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내어라. 나다 마태오14장 22절-23절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스디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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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22-33 군중이 배불리 먹은 다음, 22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23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24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25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2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27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8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9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30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31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32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33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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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삶의 불안 속에서 스스로 거두지 못하는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시는 주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느님께서는 돌풍, 지진, 불길 속에 계시지 않았고 오히려 잔잔한 미풍 속 작은 속삭임을 통하여 당신의 존재를 엘리야에게 드러내십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풍랑 속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잠잠해지지 않았습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더 가져야 하는 것은 바로 베드로의 말과 행동입니다. 베드로의 믿음은 한순간 순수하여 오직 주님만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오너라.”라는 말씀으로 초대하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순수한 믿음은 불안과 의심으로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인간 스스로가 가지는 다부진 용기가 아닙니다. 그보다도 우리 자신의 눈길이 결코 흐트러짐 없이 오직 주님만을 향하며 믿음의 길을 갈 때, 주님의 힘이 우리를 붙들어 준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의심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문자 그대로 ‘자기 자신 안에서 둘로 떨어져 나간 상태’, ‘마음이 둘로 갈라져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자신감이 허물어진 상태가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마음이 둘로 갈려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흐트러짐 없이 바라보는 온전한 믿음만이, 불안과 의심이 생길 때마다 우리를 삼키려 입을 벌리는 바닥 모를 심연을 뛰어넘게 할 것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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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 신앙생활을 하다 베드로처럼 불안과 의심으로 쉽게 무너진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주님만을 바라보며 걸어갈 수 있는 나만의 노하우가 있다면 이야기 해봅시다.

– 기도는 우리 신앙생활에 어떤 비중(우선순위)을 두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기도와 함께 봉사할 경우와 의욕만으로 함게 봉사할 경우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 나의 마음의 평화(안전 Security)은 어디에서 오는지 생각해봅시다. 금전적인 문제나 사람들과의 관계가 안정이 된 이후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건 아닌지… 그런 문제가 늘 있어도 주님만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현실적인 부분 보다는 주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은 무엇일지 상상해 보며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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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675
8월9일 [연중 제19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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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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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vf0gz5ZT7rc
[원주교구 고은락 베네딕토(천사들의 집 원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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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 내 인생의 조각배 위로 올라오시면!>

이스라엘은 좁은 국토면적을 가진 소국이지만 아주 다양한 지형과 기후를 가진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서쪽에 지중해라는 큰 바다와 동쪽의 거대한 사막 사이에 끼어있는데 그래서 ‘사이의 땅’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아열대성 기후와 지중해성 기후가 교차하는 독특한 기후 조건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리적으로도 고산지대가 있는가 하면 바다 수면보다 수백 미터나 낮은 지역들이 있어 지역적으로 다양한 기후를 갖고 있지요. 고산지대인 예루살렘은 엄청 춥지만, 저지대인 사해 부근은 혹독한 더위를 견뎌내야 합니다. 메마른 유다 광야에는 풀 한 포기 찾기 힘들지만, 해안가나 갈릴래아 호숫가는 항상 푸르고 온난합니다.

갈릴래아 호수 역시 이런 독특한 지리와 기후의 영향을 받아 자주 특별한 모습을 보입니다. 평소 잔잔하다가도 갑자기 깜짝 놀랄 정도의 풍랑이 일기 시작합니다.

멀리 헤르몬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찬바람과 아라비아 사막으로부터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이 갈릴래아 호수 상공에서 부딪치기라도 하면 심한 기류의 이동이 발생해 마치 바다처럼 높은 파도가 일렁거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갈릴래아 호수라고 하지 않고 바다라고까지 칭할 정도였습니다.

군중을 해산 시킨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벳사이다로 먼저 보내십니다. 그리고 당신은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육로로 가기는 너무나 먼 길이었기에 제자들은 갈릴래아 호수를 가로지르는 배에 승선합니다.

하필 제자들이 배에 오르자마자 악천후가 시작되고 맙니다. 제자들의 고초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배에 태워 보낸 시간은 오후 4~5시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새벽녘까지 호수 한 가운데서 헤매고 있었으니 적어도 10시간 가까이 탈진할 정도로 노를 저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탈진했으면 새벽녘에 물 위를 걸어 자신들 가까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유령이다!”라며 소리까지 질러댔습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의 단절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아직까지 스승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정체 파악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분이 바로 메시아라는 확신에 도달하지 못함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아직까지 스승을 향한 제자들의 믿음이 확고하지 못함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우리 각자 역시 갖은 역풍과 맞서면서 인생이란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때로 그 역풍이 너무나 커서 삶 전체가 흔들리기도 합니다. 때로 지레 겁을 먹기도 합니다.

파선될 것 같은 기분에 다 포기하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 인생의 조각배 위로 올라오시면 아무리 큰 풍랑이라도 순식간에 잔잔해질 것이기에 무조건 참고 견디는 일이 중요합니다.

어두운 밤 갈릴래아 호수 위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현현은 큰 의미를 지닙니다. 유다 문학 안에서 깊은 물은 악의 세력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악과 어둠과 죽음의 정복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생명의 부여자로 자리매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의 물결을 당신 발아래 두십니다. 그분의 옥좌는 광란하는 파도보다 높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분은 거센 역풍을 다스리실 능력의 소유자이십니다. 당신의 현존으로 인해 제자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고 보호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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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하반기 살레시오 피정 센터 피정 운영 안내■ (2026년 8월 8일 수정)
041)675-7211
네이버 카페: 살레시오 피정센터, cafe.naver.com/pijung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를 비롯한 살레시오회 수도자들의 강의, 미사, 고백성사, 기도, 묵상, 상담, 소풍 등을 통한 영적, 육적인 쉼과 회복, 위로와 기쁨의 시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1. 1박 2일 영성 피정(가급적 빨리 신청하시면 좋습니다)
-2인 1실, 3끼 식사, 일인 당 피정비 15만원(독실 17만원)
-영성 강의, 미사, 성체강복, 묵주기도, 고백성사, 신앙 상담, 깔깔쇼, 산책 등
-익일 파견 미사 및 점심 식사로 끝나지만, 하루 더 숙박 가능, 추가 비용 없음
-대중교통 이용 시 첫날 오후 2시 태안버스터미널 픽업
-둘째 날, 오후 5시 이후 태안버스터미널 출발 버스 예매 필수
-서울 강남 호남선 및 대전 복합터미널에서 태안까지 2시간 소요.

