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6장, 30-34절;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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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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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인류의 역사에서 발생한 모든 전쟁은 어쩌면 더 많은 빵을 얻기 위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도와준다는 명분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자국의 이익을 더 많이 얻으려는 싸움일 뿐입니다. 테러와의 전쟁, 평화 유지를 위한 싸움도 무기를 팔아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얻고 그 지역의 지배권을 가지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옳은 전쟁과 싸움은 없습니다. 이렇게 역사 이래 인간의 탐욕은 전쟁과 폭력을 사라지지 않게 합니다. 그 때문에 가난한 이는 더욱 가난해지고,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역사 속의 전쟁과 같은 싸움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더 많은 부와 명예를 얻으려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짓밟으며 경쟁합니다. 짓밟지 않으면 짓밟히고 빼앗기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움에서 이기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늘 경계와 의심의 눈초리로 주위를 바라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마르 6,35-44 참조)을 행하시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이시기 전, 예수님께서 어떤 시선과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셨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쉬고 싶으셨습니다. 쉬시며 허기를 달래고 싶으셨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오가는 바람에 제자들과 함께 외딴곳으로 떠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곳까지 쫓아와 예수님께서는 쉬실 수도, 허기를 달래실 수도 없으셨습니다. 이렇게 배고프고 피곤하신 예수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당신의 허기를 달랠 빵이 아닌 굶주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 시선에서 예수님의 기적이 시작됩니다.
우리 또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빵이 필요합니다. 충분하기보다는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내 이익과 욕심에 주의를 빼앗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더 가난하고 아파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들과 함께 나눌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기적의 현장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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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나는 내게 맡겨진 소명에 대하여 예수님처럼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가지고 형제/자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말씀/복음화/선행 등등)을 어떻게 전하고 있는지 묵상해 보고 현재 내가 속해 있는 그룹에서 필요로 하는게 무엇인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나는 신앙적으로 어떻게 쉬며 생활하고 있는지 묵상해 보고 나는 신앙적인 기운을 어떻게 누구로부터 얻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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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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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경제 구조는 생산 능률과 효용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습니다. 모든 것을 자본으로 환산하다 보면 복음의 가치들도 물질적 척도로 평가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잘 아셨습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전한 복음은 물질적 평가와 보상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군중은 가난한 이가 부를 얻고, 병든 이가 치유되고, 불의한 재판의 결과가 공정하게 바뀌기를 기대하며, 복음이 세상 속에서 내는 효과를 직접 느끼고 싶어 한다는 점을 말입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기대감이 커질수록 복음이 지닌 내면의 가치는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맡기신 복음 선포는 능률과 효용성의 문제가 아니라 내적 평화와 자유의 길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안에 ‘쉼’을 통해 그것을 깨닫도록 초대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신성한 노동이 고된 노역으로 전락하고, 기쁜 봉사가 피하고 싶은 의무감으로 느껴질 때, 내가 선택한 삶이 잘못된 판단처럼 여겨지고, 희망찬 내일이 두려운 미래가 되는 불안감에 빠질 때, 우리는 잠시 외딴곳에서 쉬면서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평화와 자유, 내가 가진 재물과 세속적 권력이 누군가의 희생이나 나의 위선과 기만으로 얻어진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서로 다른 가치와 이념으로 갈라져 적대하며 살아가는 현실은 물론, 우리가 지닌 내적 모순을 십자가를 통해 화해시키시어 새로운 인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고백합니다. 흩어진 양들을 이끌어 줄 목자가 세상의 공정과 정의를 이루어 줄 그날이 올 것임을 확신한 예레미야 예언자의 굳은 믿음과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깊이 묵상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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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고한 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착한 목자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은 첫 번째 전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예수님께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낱낱이 보고합니다. 그들은 많은 경험을 하였지만 피곤하여 지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경험은 기쁨이 용솟음치는 살아 있는 체험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오붓한 시간을 가지시려고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셨는지,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떠나시는 것을 보고 군중은 육로를 이용하여 예수님 일행보다 앞질러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배에서 내리신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연민과 자비와 사랑의 주님!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하고 화답송에서 노래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세상의 고통을 가엾이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어, 아픈 사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 등 소외되고 도움이 절실하며 인간적으로 홀대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주셨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목자가 없어 흩어져서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왜 이렇게 가엾고 측은하게 보일까요? 경제적인 이유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에서 바라보고 찾아 나서기 때문이 아닐까요? 감당하기에 너무 벅차다고 생각되는 시련을 겪을 때, 복음의 군중처럼 예수님을 찾아 나서면 어떨까요? 몸과 마음이 눈에 보이는 안일과 즐거움만을 찾아 헤맬 때에 주님을 찾아 나서면 어떨까요? 올바르고 착하게 살려고 하다가 지치고, 정의롭고 좋은 일을 하다가 실망했을 때, 또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방황할 때 주님을 찾아 나서면 어떨까요? (출저: maria.catholic.or.kr)

♣복음말씀의 향기♣ No3925
7월21일[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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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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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aPvfqDprSU
[원주교구 김대중 베드로(영산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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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위기는 기회입니다!>

이백명 삼백명은 아니지만, 육칠십명 아이들을 위해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여름 신앙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젊은 형제들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프로그램 진행하랴, 물놀이 따라다니랴, 동선 체크하랴, 정신이 없습니다.

저는 주방 근무라 새벽 6시에 홀로 미사를 봉헌합니다.
특별한 체험입니다. 아무 탈 없이 신앙학교가 잘 진행되었으면, 하는 지향으로 초스피드로, 그러나 정성껏 미사를 봉헌합니다.

미사 끝나자마자 주방으로 달려가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침 끝나면 점심 준비, 점심 끝나면 시장, 그리고 저녁…단 한 순간도 자리에 편히 앉아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강철 체력을 주신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는 요즘입니다.

