받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베드로는 자기 뜻을 죽이고 물 위를 걷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농구공을 몇 분 주고 받느냐의 수를 세느라고 정신이 팔려 그 사람들 사이로 지나가는 고릴라를 보지 못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 욕망이 한쪽에 빼앗기면 다른 것은 볼 수 있는 힘을 잃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를 믿으면 하느님을 믿을 힘을 잃습니다. 믿고 싶지 않아집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어지는 것입니다.
아주 먼 옛날 앞을 못 보는 남자가 하느님께 한 번만 세상을 보고 싶다고 소원을 청하였습니다. 하느님은 부엉이 한 마리를 불러 낮에는 눈이 필요 없으니 그 소경에게 주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보게 된 소경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밤에도 눈을 부엉이에게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부엉이는 먹이를 먹을 수 없어 죽었고 그때 소경의 눈은 흐려지다 영영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내가 죽는 만큼 내 안에 성령께서 살아나십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믿음이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이 살아나는 만큼 교회의 성사는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체를 영하면서도 여전히 인간에 불과하다면 인간의 본성에 사로잡혀 성령의 불이 꺼지고 맙니다.
에덴 동산에서 뱀은 하와를 유혹하였습니다. 선악과를 자신이 차지하여 스스로 주(인)님이 되고 선악과를 먹어(육체적 욕망) 스스로 창조자가 되며 사람을 심판하여 스스로 심판관이 되라고 유혹했습니다. 스스로 하느님이 될 수 있는데 다른 하느님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을 때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셨겠습니까? 계셨습니다. 그러나 볼 수 있는 눈을 잃었습니다. 자아를 긍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소유욕-성욕-지배욕이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를 살리기 위한 욕망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이 있다면 주님의 뜻, 곧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덜 가지고 절제해야 하며 겸손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뱀의 욕망과 반대됩니다. 따라서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을 버려야만 함을 압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은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인식하고 그분께서 우리도 당신의 자녀가 되도록 불러주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있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저주와도 같습니다. 더는 돈을 좋아할 수 없고 더는 여자에 끌릴 수 없으며 더는 다른 이들보다 높아질 수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고 싶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자신을 버려야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잘 믿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믿음을 십자가에 봉헌함 없이 우리를 하느님처럼 만들려는 분을 믿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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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16,13-20: 하늘나라의 열쇠를 너에게 주겠다.
오늘의 전례는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과 이에 따른 교회 전체에 대한 특별 권한이 주어지는 것으로 신약성서의 메시지를 총괄하는 듯한 장중한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는 고통받는 메시아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사명을 다할 것이며, 교회가 이제 존속하기 위해서는 봉사와 직무는 베드로 안에 언제나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이사야서에는 권한의 이양에 대한 개념이 많이 들어있다. 그중에도 열쇠라는 개념은 더 높은 사람에게서 받은 충만한 권한을 말한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 예수께서 베드로를 교회라고 하는 당신의 집의 책임자로 세우신다는 의미로 베드로에게 그 의미를 적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론적 관점 외에 교회론적 관점이 있다. 오늘 복음의 그리스도론적 관점은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절)에서 나타난다. 이 질문은 사람들의 생각을 알려는 것보다도 사도들이 당신의 신비에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질문이다. 사람들의 말은 당신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고 물으신다. 이때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라고 고백한다. 오늘 복음의 고백은 다른 두 공관복음의 고백과는 다르다. 다른 두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즉 메시아로만 고백하지만, 여기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도 고백하고 있다. 베드로를 통해서 더 완전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이 믿는다는 것은 순전히 이성의 힘으로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지성을 넘어서는 어떤 사실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다. 믿음이란 예수께서 말씀하시듯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순수한 선물’이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17절). 그러나 이 베드로의 고백은 단순히 개인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교회에 항구히 바쳐져야 할 ‘봉사’의 상징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론적 내용이 교회론적 내용으로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가 비록 나약하지만 큰 책임을 맡기겠다고 선언하신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감히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19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한 베드로를 당신 교회를 세울 주춧돌로 삼으신다. 주춧돌의 역할이 주춧돌만이 아니라, 결합하는 역할이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역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 대한 유일한 믿음을 항상 새로이 제시하고 해석해 줌으로써 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너는 베드로이다.”(18절) 라고 하시면서도 “세울 것이다.”(18절), “열쇠를 주겠다.”(19절) 라고 하신다. 이것은 베드로의 봉사적 역할이 영속적으로 계속되리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즉 계속해서 베드로와 같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이 교회의 주춧돌의 역할을 할 사람이 항상 필요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악의 세력들(죽음의 힘)도 교회를 누르지 못할 것이다. 베드로의 믿음이 이 세상 끝날까지 교회를 지탱해 나갈 것이다. 이 믿음은 이제 여러 문화적 상황들과 접하면서 거기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마주 대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충만한 믿음으로 결정적인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9절). 열쇠라는 상징적 개념은 랍비적 형태의 표현으로 일정한 행동을 금하거나 허락하는 것을 권위 있게 선언하는 의미이다. 이것을 종교적 차원에서 본다면 이 표현은 공동체에서 제외하는 권한 내지 받아들여 주는 권한을 가리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받은 권한이 아니라,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전권대사로서 행하는 모든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준다는 사실이다. 베드로의 신비는 여기서 유래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 안에는 그리스도의 현존 자체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해 유일하면서도 확고부동한 믿음을 우리 모두에게 선포하여 알려주시고 또한 해석해 주신다.
오직 믿음만이 이성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해 준다. 이 때문에 사도 바오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에 찬미를 드리고 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로마 11,33.36).
베드로의 신앙 위에 예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권한을 주셨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권위라는 것은 봉사를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느 위치에 있든지 우리는 베드로라는 주춧돌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우리도 그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또 진정으로 봉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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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미국에서 ‘새만금 잼버리’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1991년 이미 고성에서 잼버리를 개최하였던 경험이 있었기에,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 또한 이미 오래전에 개최하였던 경험이 있었기에, 평창 동계 올림픽도 차질 없이 진행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잼버리 정도의 국제 행사는 넉넉하게 치러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문화와 전통은 ‘손님’을 환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들리는 소식은 안타까웠습니다. ‘폭염, 해충, 습지’라는 삼 종 세트가 청소년들의 축제인 잼버리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늘이 없는 가운데 50,000명 가량의 청소년들이 체감온도 40도가 넘는 곳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배수시설이 잘 안 되는 습지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습지에는 각종 해충이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태풍 ‘카눈’까지 한반도에 상륙하면서 새만금에서 조기 철수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폭염을 피해서 몇몇 국가는 새만금 현장에서 철수하였습니다. 한국을 찾은 세계 청소년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준비의 부족으로 대한민국의 ‘국격’이 떨어진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미 1년 전부터 ‘새만금 잼버리’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고 합니다. 바다를 매립해서 만든 간척지이기에 배수시설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비가 오면 습지로 변하는 곳이니 반드시 배수시설을 확보하라는 조언도 있었습니다. 폭염에 대한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전기를 끌어들여서 선풍기나 에어컨을 확보해야 한다는 조언도 있었습니다. 얼음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해충이 많으니 충분한 방역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그에 따른 예산도 확보해야 한다는 조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준비하는 쪽에서는 이런 지적과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행사의 주체 도시인 전라북도는 중앙 정부에서 예산 지원을 적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중앙 정부는 전라북도가 준비를 소홀히 했다고 하였습니다. 말로는 폭염대책, 배수대책, 방역대책이 잘 되고 있다고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2023년 ‘새만금 잼버리’는 기쁘고 즐거운 한바탕 축제가 아니라, 폭염과 해충과 습지에서 살아야 했던 생존게임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저승의 세력도 능히 물리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천국의 열쇠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열쇠로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세운 교회는 지친 이들에게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절망 중인 이들에게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근심과 걱정에 빠진 이들에게는 용기와 담대함을 주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홍수에서 사람을 살렸듯이 교회는 공동체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구원의 방주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받았던 천국의 열쇠는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사’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용서받습니다. 견진성사를 통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습니다. 고백성사를 통하여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모실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를 통하여 치유의 은사를 받습니다. 혼인성사를 통하여 성가정을 이룹니다. 성품성사를 통하여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꾼을 선발합니다. 이렇듯이 ‘성사’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천국의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교회를 맡기고, 천국의 열쇠를 주셨듯이 제가 속한 서울대교구의 주교님은 제게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을 맡겼습니다. 저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을 운영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제게 매주 발행되는 가톨릭평화신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주셨던 천국의 열쇠와 같습니다.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습니다. 저의 사명은 천국의 열쇠이며 밭에 묻혀있는 가톨릭평화신문을 전하는 것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의 지면에는 보물이 많습니다. 교황님의 근황과 교회의 가르침을 볼 수 있습니다. 미주한인가톨릭 공동체의 소식을 알 수 있습니다. 선교사들의 땀과 눈물을 알 수 있습니다. 소외되고 외로운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희망을 주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저는 매주 발행되는 가톨릭평화신문을 2시간에 걸쳐서 읽습니다. 제가 신문사 사장이라서 읽는 것도 있지만 가톨릭평화신문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LA 성 아그네스 성당의 교우분들에게 가톨릭평화신문이라는 보물을 나눠드리고 싶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은 여러분들을 천국으로 안내하는 천국의 열쇠가 될 것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을 구독하셔서 부디 많은 보물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을 구독하셔서 천국의 열쇠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신자들을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도 참 기쁨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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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고백, 증언>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마태 16,15-20)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는 말을 할 때, 예수님을 향해서 그 말을 하면 그것은 ‘신앙고백’이 되고, 사람들을 향해서 그 말을 하면, 그것은 ‘신앙의 증언’이 됩니다.