9월 5일(토)~6일(일), 9월 12일(토)~13일(일), 9월 19일(토)~20일(일), 10월 3일(토)~4일(일), 10월 10일(토)~11일(일), 10월 17일(토)~18일(일), 10월 24일(토)~25일(일), 10월 31일(토)~11월 1일(일), 11월 14일(토)~15일(일), 11월 28일(토)~29일(일), 12월 5일(토)~6일(일), 12월 12일(토)~13일, 12월 19일(토)~20(일), 12월 24일(목)~25일(금), 12월 31일(목)~1월 1일(금)

*레지오나 반 모임 등 교회 단체나 가족, 친구일 경우 열 명 내외 인원이면 주중에도 1박 2일 가능합니다. 날자 조율하시면 됩니다.

2. 하루 피정
-일인당 피정비 5만원, 개인 혹은 소규모, 단체 신청 가능, 10명 이상 가능
-원하시는 날자(평일) 조율 필요.
-영성강의, 점심식사, 개인 묵상, 고백성사, 신앙 상담, 파견 미사 등
-대중교통 이용 시 오전 11시 태안버스터미널 픽업, 오후 5시 태안 출발 버스 예매 필수

3. 원룸이나 부속 독채에서 자체 식사와 함께 하는 피정
-식사 자체 해결하면서 공동체 미사와 아침 저녁 기도 참석, 고백성사 및 면담 가능
-비용(1박2일): 1인: 5만원, 2인: 10만원, 3인: 12만원, 4인:14만원, 5인:16만원, 6인: 18만원, 7인: 20만원, 8인: 22만원, 9인: 24만원, 10인:26만원(동하절기 약간의 냉난방비 추가)

4. 신앙 상담 및 고백성사
-상시 가능
-문자나 전화로 시간 예약 필수

5. 초중고 겨울 동계 피정 대관 안내
-기간 2027년 1월~2월
-피정 운영 및 진행: 본당

*피정 센터에서 제공 가능한 프로그램
-미사(주례, 강론, 반주)
-고백성사와 신앙 상담
-복음성가 연습
-떼제 성가와 함께 하는 성체강복
-묵상과 함께 하는 묵주기도
-군고구마와 함께 하는 불멍 체험
-바베큐 파티 등
-비용: 1박 2일 3끼 식사: 1인당 12만원, 2박 3일 6끼 식사: 1인당 15만원

6. 예약
-문자로 신청(010-6817-9484)
-날자, 인원, 대표자 성함, 세례명 적어주시면 가능 여부를 확인해 드립니다.
-1박 2일 영성 피정인 경우 1인당 5만원 입금시 확정. 취소나 변경시 늦어도 열흘 전 문자
-단체 피정일 경우 전체 금액의 10퍼센트 입금시 확정, 취소나 변경시 늦어도 한 달 전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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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노력하라 가르치면 자녀 인생 망친다>

“제가 평생 열심히 노력해서 살아왔는데, 결과는 비참합니다.” 이런 한탄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노력은 좋은 것일까요? 분명 대부분 좋은 것으로 생각ㄱㄱ6ㄷ5합니다. 그러나 노력해서 되나요? 노력했더니 원하는 것을 얻었나요? 노력했더니 원하는 관계가 맺어졌나요? 노력했더니 인생에서 성공했나요?

오히려 노력하는데도 안 되는 것이 많지 않았습니까?자녀에게 노력하는데 자녀는 그 마음을 알아줍니까? 배우자는 나의 노력을 알아주나요? 직장에서 노력하는데도 오히려 인정은 다른 사람이 받지 않습니까?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말은 세상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일종의 덫이고 함정입니다. 노력해서는 절대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덫에서 빠져나오려면 왜 지금 우리가 하는 노력이 헛된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우선 우리가 왜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부터 확실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공부하고 왜 일하고 왜 자녀를 키우나요?

사실 우리는 ‘두려움’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을 갖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버리고 떠날까봐 두려워 노력하고,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할까 노력하며,
자녀들에게 자신들을 왜 그렇게 키웠느냐는 원망을 받을까 봐 노력합니다.

이렇게 두렵지 않으려는 근저에는 ‘행복’이란 생각이 깔려있습니다. 우리는 두렵지 않아야 행복할 것이라 믿습니다. 두려움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라고 믿는 것을 노력해서 갖게 되었다면 두렵지 않나요? 이젠 그것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합니다. 저 사람과 결혼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는데, 이젠 그 사람이 바람피울까 봐 두려워합니다.

일단 인간은 노력만으로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욕구에서 나오는데, 그 욕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욕구라는 컵에 담긴 물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 물을 마시기 위해 욕구까지 들어 올리게 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싶은 욕구가 생겼을 때 그것을 먹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도 동시에 생겼습니다. 사실 욕구가 사라지면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두려움을 없애려면 욕구부터 없애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추구하는 욕구의 최종목적지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모든 욕구는 생존을 넘어서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습니다. 내가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렇게 여겨주지 않으니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 좋은 배우자와 결혼하여,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인정받으려 합니다.

결국,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워런 버핏은 인생의 성공이 무엇이냐 물을 때,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돈을 가장 많이 번 사람도 결국은 사랑받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자신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심리상담사, ‘고코로야 진노스케’의 『너무 노력하지 말아요』란 책이 있습니다. 고코로야가 심리상담사로 처음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우선 강연을 통해 사람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지금 참가 신청을 하면 최신 사은품을 준다고 하고, “이 강연에 참여하면 내일부터 당신을 다른 사람!” 이런 문구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홍보해도 강연장은 텅텅 빌 때가 많았습니다.

고코로야는 계속 자신의 문제점을 찾아내어 바꿔보려 했습니다. ‘홍보를 잘 못 했나?’, ‘수강료를 좀 더 싸게 했으면 잘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바뀌는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아! 내가 내 강의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구나!’

자기 스스로 자신의 강연이 ‘더 싸고 좋은 혜택이 있어야지만 관심을 가질 만하다.’라는 전제로 강연의 가치가 낮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파는 사람이 가치 없다고 여기는 것을 사는 사람이 어떻게 가치 있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이후 그는 ‘내 강연은 수강료가 비싸도, 사은품이 없어도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강연이다.’라고 전제를 바꾸고, 원래는 도쿄까지 올라가서 하던 강연을 사은품도 없애고 자신의 고향인 교토에서 그냥 열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강연장에 사람이 꽉 찼다고 합니다.