정말이지 다들 몸은 피곤하지만 신명나는 하루 하루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단이 펼쳐나갔던 초기 교회 공동체의 모습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신명나게 전개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복음 선포 활동은 세상 사람들을 크게 매료시켰습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군중들로 인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 쉴 틈도 없었으며,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제자들의 피로는 누적되었고, 수면부족으로 인해 건강까지 염려될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걱정되었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 31)

밀물처럼 밀려드는 고객들, 양떼들로 인해 힘겨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기중천, 의기양양했던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의 모습, 그런 모습과는 너무 비교되는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청소년과 청년들, 급격한 고령화 현상, 동력을 상실한 공동체의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 하는 안타까움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초기 교회 공동체가 그토록 군중들을 매료시킨 비결이 무엇인지 유심히 관찰해봐야겠습니다. 우리도 그들의 운영 노하우를 배워야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우리 교회로 끌어들일 수 있는 매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요즘 교회의 위기라고 합니다만, ‘위기는 기회’라는 말도 있습니다. 위기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다시 한번 일어서라고, 다시 한번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라고, 그래서 철저하게도 쇄신되고 거듭나라고 주신 은총의 기회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조금 더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교회를 외면하고 있는 이들, 교회로부터 매력과 흥미를 잃어버린 이들이 눈을 번쩍 뜨고 되돌아올 수 있도록, 더 많은 행복거리들 찾아봐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파에 시달려 지치고 힘겨워하는 양들에게 기쁨과 희망, 열정과 첫 마음을 가득 채워줄 수 있는 에너지 충전소가 되도록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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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LYT4TFHu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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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쉬어도 피곤할까?>

오늘 복음은 참다운 ‘쉼’이 무얼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온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찾는 수많은 군중이 몰려오자 예수님은 그들을 쉬게 내버려 두고 당신이 직접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들의 쉼을 존중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아서 만성 피로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삶의 에너지를 얻는 참다운 쉼은 무엇일까요? 오늘 제자들처럼 사명을 다 마치고 와서 그 파견한 분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도’와도 연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휴식은 현실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힘을 얻는 과정입니다. 현실의 모든 어려움은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일이 고되다고는 하지만, 일도 관계가 좋으면 견뎌낼 수 있습니다. 관계가 안 좋으면 아무리 아무것도 안 하고 있더라도 그 자리가 지치고 고생스럽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관계를 위한 에너지를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쉬고 나서도 다시 사람들을 만날 힘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면 쉰 것이 아닙니다. 현실 도피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 도피와 쉼을 잘 구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현실 도피는 그것을 하고 나서 다시 일자리나 가정으로 돌아갈 힘이 생기지 않지만, 참다운 쉼은 다시 도전하고픈 용기가 생깁니다.

MBTI라는 성격유형 검사에서 ‘I’와 ‘E’의 차이점이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성격이 ‘E’로 외향적인 사람은 사람을 만날 때 힘을 얻고 반대로 ‘I’인 사람은 혼자 있을 때 힘을 회복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격의 유형일 뿐 무엇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굳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회복해야 하고 사람을 만날 때 에너지를 빼앗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러 오실 때 에너지를 빼앗기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기도하실 때 에너지를 회복하셨습니다.

사람은 진정 혼자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내 자아로부터 괴롭힘을 당합니다. 잠을 자도 악몽을 꾸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생각이 자꾸 자신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고 일어나도 피곤합니다. 어차피 만나려면 나에게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존재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존재가 나를 이웃을 사랑하라고 파견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이때 기도가 진정으로 휴식이 됩니다.

EBS ‘선생님이 달라졌어요’ 제5화에서 보령의 한 초등학교 여선생님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너무 벅찹니다. 아이들에게 고함만 지르게 되고 아이들은 선생님을 마녀나 마귀라고 부릅니다. 지친 선생님은 이제 학교를 그만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제작팀은 가르침은 먼저 관계라고 말해줍니다. 관계를 어떻게 잘 할 수 있는지 교육합니다.

가장 일찍 나와 아이들에게 하이 파이브를 하고 집에 돌아갈 때는 아이들을 일일이 안아줍니다. 친절하게 바뀐 선생님을 보며 아이들도 선생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학교 가는 게 즐겁습니다. 이제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은 아이들을 만나기 위한 준비가 됩니다. 이것이 참다운 쉼입니다. 쉼의 목적은 파견에 있습니다.

미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유방암이 온몸에 전이된 상태의 선생님에게 아이들이 노래를 불러줬고 차차 암세포가 사라져 완치되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만날 때 그러합니다. 암세포는 몸이 허물어진 상태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몸의 설계도와 같습니다. 그분과의 만남으로 우리 DNA가 회복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그러면 다시 아이들을 가르칠 힘과 용기가 생깁니다.

기도와 쉼은 아예 처음부터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봉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야 길을 잃지 않습니다. 말씀을 읽을 때도 나를 파견하는 말씀을 찾아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기도하고 제자들과 사람들이 당신을 찾자 바로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라고 하셨습니다.

새벽이 아버지를 만나 힘을 얻고 다시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받으시는 일이 그분에게는 기도였고 휴식이었습니다. 기도가 휴식이 되면 뒤로 미룰 수 없습니다. 잠을 자고 식사를 하는 것처럼 먼저 이것을 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사랑하도록 파견받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이만이 온전히 파견하시는 분 안에서 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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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02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역사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입니다. 어느덧 22년이 지났습니다. 한국은 폴란드와 포르투갈을 이기고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올랐습니다. 기세를 몰아 한국은 이탈리아를 연장까지 가는 혈투 끝에 2:1로 이기고 8강으로 올랐습니다. 감독인, 히딩크는 ‘I am still hungry!’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한국은 스페인과 승부차기 끝에 4강으로 올랐습니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용광로와 같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붉은 악마’가 되었고, 붉은 셔츠를 입었습니다. 당시에 모든 사람이 힘차게 외쳤던 구호와 박수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구호와 “짝짝 짜자작”으로 이어지는 박수였습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구호가 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구호입니다.

