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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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의 끝입니다. 16,15-20ㄴ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20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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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주님의 승천은 주님께서 떠나심과 동시에 우리에게 새롭게 찾아 오신 사건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하늘로 오르셨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과연 하늘 위 몇 미터까지 올라가셨을 때 승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100미터? 아니면 1,000미터인가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높이면 될까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상상력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수치로 측정하려고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어느 공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늘’이라는 장소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한계를 넘어 우리의 눈앞에서 다른 세상으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화와 부활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듯이 부활과 승천 또한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버리고 떠나심이 아니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는 주님 약속의 이행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분을 믿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든 시간에 대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시겠다는 약속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승천의 또 다른 의미는 우리에게 세상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보고 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땅의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 살고, 세상의 기준으로 나의 삶에만 집중하여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다하고 복음을 전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오늘은 홍보 주일입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 그 구원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산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것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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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보거나 다음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 하느님의 입장
– 예수님의 입장
– 제자들의 입장
2. 우리는 나의 삶에 집중하며 살고 있는지 하늘의 것을 보고 살고 있는지 묵상해보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우리는 어떤 거룩한 삶을 살아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증거에 대해 묵상해보고 내가 가지고 있는 증거에는 무엇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아직 찾지 못하였다면 어떤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할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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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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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수님의 승천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셨다는 것은 오늘 복음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지상에서의 사명을 다 마치시고,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셨다는 뜻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셨기에 이제는 인간의 모습을 띠고 계시지 않습니다. 제1독서처럼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찾지 않아야 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하느님으로서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세상은 점점 선과 악의 대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생명과 사랑의 문화를 창조해 나가려는 노력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끝없이 세상을 타락시켜 나가는 악의 세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인간 생명을 경시하거나 물질적인 것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대표적입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을 맞은 우리의 사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 스스로 예수님과 일치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생명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와 죽음의 문화에서 나오는 악취를 제대로 판별하게 해 주는 가치관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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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복음을 살펴보면 승천이 주님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 에페소서의 심오한 가르침을 깊이 묵상하면 승천은 아쉬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경축해야 할 기념비적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승천은 예수님께서 만물을 주재하시는 아버지의 오른쪽에 앉으시어 아버지와 함께 온 세상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심을 뜻합니다. 이와 같이 승천은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다시 영광스러운 당신 신성을 드러내시는 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기간은 분명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제자들의 믿음으로, 희망으로, 증언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승천은 우리에게 ‘아직 아니’라고 충고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세상에 머물러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신학적으로 지극히 미성숙한 상상을 해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비현실적인 가상일 뿐입니다.
사도들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예수님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 곧 하느님 나라가 드러날 때인지 묻자, 예수님께서는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 권한으로 정하셨다고 밝히신 뒤, 오히려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은 물론 땅끝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사명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주님만 바라보면서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 앞에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때까지는, 주님께서 하시던 일을 이어 가야 합니다.
사도들과 같이 우리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면서 주님 승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분명 하나의 끝을 의미합니다. 이제 눈으로 직접 뵈옵는 믿음과 신앙은 끝나고, 그 대신에 시간과 공간을 영원히 초월하시는 주님과 대화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주님의 승천은 하나의 시작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은 실망하고 의기소침하여 떠나간 것이 아니라, 크게 기뻐하며 희망을 안고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바야흐로 기쁨의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는 어떤 것도 부활 승천하신 주님과 헤어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슬픔도 번뇌도 절망도 죽음도 결코……!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
♣복음말씀의 향기♣ No3855
5월12일[주님 승천 대축일(홍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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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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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qrwmtrWWjLE
[마산교구 주용민 리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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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어!>
베드로•바오로 사도를 비롯한 초대 교회 지도자들의 행적과 복음 선포 여정을 소상히 소개하고 있는 은혜로운 책이 사도행전입니다. 저자로 추정되는 루카는 사도행전 첫 장에 예수님의 승천 장면을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오르시기 전, 이런저런 당부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습니다. 허탈하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사라진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그들 곁에 서서 외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제자들은 스승님과 함께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찬 나머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분께서 떠나신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의 심정을 잘 헤아리셨던 예수님이셨기에 떠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1.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 성령을 기다려라.