신약성경에는 베드로 사도의 중요한 신앙고백이, 또는 증언이 네 번 나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앞의 두 번은 예수님을 향해서 한 말, 즉 신앙고백이지만, 그 신앙고백을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사람들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사실상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신앙의 증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 사도의 고백을 세상 사람들의 질문과 사도들의 답변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들은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가? 왜 예수님을 따르는가?” “우리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 그리스도이신 분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분의 제자가 되었고, 그분을 따르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도(신앙인들도) 세상 사람들의 질문에 그렇게 증언해야 합니다. “당신들은 왜 성당에 다니는가? 왜 신앙생활을 하는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목숨을 바쳐서 자신의 증언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 그것이 바로 ‘순교’입니다. 사도들은 순교자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삶과 죽음을 보고서 그분들의 증언이 진리라는 것을 믿고 있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온 삶으로 믿음을 증명하는 생활’,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믿음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믿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삶’이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면, 그 믿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베드로 사도를 뽑으셨음을 확인해 주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살과 피가 아니라”라는 말씀은 “인간적으로 얻은 지식이 아니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과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신 일은, ‘아버지의 뜻’에 따른 일입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셨을까? 복음서에는 자세한 설명이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베드로 사도만의 뛰어난 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일은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메시아의 어머니로 선택하신 일과 비슷합니다. 성모님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성모님만의 뛰어난 점이 있었기 때문에 메시아의 어머니로 선택되셨고,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복되신 분’이라고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향해서 하신 말씀, “너는 행복하다!”라는 말씀도 “너는 복되다.”인데,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택은, 또는 부르심은 인간의 ‘응답’으로 완성됩니다. 하느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특별히 선택하신 일은 베드로 사도의 응답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 응답은 곧 ‘믿으려고 노력한 일’, ‘자신의 믿음을 삶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한 일,’ 그리고 마지막에는 ‘목숨을 바쳐서 믿음을 증언한 일’ 등입니다. 신앙고백과 증언으로 좁혀서 생각하면,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성령의 인도’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라고 설명합니다.(1코린 12,3) 우리가 하는 신앙고백과 증언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는 일입니다. 내가 내 능력으로 공부해서 얻은 지식을 말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느님께서 뽑으신 사람들입니다. 원래 신앙인들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고(1코린 1,2), 신앙생활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 죽음, 부활이 이루어질 때까지 말하지 말라는 뜻이고(마태 17,9), 진정한 신앙고백은 부활신앙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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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헤로데 임금은 죽기 전 아끼는 아들 필리포스에게 자기 왕국의 북쪽 영토를 줍니다. 바산, 곧 지금의 골란고원과 그 너머 북쪽의 영토입니다. 비옥한 땅과 단에서 흘러나오는 깨끗한 물에, 가축을 위한 목초지도 풍부하여 번영의 조건을 고루 갖춘 곳이었습니다. 필리포스는 그 땅에 수도를 정하고, 이름을 “카이사리아”(카이사르의 도시)라고 짓습니다. 그가 충성하는 로마 황제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필리포스는 샘물이 솟아나는 자리 위에 판테온(만신전)을 짓고 풍요와 번영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에게 나는 누구인가?’ ‘너희에게 나는 누구인가?’ 아마도 제자들 앞에는 그들의 눈을 사로잡는 무엇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자연의 선물인 비옥한 땅과 샘솟는 물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화려한 궁전과 신전들의 위세였을 것입니다. 이 광경을 눈앞에 두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던지신 질문의 요지는 결국 이렇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인가? 많은 신과 왕과 나 사이에서 너희는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필리포스가 지은 판테온에는 사람들에게 유독 사랑받던 두 신, 곧 목축의 신 ‘판’과 정령의 신 ‘님프’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에게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풍요와 다산을 주겠노라 약속한 신들입니다. 거기에다 그들에게 충성하는 필리포스의 친구들은 임금이 주는 부와 풍요를 나누어 가졌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유혹입니까?
과연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과 차별되는 어떤 것을 제자들에게 주십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담대하게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낱낱이 밝히지는 않지만 우리는 다른 성경 구절로 말미암아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다는 것을 적잖이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다는 우리의 고백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께 무엇을 얻고자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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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하성용 유스티노 신부님]
<우리는 모두 교회의 반석입니다>
제가 신학교 입학 면접을 볼 때 한 교수 신부님께서 “어떤 사제가 되고 싶냐?”라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정해진(?) 모범 답안대로 답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제가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 신부님의 다음 말씀은 정해진(?) 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좋은데 본인만의 사제상을 만들면 좋겠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교수 신부님의 이 말씀이 항상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어떤 사제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본당의 주임 신부님들과 보좌신부님들 그리고 동기들이 얘기해 주는 다른 신부님들의 삶의 모습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제 나름대로 답을 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제도 좋지만 먼저 기본이라도 잘하는 사제가 되어야겠다.’라고 말입니다. 노래 잘하고, 춤 잘 추고, 운동을 잘하는 사제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솔직히 그런 것들은 사제가 아니어도 잘하는 사람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반면, 미사와 성사를 잘하는 것은 사제만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사람들이 저에게 어떤 사제가 되고 싶냐? 또는 ‘어떤 사제로 살아가고 있냐?라고 물을 때마다 저는 “기본이라도 잘하는 사제가 되고 싶다.” 또는 “기본이라도 잘하는 사제가 되려고 노력하면서 살고 있다.”라고 대답합니다.
기초가 튼튼한 사람의 일은 흔들릴 수는 있지만 중심이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기초가 부실한 사람의 일은 한때 잘 나갈 수는 있지만 단 한 번의 위기로 한순간에 무너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이라고 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도 교회의 반석입니다. 곧 교회의 가장 탄탄한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라는 기초가 흔들리면 교회라는 큰 건물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저는 교회의 한 구성원으로 보잘것없지만, 묵묵히 제자리를 지켜나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 같이 부족한 사람이라도 교회에 누가 될 수도 있다는 사명감 때문이지요. 그 마음이 바로 기본이라도 잘하는 사제의 모습으로 드러난다고 믿습니다.