어린 시절 저의 기억에 깊이 새겨졌던 구호가 있습니다.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 불’이라는 구호입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웠습니다. 모두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학교 담벼락에도, 동네의 담벼락에도 ‘국민소득 1,000불과 수출 100억 불’이라는 구호가 신동우 화백의 그림과 함께 그려졌습니다. 당시 정부는 1980년대에 그 목표를 이루겠다고 했는데 빨리빨리의 대한민국은 4년 앞당긴 1977년에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2023년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33,475달러입니다. 수출은 1,118억 달러입니다. 소득은 33배가 넘게 증가했고, 수출은 11배가 넘게 증가했습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구호가 있습니다.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입니다. 구호는 목표가 되었고, 목표는 우리에게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한국교회에도 구호가 있었습니다. 1984년 한국교회는 창립 20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한국교회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주례로 103위 시성식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200주년 준비의 하나로 ‘사목회의’를 개최했습니다. 103위 시성식을 기점으로 한국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10년마다 신자 수가 100만 명씩 증가했습니다. 1980년대에 100만 명이던 신자는 2020년에는 500만 명을 넘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가 늘어났습니다. 본당은 넘쳐나는 신자로 분가해야 했습니다. 서울과 광주에만 있던 신학교도 늘어나는 신학생을 다 받지 못해서 늘어났습니다. 수원, 인천, 대전, 부산, 대구에 새롭게 신학교가 생겼습니다. 한국교회가 창립 200주년을 준비하면서 내세운 구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빛을‘이라는 구호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의 도움 없이 하느님을 받아들였던 특별한 교회였습니다. 많은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이 땅에 하느님 사랑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하느님 사랑의 빛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1989년에 한국교회는 44차 ‘성체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103위 시성식은 우리만의 행사였다면 성체대회는 가톨릭교회의 공적인 행사입니다. 변방에 있던 한국교회는 성체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당당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신학생이었던 저는 ‘괌’에서 온 순례단의 안내를 맡았습니다. 브라질의 주교님이고, 세계적인 해방 신학자인 ‘돔 헬더 까마라’ 주교님의 강의를 직접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교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가난한 사람을 돕자고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성자(聖者)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내가 가난한 사람을 위한 조직을 만들자고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도 좋지만,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을 주는 것은 더 좋은 것입니다. 44차 세계 성체대회의 구호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영적으로 충만한 신앙은 ‘공감’에서 시작됩니다. 공감은 연민이 되고, 연민은 조건 없는 나눔이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공감과 연민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은 공감과 연민이 희생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공감과 연민이 함께 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더는 슬픔과 울부짖음이 없는 세상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재물과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한없는 연민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영적으로 충만한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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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30-34: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

오늘의 전례는 지난주의 선교 사명의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목자와 양 떼라는 상징적 표현들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레미아 예언자는 당시의 왕들과 지도자들이 목자들이라고 하기에는 부당하다고 비난한 후, 이스라엘 백성을 귀양살이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에게 당신 마음에 맞는 목자들을 주심으로써 돌보아 주시리라는 것을 예언한다.(예레 23,3-4 참조) 그리고 마지막 날 이상적인 왕이며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에게 성덕과 정의를 펼쳐 보이시리라고 예고한다. 그분은 정통 왕손, 야훼, 우리를 되살려주시는 이로 불릴 것이라고 한다.

복음에서는 사도들이 선교활동의 결과를 예수께 보고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좀 쉬자고 하신다.(31절) 군중들이 많이 밀려들었기 때문에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났지만, 군중들은 이미 알고 앞질러 그곳으로 갔기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33-34절) 측은히 여기시는 주님의 모습은 양 떼가 흩어지는 것을 보살필 뿐 아니라, 양 떼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고, 기적의 빵으로서 양육시키고자 애쓰시는 그런 목자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이런 의미에서 이상적인 목자이시다. 왜냐하면 첫째로 목자는 자기의 양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마음 깊이 느낄 수 있을 만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힘보다는 사랑과 헌신과 부드러움으로 나타나는 예수님이시다.(요한 10,11-12 참조)

두 번째는 양 떼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함께 느껴 그들과 하나가 되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빵의 기적을 통하여 그들과 완전히 하나가 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마르 6,37 이하 참조) 이 빵의 기적에서 사도들의 태도는 바로 교회 안에서 우리의 봉사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즉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장하고 강해지도록 그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봉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양 떼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한 종으로 느낄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마태 20,25-28 참조)

세 번째로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홀로 있는 것과 휴식의 필요성을 실천하시는 분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이루실 수 있었고 또 필요한 빛과 지혜를 얻기 위하여 침묵과 기도를 위한 휴식을 필요로 하셨다.(마르 6,45-47 참조)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봉사자로 일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말씀의 충실한 해석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대화할 시간과 공간을 가져야 한다. 즉 기도와 묵상이 없는 봉사활동은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화해시켜 한 몸을 이루게 하셨다고 한다.(에페 2,14-16 참조)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통해 이루신 화해의 의미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서로 대립하는 두 민족으로부터 “하나”(에페 2,14), “새 인간”(에페 2,15), “한 몸”(에페 2,16)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목자들은 먼저 자신이 사랑 안에서 성장하고 또한 그들이 맡은 신자들이 사랑 안에서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증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목자들이든 신자들이든 모두가 다 같이 서로 노력하는 여기에 우리 교회의 미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우리를 그분께 맡겨드려야 한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에페 2,18)

오늘 복음의 내용은 설교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자들을 제외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목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에 따라 행동해야 하고, 또 신자들은 사랑으로 충실히 목자의 소리에 응답하여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들과 한데 어우러져 그들과 하나가 되신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고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군중들의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 우리가 비록 여럿이지만, 다양성을 표현하고 있지만, 하느님 안에, 주님의 이름 안에 진정한 하나,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우리가 되는 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을 올바로 알아듣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이 우리 안에 항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표징이 되어 드러날 수 있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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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죄인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여전히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악의 지배를 받는 이들에게는 하느님께서 그들도 구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신다는 것을,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는 그들이 얼마나 하느님에게서 빗나간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온 삶을 다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최고의 가르침은 십자가였습니다.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기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는 어떤 구분도 차별도 예외가 되는 사람도 없습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 신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당신 목숨을 바치시면서까지 가르쳐 주신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는 제1독서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구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큰 죄를 저질렀어도, 여러분이 잠시 믿음을 잃어버리더라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신비는 여전히 여러분에게 모두 유효합니다.