2.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도 천사들은 똑같은 말을 건넬 것입니다
“너희는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하늘 높이 향했던 우리의 시선을 일상의 낮은 곳을 향해 내려야겠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낮추어 꼬질꼬질해 보이고 남루해 보이는 인간 세상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흔적을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인간 세상 안으로, 죄투성이의 비참한 인간들 안으로 완전히 육화하신 하느님의 자취를 발견하기 위해 우리의 발밑을 내려다봐야겠습니다.
왜 하늘만 바라보고 있느냐는 질책은 이제 이 지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 머무시는 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가르침과 업적을 찬양하며 인간 세상 안에서 그분의 공동체를 건설하라는 말입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라는 말입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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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rDmgO1MQd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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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승천이 꼭 필요한 이유: 아버지가 되시려고!>
오늘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신 날입니다. ‘사랑하는데 왜 떠나야만 하느냐?’는 내용의 가사도 있듯이,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면 함께 계시면 좋았을 텐데 왜 우리를 떠나 하늘로 가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떠나시면서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사명을 교회에 주십니다. 세례는 하느님 자녀를 낳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를 낳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곧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마지막 심판 때 가진 것이 없어 지옥 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인의 누더기 옷 주머니에 있었던 구슬 3개씩이 그를 구원하였습니다. 세 개는 그가 세운 수도회고, 세 개는 복음삼덕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빈손으로 내 앞에 나와서는 안 된다.”(탈출 34,20)라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빈손으로 오면 그분께서 성령을 주신 것에 대한 부담감으로 그분 나라에 살 수 없게 됩니다. 돈 10,000원을 훔친 아이도 부모가 그것을 알았을 때 다가가기 어려운데, 부모의 살과 피를 훔쳐서 그분들을 죽게 만들고 아무런 열매도 없다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이를 위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열매는 혼자 맺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 자녀를 탄생 시켜야 합니다.
여기서 남편이 주는 돈이 ‘성령’과 같습니다. 성령은 남편의 살과 피입니다. 아내는 그것으로 아이를 낳고 키워야 합니다. 결혼하여도 아내가 자녀를 낳지 않고 남편이 주는 모든 돈을 자기 자신을 치장하는 것과 자기 친정 식구들 만을 위해 쓰려고 한다면 남편도 계속 돈을 주는 일이 꺼려지게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면 남편이 아이에게 돈을 직접 주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것은 마치 젖먹이에게 떡이나 고기를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에게 그 돈은 부담스러울 뿐더러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소화해서 주는 엄마의 존재가 꼭 필요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아빠의 지나친 영향력 때문에 아이가 비뚜로 성장하는 예가 많이 나옵니다. 아이에게 엄마를 제외하고 아빠가 영향력을 많이 미치면 아이는 두 가지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 부담감에 짓눌려버리거나, 아니면 자신이 받는 그런 대접을 당연하게 여기게 됩니다. 어떤 아이는 아빠를 마치 종처럼 다룹니다. 아빠가 다 해 주기 때문에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어떤 아이들은 아빠가 무서워 주눅 들어 삽니다. 그 이유는 돈을 벌어오는 아빠의 영향력을 아이들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아버지가 저를 매우 사랑하셨지만,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 말하는 게 더 편했습니다. 아버지가 세발자전거를 사 주셨는데 하루도 안 돼서 손잡이가 부러졌습니다. 아버지가 야단은 치지 않으셨지만, 그것을 말하기 위한 부담감은 지금도 기억납니다. 불량배에게 아버지가 사주셨던 시계를 빼앗겼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채변봉투를 재래식 화장실에 떨어뜨렸을 때도 아버지가 건져줄 수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먼저 어머니에게 말하는 편이 나았습니다. 어차피 어머니도 아버지에게 돈을 받아 사시는 것을 알기에 어머니에게 훈육 받는 것은 견딜 수 있으나 아빠는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인도 영화 ‘지상의 별처럼’(2007)은 중산층 부모에게 공부를 지독히도 못 하는 문제아가 태어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그 아이는 난독증을 앓고 있었지만, 부모는 이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난독증을 이겨낸 미술 선생님을 만나면서 아이가 치유됩니다.