베드로 사도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두 교회의 반석입니 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히 자기 몫을 해 나간다면, 지난 이천 년간 그랬던 것처럼 최근 교회에 닥친 위기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내가 안 해도 괜찮겠지?’라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교회는 지난 이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큰 위기를 겪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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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주보》 오늘의 말씀
[인천교구 이완빈 요셉 신부님]
<하느님이 보여야 이웃도 보입니다>
잘 지내기가 참 어려울 때입니다. 사람끼리도, 나라끼리도 그렇습니다. 아비 어미란 자가 인두겁을 쓰고 제 새끼를 내다 버리지 않나. 힘센 나라가 수치심도 없이 힘 약한 나라를 깔아뭉개지 않나. 아무튼, 안팎으로 위태로운 시절입니다. 사람끼리든 나라끼리든 너와 내가 마주 선다는 점에서 결국 본질은 이웃 사이입니다. 너와 내가 어디 보통 인연입니까. 네가 나인 듯 공들여 섬기라고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너와 나인데 어쩌다 이리 각박해졌느냐 하면, 그저 너랑 내가 맘이 상해서가 아니라 너도나도 그만 하느님을 잊어버린 탓입니다.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판국이니 사람이 보일 겨를이 있겠습니까. 하기야 하느님 등 뒤에서 몰래 열매나 훔쳐먹은 통한의 그 날부터 여태 하늘 아래 단 하루라도 괜찮았느냐만, 그렇다고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사형수처럼 낙심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팔월 염천에 땀을 비처럼 쏟으면서도 꿋꿋이 천지를 보살피고 계신 덕분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보면 한숨이 나지만, 세상 너머까지 본다면 한숨만 짓지는 맙시다. 아무렴 사람이 헤집어 놓은들, 만물을 품으시는 하느님의 부성애는 날로 더 지극하신 까닭입니다.
오늘 하느님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물으셨습니다. 세상은 나를 누구라고 하는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는지. 같은 물음이 두 차례에 걸쳐 있으니 예사 물음은 아니려니 합시다. 이웃끼리 잡아 먹는 지옥 같은 세상이 더는 마구간만큼도 내주지를 않아 하느님을 길바닥으로 내쫓았고, 오갈 데 없는 가엾은 하느님은 우리 틈새에 당신 자리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고 싶으셨습니다. 세상은 당신을 잊은 지 오래지만, 우리만은 부디 그러지 말라는 신신당부와도 같겠습니다. 일찍이 약속하신 대로 단 두세 명만 합심하더라도 하느님은 거기 머무실 것이니. 그리만 되더라도 요사이 이웃이란 말이 무색하도록 매정해진 세상사의 판도를 뒤집기에는 넉넉합니다. 하느님은 혈혈단신으로도 당신이 세상을 이겼노라 하셨는데, 그 하느님을 필두로 뒤따르는 무리가 두셋이나 있다면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어서 고합시다. 뭇 얼치기들은 요한이요. 엘리야요 하며 헛발질하겠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입을 모아 당신은 저의 하느님이시라고 당신이 저의 전부라고 그러니 저도 꼭 당신처럼 살다가 꼭 당신처럼 죽을 거라고 아룁시다. 속속들이 상해버린 이웃 사이가 하느님 아니고선 본디처럼 성해질 리 만무합니다. 딴에는 이웃끼리 잘 좀 해 보려는데 이 사람 때문에, 저 사람 때문에, 또 누구 때문에, 마음 같지 않을 때마다 기억합시다. 이웃에 앞서서 단연 하느님부터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부동의 첫째이고 이웃은 그다음입니다. 하느님은 단지 순서만 앞서는 게 아니라 기초요 근간이며 토대라는 뜻입니다. ‘나는 네게 누구냐?” 하시는데, 천추에 사무친 그 날처럼 선악과보다 못한 하느님, 그래서 어느새 까먹어 버린 하느님, 그리고 별로 기억나지도 않는 하느님이라 답해서야 되겠습니까? 참으로 우리의 하느님이요. 참으로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그게 무지막지하게 살벌해진 작금의 이웃 사이를 돌이킬 수 있는 유일하고도 역량 있는 고백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시인하는 우리와 똘똘 뭉쳐, 너와 내가 부둥켜 살맛이 넘쳤던 천국살이를 되세우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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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주보》 말씀의 향기
[대전교구 임상교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사는 대로 믿어도 될까?>
복음을 듣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런데 대답이 쉽지 않습니다. 복음에 소개되는 베드로처럼 당신께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응답이 쉽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수, 내가 알고 있는 예수가 내가 고백하는 예수인지 확신하기가 어렵습니다.
내가 고백하는 예수라면 나를 통해 그 예수가 세상에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고백한다는 것. 특히 신앙고백은 나의 온 존재가 고백하는 대상을 향해 열려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침잠합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예수는 내가 고백하는 예수인가?” 말하는 것과 사는 것이 다르면 철학과 신학 그리고 다른 공부를 통해서 알게 된 하느님은 내가 고백하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듣게 되는 스승 예수의 질문은 자금을 사는 나를 깊이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예수를 알기 위해서 공부를 합니다. 매일 책을 읽고 말씀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발견합니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예수 그래서 사람 사이 피조물과 사이에서 저질렀던 의롭지 못했던 선택을 깨닫고 변화를 선택합니다.
“내가 고백하는 예수는 누구인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공부를 통해서 알게 된 예수가 제가 고백하는 예수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손을 잡고 그들과 할 수 있는 만큼 연대하고, 무너져 가는 지구의 아픔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불의한 구조에 저항하고, 그 안에서 살아야 하는 모든 생명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창조된 모든 생명은 자원이 아니라는 것을 선포하고 싶습니다. 성경과 세상 속에서 제가 알게 된 예수, 아니 제가 믿는 예수입니다. 비싼 옷과 고급스러운 음식점 골프장을 가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곳에 가면 내가 고백하는 예수가 그런 예수로 세상에 선포되기 때문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복음에서 예수의 질문이 이렇게 들립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믿는가?” 사는 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하느님을 향하는 좁은 길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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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주보》 말씀 중심의 삶
[청주교구 류재은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성경은 교훈을 주는 책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좋은 말(명언)들이 많습니다. 말은 존재를 드러내기에 누가 하느냐에 따라 또는 듣는 이가 어떤 처지 있느냐에 따라 그 무게가 결정됩니다. 말은 무게에 따라 금방 사라지기도, 긴 여운을 남기기도, 때로는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성경 안에도 참으로 많은 말씀이 담겨있습니다. 성경의 내용 또한 읽는 사람의 처지에 따라 그 무게가 달리 느껴집니다. 저도 그 무게를 느끼기 위해 내용에 집중하고 나의 처지에 대입하면서 읽고 묵상해 왔습니다. 이런 저에게 오늘 예수님의 질문은 거기에만 머물지 말라는 무거운 초대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분명히 군중과 제자들의 답은 다릅니다. 군중에게 예수가 누구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표 징만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려주려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을 내어주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들에게 자신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을 읽을 때 예수님을 먼저 바라봅시다. 우리가 말씀의 내용과 자신의 처지만을 보려 한다면 예수님을 얻으려 하기보단 표징만을 얻으려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교훈을 주는 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에게 성경은 명언집이나 교훈을 주는 책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성경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얻는 책입니다. 말씀으로 성화된다는 것은 말씀을 읽는 내가 하느님을 알아가며 종국에는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의 모습이 점점 하느님께 스며들어 변화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모상대로 창조되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 존재의 성숙과 완성은 아버지의 은총에 달려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나를 바꾸어 놓을 수 있도록 오늘도 말씀으로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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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정이》 강론
[전주교구 홍석진 세례자 요한 신부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과 제자들의 여정은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당신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마태 16,13)