특별히 오늘 하루는 부족한 저와, 교회의 모든 사제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사제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신비를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선포하는 목자들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내가 입을 열면 말씀이 주어져 복음의 신비를 담대히 알릴 수 있도록 나를 위해서도 간구해 주십시오.”(에페 6,19)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여 주십시오.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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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피정>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0-34)

1)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신 이야기를 보면, 활동을 마친 제자들이 ‘기뻐하며’ 돌아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루카 10,17), 열두 사도의 경우에도 그렇게 ‘기뻐하면서’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이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박해도 받았을 것이고, 여러 가지 고통도 겪었을 것이고… 그래서 정신적으로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겠지만, 육체적으로는 체력이 모두 소진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돌아와서 보니, 예수님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일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쁘게 일하시는 것을 보면서 사도들은 자기들만 쉴 수는 없었을 것이고, 쉬는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도와드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쉬면서 힘을 재충전할 수 있도록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지시하십니다. <예수님은 일만 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즉 신앙인들을 혹사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휴식이 필요할 때에는 쉬라고 명령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도 사도들과 함께 가셨기 때문에,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는, “우리 함께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외딴곳’은 사람들이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사도들의 휴식을 위해서,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등의 ‘일’을 잠시 멈추셨습니다. <사람들을 ‘버리고’ 가신 것은 아닙니다.>

2) 예수님께서 잠시 ‘일’을 멈추신 것에 대해서,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당신도 쉴 수가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과 지금의 상황은 모순되지 않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요한 5,16-18)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아버지께서 쉬지 않고 일하시니 나도 쉴 수가 없다. 안식일이라고 해도…”라는 뜻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단 한 순간도 중단되지 않는다. 안식일에도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을 보살피고 보호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신다. 그러니 나도 안식일을 ‘초월해서’ 일할 수밖에 없다.”>

이 말씀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하시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지, “나는 휴식이 필요 없다.”가 아닙니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는 휴식이 필요 없겠지만, 사람이신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과 같은 분이었습니다. 잘 때가 되면 자야 하고, 먹을 때가 되면 먹어야 하고, 일하다가 지치면 쉬어야 하고…>

3)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쉬는 일”을 우리 교회는 ‘피정’이라고 부릅니다. 피정은 잠시 ‘일’을 멈추고 쉬는 ‘휴식 시간’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새 기운을 얻는 ‘재충전 시간’입니다. 그 새 힘은 하던 일을 더 잘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체력의 한계가 있고, 힘을 재충전하지 않으면 지쳐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쉬지 않고 일하다가 너무 지쳐서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까지 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잘 달리는 자동차도 기름이 떨어지면 주유소에 들러서 기름을 넣어야 합니다. 잠시 주유소에 들르는 것은 달리는 것을 중단하는 일이 아니라, 더 잘 달리기 위해서 힘을 충전하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전례나 기도에는 피정의 성격도 들어 있습니다. 좋은 예가 ‘주일미사’입니다. 한 주간 동안 인간 세상에서 힘들게 살다가 주일에 성당에서 미사참례를 하는 것은, 일을 멈추고 피정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미사를 통해서 새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 힘은 다음 한 주간을 잘 살아갈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살아갈 힘을 재충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일을 안 지키는 사람은 그 힘을 받지 못해서, 점점 힘을 잃다가 결국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

4) 예수님과 제자들이 ‘외딴곳’에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제자들도 쉴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조금 관점을 바꿔서 그 상황을 바라보면, 몰려든 군중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라는 예수님 말씀대로 ‘참된 안식’을 얻으려고 예수님에게 온 사람들이고,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면서 ‘참된 안식’을 주실 때, 사도들도 그 가르침을 함께 들으면서 새 힘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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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광현 이냐시오 신부님]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

참 목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착한 목자도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그분 뒤를 따라 가면 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가엾게 여기지 않으시고, 기특하게 여기시고, 사랑스럽게 바라보실 것입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려면 성령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 전에 보호자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4,16-17)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3)하고 명하셨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양육하시고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

보호자, 성령의 인도하에 착하신 목자, 참 목자의 뒤를 잘 따라갑시다. 예수님의 가여운 눈빛을 사랑의 눈빛으로 바꿔 드립시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요한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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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전승진 필립보 신부님]

<마음과 마음 그리고 위로>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첫 부분은 제자들이 다시 주님께 돌아와 자신들이 했던 일들을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신나서 자신들이 했던 활동과 선행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놨을 것입니다. 꼭 근사한 무용담을 이야기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제자들의 이야기 안에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 기적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치유에 관한 이야기와 용서에 관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셨을 것입니다.

이 모습은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우리도 공동체 안에서 우리 각자와 함께 걷고 계시는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우리 삶의 기쁨과 슬픔, 행복과 고난이 있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은총이 있음을 우리는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며 행복한 미소를 지으셨을 것입니다. 그 미소의 의미에는 제자들이 많은 일을 훌륭히 처리했음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느님의 일을 하며 행복해하는 제자들의 모습 자체가 사랑스러워 보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걱정되셨던 모양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에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일의 기쁨과 동시에 쉼의 필요도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 삶에 쉼은 중요합니다. 쉼이 있어야 힘찬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쉼이 있어야 자신을 바라볼 수 있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또 다른 새로운 ‘나’로의 초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쉼’은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마음은 제자들의 마음과 만나고 그 안에서 ‘위로’를 나눴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쉼이 되어주는 ‘위로’ 말입니다.

제자들과 주님은 ‘쉼’ 즉 ‘위로’를 찾아 배를 탑니다. 쉼을 찾아 떠났지만, 도착한 곳에서 만난 것은 쉼이 아닌 위로를 원하는 마음들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라 육로로 달려온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차마 돌려보낼 수 없으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만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마르 6,34)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쉼을 청하고, 치유를 청하며, 위로를 청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마음은 또 다른 마음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 만남은 또 다른 ‘위로’를 만들어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신앙의 길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은 단순한 만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만남은 주님의 마음과 우리 마음이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마음과 마음이 만나면 그 안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특히 ‘위로’라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늘 우리 마음이 주님의 마음과 만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만남으로 얻은 기쁨과 사랑이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의 마음에도 전해지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오늘은 ‘농민 주일’입니다. 농민들의 마음을 주님께서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소출을 기다리며 땀을 흘리는 모든 농민의 마음을 함께 헤아려주시기를 기도합시다. 또한 우리도 농민들의 마음을 나누고 함께 위로와 격려도 나누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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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한석 사도 요한 신부님]

<멈추어서 가만히 머무름>

잘 쉬는 것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것도 의미 있지만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쉬는 것만이 중요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잘 쉴 수 있는지 우리 사회는 이제야 제대로 된 고민을 시작한 듯합니다.