노력은 인정받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인정을 받았다고 믿으면 그 노력은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근원적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두 가지 다른 태도가 나옵니다. 한 부류는 두려움의 바다와 맞서 끊임없이 노를 젓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인정받으려고 평생 자기의 힘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는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그들에게 두려움은 오직 노력으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고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을 보는 것은 유령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두려움을 이미 극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현실이 아니라 유령처럼 바라봅니다. 저런 방식으로는 절대 자신들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 자기 존재가치를 증명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로 초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베드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려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바다를 예수님처럼 걸어보는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 하는 것이라면, 이미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는 것으로 그 바다를 넘어보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그리고 물 위를 걷습니다. 물론 그 믿음이 완전하지 못하여 다시금 두려움에 빠지기도 하지만 베드로가 느끼는 두려움은 이미 배 위에서만 머무는 제자들이 느끼는 두려움과는 질적으로 다른 두려움입니다.

배 위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은 끝나지 않는 두려움으로 살겠지만, 베드로는 언젠가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물 위를 자유롭게 걷게 됩니다.

고아로 남의 집 식모살이만 하시며 자라신 저희 어머니가 자살을 생각하실 때 물 위를 걸어오시던 예수님은 나병 환자 있는 곳으로 방향을 바꾸시며
“저런 사람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삶이 힘든 것은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인정 받기 위해 너무 열심히 노력해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노력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당신께서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믿어야만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그리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모든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이런 신앙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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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마산교구 유청 안셀모 신부님]

성경에는 자연 현상이나 소리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옵니다. 우렛소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을 받을 때 시나이산에서 주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상징이었고(탈출 19,19 참조), 지진은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드러내는 표지였습니다(시편 18[17],8 참조). 불은 모세가 하느님을 뵈었던 불타는 떨기나무를(탈출 3,4 참조) 떠올리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 그리고 불길 등의 표현은 힘 있는 하느님의 표징입니다. 엘리야는 이 신비스러운 자연 현상을 통해서 믿음의 시험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력한 자연 현상 그 어디에도 주님께서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나가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1열왕 19,12)가 들려왔을 때, 엘리야는 주님의 현존을 느끼고 주님 앞에 섭니다. 이 장면은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바라보는 가운데 화려하게 나타나시지 않고 조용히 오셨습니다. 지금도 조용하고 부드러운 말씀으로, 성체 성혈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강하고 힘이 센 주님을 찾고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그런 체험을 할 기회는 흔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천둥 번개 치듯 나타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소리 없이’ 나타나시는 하느님과 ‘조용하고 부드러운 사랑’이 무엇보다 큰 힘이신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소리 없이’ 그러나 우리를 통하여 활동하시는 ‘조용하시고 부드러우신’ 하느님을 묵상하는 뜻깊은 한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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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4,22-33: 풍랑에 시달리는 배

1. 하느님의 현존은 “살랑거리는 바람” 안에
오늘 제1독서(1열왕 19,9.11-13)에서 엘리야는 호렙 산에서 하느님을 기다린다. 그분은 “크고 강한 바람에도, 지진에도, 불에도 계시지 않고,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 속에”(1열왕 19,12참조) 나타나신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알아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린다(13절) 이는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경외의 표시이다. 이 대목은 하느님이 “권능의 폭풍”이 아니라, “사랑의 친밀함”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느님은 인간의 삶 속에서, 큰 사건보다 작은 충실함 안에 현존하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하느님은 외적인 굉음 속에서가 아니라, 영혼의 고요함 속에서 말씀하신다.”(Hom. in 1 Regum 19 의역)라고 하였다. 따라서 기도와 침묵의 내적 공간을 마련하지 않으면 그분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없다. 하느님은 오직 사랑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며, 그 현시는 구원을 위한 자비의 행위이다.

2. 예수님: 풍랑 위에 서 계신 하느님의 아들
복음(마태 14,22-33)은 그 하느님의 현존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장면은 단순한 기적의 시범이 아니라, 하느님께만 속한 주권의 표징이다. 시편 77,20은 이렇게 노래한다. “당신의 길이 바다를, 당신의 행로가 큰 물을 가로질렀지만 당신의 발자국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다는 것은 바로 야훼의 현존(theophania)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즉, 그분은 단지 인간의 스승이 아니라, “자기 백성과 함께 바다를 건너시는 하느님”(탈출 14,21-22)의 완전한 현현이시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다의 격랑 위를 걸으심으로써, 피조물 위에 주권을 가지신 분임을 드러내셨다. 그분은 ‘나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이름을 드러내신다.”(In Matthaeum 14,27 의역) 예수님의 “나다.”(ἐγώ εἰμι)는 단순한 자기 확인이 아니라, 탈출 3,14의 “나는 있는 나다.”(Ἐγώ εἰμι ὁ ὤν)의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다시 울려주는 말씀이다.

3. 풍랑에 시달리는 배: 교회의 상징
제자들이 탄 배는 격랑에 휩싸여 있다. 교부들은 이 배를 교회의 상징으로 해석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바다는 세상이고, 배는 교회이며, 바람은 박해와 유혹이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계시니 배는 결코 침몰하지 않는다.”(Sermo 75,4 요약)라고 한다. 교회는 역사를 항해하며 세상의 조류를 거슬러 나아간다. 때로 주님이 “멀리 계신 듯” 느껴질 때가 있지만, 그분은 언제나 “풍랑 위를 걸으시며” 교회를 향해 오신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27절) 이 말씀은 하느님 백성의 역사를 통틀어 반복되는 구원의 언어이다. 이사야서에서도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이사 41,10)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현존은 언제나 두려움을 평화로 바꾸는 사랑의 힘이다.

4. 베드로의 믿음과 의심: 교회의 초상
베드로는 용기 있게 “주님,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28절)라고 청하지만, 거센 바람을 보고 곧 의심에 빠진다. 이것이 믿음과 두려움 사이에 선 인간의 모습, 곧 교회의 현실적 초상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바람을 보고 두려워한 베드로는 자신을 보았고, 믿음에서 눈을 돌렸다. 그러나 손을 내밀어 붙잡으신 주님은, 곧 교회의 구원자이시다.”(In Ioannem Tractatus 2,5 의역) 교회의 위기, 세상의 풍랑, 신앙인의 불안 속에서도 그리스도는 손을 내밀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31절)라고 구원하신다. 이는 꾸짖음이 아니라 사랑의 초대이다. 다시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라는 초대이다.

