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9장, 38-43.45.47-48절;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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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38-43.45.47-48

그때에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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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매우 강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예수님 말씀은 더 큰 죄악을 저지르기 전에 그 원인을 먼저 없애라는 뜻입니다. 사실 별다른 의식 없이 작은 죄를 무심코 계속 저지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더 큰 죄를 짓는 일이 반복되곤 합니다.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죄악을 피하며 선행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목마른 사람에게 베푸는 물 한 잔도 귀한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질문하십니다. “너는 내가 목마를 때 물 한 잔 주었는가? 너는 나에게 늘 무엇을 해 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하지만, 너는 나를 위해 땀 흘려 보았느냐?” 우리는 극심한 시련이나 억울한 일을 겪을 때 주님께 눈물로 호소합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꾸준히 기도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주님께 받은 은총에 마음 깊이 감사드린 적은 있는지, 내가 가진 재능을 아낌없이 바친 적은 있는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몸담은 자리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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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예수님을 만나 다시 들을 수 있게된 사람은 그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자유롭게 상상해 보십시요.

2.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포용하는 것이 가능한지 함께 묵상해보고, 가톨릭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다른 종교를 사랑으로 이해하고 포용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이야기해봅시다.

3. 신앙생활 중에 반복적으로 죄를 짓고 있는지 묵상해보고, 어떤 요소들이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지 못하게 하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죄에서 진정으로 해방될 수 있을지 함께 이야기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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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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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 육신의 한 부분이 죄를 짓게 하면 그 부분을 잘라 던져 버리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알아듣고 죄를 지은 육신을 잘라 낸다면, 우리는 정화되고 자꾸 반복되는 죄를 짓지 않게 될까요? 아닙니다. 의식과 생각이 바뀌지 않고서는 반복되는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나약함 때문에 유혹에 빠져 죄를 짓게 됩니다. 죄를 지으면 가슴 위에 돌덩이를 하나 올려놓은 듯이 답답하고 힘들며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나약함을 탓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용서를 믿고, 주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탁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러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합니다. 교회의 성사, 특히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에 자주 참여하며 우리의 영혼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용서받은 죄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깨끗하게 치유받은 나병 환자(마르 1,40-42 참조), 시력을 되찾은 바르티매오(마르 10,46-52 참조), 죽음에서 되살아난 라자로(요한 11,1-44 참조)처럼 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풍성합니다. 오늘 제2독서의 말씀을 기억하며 나의 것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더 쉽게 알게 될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자비는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의 이름은 자비입니다』, 35면 참조).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자비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점점 죄에서 멀어지고, 우리의 나약함 안에서 우리의 강함이신 하느님의 도우심을 발견하게 됩니다.(신우식 토마스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3995
9월29일[연줌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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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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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DINj3DzxTXE
[의정부교구 홍석정 가시미로(청소년사목국 국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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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주민과 난민을 존중하고 인격적으로 대합시다!>

오늘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오늘 그분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가짐이나 시선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날입니다. 어린 시절 예수님께서도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을 가신 적이 있습니다. 일종의 난민이셨던 것입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도 예수님께서는 어디 한 군데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철저한 이방인이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이주민이나 난민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기쁘게 포용한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주에 단체로 예멘 난민이 입국한 때가 있었습니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습니다. 그분들로 인해 곧 나라가 파탄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습니다.다문화 다민족, 다국적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시대에 제대로 된 국제적 망신을 당했습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마태오 복음 25장 35~36절)

솔직히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 나그네요 이방인입니다. 우리 것이라고 여기지만 솔직히 우리 것도 아닙니다. 그뿐인가요?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빼앗기고 힘겨울 때, 전쟁으로 모든 것이 풍비박산 났을 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난민이 되어 정처없이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습니다.

난민들은 위험한 사람들, 혐오스러운 대상들, 두려운 존재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엄마 잃고 상처입은 어린 새 같은 존재들입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 죽음의 공포, 사랑하는 가족과의 생이별 등, 갖은 트라우마를 안고 우리를 찾아온 나그네들입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듯한 느낌 속에 불안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을 난민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따뜻한 환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파나마 세계 청년대회에 참석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난민’, ‘이주자’에 대해 언급하시며, 착한 목자로서 당신 자신의 품격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다른 여러 국가 지도자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교황님께서는, 부단히 난민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관심을 드러내 보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헤로데 대학살 사건을 피해 이집트로 떠났던 난민이셨습니다. 난민들을 사회에 대한 위협으로 낙인찍는 것처럼 분별없고 무책임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버림받은 사람들, 땅과 뿌리, 가족과 일로부터 강제로 쫓겨났거나 빼앗긴 사람들을, 기쁘게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웁시다. 하느님은 우리가 난민들을 구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가 난민들을 외면하는 것은 너무나 큰 위선입니다.”

참으로 품위있고 품격있는 교황님의 말씀과 처신에 큰 박수와 아낌 없는 지지를 보냅니다. 큰 슬픔과 고통 속에 빠져있는 난민들 입장에서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지난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황 즉위 직후, 바티칸과 로마를 벗어난 첫 방문지 람페두사 난민 수용소에서 하신 말씀은 또 얼마나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가요?

“난민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각자 얼굴과 이름, 삶의 이야기가 있는 난민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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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VtFUOZFs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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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때문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하지 못하게 말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반면 당신을 믿는 이들을 죄짓게 만드는 사람은 마치 손과 같은 사람일지라도 잘라내고 눈과 같은 사람일지라도 뽑아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굉장한 포용력과 함께 굉장한 단호함을 보이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포용력과 단호함을 동시에 유지하며 사람의 애정과 미움에 흔들리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사실 이 능력이 한 사람의 미래를 좌우합니다.