예수님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 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말들에 대한 물음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질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을 향해서 질문하 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저는 신학교에 조금 늦게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늦게나마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하느님을 사랑하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입학한 신학교에서의 생활은 사랑의 갈망을 채워주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더 많이 알아가고 더 깊이 생각하고 공부하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열심히하였습니다. 부족하나 미사와 기도하는 시간도 공부하는 시간도 그리고 다른 신학생들과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시간에도 언제나 열심인 저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에게 문제가 찾아왔습니다. 사랑의 갈망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산 삶이 제게 ‘번 아웃’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이던 삶은 제게 충만한 사랑이 아닌 ‘의미 없음’과 ‘상처’로, 그렇게 열심히 하던 공부는 ‘답답함’으로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부를 졸업하며 다시 신학교에 돌아와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고 학부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다시 학교로 돌아갈 마음도, 그렇다고 다른 길을 선택할 용기도 가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30일간의 피정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피정 안에서 저의 문제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저는 예수님의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이들이 알려주는 하느님을 듣고 공부했습니다. 시험을 준비하고 많은 글을 쓰면서도 저는 제가 고백하고 저와 관계하는 하느님이 아닌 타인에게 곧 교수 신부님들, 수녀님을 통해서 또는 책을 통해서 듣고 배운 하느님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게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에는 답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타인이 전하는 예수님이 아닌 제가 만나고 체험하며 관계하는 예수님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다른 이들이 알려주고 시키는 미사와 기도만이 아닌 제가 알고 찾고 만나고자 봉헌하는 미사와 기도를 드릴 수 있었고 예수님을 더 가까이에서 만나고자 감실 안의 성체를 가까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질문에 조금씩 답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의 답은 베드로 사도의 답변처럼 완벽하지도 멋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베드로 사도의 답변보다 소중하고 귀한 답변입니다. 저는 이렇게 예수님의 질문에 답을 하며 ‘저의 신앙’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찾아가 는 이 길에 여러분을 초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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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주보》 주일의 말씀
[대구대교구 나영훈 안토니오 신부님]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
8월의 끝입니다. 이번 여름 어떻게 보내셨나요? 유난히도 더웠던 여름이었습니다. 산이나 바다로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이 일반적인 피서법일 것입니다. 또 하나의 피서법이 있다면 그것은 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일 것입니다. 이번 여름 저도 학교 집중 휴가 기간을 이용해서 피정이라는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평소에 바쁘다는 핑계로 읽지 않았던 책 두 권을 책장에서 꺼내어 가방에 넣고 피정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방에서 고요히 이 책들을 읽으면서 선풍기 바람과 함께 시원한 마음의 피서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성바오로딸수도회에서 나온 ‘다시 읽는 명작’ 시리즈 중에 A.] 크로틴의 《천국의 열쇠》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중국 선교를 떠난 치셤 신부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제가 알기로 신부님들의 혹은 신학생들의 성소 동기 중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책일 것입니다. 천국으로 가는 열쇠가 정말 있을까요? 그런 열쇠가 있다면 저도 하나 사고 싶지만, 사실 천국으로 가는 열쇠는 아마도 이 책에서 나오는 치셤 신부의 삶과 같은 그런 삶을 살 때 주어지는 은총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십니다. 왜 베드로가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았을까요? 해답은 아마도 베드로의 다음과 같은 고백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고백 직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십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대답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이 말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우리도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예수님에 대한 나의 어떤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때 이미 그 고백을 했습니다. 물론 유아 때는 부모님이 대신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일 미사 혹은 매일 미사를 통해서 오늘도 그 고백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 이 하나의 형식적인 고백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살아계신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복음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나의 언어로 나의 신앙을 고백할 때 우리도 베드로처럼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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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 빛의 소리
[광주대교구 김동일 요셉 신부님]
<돌, 돌 무슨 돌?>
찬미 예수님!
이번 주일 성경은 재미있는 대조를 보여줍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올바른 대답을 했고, 이 대답으로 베드로, 반석이 됩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뒷부분에서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반발하다가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라는 꾸중과 함께 걸림돌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의 돌이지만, 그 돌은 반석이 될 수도 있고,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뒤로 물러나라.” 맞습니다. 예수님 뒤에 있으면 반석이지만, 예수님 앞을 가로막으면 바로 같은 돌이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자리에 있으면 디딤돌이 되지만, 자신의 자리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앞에 서려고 하면 걸림돌이 되는 것이죠.
베드로는 갑자기 왜 예수님 앞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어 버렸을까요? 바로 예수님의 바람, 계획 보다 자기 계획. 욕망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서울의 어떤 초대형 교회는 성장하면서 예수님의 디딤돌로 제 역할을 다했지만, 아들에게 목사직을 세습하는 순간, ‘개독’이라 불리며 예수님의 앞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변해 버리는 것처럼, 우리도 내 욕심, 내 욕망을 예수님보다 먼저 들이대는 순간, 디딤돌에서 걸림돌로 변해 버릴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또한 공동체에서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성당 안에서 제일 무서운 말은 ‘생각코’라고 생각합니다. ‘다 너를 위해서’, ‘다 너 잘 되라고’, ‘너 생각코’라고 하면서, 이런 저런 간섭을 하고, 참견을 하고, 소문을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그 생각코’는 ‘내 생각에 따르면’입니다. 이미 내 생각이 주체가 되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의 걸림돌입니다. 정말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란다면, 영원한 디딤돌이셨던 성모님처럼 뒤에서 믿고 조용히 기도해 주십시오. 하느님은 여러분보다 그 사람에게 더 잘 해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 뒤에서 디딤돌로 머무르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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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빛》 복음 묵상의 향기 ‘말씀’
[원주교구 서동신 대건안드레아 신부님]
<하늘나라의 열쇠>
열쇠는 자물쇠, 잠긴 문 상자 따위의 잠금장치를 여는 도구입니다. 나아가 어떤 일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방법이나 요소를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문을 열고 닫을 때, 어떤 것을 매고 풀 때도 반드시 열쇠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하늘나라 열쇠는 무엇이며 어떤 용도로 쓰일까요? 최초 인간 아담과 하와는 본래 하느님의 원복(原福)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뱀의 유혹에 빠져서 선악과를 그만 먹음으로써 하느님과 약속이 깨어집니다. 축복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래성이 훼손되는 원죄(原罪)를 결국 짓고 말았습니다.