5. 교부적·교의신학적 조명
성 그레고리오는 이 장면을 교회의 역사적 여정으로 해석하며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산에서 기도하시고 제자들이 바다에 있는 것은, 하늘의 주님과 땅 위에 있는 교회의 관계를 보여 준다.”(Homiliae in Evangelia 16,5 의역)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와의 친교로부터 흘러나오며, 그분은 기도 속에서 우리를 위한 중개자로 계신다.”(2609항 요약) 즉, 주님은 “산에서 기도하시며 바다의 제자들을 지켜보시는 분”으로, 오늘의 교회와 신자들을 위해 계속 중개하고 계신다.(히브 7,25)

6. 결론: 믿음으로 걷는 삶
오늘 복음은 말한다.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32절)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함께 계시는 한, 어떤 풍랑도 결코 침몰시킬 수 없다. 믿음이란 풍랑이 없는 바다를 걷는 것이 아니라, 풍랑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걷는 것이다. 성 베르나르도는 “믿음은 발이 닿지 않는 곳에서 걷게 하는 손길이다.”(Sermo in Nativitate Domini 3,2 의역)라고 하였다. 우리는 두려움 속에서도 “나다.” 하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그분께 손을 내밀어 붙잡아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도 “진실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33절) 하고 고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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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낯선 당신>

마태오 14,22-33 (물 위를 걸으시다)

군중이 배불리 먹은 다음,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낯선 당신>

분명 당신인데
내게 오시는 당신이
너무나도 낯설어 두렵습니다

납니다
언제나처럼 납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날 두렵게 하는
당신의 낯섦을 떨치도록
당신을 닮게 해주십시오

그래요 오십시오
내가 그대에게 가듯이
그대 나에게 오십시오

한 걸음 두 걸음 그러나
당신 닮은 내가 오히려 내게 낯설어
또 다시 두려워 무너집니다

괜찮아요 나를 잡고 일어나십시오
나의 낯섦과 나 닮은 그대의 낯섦이
그대에게서 사라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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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후유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행을 다녀오면 ‘시차’라는 후유증이 있기도 합니다. 밤을 새워 놀았으면 다음 날 ‘피곤’이라는 후유증도 있습니다. 포트워스 신부님과 산타페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12시간 운전하는 여행이었고, ‘어도비’라는 독특한 양식의 건물을 보았습니다. 신부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아이스박스에 음식과 술을 가져가서 경비도 절약하였습니다. 전체 경비가 600불 정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후유증이 있었습니다. 가는 날과 오는 날 경찰에게 ‘티켓’을 받았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범칙금의 반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가볍다고 하니, 나누어 내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2주 후에 신부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범칙금 고지서가 나왔다고 했습니다. 반을 주기로 해서 고맙다는 문자였습니다. 그런데 벌금의 액수가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여행 경비의 3배인 1,800불이 나왔습니다. 그래도 사이좋게 반씩 나누어서 냈습니다. 생각보다 큰 후유증이었습니다.

21년 전의 일입니다. 저는 당시 사목국에서 교육 담당 업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대방동 성당에서 구역장, 반장 교육이 있었습니다. 제 강의 시간은 오후 4시였지만, 미리 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2시에 강의하러 오실 신부님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저는 몸이 피곤해서 잠시 불가마 사우나에 가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우나에서 방송이 나왔습니다. “손님 중에 조재형 씨 계시면 나와 주십시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사우나에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사연을 알게 되었습니다. 2시에 오기로 한 신부님이 길이 막혀서 늦는다고 연락하셨습니다. 봉사자는 제가 성당에 와 있는 것을 알고, 그러면 제가 먼저 강의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모상 앞에도 제가 없고, 성체 조배실에도 없고, 사제관에도 없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불가마 사우나에 연락했고, 저는 정말 그곳에 있었습니다. 저는 급히 옷을 갈아입고 성당으로 돌아와 먼저 강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늘 긴장하고 불안하게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알고, 내가 해야 할 일을 기억하며, 부르심이 있을 때 응답할 준비를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날 저는 잠시 쉬고 있었지만, 불러 주는 소리를 듣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신앙인도 그렇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다시 복음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나에게 내리셨다. 가난한 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묶인 이를 풀어주며, 눈먼 이를 다시 보게 하고, 억눌린 이를 자유롭게 하라고 나를 보내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 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삶으로 이루신 분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마귀 들린 이를 해방해 주셨고, 병든 이를 고쳐 주셨으며, 죄인에게 용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명의 물을 주셨습니다. 베짜타 못가에서 38년 동안 기다리던 사람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있던 여인에게 새 삶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셨고, 중풍 병자를 일으켜 세우셨으며, 눈먼 사람에게 빛을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화려한 궁전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권력과 명예를 가진 사람들 곁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 죄인, 마귀 들린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믿음이었고, 이것이 예수님의 길이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믿음에 대한 아름다운 글을 남겼습니다.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 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그리고 더 깊이 묻습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주고 있는가? 믿음은 말로만 하는 고백이 아닙니다. 믿음은 누군가가 나에게 마음을 맡길 수 있는 삶입니다. 믿음은 어려운 순간에도 끝까지 지켜주는 마음입니다. 믿음은 세상의 유혹 앞에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주는 내면의 힘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보장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을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성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하셨기 때문에 “예”라고 대답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모님의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을 맡기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믿음은

하느님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나를 믿고 맡겨 주셨기 때문에 기쁘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돌보는 것도 믿음입니다. 봉사자가 공동체를 섬기는 것도 믿음입니다. 사제가 말씀을 준비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신자가 아픈 이웃을 찾아가고, 외로운 이를 위로하고, 어려운 이에게 손을 내미는 것도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영원한 생명의 길을 분명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믿음은 가난한 이에게 빵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외로운 이에게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병든 이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믿음은 용서받지 못한 이에게 자비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성당 안에서만 피어나는 꽃이 아닙니다. 믿음은 가정에서, 일터에서, 병원에서, 길 위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피어나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 믿음의 꽃은 피어있습니까? 내 믿음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고 있습니까? 내 믿음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게으름과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시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산타페, 곧 거룩한 믿음이라는 말처럼, 우리의 삶도 거룩한 믿음의 길이 되면 좋겠습니다. 믿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르실 때,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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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시길 빈다. 예기치 않은 무더위로 지친 마음을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도록 강복해 주시길 청한다.