사람을 너무 쉽게 배척하는 것도 문제고 너무 쉽게 품는 것도 문제입니다. 끊어야 할 사람을 알고 품어야 할 사람을 아는 게 참 지혜입니다. 끊어야 할 사람을 끊지 못해도 망합니다. 베토벤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조카 카를에게 집착하였습니다. 형수에게서 그를 빼앗기 위해 오랜 재판과정에서 매우 노쇠하였으며 카를이 자신을 싫어하여 자살 시도한 것 때문에 더 급격히 쇠약해진 그는 몇 달 뒤에 사망합니다.

중국 항우란 인물은 품어야 할 사람을 품지 못해 망한 경우입니다.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인 진(秦)나라 시황이 죽자 두 영웅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항우와 유방 간의 전쟁이었습니다.

항우와 유방은 출신부터가 매우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항우는 초나라의 반듯한 귀족의 집안에서 출생하였지만, 유방은 평범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항우는 사람을 제압할 정도의 외모와 기개를 갖춘 영웅이지만, 유방은 한 마을 건달로 사람을 위압할 외모나 기개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를 세운 사람은 유방입니다. 포용력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의 유방은 지금으로 치자면 배운 것도 없고, 할 일 없이 매일 술만 마시고 사고나 치는 백수건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던 유방은 함양에서 부역을 하다가 진시황의 행차를 보고 대장부란 저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뜻을 키웠습니다. 반면 개인 능력이 특출했던 항우는 자기 자신을 너무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 대해 의심이 많았습니다. 이에 인재를 등용할 때 혈연관계를 매우 중요시하였습니다. 반면 유방은 하층민들도 필요한 부서에 배치할 줄 알았습니다.