비구원에서 구원으로 나아가는 데 필수적인 하늘나라의 열쇠는 인간과 만물에 주어집니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기 때문입니다.(로마11,36) 자비하신 한 분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우리들은 주님의 해 2023년이라는 구원 여 정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로 향하는 여정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 교회와 함께 그분께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는 구약 안에서 미리 준비되었고 이사야를 통해 이르시기를 그 열쇠가 메시아 그리스도에게 주어질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이사 22.22-23)
자비하신 하느님 구원의 계획은 당신의 자비하심에 의해 신약 안에서 하느님 자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강생하심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 사흘 만에 부활하심, 50일 되는 날 하늘로 승천하심을 통해 구원의 천국 문이 활짝 열리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수제자 베드로를 반석 삼으시고 그 위에 곧 성 교회를 세우셨습니다.(마태 16.18) 그리고 하늘나라의 열쇠를 성 교회에 주심으로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게(마태 16,19) 성 교회를 하늘나라 신비의 관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무엇이든 맺고 푸는 고해성사를 교회의 직무로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마태 16.13) 라고 물으십니다.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물으 신 것입니다. 또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 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거울 앞에 선 나는 누구인가? 거울 안에 그대로 비친 그는 누구인가? 나와 상대 사이에 보이지 않는 거울이 있다고 가정하면 나는 상대의 모습인 것이고 상대는 나를 비추는 모습입니다. 마치 하늘나라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 리스도”(마태 16,16)라고 대답한 것은 이미 베드로 마음에 섭리의 하느님께서 은혜로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비추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비추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성교회가 무엇인지? 그 신원을 확연히 아는 것이 거 울 안팎을 보듯 그리스도교 신자의 올바른 정체성을 함양하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은 성 교회와 함께 형제애로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성 교회는 우리를 비추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성 교회를 비추고 있습니다. 하나 안에서 각각의 고유성을 지니고 보편성 안에서 하나와 일치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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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마산》
[마산교구 박혁호 미카엘 신부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예수님은 카이사리아 필리핀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으로 여긴다고 말씀드립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태 16.15) 하고 물으십니다. 시몬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하고 대답합니다. 즉 스승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구세주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고백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려주셨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고백에 대한 참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어지는 복음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말에 반박하다가 스승으로부터 사탄이라는 말까지 들으며 꾸중을 듣는 장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마태 16,21-23 참조) 그 후 베드로는 스승의 이 질문을 계속 되뇌고 묵상하며 예수님과 동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이후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고백에 대한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사도로서 사명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했던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도 던지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어느 신자분이 피정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을 묵상했다고 합니다. 묵상에 어려움을 느끼는 가운데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예수님 그러면 당신에게 있어 저는 누구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신자가 어린 시절 자신에게 붙였고 자신만이 알고 있는 애칭을 부르시며 ‘너는 나의 누구(애칭)이지!’라고 다정하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걸어가기를 원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순간 그 신자는 예수님이 자신을 깊이 아시고 사랑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자신의 삶에 동행하시고 참된 길로 이끄시는 분이심을 마음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참되고 깊은 이해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것이 그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키워주고 그리스도인인 나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시켜 그리스도인답게 살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자신에게 있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묻고 말씀과 기도 안에서 묵상해 나가며 그 답을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할 때 그분은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조금씩 깨닫게 해주실 것이고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알려주시며 그 힘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베드로처럼 믿음으로 고백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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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주보》 말씀
[군종교구 김경주 이시도르 신부님]
<너는 행복하다!>
사제가 되기 위해 지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원자들은 입학 전부터 모임을 가지며 이 길이 나에게 올바른 선택인지 식별하게 됩니다. 제가 지원했 던 광주대교구의 경우 이 과정 안에서 매번 한 차례의 피정 시간을 가졌습니다. 피정 기간에 여러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특별하고 기억에 남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각자가 체험한 하느 님에 대한 나눔 시간입니다.
사제가 되고자 희망하여 모인 젊은이들은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에 대해 깊이 나누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하느님 체험이 각자가 고유한 점이죠. 모인 이들 모두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모두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 속에는 행복이 묻어나 있습니다. 각자 다른 환경 안에서 겪은 개별적인 하느님 체험이지만 공통으로 행복해하고 떨림이 가득합니다.
신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은 앞으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함을 내포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꽃길만 걷자의 삶이 아닙니다. 흙길, 돌길도 걸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원자들은 자신이 이 길을 걷고자 함에 행복해 한다라는 것, 그것이 하느님 체험을 나누는 과정에서 보이는 놀라움입니다. 왜 그러한 것인가요? 남들과 달리 고생을 사서 하는 이 위치에 오고자 하는데 왜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행복해하는가요?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행복하다.”
베드로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올바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뭐라고?”라고 생각할 이들도 많겠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그리고 ‘깊이 안다’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사건입니다. 이로써 그의 삶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참된 행복을 향해 나아갈 것이며 스스로 하느님의 종이 되고자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은 물론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하는 행복은 이 차원을 넘어섭니다. 세상 행복처럼 일시적이지도 않고 시간이나 상황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알게 되는 행복을 체험하면 세상의 어려움에 고통도 받겠지만 언제나 희망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하느님을 알게 되는 행복이 나에게 오면 이전에 알고 있던 행복은 나의 첫 번째 행복 순위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진실로 알게 되고 그것을 고백하는 때가 다가오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장 행복해지는 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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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부산》 강론
[부산교구 임형락 이냐시오 신부님]
<주어진 운명대로>
여러분들은 하느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신앙을 청합니다.” 신앙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우리 교회가 주고자 하는 믿음은 감히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믿음이자, 우리가 모두 하느님께 이 생명(인생)을 거저 받았으니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자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받은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고 살겠다는 결단의 예식이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두 질문은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처음 질문은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주로 나를 어떻게 알고 말들을 하느냐?”라는 질문이라면, 두 번째 질문은 “너희는 사람의 아들인 나를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 믿지 않느냐?” 그러면 “너희는 너희 자신을 누구라 믿고 있느냐?”라는 물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몬 베드로의 대답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믿고 있는 우리들의 고백이자, 우리 모두도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는다는 고백인 셈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그렇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너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이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너는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너의 그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고, 우리에게도 ‘아버지’라 부르라 하셨습니다. 너희도 나처럼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자고 하신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성령의 힘으로 있게 하신 하느님을 믿으며, 이 생명, 이 인생도 그렇게 주어졌고, 그 힘으로 살아가야 함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우리 삶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또한 현실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기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살아가야 할 운명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주어진 운명대로 겸손하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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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주보》 말씀 담기
[수원교구 박현민 베드로 신부님]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하느님의 교회를 세우실 것인데 저승의 세력도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베드로 사도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면서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자연스럽게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이야기(사도 5.1-10)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는 부부인데 자신의 땅을 모두 팔아 하느님께 바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 발 앞에 내어놓은 돈은 땅 판 값의 일부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베드로 사도는 이들이 하느님을 속이고 그분을 시험한 대가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자 이 부부는 베드로 사도의 발 앞에서 숨을 거두게 되고, 교회와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베드로 사도가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에게 단죄를 하니 곧 바로 죽음을 맞게 된 이 사건은 베드로 사도의 판결이 곧 하느님의 판결임을 알려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베드로 사도의 말씀 한마디에 두려움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성경 말씀은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믿음을 불러일으킵니다. “교회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쥐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결정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곧바로 하느님의 판결이 된다.”
하지만 정작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자신들의 인간적 결정이 곧 하느님의 신성한 판결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방계 그리스도교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예루살렘 사도 회의의 결정을 보면, 교회의 최종 결정은 항상 성령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사도 15,28)
사실 오늘 복음 말씀을 고대 그리스어의 문법적 구조로 다시 해석하면 다음과 같은 의미가 됩니다. “하늘에서 매이도록 정해놓은 것(사탄의 세력)을 이 땅에서 매이도록 할 것이며, 하늘에서 풀도록 정해놓은 것(사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할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구원과 관련한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주님의 기도)” 부름을 받은 사람이 곧 베드로 사도요. 거룩한 성 교회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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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안동》 말씀 담기
[안동교구 이동명 사도요한 신부님]
<확신에 찬 믿음>
오늘 복음 말씀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중요한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당신이 잠시 머무르신 그 지역 사람들의 반응과 생각을 첫째로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옛 예언자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누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엘리야, 세례자 요한 또는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 표현에는 더 거론된 이름들도 있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그만큼 그 지역 주민들은 아직 예수님의 정체 곧 그분 신원에 대해 불확실한 상태로 알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분명히 ‘너’라는 단독자가 아니라 ‘너희’라는 제자들 무리에게 물으셨습니다.
주민들은 저희끼리 불분명하게 ‘요한이다. 예레미야다. 엘리야다.’라고 떠들고 있지만 오랜 시간 당신을 따라온 제자들은 확실한 정체를 알고 있는지 질문하신 겁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의 중요성은 이렇습니다. 일정한 지역의 범주 안에서 그리고 당신과 어느 정도 유대를 맺어온 이들의 관계성 안에서 각 개인이 ‘예수님’께 어떤 확신을 하고 있느냐라는 물음을 통해 왜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지를 통찰하게 하십니다.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베드로가 놀랍게도 이런 답을 드립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제자 집단에 던지신 질문에 베드로 한 사람만 이런 대답을 드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그가 처한 현실에서 예수님은 스승이시고, 하느님은 살아계시다는 믿음과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고백합니다. 이 대답에서 베드로의 겸손한 마음을 엿보게 됩니다.