우리 삶의 여정은 방황, 안주, 순례의 삶이다.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이 줏대 없이 이리저리 헤매는 삶, 이 삶이 방황이다. 안주는 천상을 바라보고 영원한 삶을 추구해야 함에도 내가 원하는 현실에 머물러서 그럭저럭 살아가려 하는 모습이다. 순례는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고 동시에 하느님의 품 안에 머무는 삶이다. 세상 사람들은 편안하고 안락한 길에 관심을 두지만, 신앙인은 방황하지 않고, 안주하지 않으며 순례의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한다.

혼자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어둠 속 풍랑에 시달리며 두려움에 있는 제자들을 구해주시려 단숨에 달려가셨다. 그리고“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에게는 물 위를 걸어‘오너라.’ 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밟고 예수께로 걸어갔다.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하고 청한 자기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깐이었다. 거센 바람을 보자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들게 되었다.(마태14,30).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물 위를 걸었지만 거센 바람을 보았을 때는 물에 빠졌다. 아무리 험한 상황이라 해도 그 속에 주님이 계시면 그에 관한 확고한 신념을 지켜야 한다. 어려움이 생겨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우리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다. 어둠과 거친 맞바람으로 여겨지는 위기가 참으로 많다. 가정의 문제, 경제적 어려움, 이웃과의 소원한 관계, 알콜, 흡연 등등 감당하기 힘든 일이 있을 때 두려워진다. 그러나 이때가 내가 기댈 주님께서 다가오고 계시는 때다. 거센 바람을 뚫고 제자들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자리에도 오신다. 마음의 문을 열어 그분께 철저히 의지해야 한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신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믿음은 아무래도 ‘머리’로 믿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성경의 말씀을 수긍하고 받아들여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진리에 동의하는 지성적 행위’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야 한다. 우리는 가슴으로 믿어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현존, 사랑, 예수님께서 주시는 용서와 평화 등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의지로 믿어야 한다. 세상의 셈법을 따르지 않고 조건이 어떠하든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철석같이 믿어야 한다. 기도에 대한 응답, 신앙 안에 키워온 어떠한 꿈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지녀야 한다. 그때는 내가 원하는 때와 방법이 아니지만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항구해야 한다.

많은 경우 ‘모든 일이 잘 풀린다면’, 내 사업이 잘 된다면, 내가 행복해진다면, 건강이 좋아진다면, 성공한다면’, 그때 하느님을 믿고 감사드리겠다고 말한다. 소위 ‘……한다면’의 신앙생활을 한다.

반면에 ‘비록 악한 사람이 선한 이들보다 잘 사는 듯이 보여도, 착하게 산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사랑하는 이가 고통 안에 있어도 나는 그 순간에도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신뢰할 것이다.’하면서‘그럼에도’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전천후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다. 변화무쌍하고 덧없는 세월에도 상관없이 소신을 지키는 사람이다. ‘내가 궁핍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다.’(필리 4,11-12).고 말한 바오로 사도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우리도 예기치 않은 위기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급히 달려오시는 주님이계시다는 것을 믿고 굳건해지길 바란다.

베드로에게 닥친 세찬 바람이 은총이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을 바라볼 때 어떻게 되는지를 그는 확실히 체험했다. 믿음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험한 상황이라도 그 속에 숨어계신 예수님을 보는 사람에게는 문제 될 것이 없다.

우리 인생 항로에서도 역풍을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때는 믿음을 성장시킬 기회요, 더 큰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순간이다. 곤경의 맞바람을 보지 말고 그 한복판에 계신 구원자 예수님을 확실히 보라!

“어둠 속에 있어도 믿음과 희망 안에 사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은 당신을 지켜 주시니 말입니다.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주님, 저희의 믿음을 더해 주시고 진리의 빛으로 굳세게 하소서.”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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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는 의심이 암이래요, 항암제는 오직 믿음뿐이고요. 그러니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확실하게 믿으십시오. 우리 믿음의 대상은 오로지 주님뿐,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 그러므로 사람을 믿어서 발등 찍히지 말고 오로지 주님을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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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이들은 자기 부모를 ‘내 편’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버릇없어 보이는 어리광도 부립니다. 그러나 ‘내 편’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거리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본당 아이들은 저를 보면 달려와 껴안기도 하면서 반가움을 표시합니다. 물론 간식달라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아마 자기 편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조카 손주를 만났습니다. 반가워서 다가가니 울음을 터뜨립니다. 낯을 가리는 나이이기도 하지만, 아마 낯설어서 ‘자기편’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가 상대방을 ‘내 편’이라는 생각이 들어야 사랑으로 연결됩니다. 상대가 알아서 먼저 사랑으로 다가오면 모르겠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내 편을 만들기 위해 내가 먼저 사랑으로 상대에게 다가가는 방법이 훨씬 쉽습니다.

세상은 과연 내 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세상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세상에 계속 선물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쓰레기를 주우면서 ‘세상아! 나는 네 편이야. 널 사랑해.’라고 말한답니다. 이처럼 자기가 사랑해서 먼저 선물을 주어야, 상대도 자기편으로 인정해서 선물을 자기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과 ‘내 편’의 관계인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과 거리를 두고, 그 어떤 주님의 일도 하지 않는다면 과연 같은 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산에서 기도하고 계실 때, 제자들을 태운 배가 거센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과연 주님께서 제자들의 풍랑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몰랐을까요? 기도하시는 주님의 시선과 마음은 늘 제자들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급했으면 물 위를 걸어오셨겠습니까? 더구나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라고 안심의 말씀까지 해주십니다. ‘내 편’에 서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바다와 거센 물결은 인간을 위협하는 혼돈과 죽음의 세력을 상징했습니다. 따라서 물 위를 밟고 오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혼돈과 죽음을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베드로가 자기에게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향해 물 위로 발을 내딛는 놀라운 용기를 보여줍니다. 주님 말씀에 온전히 의탁했다는 것이지요. 주님을 ‘내 편’으로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물에 빠지고 맙니다. 그의 시선이 예수님에게서 ‘거센 바람’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곧바로 주님께서 붙잡아 주시면서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4,31)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심하는 순간, ‘내 편’의 관계는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거센 바람 앞에 허우적거리며 빠져드는 우리입니다. 그때 과연 주님을 ‘내 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내 편’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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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원호 바오로 신부님]