이 두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자세는 ‘꿈에 대한 의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목적이 분명하면 방법이 보이게 되어있습니다. 개울을 건너려는 마음이 생기면 그동안엔 관심 없던 배나 다리를 찾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진시황처럼 천하통일을 꿈꾸던 유방은 누가 품어야 할 사람이고 누가 맞서야 할 사람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항우는 자기가 곧 대의명분이었습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처럼 미심쩍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누구를 품고 누구를 버려야 하는지 명확히 아는 방법은 ‘목적의식’에 있습니다. 사람은 두 부류입니다.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와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입니다. 배우는 대본이 있습니다. 관객의 반응에 따라 조금 흔들리거나 흥분될 수 있어도 그 대본을 끝까지 연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관객은 배우의 연기나 주위 사람들의 방해 때문에 많은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의 대본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반응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보디랭귀지』 등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앨런 피즈와 바바라 피즈 부부는 많은 성공과 파산, 그리고 말기 암 등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언제까지는 암을 극복한다, 언제까지 베스트셀러를 써서 재기한다는 등의 목표를 세우고 밀어붙였습니다. 전립선암 방사선치료로 정자가 생성되지 않고 아내는 마흔이 넘었는데도 자녀를 낳겠다는 계획도 세웁니다. 개나 키우라는 의사는 차버리고 고환을 빼내어 정자가 생성될 수 있게 수술해 주겠다는 의사는 자기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목적이 생기면 내 편과 아닌 사람이 명확히 구분됩니다. 돈 내고 방청석에 일단 앉았으면 무조건 내 편입니다. 그러나 연기에 방해가 되고 다른 사람들의 관람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끌어내야 합니다. 공연을 무사히 마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관객이 되지 말고 주인공이 되십시오. 그리고 대본을 받는 시간은 새벽 기도에서입니다. 하루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파견된 날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에 휘둘릴 일이 없고 같은 사명에 동참하는 많은 친구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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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주에 ‘본당의 날’ 행사가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참여와 관심 속에 본당의 날이 잘 끝났습니다.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믿음과 미신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의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면서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된 것이 믿음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이 믿음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의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미신은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바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짜증을 내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면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채워 주기 때문입니다. 이미 포도원이 많이 있음에도 나붓의 하나 밖에 없는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 왕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미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야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다윗 왕은 하느님께 기름부음 받았던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미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내가 믿음의 삶을 사는지, 미신의 삶을 사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성숙한 신앙과 미성숙한 신앙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성숙한 신앙은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한 길이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은 성서를 읽고, 교리를 잘 아는 지식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은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활동을 많이 한 업적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은 성직자와 수도자처럼 직책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하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하기 싫은 일일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쁘게 하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더 좋은 땅을 조카 롯에게 기꺼이 양보한 아브라함, 사랑하는 아들을 하느님의 제단에 기꺼이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은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은전 서른 닢에 팔아 넘겼던 형들을 용서하고, 품어 주었던 요셉은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용감하게 왕 앞에 나섰던 에스테르 왕비는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고백했던 마리아는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어떤 사람이 미성숙한 신앙인일까요? 하고 싶은 일만 하려는 사람이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짜증내는 사람이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시기심에 동생을 죽인 카인은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말했던 카인은 미성숙한 신앙입니다.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는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유다는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는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잘 안다고 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중에도 미성숙한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도 미성숙한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미성숙은 직책으로도, 능력으로도, 지식으로도 가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성숙한 신앙인들을 향해서 ‘회칠한 무덤과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미성숙한 신앙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손을 버려야 한다.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한 손으로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더 좋다.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발을 버려야 한다.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 보다 한 발로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더 좋다.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눈을 버려야 한다.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 보다 한 눈으로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더 좋다.”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신 것은 생각으로 죄를 지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손에 못이 박힌 것은 손으로 죄를 지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발에 못이 박힌 것은 발로 죄를 지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옆구리를 창에 찔리신 것은 미성숙한 신앙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미성숙한 신앙인이었다면 성숙한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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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9,38-43.47-48: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 모세는 여호수아를 꾸짖으며, 하느님의 영을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지극히 자유로우신 하느님을 인간이 멋대로 지배하려는 우를 범하지 말고, 우리가 다른 형제들의 봉사자가 아니라, 지배자인 듯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형제들의 응답 능력을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그리스도 신자는 아니더라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고 하신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40) 신앙이 올바로 성숙하지 못하면 나와 다른 사람들을 구분하려고 하는 바리사이적 위험이 있다. 예수님은 이런 벽을 허물고 모든 진리의 씨앗들을 받아들이라고 하신다.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기 위해 그들과의 접촉점이 무엇인지 발견하여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논쟁적이거나 배타적인 성격을 띠지 않고 모아들이고 너그러이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에서는 구마 행위를 하던 사람에 대해 요한은 예수께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도록 막아 보려 하였습니다.”(38절) 말씀드린다. 이것은 어떤 차별을 나타낼 뿐 아니라, 예수님을 많은 사람이 함께 나누어야 할 선물로서가 아니라, 질투심에 의한 소유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여기에 예수께서는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39-40절) 하신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사려는 듯한 것 같지만, 이 말씀은 사도들에게 자신들을 진리의 소유주와 같이 자처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우리와 어떤 신앙의 공통점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우리를 개방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써 인간 상호 간의 대화와 또한 그리스도인들 간의 일치운동 근거를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마태 12,30) 하신다. 그분을 알아보는 사람은 그분과 함께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만약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면 그분을 해치게 되고 그 결과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진리와 선은 부분적으로는 다른 곳에도 존재하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 하느님은 그러한 미세한 것을 통해서도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은 교회라는 테두리는 물론 교회 신앙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요한이나 여호수아처럼 다른 사람들이 주님의 성령을 받거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공경하는 데 대해 질투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41절). 우리의 신앙은 어떤 형식이 아니다. 때로는 그리스도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서도 발견되는 실천적 생활이다. 사도들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유다인들이나 이교인들이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겸손하고 진실한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도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처음부터 권위의 태도가 아니라 봉사의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공동체 내의 어떤 사람도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고 하신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 신앙의 위기에 놓일 수 있는 사람이다. 물에 빠진 사람의 목에 달린 연차맷돌은 예수의 시대적 배경에서 볼 때 무덤도 갖지 못하게 되는 버림받은 인간의 최고의 불행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죄를 짓게 하는 인간 신체의 세 가지 상징적 표현은 아주 소중한 것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이 치명적으로 영원한 파멸을 초래할 죄로 인한 벌에 비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43-48절) 지옥이라고 번역된 게엔나(Geenna)라는 표현은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힌논(Hinnon) 계곡을 말하는데 버림받은 자들이 버려져 화장되던 곳이다. 그곳은 항상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신약에 와서는 악한 이들을 벌하는 장소의 대명사가 되었던 곳이다.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의미로 육신의 일부를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윤리적 영적 의무의 차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차원에서 근본적인 선택을 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우리가 선택을 잘못하면 우리가 잃는 것은 일부가 아니라 모든 것을 영원히 잃게 될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불의한 방법으로 부자들이 쌓았던 그 재물은 실제로 마치 녹이 쇠를 부패시키듯이 그들 자신을 갉아먹을 녹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재물은 생명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영원히 그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탐욕을 생기게 하는 눈을 빼어버릴 용기가 없었다. 그러니 그들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마르 9,47). 오늘의 말씀은 대단히 준엄한 가르침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잃는 것이 곧 자신을 찾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나 공동체를 넘어 다른 사람들과도 사랑 안에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변화가 나로부터 시작하여 이 사회가 변화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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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수기 12장 3절은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다.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제1독서인 11장에서는 그러한 겸손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천막 주위에 모인 이들에게 모세의 영을 나누어 주실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이들에게도 영이 내리고 그들이 예언합니다. 이때 여호수아는 영은 모세에게만 주어지고 그와 함께 있는 이들만 예언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모세 자신은 그러지 않습니다. 모세에게는 예언자를 통해서, 되도록 많은 예언자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백성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그 일이 자신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요한과 예수님은, 민수기에서 여호수아와 모세가 보여 준 것과 같은 태도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반대하지 않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고 사람들이 마귀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지, 자기 무리에 속한 이들만 그 일을 하여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지금 복음을 중심에 두고 있는지 아니면 그 복음을 선포하는 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있는지 늘 살펴야 합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지금 당장 다른 사람에게 맡겨진다 하여도, 또는 수고는 내가 하였는데 공로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간다 하여도 아무런 미련이 없어야 모세와 같이 겸손한 사람이 되고 참으로 이 세상에 복음이 선포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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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편 가르기를 하면 안 됩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38-41) 1) 여기서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는 “막았습니다.”로 번역을 바꿔야 합니다. 요한 사도가 ‘어떤 사람’의 구마 행위를 막은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예수님이 모독당하는 일이 생길까봐 걱정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런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마자로 돌아다니는 몇몇 유다인까지도 ‘바오로가 선포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령한다.’ 하면서, 악령 들린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그런데 스케우아스라는 유다인 대사제의 일곱 아들이 그렇게 하자, 악령이 그들에게 ‘나는 예수도 알고 바오로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 하였다. 그때에 악령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모조리 억누르고 짓누르는 바람에, 그들은 옷이 벗겨지고 상처를 입어 그 집에서 달아났다.”(사도 19,13-16)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신성 모독죄입니다.>

(2)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는 것은 사도들만의 권한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시긴 했는데(마르 6,7), 열두 사도에게만 주신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열두 사도가 아니었지만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을 했습니다. 또 코린토 1서의 ‘성령의 은사’를 설명하는 부분을 보면, 사도들을 ‘첫째’ 자리에 두었고,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네 번째’ 자리에 두었는데, 그것은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이 사도들만의 권한은 아니었음을 나타냅니다.>

물론 교회가 제대로 운영되려면 질서가 유지되어야 하고, 직무에 따른 권한과 책임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어야 하고, 아무나 마음대로 설치는 ‘월권행위’를 막아야 하는데, 지금 ‘어떤 사람’이 마귀를 쫓아낸 것을 월권행위로 보지 않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옹호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일을 승인하신 것과 같습니다.>

2)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일 수도 있고,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요한 사도 입장에서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아니니까 신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1) 그 당시에, 예수님은 알고 계시는데 사도들은 모르고 있었던 제자들(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 예수님께 어린 나귀를 빌려 드린 사람과 최후의 만찬 장소를 미리 준비해 놓은 사람 등이 그런 제자들입니다.(마르 11,1-6; 마르 14,12-16)

신자 수가 적었던 당시에도 사도들이 모든 신자들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오늘날에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저 사람은 신자가 아니다.”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반대로,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신자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세례 증명서’만 있으면 되나? 사실 그런 서류는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으니, 그것이 신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아니고, 신앙인답게 사는 것, 또 신앙인답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내가 신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입니다.