‘스승님’, ‘살아계시는'(생명의 원천이신). ‘그리스도'(구세주) 이와같은 표현에서 그분을 높여 드리면서도 확신에 차 있는 베드로의 믿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그가 참으로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가 한 고백이 인간의 지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직접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주일미사와 신심 및 신앙 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묻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는 베드로처럼 주저하지 않으면서 확신에 찬 답을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신앙 안에서 참 행복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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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6,15)라고 묻자, 사도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16)고 신앙을 고백한 이야기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도들 가운데 으뜸 사도로써,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이며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 우리나라를 방문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베드로 사도처럼 신앙고백을 몸소 삶을 통해서 보여주셨으며, 특별히 시복되신 순교자들의 신앙의 본을 본받아 한국 사회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살도록 우리에게 힘을 실어 주셨습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라고 말입니다. 정말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자신들의 신앙생활, 곧 순교를 통해서 증거하고 고백했던 신앙을 살아가도록 저희에게 자긍심을 깊이 심어주셨다고 믿습니다. 참된 신앙은 입으로 고백하고 몸으로 그 참된 진리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질문하신 의도는 단지 그들의 신앙고백을 듣기 위함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믿고 있는 바를 살겠느냐는 다짐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것처럼 악령들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지는 않았잖아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 만큼, 그리스도께서 사신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하느님 안에서 산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 (1요2,6) 베드로의 신앙고백 다음에 예수님께서 교회 설립을 말씀하시는 것은 ‘스승이신 주님께서 사셨던 삶을 살고자 그분을 그리스도로 믿고 추종하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하는 신앙생활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며, 늘 저희와 함께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이자 목사였던 ‘디트리히 본 훼퍼’(1906~1945)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싸구려 은총이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적이다. 은총이 싸구려 행상인의 물건인 양 시장에서 팔리고, 죄의 용서라는 것도 할인된 가격으로 내다 팔리고, 가치 없는 은총, 노력 없이 은총만을… 그러한 교회가 있는 사회는 죄를 손쉽게 은폐해 버린다.” 본 훼퍼의 표현은 곧 세상에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보다도 더 못하게 살면서, 한 발을 교회에 이름을 등재해 놓았기에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향한 질책이라고 봅니다. 교회 내에서는 입으로 주님께 대한 신앙 고백문을 절절히 고백하면서도, 교회 밖에서는 믿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비인간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받은 은총을 ‘싸꾸려’ 취급하는 부끄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값비싼 은총’으로 구원받은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가 진정한 공동체인가 여부는 바로 공동체 안에 하느님이 생생하게 현존하며 활동하고 계신다면 그곳이 하느님의 교회라고 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의 사명은 그러기에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 17,21)라고 예수님은 직접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이 실행되고 실현되는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며 교회입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바로 베드로 사도가 스승과 함께 생활하면서 보고-듣고-만지고-경험한 바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당신의 실천안에 살아 계시게 하였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신앙고백을 삶을 통해서 증거하였듯이, 우리 또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한다면 재물과 권력을 자기 삶의 최대 보람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모인 교회라고 하면서 재물을 가진 사람이 우월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자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교회라면, 신앙인은 누구라도 교회 안팎의 가난한 사람, 버려진 사람, 불행에 우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고 그들을 돌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전엔, 세상은 높은 사람이 행세하고 낮은 사람은 순종하는 낡은 가치가 지배하는 게 세상의 질서였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교황-주교-성직자-평신도라는 교계 제도적 구조하에서 교회 공동체의 장상들이 권위를 행사하고, 하느님의 백성인 평신도와 공동체 내의 수하자는 순종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런 질서와 관계를 복음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 권위를 행사하는 부류와 그 권위에 순종해야 하는 부류로 구별되어왔지만, 교황님의 표현처럼 교회 내의 권위를 가진 사람의 가장 큰 힘은 역설적으로 바로 권위를 지닌 사람들이 먼저 섬김과 종이 되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모든 이를 위해 종이 될 때 진정한 권위를 가진다고 말입니다. 자기가 소속한 교회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구성원은 의사 결정 과정에서 자유로이 대화와 소통을 통해 참여하고, 결정된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실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공동체의 비전과 사명을 실현하고 발전해 나가도록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만 예전처럼 무조건, 맹목적으로 권위를 지닌 사람에게 순종하는 그것이 예수님의 일이 아님을 우리는 배우고 있습니다. 결국 모든 교회 구성원은 각자에게 맡겨진 소임과 직무를 통해서 봉사하고 섬김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며, 하느님의 일이 모든 일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실천되고 실현되는 교회가 되어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실천할 때,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이 진정성을 되찾는 길이요, 교회는 바로 그분의 신비체이며, 신비체인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 주님, 귀를 기울이시어 저희의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소서. 저희를 세상 앞에 당당하게 세워주시고 저희가 당신께 고백한 신앙을 실천할 수 있도록 늘 값비싼 은총을 베풀어 주셨음에 감사하면서 당신의 일을 당신과 함께 당신을 통하여 실천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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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셨고,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나는 주님을 어떤 분으로 모시고 있는지 성찰하고, 아드님의 사랑을 받는 만큼 주님의 연장으로 쓰임 받음에 감사하며 살 수 있기를 청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뜬소문에 뭐라 하느냐? 하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자주 다른 사람의 얘기를 하기를 좋아합니다. 좋은 얘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얘기를 더 즐깁니다. 소위 ‘신상털기’도 합니다. 속마음은 감추고 남의 이야기에 기대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 하고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신이 나서 의견들을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것은 남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 질문을 하며 제자들의 마음을 건드렸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다른 사람들 얘기 말고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생각하는 대로 너희의 행동이 드러날 것이라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런데 시몬 베드로는 단숨에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살과 피가 아니라”는 말씀은 ‘네가 공부했던 교육이나 문화가 알려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청해야 은총이기도 합니다. “아버지 예수님을 고백할 은총을 저에게 주십시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은 베드로의 즉각적인 응답을 인정하시며, 선언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시몬에게 주신 ‘베드로’라는 새 이름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가 방금 드러낸 신앙은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고, 하느님의 아드님은 이 반석 위에 당신의 교회, 곧 공동체를 건설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교회는 항상 베드로의 믿음 위에서, 예수님이 인정하시고 그를 교회의 우두머리로 삼으신 그 믿음 위에서 전진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시몬은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서 반석이 됩니다. 시몬의 능력 위에 교회를 세우라고 말하지 않고,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세우라 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 이어 이제 우리 각자에게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을 듣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 각자는 이 물음에 답해야 합니다. 이론이 아니라 신앙이 녹아든 대답, 삶이 녹아든 대답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제게 당신은 00무엇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구약의 사람들이 갈망하던 하느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 구세주(그리스어), 메시아(히브리어; 기름부음 받은 사람)라는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 혹은 다른 예언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고백했는데 그들과는 다른 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아느냐?’라는 질문이 아니라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이냐?’를 묻는 것이기도 하고, 그에 따른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녀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주님 손에 쥔 작은 몽당연필’로 표현하였습니다. 글씨를 쓰시는 분도, 무엇을 쓸지 생각하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나는 그저 그분 손에 들린 작은 도구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쓰시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수녀원 생활 초기에 환시를 통해 “너는 누구냐?”는 한 소년의 질문을 받게 되는데 “예수의 데레사”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꼬마에게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그에 대한 소년의 대답은 “데레사의 예수다.”였습니다.
우리의 고백은 어떤 고백일까요? 예수님께서 나에게 ‘너는 누구냐?’ 했을 때 당당하게 ‘저는 예수님의 사랑받는 아무개입니다.’라고 할 수 있나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화답해 주실까요?‘그래, 나는 네가 사랑하는 너의 예수다’라는 응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미사 안에서 거양성체 때 마음속으로 기도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영광 받으소서.
자비 베푸소서.
용서하소서.
저를 당신의 종입니다.
연장으로 써 주소서.” 합니다.