그러나 잘 쉬는 것에 대한 관심과 이를 위한 선택이 새로운 장소, 낯선 문화, 새 상품을 소비하는 것으로 좁혀지는 것 같습니다. 자칫 ‘잘 쉬는 것’이 ‘다르고 좋은 것을 소비하는 것’으로 대체될까 걱정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파견에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군중들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할 만큼 일로 소진되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결국 예수님과 제자들은 조금도 쉬지 못하는 듯합니다. 자리를 옮겨간 그들을 보고 많은 사람이 다시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쉬지 못하시고 다시 일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복음에서 사용된 ‘휴식’이라는 성서 단어는 우리말의 ‘쉬고 숨 쉬는 것’(休息)과 의미가 다릅니다. 원어의 의미를 풀자면, ‘거기에(ανα) 멈춰서 머무르는 것(παυω)’입니다. 이 맥락에서 보면 사실 예수님은 못 쉬신 것이 아닙니다.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사람들의 고통을 가엾게 보시며 ‘그들의 삶에 멈추어 서시어 머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고통과 갈망 앞에 멈추시어, 그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진정한 휴식을 취하신 것입니다. 쉬려고 하시다가 못 쉬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아픔을 알아보고 그 아픔을 채워주며 삶을 나누는 진정한 의미의 ‘휴식’(ἀναπαύω)을 하십니다.

우리가 찾는, 잘 쉬는 방법에 대한 생각도 여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삶 속에서 ‘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너’가 있어야 그 원래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에, ‘나’만을 만족시키는 것만으로는 늘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없는 휴식은 늘 목마르며, 공동체의 현실과 관련 없는 쉼은 공허한 자기만족에 그쳐 버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내가 멈춰서 머물며 진정으로 쉴 수 있는 곳은 나의 사랑을 원하는 ‘가엾은 너’와 이룰 공동체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당신의 쉼으로, 너와 내가 주고받을 사랑으로 초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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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머리카락 때문에 어렸을 때 놀림을 많이 받았습니다. 너무 뻣뻣하다고 해서 빗자루, 돼지털이라는 놀림을 받았고, 또 머리숱이 많아서 이발한 지 얼마 안 되었어도 지저분하다고 선생님께 자주 혼났습니다. 머리카락이 빨리 자란다면서, “너 공부는 하지 않고, 야한 생각만 하는구나.”라며 놀리기도 하셨습니다.

아마 고3 학력고사 끝난 뒤였을 것입니다. 한 친구가 미용실에서 커트하고 왔는데 너무 멋져 보이는 것입니다. 당시 유행하던 머리 모양이라면서 멋지게 차려입고 학교에 나타난 것입니다. 당시 ‘두발 자율화’는 아니었지만, 학력고사도 끝났다고 선생님께서는 머리가 길어도 암묵적으로 묵인해 주셨지요. 그래서 친구들은 미용실부터 찾았습니다.

저 역시 친구에게 그 미용실을 물어 찾아갔고, 미용실 선생님께 요즘 유행한 스타일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이발하면서 계속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당시 인기 가수의 머리로 해주셨는데 글쎄 ‘바가지 머리’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니, “이게 학생에게 제일 잘 어울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 동네 이발소에 가서 다시 스포츠머리로 이발했습니다. 제게 제일 잘 어울린다는 것을 이때 알게 되었습니다. 남들과 머리카락 자체가 다르기에 남에게 맞게 이발하는 것이 아닌, 나에게 맞게 이발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제 머리는 짧은 커트 머리입니다.

자기의 고유함을 찾아야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처럼이 아닌 남처럼 살려고 하면서 자기의 고유함을 찾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남처럼 살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서 왜 그렇게 사느냐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이 역시 고유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무지’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없앨 궁리만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자기들처럼 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지 않았고, 자기들을 향해 위선자라는 말을 하면서 반대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들만 옳고, 예수님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았다면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가 말한 대로, 모든 민족이 희망을 거는 이름입니다.

제대로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더 알기 위해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아니라, 남의 고유함도 인정하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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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를 가엾은 마음으로 챙기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많은 분이 휴가를 즐깁니다. 휴가를 통해 쉬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쉬는 방법과 우리의 쉬는 스타일은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쉬지만, 우리는 사람도 많고 시끄러운 곳으로 휴가를 떠납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곳으로 갑니다. 길도 막히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휴가를 다녀와서는 더 피곤해합니다. 그렇다면 그 휴식은 바람직한 쉼이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기쁘고 건강한 휴식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을 지니고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사람들을 만나고 마귀를 쫓아내며 주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 앞에 모여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자랑삼아 보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아침에 계획한 것을 열심히 살고 저녁에 삶을 되돌아보며 하루의 시간을 예수님께 보고하는 것은 저녁기도 시간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고 하셨습니다.

왜 외딴곳을 선택하셨을까요? 동안에 열심히 할 일을 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주님의 일이었는지, 내 일이었는지를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혹 하느님의 일은 접어두고 인간적인 일에 매달린 것은 아닌지 내적으로 반성하고 채울 시간을 가져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일에 치이면 마지못해, 억지로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일은 신성한 노동이 아니라 부역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휴식을 잘해야 합니다.

어느 수도원의 두 수사가 원장으로부터 들에 나가 밀을 거두어들이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두 수사는 낫으로 밀을 베어 단으로 묶어나갔습니다. 한 수사는 시간마다 쉬곤 하는데, 반해 한 수사는 한 번도 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었을 때 보니 쉬면서 일한 수사가 쉬지 않고 일한 수사보다 훨씬 더 많은 밀을 베어 놓았습니다. 열심히 일한 수사는 어떻게 그런 결과를 가져왔을까? 궁금해했는데 쉬면서 일을 한 수사가 말했습니다. “저는 틈틈이 쉴 때마다 제 낫을 갈았습니다.” 쉰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을 준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일에 파묻혀서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불분명할 때, 가족과 잘 지내고 있는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잘 모시고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회복하는 시간이 휴식입니다.