(2) 공적으로, 또는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어떤 사람’의 일을 인정하신 것은, 그 사람의 믿음을 인정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3) 예수님을 믿지만,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을 생각은 없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도, 우리는 그를 형제로 대해야 합니다. <‘이단’은 경계해야 하고, 물리쳐야 하지만, 다른 종교 사람들과 다른 종파 사람들을 무조건 적대시하고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모두, ‘잠재적인 예비신자들’입니다.>

3)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라는 말씀은, “내가 하는 일을(구원 사업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즉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할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정식으로 신자가 된 것은 아니라도,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신자가 되려고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은, 구원받기를 스스로 거부하지 않는 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개방성’과 ‘보편성’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 교회의 ‘가톨릭교회’ 라는 이름은 ‘보편적인 교회’라는 뜻이고, 모든 사람을 위한 교회,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신자들끼리만 똘똘 뭉쳐서 배타적인 집단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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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백호현 다미아노 신부님]

<하느님 나라의 이주민>

캐나다로 교포사목을 할 때, 혼자 영어를 사용해야 익숙해진다는 생각에 패스트 푸드점을 간 적이 있습니다. 메뉴를 보다가 종업원에게 치킨버거 세트를 더듬더듬 주문하였더니 종업원이 뭔가 못 알아듣는 말로 길게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눈치껏 뭔가를 추가하겠냐는 질문처럼 보여서 ‘Yes’라고 답하며 주문한 음식을 기다렸습니다. 제 차례에 나온 음식을 보며 순간 당황스러웠습니다. 글쎄 치킨버거 세트가 아닌 후라이드 치킨이 버켓에 가득 담겨 나왔기 때문입니다.

‘내가 치킨을 많이 좋아하는 것을 알았나 보다’라고 위안을 삼기는 했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이고 홀로 고립되는 일인지 느낄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종업원이 제가 말 못 하는 것 같으니 일부러 바가지 씌운 건 아닌지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아마 한국에 오는 이주민들도 저와 같은 부분들을 한 번쯤 경험하지 않았을까 여겨집니다.

예전에 이주민 사목 야유회 때,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 어떤 이주민이 줄을 서서 라떼를 주문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휴게소 종업원이 라떼가 떨어졌다고 말하더라며 아무것도 받지 못한 채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다시 가보니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커피를 주문 받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봉사자가 가서 이주민의 라떼를 대신 주문해 받아 왔습니다. 이 일들을 보며 내가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반대로 다른 이들에 대해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강하게 말씀하시는지 무섭게 다가올 수도 있지만, 그만큼 다른 이들이 죄에 빠져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 알려주시고자 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스스로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가장 작은 이가 될 수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악의를 가지는 마음보다 따뜻한 관심으로 선행과 사랑을 베풀 때, 그것이 마실 물 한 잔 일지라도 우리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인 오늘, 이주민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서로가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더라도 더욱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가장 작은 이들(마태 11,11)이며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전까지 ‘하느님 나라의 이주민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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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유승록 라우렌시오 신부님]

<죄 짓지 않도록 늘 깨어있어야>

예수님 당대부터 그분의 제자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 구마 행위를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마르 9,38-41)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막아보려고 하였던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들이 당신의 제자 무리에 속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배척하지 말라고 하시며 제자들과는 상반된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요한으로 대표되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추종하는 이들의 충실함을 엿볼 수도 있지만, 자신들과는 상이한 이들에 대한 경계와 배척의 태도가 드러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이들이 악한 세력에서 풀려나 회복되는 것을 당신 사명에 협력하는 것으로 보았기에 그 구마자들을 개방적 자세로 인정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생을 사셨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을 일상에서 실천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이유로 다른 이들을 인정하지 못하고 배척할 때가 있습니다.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 편 가르기를 하며 서로 대립하기도 하고 편협한 마음과 시각에 갇혀 남을 판단하거나 단죄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대한 자신의 한정적인 체험을 절대화하여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잘못된 길로 이끌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도우시어 자기 방식이나 주장만을 고집하는 것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비추어 우리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성찰해 갈 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 안에서 풍요로움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마르 9,42-48)는 죄를 지으면 지옥으로 가고 죄를 끊으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기 때문에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죄 짓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내용입니다. 죄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 나오는데 이웃을 죄 짓게 하는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라고 하시며, 자신이 죄를 범하는 것도 경계해야 하지만 악한 표양으로 남을 죄 짓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이어서 죄를 짓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방해한다고 밝히시며 손과 발과 눈이 죄 짓도록 충동질하거든 가차없이 찍어 버리고 빼어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상징적 표현은 우리가 죄를 싫어하여 죄를 피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해 당신과의 일치에 균열이 생기고 죄로 인해 공동체가 분열된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깨닫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화단이나 텃밭의 잡초를 제거해 보셨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 미루다가 한참 자란 다음에 한꺼번에 잡초를 뽑으려고 하면 매우 힘들고 어렵습니다. 처음부터 그때그때 잡초를 뽑아내는 것이 힘도 적게 들고 시간도 절약됩니다.