<도포 자락 휘날리며 다가오시는 주님의 힘찬 발걸음>

괜찮으리라 생각했지만, 신학교 생활의 시작은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지내던 제 눈에 기숙사에 걸려 있던 그림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운보 김기창 화백이 한국의 색과 멋으로 그린 예수의 생애 중 〈물 위를 걷다〉라는 작품이었습니다. 푸른 파도 위에 하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초연히 서 계신 예수님께서 반쯤 벗겨진 갓을 쓴 채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베드로의 두 손을 꼭 잡고 계신 그림이었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처지의 저에게 그 그림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방학 때 헌책방 골목을 샅샅이 뒤져 ‘운보 김기창 성화 집’을 힘들게 구해 모든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이스라엘의 광야가 우리 강산으로 바뀌고, 성경의 인물들은 매일 골목에서 마주했을 것 같은 이웃의 얼굴로 다가왔습니다. 무엇보다 이국의 왕으로 멀게 만 느껴졌던 예수님이 ‘우리의 왕, 나의 주님’으로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나의 나약함과 한계를 고스란히 당신의 것으로 안으시기 위해 우리말과 옷을 입고 삶의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분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거친 풍랑에 시달리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시퍼런 파도 위를 걸어 주님께서 다가가십니다. 파도 위 발자국은 사라질지언정 주님의 사랑과 용기는 제자들의 마음에 새겨집니다. 이렇게 수고로 움을 마다 않고 우리 곁에 다가오시는 주님은 가장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에게 다가오신 주님을 잊습니다. 삶이 잔잔할 때는 생각조차 하지 않다가 조금만 인생의 바람이 불고 고난의 파도가 몰아치면 주님을 찾습니다. 그러다가도 눈앞의 두려움에 압도되는 순간 우리는 물속으로 가라앉는 베드로가 됩니다. “주님, 살려주십시오!” 외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의심과 불 신이라는 더 깊은 수렁으로 스스로를 몰아넣습니다.

우리가 빠져드는 거친 바다는 세상의 시련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불신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바로 그 불신의 바다 위를 걸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거센 풍랑도, 우리의 깊은 의심도 주님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허우적거리는 우리의 손을 단단히 움켜쥐시며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애정 어린 핀잔을 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오늘도 주님께서는 도포 자락을 날리며, 바로 여러분의 삶 한가운데로 걸어오고 계십니다.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의 힘찬 발걸음과 우리를 단단히 잡아 주시는 주님의 두 손이 있는 한 우리를 삼키려던 어떤 거친 파도도 주님 사랑을 체험하는 통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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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박재우 베드로 푸리에 신부님]

<용기를 내어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 가로등 하나 없는 낯선 시골길을 운전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방은 어둡고 거센 비바람까지 몰아친다면, 내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지 덜컥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그때 우리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것은 작은 화면 속 ‘내비게이션’의 안내 음성입니다. 눈앞은 여전히 어둡지만, 내비게이션이 “잠시 후 우회전입니다”, “곧 목적지 주변입니다”라고 다정하게 말해주기에 우리는 안심하고 다시 가속 페달을 밟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속 제자들의 마음이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스승님이 곁에 계시지 않는 칠흑 같은 밤, 호수 한가운데에서 맞바람을 맞아 배가 뒤집힐 것 같은 위기를 마주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부재가 가장 큰 어둠이자 공포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서 기도하시면서도 제자들의 고통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힘겨운 새벽녘, 물 위를 걸어 이정표처럼 나타나셨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거친 파도를 뚫고 들려온 예수님의 목소리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벗어나게 해주는 가장 안전한 안내 음성이었습니다.

우리 삶에 찾아오는 밤도 이와 닮아 있습니다. 고통과 슬픔, 뜻하지 않은 시련으로 눈앞이 캄캄할 때, 우리는 길을 잃었다고 낙담하며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만 같아 외로워합니다.

그러나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가장 정확한 내비게이션입니다. 상황은 여전히 어둡고 세상의 거센 바람이 불지라도, ‘용기를 내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결국, 내 마음의 상태가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을 결정하게 됩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면 내가 바라보는 세상도 두려운 것이고, 늘 주님의 믿음 안에서 굳게 살아가려 한다면 세상의 모든 어려움도 다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좋은 것만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아니지만, 어떤 상황이든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결국 자기만의 선택입니다. 그 선택의 순간에 우리 신앙인들은 불신과 의심의 삶이 아니라 용기를 내어 믿음의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연중 제19주일, 마음을 어지럽히는 세상의 소음을 잠시 끄고 기도의 주파수를 맞추어 봅시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이시는 주님의 안내 음성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태 14,3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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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이재헌 프란치스코 신부님]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만 보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참 많은 일을 하십니다. 5천 명의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고 난 다음, (제자들이 힘들까 봐)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십니다.(마태 14,22)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산에 계셨습니다.(14,23)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파도치는 호수 위를 걸으시어 제자들 쪽으로 가셨습니다.(14,25) 물에 빠지는 베드로를 구하시고(14,31) 바람을 그치게 하셨습니다.(14,32)

그런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체험한 제자들은 자기들의 스승님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고백에 이르기까지 했던 말들 – “유령이다!” (14,26),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14,28),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14,30) – 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14,27), “오너라.” (14,29),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14,31) – 을 통해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풍파를 겪을 때 가지게 되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시험에 듭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더 산란하게 만듭니다. 인간적인 한계가 자꾸 우리의 신앙을 약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래도 신앙인은 그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께 나아가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종종 의심한다고 해서 자책하지 마십시오. 제자들 또한 누구보다도 예수님 가까이서 기적을 체험하고도 예수님을 의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 또한 끝까지 포 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두려울 때 손을 내밀면, 영원한 죽음에서조차 우리를 구해 주시는 그분께서 언제나 우리 손을 잡아 주십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십시오. 주님이십니다. 두려 워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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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는 물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으로 하느님을 신뢰했던 세 사람, 곧 엘리야와 바오로와 베드로가 믿음의 위기에 닥쳤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의 믿음이 위험에 처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제1독서는 엘리야가 가르멜 산에서 바알의 사제들을 쳐 죽인 후 자신을 죽이려는 이제벨 여왕을 피하여 호렙산의 동굴로 피해 있을 때, 주님께서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1열왕 19,11) 하시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당신을 찾아오시어 위로하심을 전해줍니다.

곧 믿음의 위기에서 엘리야를 건져주셨음을 보여줍니다. 제2독서는 바오로의 사도에게는 일생을 통하여 그를 괴롭힌 것이 있었으니, 자신의 동족인 유다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와 불신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에 대한 답을 주시지 않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과 언젠가는 그분을 받아들일 날이 오리라는 것을 확신하며, 신뢰와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 받으실 분이십니다.”(로마 9,5)

복음은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 신앙의 위기에서 오히려 주님께 대한 믿음을 되찾은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의 이야기는 의심하는 습관을 지닌 한 회의주의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압도되어 혼란에 휩싸여서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삶에 기꺼이 도전하고, 미지의 물속으로 뛰어드는 신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더 깊은 신앙의 길로 나아가려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어둠과 위험과 만연한 이 세상에서 교회라는 배를 타고 하늘나라라는 건너편으로 건너갑니다.