이처럼 부모는 멀리 떨어져 있고 아이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에게 맡기고 지원만 해 주는 게 아이에게 더 낫습니다. 영화 ‘블랙’도 같은 내용이고, 헬렌 켈러에게 부모님보다 그녀와 같은 처지에서 탈출했던 ‘설리번’ 선생이 더 필요했던 것도 같습니다. 이것이 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시어 교회에 성령만을 주시고 교회에 우리를 맡기셨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보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것을 보고 따라 하기 더 쉽습니다.
교회의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시며 그분의 신부가 된 우리가 어떤 열매를 맺는지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승천의 의미는 이제 그분이 우리 아버지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머니인 교회에 순종 하며 양육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자녀를 낳으려면 교회 앞에서는 어머니이지만, 동시에 아버지도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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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번 성지순례 갈 때입니다. 가기 전에 몇 가지 준비를 하였습니다. 사무실에서 사용할 체크에 미리 사인을 해 놓았습니다. 사무장님이 30장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사제관에는 보름정도 자리를 비우니 빨래를 미리 해 놓았습니다. 쓰레기도 모두 치웠습니다. 사제관 청소를 하는 날은 부주임 신부님께 문을 열어 놓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냉장고에 있는 음식물도 대충 정리했습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도 출장을 갈 때면 비슷하게 준비했습니다. 제가 없더라도 사무실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체크에 사인하고, 서류 결재하고, 원고 교정보고, 냉장고도 정리했습니다. 제가 성지순례도, 출장도 잘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없어도 직원들이 성당과 사무실을 잘 지켜 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꼭 알아야 할 일이 있을 때면 메일이나 문자로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없을 때, 오히려 더욱 열심히 자리를 지켜준 직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보좌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휴가를 가시면 가능하면 외출을 하지 않았습니다. 약속도 많이 잡지 않았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저를 믿고 휴가를 가셨기 때문입니다. 평일미사 2번과 주일미사 4번도 기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오시면 기뻤습니다. 업무가 줄어서가 아니라, 본당 신부님의 자리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많은 준비를 하셨습니다. 주님을 그리워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믿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을 주셨습니다. 두려움에, 절망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담대하게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난 못 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있는 창 자국을 만져보고야 믿겠다는 토마 사도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되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풀이 해 주셨을 때 가슴이 떨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협조자,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준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믿고 ‘승천’하셨습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주님의 승천을 보면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천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마치 제가 없을 때, 직원들이 더욱 열심히 자리를 지키고, 일을 했던 것처럼, 제가 본당 신부님이 안 계실 때, 자리를 잘 지켰던 것처럼, 제자들은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그렇습니다. 직원들에게 제가 성지순례를 어디로 갔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출장 가서 어떤 일을 하는지도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충실하게 전하기 위해서 교회는 오늘을 ‘홍보주일’로 정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주님을 충실하게 전할 수 있을까요? 꽃이 아름답게 피면 그 향기가 바람에 날아갑니다. 많은 벌과 나비는 꽃이 찾아가지 않았어도 그 향기를 따라서 꽃에게 오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향기가 된다면, 우리의 발과 손이 주님을 전하는 발과 손이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우리를 보고, 교회를 찾아 올 것입니다. 바다로 세상의 모든 물이 모이는 것은 바다가 높은 곳에 있지 않고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겸손함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면, 고독과 외로움 때문에 방황하는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선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음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이란 우주선을 타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현재를 옹골차게 딛고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승천은 좌절과 두려움에서 희망과 신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자리에서 변화된 삶을 시작하는 것이 바로 ‘승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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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6,15-20: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예수님은 마침내 제자들의 곁을 떠나 당신이 취하신 인성이 함께 하느님의 영광으로 들어가시어 성부 오른편에 앉으신다. 이제 우리는 천국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상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도행전은 성령 강림을 예고하고 있다. 영광을 받으신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신다. 교회는 이 성령 안에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성령을 보내주시는 분은 바로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이시다. 