마찬가지로 죄로 이끄는 유혹도 초기에는 물리치기가 쉽습니다. 미루거나 틈을 주게 되면 단순한 유혹도 점점 강해져서 물리치기도 쉽지 않고, 때로는 그 유혹으로 악에 떨어져 헤어나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기도하며 예수님의 은총에 힘입어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 묵상을 통해 예수님의 시선으로 이웃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마음, 그리고 죄 지을 기회를 피하도록 노력하는 마음을 새롭게 지니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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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윤웅렬 하상 바오로 신부님]

<내가 주님의 제자>

사람이 많이 붐비는 어느 역 주변을 걷던 중, 저에게 말을 건네 오는 분이 있었습니다. “저기요, 영이 정말 맑아 보이세요.” 어떤 의도인지 얼른 눈치 채고서, 저는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 답했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저의 대답에 그분의 음성이 더욱 밝아졌습니다. “잠시 대화하실 수 있을까요? 이렇게 얼굴이 환한 분, 오랜만에 만나요.” 저는 얼른 목례하며 걸음을 두 배로 빨리하여 벗어났습니다. “아, 일정이 있어서요⋯.” 그럼에도, 이유야 어찌되었든 얼굴이 환하다 하니 듣는 입장에서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기분이 매우 상했던 적이 있습니다. 거리에서 선교하시던 어떤 개신교 신자 한 분이, 성직자 셔츠에 로만 칼라까지 한 저에게 전단을 건네며 말했습니다. “예수님 믿고 천국 가세요.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저는 그분을 수 초 동안 빤히 보았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가톨릭교회 사제에게 ‘예수 믿고 천국 가라’ 하다니. 제 낯빛이 냉랭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얼른 다른 사람에게 전단을 나누어주려 했기 때문인지, 그분은 곧 저에게서 멀어져 다른 쪽 길가로 이동했습니다.

그날, 왜 기분이 상했는지를 곰곰이 헤아려 보았습니다. 일단 가톨릭교회 사제를 대하는 그 태도에 화가 났던것 같습니다. ‘도대체 가톨릭교회를 어떻게 보았으면, 이토록 무례할 수가 있나!’ 그런데 제가 그날 입고 있었던 성직자 셔츠는 회색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이 저의 복장만으로 제가 가톨릭교회의 사제인지 구분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다 싶습니다.

만약에, 만약에 그렇다 한다면, 이제 제 마음이 상한 이유는 그분이 아닌 제 자신에게 있는 셈입니다. 네, 실은 그랬습니다. 저는 사제인 저에게 ‘감히’ 예수님 사랑을 운운하며 천국을 권하는 그분의 태도가 너무나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영이 맑다는 소릴 들었을 때는 자못 즐거워했으면서 말이지요. 어쩌면 당시 저의 관심사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막지 마라.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9.40) ‘제자도 아닌 주제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들을 막아보려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냥 놓아두라 하십니다. 오히려 죄짓게 할 수 있는 제 손을, 제 발을 잘라 버리고, 죄짓게 할 수 있는 제 자신의 눈을 빼 던져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강한 어조에 제자들이 다소 무안했을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말씀 안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다시금 묵상해 보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얼 바라시는지 알 것만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판단하기보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바라보시는 당신 제자는 그가 아니라 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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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고등학교 때의 친구 전화를 받았습니다. 오랜만의 통화라 정말 반가웠고, 요즘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의 목소리가 차분해지면서 “암에 걸렸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 “내가 죄를 많이 지어서 벌을 받나 봐. 그래서 네게 전화했어.”라고 합니다.

사실 큰 병에 걸리면 자기 잘못을 이야기하며 자책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병에 걸려 고통받는 환자가 죄책감까지 뒤집어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안 좋은 상황으로 나아갑니다. 어느 철학자가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병에 걸렸을 때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는 병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일뿐입니다.”

병에 걸린 것은 자기 잘못이 아닙니다. 운동하지 않아서, 식습관이 잘못되어서, 성당에 안 나가서 등의 이유를 말하지만, 이런 생각으로 힘들어하는 것보다 이 역시 자기 삶을 받아들일 때 편안한 마음으로 치료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의 벌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짓는 죄에 대해 곧바로 책임을 지우는 속 좁은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또 하나의 의미를 전달해 주시는 분이며, 더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쉽게 판단하고 잘못되었다고 단죄하는 우리의 모습을 자주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요한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했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 쫓아낸 것은 하느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판단이 옳지 않음을 “막지 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1독서에서도 진영에서 예언하는 사람을 말려야 한다는 여호수아의 말에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라면서 말리는 모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기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같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 인간의 뜻과 같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몫은 철저하게 악을 멀리하고 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손이나 발이 죄짓게 하면 잘라 버릴 정도로, 또 눈이 죄짓게 하면 빼 던져 버릴 정도로 철저히 악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짓게 하는 모든 판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대신 늘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께 더 철저히 다가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 뜻대로 모두가 함께 구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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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아야 한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 풍성한 가을의 여유를 지니시길 바랍니다. “행동을 통해서 수확하는 것은 습관이고, 습관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성격이며 성격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운명입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듭니다.”그러니 좋은 습관을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좋은 습관은 덕이 되고, 좋지 않은 습관은 그야말로 악습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악한 행동으로 남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릇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이 약한 사람을 죄짓게 하여 신앙을 저버리게 한다면 그 책임이 막중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네 발이 너를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마르9,45-47). 이렇게 섬뜩한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소나기는 피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다른 사람의‘신앙에 걸림돌이 되는 악한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엄포성 말씀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섬김의 자세로 살지 않고 오히려 잘못된 행동으로 다른 이들을 신앙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되어서 버려질 뿐입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는 옛말이 스쳐 지나갈 말이 아니지요.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합니다. 매 순간 단호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말씀하십니다. ‘교회가 권력과 돈과 허영을 쫓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이끄시는 그리스도인의 길은 봉사와 겸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세속적인 유혹’을 이겨내고 출세와 출세를 위해 타인을 망가트리고 싶은 유혹에 잘 맞서야 한다.’