그러나 배를 타고 앉아 있다고 해서 절로 하늘나라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침몰하지 않으려면, 키를 제대로 잡고서 모든 위험요소를 헤쳐 나가야 합니다. 사실, 삶의 물살이 고요한 강물처럼 잔잔하게 흐를 때는 믿음과 신뢰에 대한 도전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삶의 물살이 암담하고 격렬하게 풍랑으로 밀어닥치면, 우리의 신앙은 베드로처럼 시험에 들게 되고 도전을 받게 됩니다. 베드로는 기꺼이 위험을 감수합니다.

그는 안전한 자기 배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예수님께 와 달라고 소리쳐 부르기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습니다(마태 14,19).

그렇습니다. 우리는 물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 길을 떠나지 않고서는 ‘신앙의 도약’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은 가만히 앉아 있거나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비록 물속에 빠져 허우적댄다 할지라도 자신을 불투명한 미지에 던질 때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물’은 우리를 침몰시키기도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걸으면 우리를 떠받쳐주고 목적지로 인도하는 ‘발판’이 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신앙의 길’은 예수님께만 믿음을 두는 ‘순종’을 통해서 가능해집니다.

본 훼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신앙이란 순종이 있을 때에만 참이다. 순종할 때에만 비로소 신앙은 신앙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위기의 순간에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캄캄한 밤에 길을 잃고 헤맬 때, 풍랑 속에서 혼란과 혼동에 빠졌을 때, 어둠과 절망에 빠져 두려움에 휩싸였을 때, 바로 우리 곁에 다가와 계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약해져 있을 때, 오히려 당신의 손을 내미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사실 ‘믿음’은 기본적으로 어떤 사실이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을 넘어서, 그 사실에 대한 ‘신뢰와 헌신(충실)’, 곧 ‘순종’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문제를 성장과 단련, 그리고 배움과 도약의 기회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하여 믿음은 우리를 물 위를 건너게 하여, 마침내 예수님 품에 안기게 합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믿음’이란 ‘초월성이 진짜임을 인정하는 능력’, 곧 ‘삶의 이면에 실재하는 우리가 경험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실재하는 더 성스러운 차원을 인정하는 능력’이며, 동시에 이러한 ‘인정’은 지성의 굴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 속에서 어렴풋이 느끼는 비경험적인 실재들을 인정하고 기뻐하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믿음에는 ‘기쁨’이 동반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그분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면 ‘기쁨’ 속에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마태 14,33) 주님을 찬양하였듯이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 안에 믿음으로 기쁨이 차오르게 하소서.
위험과 흔들림 속에서도 헌신과 충실이 차오르게 하소서.
당신께 대한 순종의 기쁨으로 찬양이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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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주님,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주님!
배안에 머물러 있기만을 고집하지 말게 하소서.
풍랑이 위협할지라도 믿음의 구명대를 입고 물위를 걷게 하소서.
삼킬 것 같은 풍랑이 오히려 저를 떠받들게 하시고, 넘어뜨릴 것 같은 거센 바람이 오히려 저를 이끌게 하소서.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신 당신이 바로 ‘저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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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독서의 동굴 속의 엘리야와 호수에 빠진 베드로의 모습이 너무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사실 이 두 상징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풍부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가장 위대하면서도 가장 소심한 인간의 양면성을 잘 드러내 주는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이 참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어가는 이야기로, 그 이야기란 다름 아닌 자신이 누구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자신 또한 옆집의 그 사람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소시민적인 근성과 그렇고 그런 부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통렬한 자기 깨달음의 이야기 말입니다.

먼저 엘리야의 이야기가 전해주는 메시지를 묵상해 봅시다. 엘리야는 거짓 예언자가 활개 치는 세상에서 홀로 하느님의 영으로 불타올라 갈멜산에서 누가 진짜 예언자인지, 누가 참된 하느님의 사자使者인지 판가름하는 진검승부를 펼쳐 승리하지만, 이세벨 왕비가 자신을 죽이겠다는 위협에 엘리야는 이세벨이 무서워 호렙산으로 줄행랑을 쳐 도망칩니다. 나름대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정의로운 행동에 목숨까지 걸면서 싸웠던 위대한 존재가, 자신을 위협하는 이세벨의 기세가 무서워서 줄행랑을 쳐 도망치는 꼴은 마치 우리 자신의 어두운 구석, 내면의 그림자와 콤플렉스를 보여 줍니다. 남자란 가끔은 이런 허망한 구석이 있답니다. 자기 딴에는 제법 그럴싸한 객기로 강한 척하면서도 남이 이해할 수 없는 하찮은 것으로 말미암아 꼬리를 내려 뒷걸음치는 면이 있고, 이를 심리학에서는 퇴행이라고 하지요. 자기 안의 어둠(=동굴)에 머물고, 자기 열등감이나 콤플렉스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 지극히 나약한 모습을 엘리야는 우리에게 보여 주면서 우리 자신을 다시금 깊이 생각하도록 해 줍니다. 남자란 자기 어둠, 문제로부터 스스로 제 발로 동굴이나 방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 열왕기에선, 하느님께서 엘리야에게 명합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하는(19,11) 이 명령은 단지 엘리아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 모두 자신의 내적 어둠, 동굴에서 처박혀 있지 말고, 자신의 열등감이나 콤플렉스에 연연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우리를 더 잘 아시고, 골수와 머리카락까지도 꿰뚫으신 분이시기에 당신 앞에 당당히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크고 강한 바람, 지진 가운데 계시지 않고 오히려 미풍 가운데 서 계시는 하느님의 자애 앞에 있는 그대로, “지금 너 어디 있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에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3,9~10) 라는 대답을 대신해서, 그야말로 본래의 자기 모습대로 나와 서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설 수 있지만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의 존재인가를 깊이 깨닫고, 사랑과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하느님 앞에서 참 자유를 누리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순수와 거짓, 정의와 불의, 선과 악으로 늘 내적 싸움을 하는 존재로 사랑하게 되며 떳떳이 하느님 앞에 설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은 남을 변화시키려는 것이고, 가장 힘든 일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길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자기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 (자신의 소리= 하느님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불같은 열정 속에 숨겨진 욕망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지진과 같은 외침 속에 숨겨진 자기 교만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하고, 바람 같은 부드러운 몸짓 속에 드리워진 콤플렉스의 그림자를 볼 줄 아는 사람만이 세상을 끌어안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세상과 함께 갈 수 있습니다.