쉼을 잘못하면 안 쉰 것만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음식을 잡수실 겨를조차 없이 바쁘시더라도 한적한 곳을 찾으셨고 이른 아침에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보내주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때때로 한적한 곳을 찾아야 합니다. 성체조배는 바로 훌륭한 휴식입니다. 자주 성체 앞으로 오십시오. 피정이나 성지순례도 꼭 필요한 휴식입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들은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한적한 곳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연 피정, 월 피정을 해야 합니다. 피정이란 말 그대로 시끄러운 곳을 피해 고요한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교회법으로, 수도회 규칙으로 정해놓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깊은 만남을 통해 자기 소명 의식을 새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대개는 침묵 피정을 합니다. 동안에 말을 많이 하고 살았으니까 침묵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내적 성장의 토대를 다지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우리 청주교구 신부 수가 200명입니다. 신부 전체가 모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 피정을 할 때는 특별히 주교님의 허락을 받은 분 외에는 모두 참석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부님이 건의 했습니다. 침묵을 해제해 달라! 일 년에 한 번 전체가 모이는데 동안의 삶을 서로 나누며 선후배 간의 끈끈한 정도 쌓고 친교의 장을 만드는 것이 더 의미가 있지 않느냐?

그래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침묵이냐? 해제냐?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절대다수의 신부님께서 침묵을 선택하셨습니다. 한번은 부산교구 정명조 주교님께서 피정 지도를 하셨는데 첫 시간에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피정은 “절대 침묵 피정”입니다. 절대 침묵이란, 내가 침묵을 지키는 것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문 여닫는 소리, 발걸음 소리까지도…왜 그렇게 침묵을 강조하셨겠습니까? 세상이 시끄러우면 시끄러울수록 그만큼 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주님의 뜻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소란하고 들뜬 마음으로는 결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고요함 속에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의 거울에 비추어진 내 속을 보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이 몇 일간 시간을 내서 피정하기란 힘듭니다. 그러나 한적한 곳에 가서 쉬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합니다. 이 말씀은 좋은 휴양지에 가서 먹고 마시고 즐기라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휴가를 내서 성지순례를 하시는 분이 계시고, 어떤 분들은 가족과 더불어 요양원이나 복지시설에 가 봉사를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들은 중환자실에서 똥, 오줌을 받아내고 식사 수발도 하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배우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일깨웁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들의 휴가는 참으로 하느님 안에서의 휴식입니다.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휴가를 내서 성경 연수에 참석하시는 분도 있고, 피정하며 주님 안에서 쉬기도 합니다.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어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정에서 실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른 아침, 일상을 시작하기 전 또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 시간, 침묵의 시간을 꼭 챙겨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예수 성심 상이나 성모님 상 앞에서 하루를 살피고 부족함을 채울 수 있도록 자기를 봉헌하면서 주님과 더불어 시작하고 주님과 함께 마치면 얼만 좋겠습니까? 세상이 각박해지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쉼이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쉰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재충전의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높은 곳에, 귀한 곳에, 천상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찾아가기도 하셨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분께 능력이 있고 힘이 있으며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휴식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제자들보다 먼저 그 휴식 장소로 와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이 파김치가 되어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데 군중에게 떠밀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충분히 짜증이 날 만한데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 같아 오히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은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과 자비심으로 가득 차, 귀찮고 짜증이 날 법한 상황에서도 꾸준한 사랑의 길을 가십니다.

과연 우리 주변에 사람이 모이고 있는가? 사람들이 나를 피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미리 가서 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처럼 주님의 뜻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를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세상 것엔 바쁘고, 주님 것엔 관심이 없으면서도 주님의 복을 청하는 모습이라면 부끄럽습니다. 오늘만큼은 외딴곳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꼭 챙기시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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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외딴곳에서 사람잔치가 열립니다>

마르코 6,30-34 (‘오천 명을 먹이시다’ 전반부)

그때에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외딴곳에서 사람잔치가 열립니다>

사람 없는
외딴곳에서

사람잔치가
열립니다

사람에 치어
사람 멀리

지금 잠시
한걸음 물러서

언젠가 다시
사람들 품으로

기쁘게 스밀
따스한 힘 돋울

쉼이 간절한
사람들이

애써 찾은
외딴곳에서

사람이 그리워
더욱 사람 가까이

한걸음에 내달린
사람들이

먼저 다다라
반갑게 맞이하고

사람이 그리운
사람들을

정성껏 품으시는
참사람과

참사람을
그대로 닮아

참사람이려는
제자들이

갈림 없이
어우러지는

눈물겹게 정겨운
사람잔치가

사람 없어 오히려
사람 가득한

어딘가
외딴곳에서

흐드러지게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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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마태오 복음사가는 주님께서 바리사이들의 반대를 받으시면서도 복음을 선포하며 아픈 이들을 치유하시는 주님에 대해서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합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를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1-3)

마태오 복음사가는 주님께서 예언서의 예언대로 ‘주님의 종’이신 메시아이심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는 ‘수난받는 주님의 종’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미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50,5-7), 넷째 노래 (52,13-53,1-12)에서 수난 받은 메시아에 대해서 선포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조차 왜 메시아가 수난 받는지에 대해서 풀리지 않는 의문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주님을 반대하고 주님께서는 아버지로 받은 소명을 조용하게 이행하십니다. 복음사가는 이 대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이르셨다.”(마태 12, 14-16)

마태오는 이미 주님께서 고통과 수난의 메시아이심을 알고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며  받대 받는 메시아이심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미카 예언자는 불의를 저지르는 이스라엘 악행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선택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악행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마자 실행에 옮긴다. 탐이 나면 밭도 빼앗고, 집도 차지해 버린다. 그들은 주인과 그 집안을, 임자와 그 재산을 유린한다.”(미카 2,1-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악행에 대해서 응징하십니다.
“보라, 내가 이 족속을 거슬러 재앙을 내리려고 하니, 너희는 거기에서 목을 빼내지 못하고, 으스대며 걷지도 못하리라. 재앙의 때이기 때문이다.”(미카 2,3)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신 나머지 아들을 함부로 하는 이들 손에게 내어 놓으십니다.

성자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러 순하게 순명과 수난의 길을 걸으십니다.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는 주님께서는 마태오가 표현하듯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19절)라는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그러나 삶에 지친 백성들은 그분을 알아보며 그분에게 희망을 겁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도 예언했던 종말의 진정한 목자 길 잃은 양들을 돌보며 자신의 생명을 바치시는 목자가 되십니다.