날이 갈수록 신앙이 여려지고 있다고 합니다. 참된 신앙인의 삶보다는 무늬만 신앙인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환경은 좋아졌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정도는 부족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전에는 모든 환경과 여건, 처지가 어려웠지만 믿음의 사람이 많았습니다. 박해를 받는 가운데 오히려 신자가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상 안에서 나를 유혹하는 것이 너무도 많기에 마음이 흔들리고 심지어 신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늘어만 갑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은 한순간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4,18) 그러므로 영원한 것을 잡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 9,49-50)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소금은 보존하기 위한 소금이 아니라 주기 위한 소금입니다. 소금은 자기 맛을 느껴지지 않게 하고 오히려 각 음식의 맛이 좋아지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자신의 풍요로움을 가지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소금의 맛을 내기 위해서는 그만한 수고와 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과하면 소금 맛만 느껴지고 다른 식재료의 맛은 느낄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매 순간 단호한 결단이 요구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영원한 것을! 일상 안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십시오.”(에페5,10)

가끔은 지옥 불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마르9,48). 지옥은 엄연한 실재이고, 되돌아올 수 없는 종착점입니다. 그러니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과장의 말씀입니다. 박해와 시련으로 공동체의 유대가 깨지고 배교자들이 생겨났던 초대교회 공동체의 상황을 반영한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아직 볼 수 없다고 해서 지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과 멀어져 마음의 불안을 느낄 때를 생각하면 지옥이 따로 없다는 의미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지옥 불의 뜨거움은 현세에서 불의 뜨거움을 통해서 비유적으로 체험할 수 있겠지만, 원한에 사로잡힐 때 영혼의 뜨거움을 체험하게 됩니다. 천국은 사랑으로 채워져 있지만 지옥은 온갖 분노와 증오, 원한, 적개심, 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비가 허락되는 이 지상의 삶에서 천국을 희망하고 지옥의 삶을 피해야 합니다. 천국은 이미 지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사랑으로 천국을 완성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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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의 사람들>

마르코 9,38-43.45.47-48(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지지하는 사람이다. 죄의 유혹을 단단히 물리쳐라)

그때에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그분의 사람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9-40)

그분은 살림입니다
그분을 따른다고 살림이 아니라
살림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 곁에 선 사람보다
살리는 사람이 참으로
살리시는 그분의 사람입니다

그분은 나눔입니다
그분을 따른다고 나눔이 아니라
나눔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 곁에 선 사람보다
나누는 사람이 참으로
나누시는 그분의 사람입니다

그분은 섬김입니다
그분을 따른다고 섬김이 아니라
섬김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 곁에 선 사람보다
섬기는 사람이 참으로
섬기시는 그분의 사람입니다

그분은 품음입니다
그분을 따른다고 품음이 아니라
품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 곁에 선 사람보다
품는 사람이 참으로
품으시는 그분의 사람입니다

그분은 착함입니다
그분을 따른다고 착함이 아니라
착함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 곁에 선 사람보다
착한 사람이 참으로
착하신 그분의 사람입니다

그분은 의로움입니다
그분을 따른다고 의로움이 아니라
의로움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 곁에 선 사람보다
의로운 사람이 참으로
의로우신 그분의 사람입니다

그분은 너그러움입니다
그분을 따른다고 너그러움이 아니라
너그러움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 곁에 선 사람보다
너그러운 사람이 참으로
너그러우신 그분의 사람입니다

그분은 어울림입니다
그분을 따른다고 어울림이 아니라
어울림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 곁에 선 사람보다
어울리는 사람이 참으로
어울리시는 그분의 사람입니다

그분은 부드러움입니다
그분을 따른다고 부드러움이 아니라
부드러움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 곁에 선 사람보다
부드러운 사람이 참으로
부드러우신 그분의 사람입니다

그분은 올곧음입니다
그분을 따른다고 올곧음이 아니라
올곧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 곁에 선 사람보다
올곧은 사람이 참으로
올곧으신 그분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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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연중 26 주일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는 모세와 그를 돕는 일흔 명의 원로를 뽑아 일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원로로 임명받은 두 명은 모임에 참석하지는 못한 채, 그들의 진영에서 하느님의 영을 받고 예언하게 됩니다. 그러자 여호수가가 모세에게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모세는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님의 영을 내려주었으면 좋겠다.”(민수 11, 29)고 말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받듭니다.

흔히, 우리는 교회의 본질과 운영방식에 대하여,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성령주의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교회가 단순한 사회적 단체나 조직이 아니며, 그 본질은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성령의 활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말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성령의 주도성’을 보여줍니다. 여호수아는 인간인 자신이 아니 영을 받은 그룹으로서 ‘자신들만의 특권의식’을 지니고 싶어 하지만, 모세는 오히려 온 백성에게 영이 내려지기기를 바랍니다.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물질적 소적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의 전환을 요청합니다. 재물은 하느님이 주신 축복이지만, 그것이 주인의 손에서 사용되는 도구가 되어야 하며, 자신을 만족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며, 부유한 자들에 대한 회개와 변화를 요구합니다.

“부자들이여! …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야고 5,1-2) 참조)

오늘 <복음>은 두 개의 단락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 단락>에서, 요한은 <제1독서>의 여호수아와 마찬가지로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을 보고는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마르 9, 38)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요한은 ‘저희’라는 말을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를 보았고, 그는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고, ‘저희’는 그를 막으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요한이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하고 말하는 것은, 다른 이들을 제자그룹에 끼어주고 싶지 않는 ‘제자임에 대한 특권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는 이가 우리를 따르는 이가 아니라 하여 그를 막는’ 제자들의 옹졸한 마음을 질타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를) 막지 마라”(마르 9,39)