복음의 이야기 또한 아주 미묘한 상황입니다. 저녁에 호수를 건너기 시작한 배는 이미 새벽, 여명이 떠오르는 시간이 되었는데도 호수를 건너지 못하고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풍랑(=내적 갈등)에 허덕이고 겁에 잔뜩 질린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14,2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의기양양한 베드로는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14,28)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주저 없이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습니다. 참으로 베드로의 물 위를 걸은 행동은 어떤 누구도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걸었던 존재는 없었고 없을 만큼 대단히 신적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마치 엘리야가 행한 위대한 일처럼, 하지만 베드로는 그렇게 위대한 일을 실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14,30) 조금 전과 전혀 다른 비굴하고 나약한 자기 모습을 직면하자 이내 호수에 빠져듭니다. (*엘리야의 동굴로 칩거와 동일 이미지) 이것이 인간의 가장 적나라한 모순적 실존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누구도 예외가 없으며, 다만 이런 자신의 콤플렉스나 열등감에 주저앉지 않고 기꺼이 인정하면서 ‘주님 앞에 서라, 오너라.’는 주님의 따뜻한 격려와 지지에 힘입어 극복해 나가야 하리라 봅니다. 이러한 과정은 주님과의 믿음의 여정이며 관계의 심화 과정이라고 봅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호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동굴에 스스로 칩거할 수 있고, 상황이나 외적 환경과 현실에 의해 호수에 빠져 허우적댈 수 있음을 인정합시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 놓일 때 자신의 나약함이나 실패나 열등감에 연연하거나 집중하지 않고 ‘여기 지금 함께 계시는 주님의 현존’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을 때 주저하지 말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14,30)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동굴에서나, 호수에서 벗어나고 빠져나올 수 있으며,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적나라한 자신의 본래 모습대로 하느님 앞에 서는 것을 관상의 경지라고 하며, 이런 관상의 경지에는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이 영혼을 보시듯이 영혼이 하느님을 볼 수 있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내면이 미풍처럼 가라앉고 잠잠할 때 느껴지며, 이러한 상태는 인간이 인간의 허상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자신, 이미 내 안에 내 것이 되어 버리신 하느님과 참된 일치와 친교의 관계를 누릴 것입니다. ‘진계유’라는 분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의 자신의 진면목을 듣고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일을 돌아본 뒤에야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음을 알았네. 문을 닫아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이전의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네. 마음을 쏟은 뒤에야 평소의 마음 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네. 』 “주님,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주 하잖은 상황에서도 움츠려드는 저의 어두운 상처와 열등감에서 저를 구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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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오. 14,27)

어릴 적 우리는 부모님을 불가능한 것이 없는 분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모님은 하느님처럼 전능하신 분이 아니라는 것을 많은 인간적인 한계와 좌절을 우리가 겪은 후에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같은’ 부모님들의 사랑을 통해 우리는 넘어져도 일어나는 지혜를 배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장한 후에는 혈육의 부모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말씀으로 우리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자전거를 막 배우던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 이제 나도 큰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능력을 아버지께 보이고 싶어, 집 앞 약간 비탈 진 길가에서 큰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시는 아버지를 향해서 처음으로 자전거 안장에 올라타서 짧은 다리로 페달을 신나게 밟았습니다.

점점 속도를 내며 내리막길을 내려가다가 하필이면 아버지와 큰 아버지가 앉아 계시는 바로 그 앞에서 꽈당 소리를 내며 나는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무릎이 깨져 피가 났지만 순간 너무나 창피해서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엉거주춤하게 일어나면서 오직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에만 곁눈질을 하며 온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넘어져 있는 나를 보시며 대수롭지 않은 듯이 허허 웃으시면서 ‘종오야, 괜찮다. 일어나라.’ 하시며 미소를 지으시며 부끄러워하는 나를 위로하시던 모습은 돌아가신 지 35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내 마음에 생생합니다. 그때 보여주신 아버지의 미소는 ‘실패는 좌절하거나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고 일어나면 된다.’는 위로와 용기의 영적 메시지로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때로 균형을 잃은 자전거처럼 넘어지기도 합니다. 불완전한 우리이기에 넘어지거나 실패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넘어졌을 때 우리를 보고 계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리고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영적 균형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말씀과 기도와 사랑의 실천이라는 삶의 페달을 매일 밟아야 합니다.

페달 밟기를 순간 멈추어 두려움의 물에 빠진 베드로와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다시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용기를 나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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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마태 14,25)

<날마다 피정을 하자!!>

오늘 복음(마태 14,22-33)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벽에 파도가 이는 호수 위를 걸으시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이 탄 배를 향해 걸어가십니다. 제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 만난 ‘두 개의 묵상’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하나’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에 대한 묵상입니다. 우리네 삶 전체에 함께 하시는 살아계시는 주님, 우리가 겪는 고통 가운데에서도 함께 계시는 주님, 이런 주님께 대한 나의 믿음에 대한 묵상입니다.

‘또 하나’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 살아계신 주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묵상입니다.
오늘 제1독서(1열왕 19,9ㄱ.11-13ㄱ)는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인 엘리야가 하느님의 산 호렙에서 주님을 만나는 내용입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1열왕 19,11)
엘리야가 만난 주님은 바람 가운데에서도, 지진 가운데에서도,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고, 고요 가운데에 계셨습니다. 바람과 지진과 불이 지나간 뒤에 주님께서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피정의 의미!’
피정은 피세정념(避世靜念), 곧 ‘세상을 피해 고요함 속에 머문다.’는 뜻의 줄임말입니다. 피정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잠시 내려놓고(break) 고요함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사도 피정이요, 기도도 피정이고,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도 피정입니다. 피정집을 찾아가서 좋은 강의를 듣고, 소리높여 주님을 찬미찬양하는 것만 피정이 아니라, 고요함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모든 행위가 피정입니다.

피정을 통해 주님을 만납시다! 지금 여기에서 주님을 만나고, 임마누엘이신 주님과 함께 해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고통을 뛰어 넘을 수 있고, 그래야 부활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고통을 마주하게 된 것은 피정을 잘하지 못한 결과라는 성찰도 해보게 됩니다.

날마다 피정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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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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