저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에 감사드리면서 저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시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쓰고 안 쓰고는 그분 손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행복하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은총이 감싸고 있었기에, 아버지의 사랑이 품고 있었기에 행복했습니다. 우리의 여정에도 아버지 하느님의 은총에 마음을 여는 한 행복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입니다.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모두가 나를 버린다 해도 주님을 차지하면 행복합니다. 나의 주님을 바로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를 알아보면, 내가 하느님의 백성이며 교회이고, 하늘의 열쇠를 받게 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16,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2절 이하에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사도들의 후계자가 주교이고 그 주교들의 협력자가 신부입니다. 그리고 신부는 주교의 위임을 받아 사목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는 세례성사를 통해 모든 죄를 용서받은 후에 또다시 범하게 되는 잘못에 대해 용서받을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이 성사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마련된 권리의 보장책입니다.(차동엽) “이 성사를 고백성사라 하는 것은, 사제 앞에서 죄를 자인하고 고백하는 것이 이 성사의 핵심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의미로는 이 성사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죄인에 대한 자비를 알아 뵙고 찬미하는 하나의 ‘고백’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사람은 감각적인 존재이고 보이지 않는 마음을 감각으로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당신의 사랑을 느끼도록 해주셨습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을 단순히 말해 주는 것보다 그 용서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음의 막연한 소리가 아니라 사제의 음성을 통해 “당신의 죄는 용서 받았습니다.”라는 선언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혼자서 회개하며 주님께서 용서하실 것이다’ 하는 것보다 고해성사를 통해 받는 은총은 훨씬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고해성사는 단순히 인간에게 고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하는 하느님의 자비에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고백성사는 하느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오늘 1독서의 말씀을 보면, 주 하느님께서는 엘야킴을 불러 특별한 소명을 줍니다. “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나는 그를 말뚝처럼 단단한 곳에 박으리니, 그는 자기 집안에 영광의 왕좌가 되리라.”(이사22,22-23)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당신의 사람을 선택하여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보내주신 하느님, 그리고 그 외 아드님을 향한 사랑이 불타오르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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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갑곶성지에 있을 때, 식기 세척기를 하나 마련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설거지가 힘들기도 했지만, 성지를 떠나 다른 사목지로 이동한다는 말을 듣고 후임 신부를 위해 좋은 식기 세척기를 마련해주고 싶었습니다. 식기 세척기가 도착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디자인도 좋고 세척력도 너무 좋은 것입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알록달록한 세제 캡슐은 정말로 신기하고 편했습니다. 이 조그마한 캡슐 하나로 그 많은 그릇이 깨끗하게 된다는 사실이 정말 신세계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를 들었습니다. 이 식기 세척기 캡슐로 인해 6세 미만의 아이들이 심각한 중독 사고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세척된 식기에 세제 성분이 남아서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글쎄 세제 캡슐을 맛있는 사탕으로 오인하고 먹는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예쁘고 실용적인 모양이었지만 아이에게 치명적이었기에, 미국 소비자 동맹에서는 캡슐형 세제 이용을 완전히 중단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습니다.
좋아 보이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좋아 보인다고 반드시 유익한 것이 아님을 삶 안에서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제시하신 하느님 나라는 어떻게 보입니까? 솔직히 많은 규제와 의무 수행 문제로 인해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좋은 것이며,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순간적인 만족, 나의 욕심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곳이며 참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즉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실 때, 유다 사회는 단순히 예수님을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해했습니다. 이것도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을 향한 큰 기대가 있었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의 지배로 힘들어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의 위로를 전달해 줄 예언자로 여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위로만 주는 예언자로서 당신을 바라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에,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정답을 이야기하지요. 그리스도는 예언자와는 전혀 다른 호칭입니다. 단순히 하느님의 말씀으로 위로하러 온 수많은 예언자 가운데 하나가 아닌, 하느님의 구원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밝히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도 바로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주님과 함께하기에 교회는 기뻐하며 희망을 품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과연 어떤 분으로 고백하고 있을까요? 예언자만도 못한 자기 욕심만을 채워줄 그리고 자기 생각만을 다 들어주는 한 명의 종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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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이 물으시거든>
마태오 16,13-20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당신이 물으시거든>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당신을 따라 당신처럼 살고 죽음으로써
오직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답을 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벗들을 위해 제 목숨을 내어놓음으로써
당신은 사랑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빼앗음과 빼앗김 없는 세상 일굼으로써
당신은 정의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갈라져 싸우는 세상 이음으로써
당신은 화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사랑과 정의와 화해를 삶으로써
당신은 평화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착한 벗들에게 밝은 웃음 지음으로써
당신은 기쁨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슬픔에 젖은 벗들의 눈물 닦아줌으로써
당신은 위로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억눌린 벗들을 일으켜 세움으로써
당신은 해방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갇힌 벗들의 사슬을 끊음으로써
당신은 자유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외로움에 지친 벗을 품음으로써
당신은 연대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어둠을 사르는 작은 불쏘시개 됨으로써
당신은 빛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죽어가는 작은 벗들을 돌봄으로써
당신은 생명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벗을 살리기 위해 나를 내어놓음으로써
당신은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죽음의 세력에 당당히 맞섬으로써
당신은 죽음을 이긴 부활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줌으로써
당신은 하느님이라고 응답하게 하소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이 물으시거든
당신을 따라 당신처럼 살고 죽음으로써
오직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답을 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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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천국의 열쇠 지기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다시 말해서 하늘나라의 문을 열게 해주겠다고 하시는데 그 뜻이 무엇일까요?
틀림없이 좋은 뜻인 것 같기는 한데 그 뜻이 무엇일까요? 하늘나라의 열쇠가 있다는 것은 하늘나라의 자물쇠도 있다는 것이고, 그 열쇠가 베드로에게 있다는 것은 하늘나라를 여닫는 권한이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베드로에게 달려 있다는 것 아닙니까?
다시 말해서 내가 아무리 잘살아도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열어줘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나의 구원이 베드로에게 달려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 구원이 주님께만 달려 있다는 것이 우리 믿음인데 베드로에게 달려 있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말이 아닙니까? 그리고 베드로에게 그럴 능력과 자격이 있기는 한 겁니까?
없지요. 하느님 없는 베드로에게 그럴 능력과 자격이 없는 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당신의 신원을 베드로가 안 것은 인간의 머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것을 알려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하늘나라 열쇠를 위임하시지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하늘나라 열쇠를 위임하시는 것이고, 하느님의 지혜를 받고 힘을 받는 사람에게 위임하십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자기를 머리를 믿고 자기 힘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 열쇠를 맡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하늘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를 베드로에게 위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베드로 한 사람에게 맡기신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이 베드로를 반석 삼아 세우신 교회에 맡긴다는 뜻이며 그것은 교회의 일원인 우리에게도 맡기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복음 다른 곳에서 너희가 무엇이든 이 세상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신 바가 있지요.
그러니 이것은 베드로 한 사람의 영광이 아니고 교회 일원인 우리 모두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위임은 책임입니다. 주님의 위임이 우리에게는 책임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당신의 책임을 우리에게 떠넘기려는 뜻은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초대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은 당신과 우리의 공동책임이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기 위한 당신 사명을 마치시면서 당신을 대신하여 이 사명을 계속 이어갈 교회를 세우시고 하늘나라를 여닫는 대표 책임을 베드로에게 맡기시고, 베드로의 신앙을 이은 교황들에게 맡기신 것인데 우리도 천국 열쇠 지기의 책임에 공동참여하고 있다는 책임감을 지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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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 하느님”>
–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이다 –
“하느님, 제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시편86,6)
제 참 좋아하는 성가 둘은 둘 다 “오!”로 시작됩니다. “오! 아름다워라”와 “오, 감미로워라”로 시작되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성가입니다. 만일 언젠가의 제 장례미사 때에는 입장성가와 퇴장성가는 이 두곡을 부탁해 두고 싶습니다. 강론과 또 묘비명이 가능하다면,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제 애송 좌우명 고백기도시로 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입니다. 어제 오랜만에 4개 본당 꾸리아 간부들 40여명의 하루 수도원 피정을 지도했습니다. 모두가 참 아름답고 성실해 보이는 밝고 환한 모습들이었습니다. 파견미사 전 잠시 둘을 공시했습니다.