사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여러 분파들이 사도직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처럼, 제자들은 자기들만이 선택된 자라고 생각하기 싶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특정 분파나 집단에 국한되지 않음을 밝히십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활동이 더욱 확장될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또 신앙의 지평이 넓고,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제1독서>에서 원로들의 항의에 대한 모세의 태도에서, 또 <복음>에서 제자의 옹졸한 행동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서 보여주듯이, 신앙공동체 안에는 하느님을 섬기는 다양한 방식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활동을 지지하고 격려하며 연대와 협력을 촉진하고, ‘다양성 안에 일치’라는 교회정신을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자칫,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내로남불의 ‘편파의식’은 참으로 오만하고 이기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하느님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모든 이를 당신 ‘협력자’로 모으십니다. 곧 교종이나 주교, 성직자나 수도자, 세례 받은 신자들만을 당신의 협조자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만을 혹은 ‘저희’만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기”(2코린 5,15)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가 독점되어서도 안 되고, 배타적이어서도 안 되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뿐만 아니라, 원수마저도 받아들이는 혁명적인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하물며, 자기 형제들을 막는 일은 더 더욱 안 될 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뒤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모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

결국, 오늘 <제1독서>에서는 권위의 독점에서 오는 갈등을 보여주며, <제2독서>에서는 재물의 독점에서 오는 악행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지닌 독점과 독선의 태도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삶의 여정은 우리 자신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독점과 독선의 악을 성령의 힘으로 정화하고 정련하는 여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오니,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2)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하소서!
비록 그들이 생각이 다르다 해도,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다 해도,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게 하소서!
이제는 제 손과 발이 그들을 가로 막는 도구가 아니라 친교를 맺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제 눈이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제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남들의 구원도 바라보며, 그들이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소서!
제 마음을 제 자신에게 붙들어 매지 않고, 당신께 꼭 붙들려 매여 있게 하소서!
오늘, 제 몸과 마음을 절단하고 수술하시어,
온 몸이 망가져 사라질지라도 더 귀중한 당신의 생명이 살아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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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믿는 이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마르 9,42)

주님!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남들의 구원도 바라보게 하소서!
남들이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말게 하소서!
남들을 죄짓게 하지 말게 하소서!
남들의 구원을 도울 때라야
비로소 자신이 구원됨을 알게 하소서.
마음을 제 자신에게 붙들어 매지 않고,
남들을 향하여 있는 당신께 꼭 붙들어 매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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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바람직한 지도자상>
-너그러운, 나누는, 죄에 단호한 지도자-

“주님의 계명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법은 환하시니 눈을 밝혀 주도다.”(시편19,9)

오늘은 참으로 소개할 사항이 많습니다. 오늘은 연중 제26주일이라 대천사 축일을 못 지냅니다만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미카엘, 미카엘라, 가브리엘, 가브리엘라, 라파엘, 라파엘라 세례명을 지닌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진심으로 축하인사를 전합니다. 저에게도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참 좋은 분들이 떠오릅니다. 오늘 주일 미사때 기도하며 봉헌하려 합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바람직한 지도자상’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역사상 이런 성인 지도자들을 많이 지녔었으며 지금도 곳곳에서 이런 지도자들을 만납니다. 우리 신자들은 주님에 이어 이런 훌륭한 지도자들을 보고 배우니 참 큰 복입니다. 오늘 연중 제26주일은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담화문을 통해, “모든 시대에 그러하였듯 우리 시대 이주민, 난민들안에서, 하느님 백성으로서 나그네라는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발견할 수 있고, 영원한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하느님 백성의 살아있는 표상을 볼 수 있으며, 이주민과 만남은 곧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라 말씀하시며 이들에 대한 환대와 배려를 촉구했습니다.

정순택 대주교 역시, “이주민에 대한 존중과 환대, 그리고 보호는 곧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며, 저출산과 고령화 위기가 예견되는 한국 사회 미래에 이주민들이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임을 강조했습니다. 참으로 너그럽고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 마음과 시야를 한없이 멀리, 넓고, 깊게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한구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인 이용훈 마티아 주교는 지난 9월23일 1974년 출범하여 숱한 위업을 이룬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설립 50주년을 맞이하여 교회 지도자로서의 시의적절한 축하메시지 일부를 나눕니다.

“앞으로도 하느님의 사제로서 성교회의 복음 정신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정의와 평화를 위해 정진하시기를 바라며, 무엇보다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여러 계층의 소외된 이들을 돌보며, 구체적 사랑을 실천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매우 긴급하고 절박한 과제인 하나뿐인 공동의 집, 지구를 살리는 생태환경 보존을 위해서도 힘을 모아주시기를 빕니다.”

또 한 분 좋은 지도자들 소개합니다.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예레미아스 슈레더(59세) 총재 아빠스가 9.14일, 세계 베네딕도회 수도원 소속의 215명 남자 수도원장들과 대표 수녀들 22명이 모인 가운데 선거에서 베네딕도회 총연합 수석 아빠스로 선출되었습니다. 명실공히 전 세계 2만2천여명의 베네딕도회 회원을 대표하게 되었고, 수도공동체에 보낸 서신도 일부 나눕니다.