과거에 실망과 아픔을 주었던 북부 이스라엘의 왕들,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지게 했던 남부 유다의 왕들과는 다른 조용히 구원을 펴시는 ‘주님의 종’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들의 메시아가 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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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착한 목자 파스카 예수님 영성 살기>
-정의, 평화, 연민-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오늘 7월21일 연중 제16주일 화답송 후렴 시편은 늘 들어도 위로와 힘이 됩니다. 말마디를 바꾸어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불안할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걱정할 것 없어라.” 바꿔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자 빛이신 주님을, 희망이자 기쁨이신 주님을 잊어 뿌리없이 표류하는 삶이요 어둠 속에 방황하는 혼란한 삶입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신 착한 목자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런 착한목자 주님을 잊고 살기에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김수환 추기경의 묘비명이기도 합니다. 아주 예전 어느 분이 돌아간 아내의 묘비명을 청하기에 주저없이 이 시편 성구를 추천한 적도 생각납니다. 이어지는 시편 가사도 마음에 평화와 위안을 줍니다.

“파아란 풀밭에 이몸 뉘어주시고, 고이쉬라 물터로 나를 끌어 주시니, 내 영혼 싱싱하게 생기 돋아라.”

참 감사하게도 착한 목자 주님은 우리를 생명의 잔치, 이 거룩한 미사잔치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는 주님의 초대에 응답해 미사잔치 참석하고 있는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생명의 미사잔치를 선택한 여러분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연중 제16주일은 제29회 농민주일이기도 합니다. 한국천주교회는 1995년 추계정기총회의 결정에 따라, 해마다 7월 셋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농민주일을 맞이할 때 마다 생각나는 착한 목자 예수님의 요한복음 15장 1절,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라는 참 멋진 고백입니다.

어떤 직업보다도 농업에 종사하는 농부들은 하느님을 가장 닮은 분들임을 깨닫습니다. 농사의 80%는 하느님께 달렸다 고백하는 농부들을 보면 하느님을 닮은 수도승같다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오늘 농민주일을 맞이하여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인 박현동 아빠스의 담화문 내용 일부를 소개합니다.

“농민주일은 농민을 위한 날이자 농민들의 열정과 노력의 결과를 소비하는 도시 생활인을 위한 날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회복하고 생태적 회개의 삶을 살아가며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갑시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마침 어제 수도원에 피정 온 청년들이 청했던 강의 제목입니다. 언제나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삶을 위해 평생 노력해야 함을 참 많이 강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삶’은 바로 우리 삶을 평가하는 잣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삶의 영원한 모델이 바로 착한 목자 예수님이요, 오늘은 착한목자 영성에 대해 세 측면에 걸쳐 나눕니다.

첫째, 정의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은 정의로운 분입니다. 구약에서 특히 강조된 정의와 공정입니다. 시편이 노래하는 하느님은 공정과 정의의 주님입니다. “주님께서는 정의를 실천하시고 억눌린 이들에게 공정을 베푸신다”(시편103,6), “그분은 정의와 공정을 사랑하시는 분, 주님의 자애가 땅에 가득하다”(시편33,5), “빛처럼 정의를 떠오르게 하시며, 대낮처럼 공정을 밝히신다”(시편37,6), “그가 당신의 백성을 정의로,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통치하게 하소서”(시편72,2). “행복하여라. 공정을 지키는 이들, 언제나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시편106,3), 끝없이 이어지는 강조되는 정의와 공정의 삶입니다.

정의와 공정, 오늘 우리 사회를 비춰주는 거울같은 말마디입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정의와 공정이 무너짐에서 시작됨을 봅니다. 힘없는 백성이 하느님의 통치를 대신하는 지도자들에게 바라는바 정의와 공정이었고, 이는 만민이 지켜야 하는 도리요 실행해야 할 과제였습니다.

현자들은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잠언21,3)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사야 예언자는 “그분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흘림이 웬말이고,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말이냐?”(이사5.7) 탄식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서 역시 일치합니다. 미래의 임금 메시아를 통해 공정과 정의가 실현되리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바로 오늘이 바로 그날이요 그분은 우리의 착한 목자 예수님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바로 주님의 우리의 정의라고 명명되는 분이 바로 착한 목자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이런 공정과 정의가 없는 사랑과 평화는 얼마나 공허하겠는지요! 애당초 불가능한 가짜 사랑, 가짜 평화입니다.

둘째, 평화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는 정의”에 이어 “주님은 우리의 평화”입니다. 정의와 평화는 한 세트입니다. 그래서 교구마다 ‘정의평화위원회’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분이 우리의 착한 목자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산상설교중 참행복에 관한 다음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랄 불릴 것이다.”(마태5,9)

전쟁과 평화입니다. 평화를 원하는데 역설적으로 계속되는 전쟁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영적전쟁을 수행하는 우리 믿는 이들, 특히 수도자들은 주님의 전사, 평화의 전사라 부릅니다. 후대 예수님의 제자들은 착한목자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의 참 평화이심을 깊이 깨달았고 우리는 바오로의 고백을 통해 배웁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셨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싱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평화이신 주님은 우리 모두 착한 목자 주님을 닮은 평화와 화해, 일치의 새인간으로, 참으로 자유로운 새인간으로 창조하셨고,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새롭게 깨닫는 진리입니다.

셋째, 연민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계시되는 착한 목자 예수님은 연민의 사랑을 지니신 분입니다. 불교용어로 대자대비하신 착한목자 예수님입니다. 힘겹게 복음 선포 활동을 하다 돌아와 보고를 받으신 주님은 지친 사도들에게 휴식을 명하십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너희는 외딴곳에서 가서 좀 쉬어라.”

참으로 착한 목자 주님의 배려하는 연민의 사랑이 빛납니다. 쉬지 못하는 활동 중독의 활동주의도 병입니다. 지친 심신의 힐링의 치유와 충전을 위해 때로 외딴곳에서 쉼터에서의 휴식은 필수요 외딴곳에서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 보다 더 좋은 힐링은 없습니다.