“입당성가는 못했고 퇴장성가로는 애국가를 부릅시다.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는 가사가 들어있어 성가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리고 함께 주님의 제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합시다.”
지난 주일 미사 강론 때 애국가를 부른 이후 두 차례의 단체피정 때마다 애국가를 부른 것입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가사를 들을 때는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얼마나 숙연한 분위기인지 모두가 한마음, 한 사랑의 애국자처럼 느껴졌습니다. 1절까지 기대했는데 무려 2절까지 불렀고 감동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나라도 국민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란 가사중 동해는 일본해로 바뀌었다 하는데 이렇게 되면 애국가 가사는 어떻게 되고, 독도는 어떻게 되나 하는 언짢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제 일간지 둘은 1면 톱기사와 첫째 사설은 둘 다 “독립영웅 흉상 철거하는 육사”라는 제하에 이념이나 정파를 떠나 올바른 역사관으로 볼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독립영웅은 누구나 아는 일제치하에서 나라독립에 몸바쳤던 홍범도 장군, 지청전 장군, 이회영 선생, 이범석 장군, 김좌진 장군의 다섯분 애국자분들입니다. 요즘 몇 번 미사중 이런저런 착잡한 마음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라와 국민의 안위를 위해 애국가를 부르며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피정대표자가 보내준 사진도 참 아름다워 즉시 답신을 보냈습니다.
“모두 활짝 웃는 모습이 활짝 피어난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사진처럼 사세요!”
답신을 보냈습니다. 웃으면 꽃같은 참사람 얼굴인데, 똑같은 얼굴도 분노나 두려움, 걱정으로 이그러져있으면 괴물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고백성사 보속시 말씀처방전에는 꼭 “웃어요!”라는 스탬프도 찍어 드립니다. 얼마전 주고 받은 덕담의 메시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언제나 그곳 그 자리에서 누구나 환대하시는 울 신부님! 신부님의 사랑과 겸손, 넉넉한 성품은 그 자체가 저희에게는 위로와 치유가 됩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존재자체가 저에게도 위로가 치유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서로서로에게 위로와 치유가 되도록 합시다. 그러나 궁극의 위로자요, 치유자는 삼위일체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보다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성사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오, 하느님!-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이다”로 정했습니다.
첫째, 성부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하느님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살아 있는 하느님과의 만남보다 더 절실하고 절박한 것은 없습니다. 어제 피정중 참 많이 강조한 하느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바로 이를 위한 끊임없는, 한결같은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의 의무임을 강조했습니다.
수도원은 하느님의 집이고, 수도자는 하느님의 사람이고 수도자의 기도는 하느님의 일이니 하느님은 수도자의 존재이유임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하느님을 빼버리면 말그대로 허무와 무지의 어둠입니다. 제2독서 바오로의 하느님 찬미가는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 감동인지요!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적이 있습니까?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주일이라 기념미사는 생략되지만 성녀 모니카(331-387)의 기념일이고, 내일은 성녀의 아드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성녀의 마지막 아드님에게 주신 유언도 감동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신비에 젖어 살았던 성녀 모니카입니다.
“아들아, 내게 있어선 세상 낙이라곤 인제 아무것도 없다. 현세의 희망이 다 채워졌는데 다시 더 할 것이 무엇인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 싶어했던 것은 한가지 일 때문이다. 내가 죽기전에 네가 기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천주께서 과람하게 나한테 베풀어 주셨다. 네가 세속의 행복을 끊고 그분의 종이 된 것을 보게 되니, 내 할 일이 또 무엇이겠느냐?”
자식 걱정에 노심초사하는 성녀를 위로한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어머니가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한 자녀는 잘못되는 법이 없습니다.”라는 만고불변의 조언도 우리에겐 감동입니다.
둘째, 성자 그리스도 예수님을 고백합시다.
믿음의 고백, 희망의 고백, 사랑의 고백입니다. 고백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 너희와 언제나 함께 있겠다.” 확약하신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요 도반이 되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참나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물음이라면 성자 예수님은 답입니다.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예수님만이 성자 아버지께 이르는 길입니다. 우리의 고백을 대변한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믿음이 고맙습니다. 예수님의 단도직입적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통쾌한 답변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감격에 벅찬 예수님의 축복을 가득 받은 베드로이지만 이후의 행적 또한 우리에겐 분발의 노력과 더불어 믿음의 여정에 더욱 충실하겠다는 각오를 지니게 합니다. 곧장 주님의 길을 막음으로 “사탄아, 물러가라!” 호된 질책에 또 후에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였고, 부활후 발현하신 주님은 세 번 연거푸 베드로에게 약속을 받아 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믿음의 고백에 이은 사랑의 고백입니다. 성부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성자 예수님 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의 두 가르침도 잊지 못합니다.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마라.”,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일보다 앞세우지 마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보다 그 무엇도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 교회를 사랑합시다.
성령께서 도와 주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교회의 사람이 바로 우리의 삼중신원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후 주님의 격찬이 우리에게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참으로 주님을 만남으로 참나의 반석이라 불리게 된 베드로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께 실현되었고 예수님은 자신의 절대적 권능을 베드로에 위임함으로 당신의 권능에 합류시킵니다.
“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여기 그가 가리키는 바 예수님이요, 이런 예수님의 엄청난 일을 그대로 베드로에게 위임하여 자신의 구원섭리에 동참하게 하셨으니 예수님의 베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갑니다. 우리 역시 또 하나의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께 합류하여 주님의 교회가 된 우리들입니다. 교황님의 호소가 절절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교회를 수호하십시오.”
더욱 하느님을 사랑하듯 예수님을,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교회를 이루는 성체성사 미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교회사랑, 미사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친교를 깊이 하시고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교회의 사람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당신의 길을 내게 가르치시어, 그 진리 안에서 걷게 하시고, 제 마음을 이끌어 주사, 당신 이름을 두려워하게 하소서.”(시편86,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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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오늘 복음(마태16,13-20)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6,13)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16,14)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나?”(16,15)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
참으로 베드로의 멋진 신앙고백이요 완전한 신앙고백입니다. 베드로는 먼저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으로’ 고백합니다. 죽은 하느님이 아니라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하느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 라고 고백합니다. 지금 나를 구해 주시고 살려주시는 ‘구세주’로 고백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예수님께 완전한 신앙고백을 드리자, 그에게 엄청난 은총이 쏟아집니다.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 되고,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가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다시 우리 각자에게 물으십니다.
“루카야,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런 주님 물음에 우리도 시몬 베드로처럼 대답합시다!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죽은 하느님을 믿지 말고,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읍시다! 사람을 믿지 말고, 보이는 것을 믿지 말고, 하느님을 믿고, 보이는 것 그 너머의 것을 믿읍시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로마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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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QCgU8mi3st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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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 19)
용서의
가르침을
제시해야 하는
임무가 우리
신앙공동체에
있습니다.
우리 자아가
죽지 않고는
결코
닫힌 것을
열고 푸는
열쇠가 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기록은
사랑과 용서의
위대한
기록입니다.
매듭이 묶이고
풀릴 때마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뜨겁게
체험합니다.
희망과 빛
기도와 소금을
주는 것은
사랑이라는
실천적
결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우리 모두를
위하여
존재하십니다.
어리석음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의
교회를 통한
구원은
구체적인
현실 위에
구체성을 띤
실천의 완성으로
드러납니다.
존중받아야 할
최고의 가치는
언제나
사랑의
실천입니다.
실천이라는
기본으로
돌아가지
않고서는
땅에서 묶인 것을
결코 풀 수
없을 것입니다.
기본을
갖추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잣대이며
열쇠입니다.
차분한 실천으로
하느님을 드러내는
기쁜 주일 되십시오.
올바른 신앙은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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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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