“젊은 수도자로서 그동안 저는 우리 삶의 선교적 성격이 우리의 위대한 수도원 전통에 그리스도 중심의 긴박함을 더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것이 저에게 영감과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저는 수백명의 형제, 장상, 비서, 선교총무들, 그리고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소박한 수도자들과 함께 일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저의 당선은 여러분께서 저에게 주신 이러한 배경과 경험과 관련이 많습니다. 이제 저는 총연합 전체를 포용할 수 있도록 마음과 생각을 넓혀야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요셉수도원에도 수차례 방문한바 있는 참으로 탁월한, 공과 사가 분명한 바람직한 교회의 사람이자 전 세계 베네디도회 총연합의 지도자가 된 예레미야스 슈레더 아빠스입니다. 39세쯤 오틸리엔 수도원의 아빠스로 시작하여 20년동안 경륜을 쌓으면서 그 능력이 검증된, 수개 국어와 소통에 능통한 세계적 지도자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신자들은 나이에 관계 없이 이런 훌륭한 교회 지도자들을 통해 믿음과 희망과 사랑, 그리고 순종과 섬김, 겸손과 지혜, 그리고 맡은바 책임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배웁니다. 세상의 모든 지도자들도 이런 교회 지도자들을 통해 보고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연중 제26주간 미사중 셋의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배웁니다. 바로 제1독서 민수기의 모세를 통해, 제2독서의 야고보 사도를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참으로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배웁니다. 모두의 공통점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첫째, 자비롭고 너그러운 지도자입니다.
모세와 예수님이 서로 닮았습니다. 두분 다 참으로 넉넉하고 너그러운 분들로 마음 넓기가 하늘같고 바다같습니다. 젊을 때부터 모세의 시종으로 일해 온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영이 내려 예언하는 엘닷과 메닷을 말려야 한다는 간청에 모세의 답변이 참 통쾌합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편협함을 부끄러워하며 너그러운 모세로부터 크게 보고 배우며, 모세의 후계자로서 지도자 수업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똑같은 역할을 복음의 요한이 그렇게 합니다. 같은 일행이 아닌 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이를 막아보려 했다고 의기양양해 하는 요한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모세를 닮았습니다.

“막지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그가 누구든 공동선에 기여한다면 막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닮은 너그러운 사람이라면 그런 이를 반가워하고 고마워하며, 환대하며 기뻐할 것입니다. 덧셈 관계의, 상생(win-win)의 달인이자 대가인 지도자 예수님이자 모세입니다. 이것 저것 부족한 것, 단점만 생각하는 부정적 뺄셈의 지도자라면 살아 남을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둘째, 나누고 섬기고 배려하는 지도자입니다.
부자들을 질책하는 야고보 사도는 구약의 정의와 사랑의 예언자들을 닮았습니다. 재물에 노예되어 인간 품위를 상실한 이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야고보 사도입니다. 바로 나눔과 섬김, 배려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부자들이여!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 먹었습니다.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도 그대들은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이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삶의 중심 자리에 주님이 아닌 재물이 자리하고 있는, 탐욕의 무지에 눈이 먼, 탐욕에 중독된 참 어리석은 부자들입니다.

셋째, 죄에는 단호한 지도자입니다.
한없이 관대하고 너그러운 예수님이지만 죄에는 단호합니다. 평범한 신자들에게 죄의 유혹과 죄의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작은 불씨가 온 산을 불태우듯 죄도 그러할 수 있습니다. 죄에 중독되어 죄인줄 모르고 사는 대로 생각하며 돌아올줄 모른다면 돌아올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친히 하시는 말씀이 충격적이니 그렇게 죄의 해악이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이대로라면 천국은 불구자들 뿐이겠습니다. 그러니 문자 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죄가 얼마나 끔찍한지 깊이 깨달아 단호히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라는 충격요법의 표현입니다. 젊고 힘있을 때 죄이지, 늙고 힘없고 병들었을 때는 결코 죄를 짓지 말아야 할 것이니 상처가 오래 가고 치유에 많은 시간이 들기 때문입니다. 약까지 먹으면서 은총으로 사는 처지에 죄를 짓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좋은 지도자뿐 아니라 참으로 참사람답게 하느님을 닮은 품위의 사람, 향기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을인생에 접어든 분들은 가을의 품위와 초연함으로 살 일입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자 믿는 이들에게는 기도의 계절, 공부의 계절입니다. 사람되는 공부, 성인되는 공부, 군자되는 공부입니다.

“군자가 정성을 보존해 생각하고 삼간다면 평안해져서 온몸이 마음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다산>

그러니 지도자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은 너그러운 삶, 나누는 삶, 죄에 단호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아가게 하면서 죄의 방패역할을 해 주십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요한17,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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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마르9,43)

<죄의 본질!>

오늘 복음(마르9,38-43.45.47-48)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과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제110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함께 걸어가십니다.’라는 담화를 통해 우리 주위에 있는 이주민들과 난민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되어줄 것을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함께 당신 백성 안에서 걸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역사를 통한 여정 중에 있는 사람들, 특히 가장 작은 이들,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신다는 의미에서 당신 백성과 함께 걸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이주민과의 만남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이기도 합니다. 도움을 청하려고 우리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이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담화문 中)

우리 주위에 있는 가난한 이들과 이주민과 난민들이 곧 예수님이라고 하십니다.

나만을 위한 재물이 되게하지 맙시다!
그랬다가는 우리의 최종 목적인 영원한 행복(생명)을 결코 누릴 수 없습니다.

‘죄(罪)의 본질’은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것’,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과 기쁘게 나누지 않은 것’, ‘재물을 쌓아놓고 나 중심의 이기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라.’고 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심과 탐욕의 죄’가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통해 깨끗하게 씻겨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세계 이주민과 난민들을 위한 2차 헌금이 있는 날’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의 정성을 담아봅시다!

우리도 이주민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고 이주민’입니다.

그곳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함께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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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마르 9, 43)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결정적인
순간에만
하느님을 찾는
우리들
신앙입니다.

모든 새로움의
시작에는 좋은
결심이
있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은
결심입니다.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우리들이기에
말씀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말씀의 자리가
마음의 자리입니다.

나사가 풀리듯
빠르게
사라지는 것이
우리들의
좋은 마음입니다.

가던 길을
끝까지
가게 하는 것은
우리의
단순한
결심입니다.

단순한 결심이
삶을 바꿉니다.

흐트러진
삶의 자세를
바꾸는 결심이
더 중요합니다.

믿음은 결심과
각오로
자라납니다.

우리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빼앗긴 마음을
되찾는 것이며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 삶의
통찰입니다.

실행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시고
좋으신
하느님께서는
좋은 결심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에서
잘라 버려야 할
관계는 미련없이
잘라 버리며
하느님을 향하는
결단의
마음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결단에서
더 깊어지는
기도이며
마음이며
새로운
삶입니다.

점점 깊어지는
주님의 길이며
주님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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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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