이 승천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욱 직접적으로 친밀하게 친교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바로 성령 안에서 가능하다.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은 왕권과 권능을 가지신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계획안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안에서 실현될 것이다. 즉 구원의 충만성은 이제 교회의 선교사명을 통해 완전하게 표현되고 교회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실현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선교사명”을 주신다. 이로써 교회는 선교활동을 통해 구원의 중재 역할을 하게 된다. 이제 교회는 삶으로 증거가 돼야 한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절)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무지렁이였고 말재주도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만민에게 가르치도록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파견하셨다는 것을 하느님의 권능으로 온 인류에게 증언하였다. 사도들이 이렇게 파견된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으며 세상의 모든 이들이 자기의 창조주를 알아 뵙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복음 선포는 모든 나라와 도시에 있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 그분의 섭리는 온 우주를 통틀어 펼쳐지고 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19절) 부활절에는 주님의 부활이 우리 기쁨의 이유였지만, 이제는 그분의 영광으로 들어가심 때문에 기뻐한다. 보잘것없는 우리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고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부활하신 후 당신 제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승천하셨다.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가 완성되기까지 아버지 오른편에 계시기 위해 육체적 현존을 끝내셨다. 여기서 오른쪽은 장소적 개념이 아니다. 오른쪽이라는 것은 복됨의 의미이다.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이 복됨 속에는 오른쪽만 존재한다. 이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 참된 “임마누엘”이 되신다.
“제자들은 사방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셨으며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전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다”(20절). 예수님 부활의 참된 목적은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택하신 제자들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과 통치권이 드러난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복음 선포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며,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승리자이심을 실제로 드러내야 한다(2코린 2,14). 그리스도께서는 천상에 오르시어 아버지 오른편에 영광을 받으심으로써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천상에 오를 수 있는, 즉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내는 축제는 기쁨과 기다림의 축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바로 우리들의 고양(高揚)을 당신을 통해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닮음으로써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요한 16,7)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떠났다. 그들은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들도 그분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결국 기적을 행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을 전한다고 한다면,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한다. 주님 승천 대축일을 맞이하여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복음을 전파하는데 따를 수 있는 온갖 악을 이겨낼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주님의 말씀대로 독을 마셔도 죽지 않을 것이며, 마귀를 쫓아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주님과 함께하는 복음 선포에는 어떠한 두려움도 이기고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용감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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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오늘 복음과 독서는 각각 마르코 복음서의 마무리와 사도행전의 시작에 해당합니다. 책 전체를 요약하는 결정적 부분들을 배치하여, 예수님 공생활의 마지막(복음)이 곧 교회의 시작(독서)임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마지막 당부를 계속 이어 가는 것이 교회의 일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실 지상 생활 동안 갈릴래아나 예루살렘에서만 제한적으로 활동하시던 예수님께서 이제 승천하심으로써 그 어떤 시공간에도 매이지 않고 활동하십니다. 이는 복음에서도 분명히 선언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부분입니다. 이 내용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교회가 행하는 모든 일이, 예수님 당신께서 행하시던 일과 결코 다르지 않음을 “표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독서를 포함한 사도행전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를 전하여 주는 동시에, 그 교회가 걸은 여정에도 예수님께서 어떻게 제자들과 함께하시고 현존하셨는지를 증언합니다.
부재는 언제나 현존과 연결되고, 떠남은 새로운 시작과 연결됩니다. 누군가의 부재에 대한 깨달음은 역설적으로 현존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결코 떠남이나 멀어짐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떠한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 없이, 인간과 더 깊은 유대와 공존의 관계를 맺으려는 도약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순간순간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도 교회와 함께하시며 당신의 현존과 구원 사업을 지속적으로 이어 가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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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