영육의 휴식의 쉼터가 되고, 주님의 생명수로 갈증을 해소하는 샘터가 되며, 주님의 진리 말씀을 배우는 배움터가 되는 미사전례보다 더 좋은 치유의 안식처는 없을 것입니다. 연민의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외딴곳에 도착했을 때 기다린 것은 쉼터가 아니라 일터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먼저 와서 예수님 일행을 기다리고 있으니 참 반갑지 않은 손님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는 빛났습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의 면모가 약연하니 쉼이 아니라 가엾은 군중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심각한 상태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착한목자 예수님이 계십니다. 가엾이 여기는, 불쌍히 여기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바로 연민의 사랑이요 착한목자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목자없는 군중을 만나서 우선하신 일이 무지를 깨우치는 말씀 공부였음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입니다. 미사의 말씀전례에 이은 성찬전례를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무지를 깨우치는 진리 말씀 공부가 얼마나 본질적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만악의, 만병의 근원이 탐욕, 교만, 질투, 분노,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알아가는 말씀공부를 통해 비로소 치유되는 무지의 병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보시시에 참 좋은 삶을 원하십니까? 착한 목자 예수님의 영성을 배워 닮으십시오. 평생공부입니다. 정의를 실천하는 삶, 평화를 실천하는 삶, 연민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착한 목자 주님을 닮는 지름길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시편5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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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화뇌동은 No! 화이부동은 Yes!>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 연중 제16주일은 진정한 양과 목자의 관계를 얘기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목자는 ‘우리의 정의’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둘째 독서에서 목자는 ‘우리의 평화’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종합하면 주님은 ‘우리의 정의와 평화’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정의이고 평화인지 성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성찰은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니, 나는 주님을 나의 정의와 평화의 목자로 모시는 착한 양인가? 세상의 정의 평화 투사를 나의 정의와 평화의 목자로 생각지는 않는가?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쫓지 않고 나의 정의와 평화를 주장하지는 않는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착한 양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길잃은 양들입니다.

사실 양들의 인도자들이어야 할 수도자 성직자들이라고 하는 저희가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따르지 않고 정치가들을 열렬히 추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길잃은 양들인 경우가 많아 참 안타깝습니다.

옛날 ‘어머니 부대’라는 극성 여성들이 있었고, 요즘은 ‘개 딸’이라는 극성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반대인 둘의 공통점은 복음이나 보편성 같은 것을 따르지 않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정치가를 무조건적으로 따른다는 것인데 어떤 때 저희 일부 수도자들과 일부 신자들이 이러합니다.

주님의 정의를 가지고 여도 야도 모두 비판하고 예언해야 하는데 비판과 예언은커녕 부화뇌동(附和雷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정의가 주님의 정의를 따르는지 잘 식별해야 하는데 우리가 주님 정의를 따르는지 세상 정의를 따르는지 어떻게 알 수 있냐 하면 우리의 정의가 주님의 평화를 이룩하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정의는 물론 불의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며칠 전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불의와는 갈라서야 하지만 화이부동(和而不同)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부화뇌동은 말고 화이부동은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인데 우리는 종종 부화뇌동하거나 독불장군처럼 자기 정의만 주장하여 화이부동할 줄 모르고 주님처럼 진정한 평화를 이룩할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참 목자이신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따르는 양들인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그러니까 성직자는 성직자의 자리에서 가정의 부모나 단체의 장들은 가정과 각 단체에서 이제, 주님을 대신하여 양들을 주님의 정의와 평화로 인도하는 목자가 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목자 의식입니다. 나도 목자라는 의식 말입니다. 나는 주님의 양이기도 하지만 양들의 목자이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양들에 대한 연민의 사랑입니다. 주님처럼 목자가 없는 양들에 대한 연민이 필요합니다.

양들을 그저 잡아먹고 팔아먹고 부려 먹으려고만 들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그들이 내 맘에 들기를 바라기보다 그들의 고통이 내 눈에 먼저 들어와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출 소녀가 있습니다. 나쁜 놈들은 그들을 꾀어 성 노리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래서 어떻게든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그럴 수 없는 집안 사정이라면 그들을 내 집이나 다른 쉼터로 인도하겠지요.

어떻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따르는 착한 양들입니까?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대신 실현하는 선한 목자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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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6,34)

<생명 농민들!>

오늘 복음(마르6,30-34)은 ‘군중을 향한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 곧 연민의 마음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입니다.

‘가엾은 마음’은 ‘연민의 마음’입니다. ‘연민'(憐憫)은 영어로는 ‘Compassion’인데, 이는 ‘함께 아파하다.’, ‘함께 고통을 나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파하는 이들, 고통 속에 있는 이들,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연민의 마음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계속되었습니다.

7월 셋째 주일인 오늘은 ‘농민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연민의 마음 안에서 ‘농민주일이 갖는 의미’를 함께 묵상해 봅니다.

농민주일은 특히,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농민들, 생명을 지키는 일에 헌신하고 있는 농민들, 땅을 살리고 건강한 먹거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농민들과 같은, ‘생명 지킴이들인 생명 농민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생명 농민들의 수고와 땀과 아픔을 기억하면서 구체적인 실천으로 함께 할 것을, 곧 ‘생태적 회개의 삶’과 ‘생명 농민들이 생산한 것을 애용할 것’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값싼 대량의 농산물을 쏟아내고 있는 ‘대규모 기업농’과 ‘기후 위기’ 등으로 인해 농민들이 힘들어하고 있고, 농업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생명 농민들의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라 했습니다. 농업이 근본이며, 따라서 농업이 무너지면 다른 것들도 무너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땅은 생명입니다. 땅을 살리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농약을 적게 사용합시다! 유기질 비료를 사용합시다!
생명 농산물을 애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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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4Nm9uQlO6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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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 6, 34)

주님 없이는
우리모두는 불쌍하고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를
진정 아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힘겨운 이 땅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
서로를 향한 연민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도 연민이고
마지막도 연민의
마음입니다.

가련한 우리들을
껴안고 함께
가시기 위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지쳐있는 우리를
눈물처럼 어루만져
주십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길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연민입니다.

연민이 있기에
기다림이 있고
회개가 있습니다.

연민과 분리될 수 없는
우리의 애처로운
시간입니다.

연민에서 복음으로
연민에서 믿음을 되찾는
은총 가득한
기쁜주일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참 목자이신
주님의 마음에
지쳐있는 이 마음을
기대어 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쉬게 해 주실
주님을 통해
우리의 삶이
되살아 납니다.

깊어지는 연민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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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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