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
복음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알려 주는 내용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도 등장합니다(마태 22,34-40; 루카 10,25-28 참조). 다만, 오늘 복음인 마르코 복음만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라는 율법 학자의 대답을 들려줍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께 형식적으로 봉헌하는 번제물과 희생 제물에 대하여 여러 차례 경고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제물을 봉헌하기만 하면 하느님께 바쳐야 할 도리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희생 제물과 번제물을 바라지 않으시고, 신의와 하느님을 옳게 아는 것을 더 바라셨습니다(호세 6,6 참조).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복음을 읽으면, 제물을 봉헌하고 전례에 참여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증해 주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전례에 참여하는 것이 이웃에 대한 미움을 정당화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그 어떤 계명보다 강조한 이유는,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감사드리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웃 사랑을 강조한 것은, 모든 이가 하느님 백성 공동체의 구성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이웃과 함께 만들어 가는 공동체의 의미를 기억하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형식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미사에 참석한다고, 주일의 의무를 잘 지킨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무엇을 감사드릴지 생각하며, 만약 미워하는 이웃이 있다면, 쉽지 않겠지만 ‘함께’라는 단어와 그의 얼굴을 같이 떠올려 봅시다. 하느님의 나라가 더 가까이 와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
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신앙생활을 하며 형식에 사로잡혀 일을 그릇치거나 사람들(봉사자)과 불편한 관계를 만든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 내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모습인지 묵상해보고 다른 사람들을 신앙 안에서 어떻게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
.
.
.
.
.
.
.
.
.
———————————–
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
오늘의 묵상
우리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마치 우리가 마시는 공기처럼, 날마다 받는 햇살처럼 하느님께서는 나보다 더욱 내 곁에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지만, 때로는 너무 가까이 계셔서 그분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 때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첫째 계명, 곧 “이스라엘아, 들어라!”로 시작하는 신명기의 위대한 계명을 상기시키십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내 존재의 시작과 마침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때로 나도 내 마음을 모를 때가 있지만, 마음이 흔들릴 때 언제든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야 하고, 목숨 걸고 잃지 않으려는 내 재산과 명예, 건강만큼이나 하느님께 기도하는 시간과 봉헌의 몫을 바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올바른 믿음을 간직하려면 정신을 헛된 것에 쓰지 않고 성경과 교리 공부도 해야 하고, 삶에 지쳐서 쓰러지더라도 힘을 내서 일어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의 첫째 계명은 이웃 사랑을 통하여 완성됩니다. 사랑은 마음이나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성장을 가로막는 것은 내가 교리를 잘 몰라서도 아니고, 성경 지식이 짧아서도 아닙니다. 내가 만나는 이웃들, 특히 교회 생활에서 만나는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은 물론, 가족과 직장 동료, 일상에서 부딪히는 이웃들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무너질 때 신앙도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은, 피하고 싶은 내 이웃을 용서하고 이해하며, 기다려 주고 돌보아 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의 이웃이 되어 주고 있습니까?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4030
11월3일[연중 제31주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GjHPZoZhA_I
[서울대교구 김요한 세례자 요한(혜화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을 말로만,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십시오!>
선입견이라는 것이 무섭습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수시로 예수님과 충돌하는 사람이 율법학자요 바리사이입니다. 그러다 보니 율법학자나 바리사이 하면 다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서도 참다운 신앙인, 예수님께 우호적인 사람들도 꽤 있었습니다. 참 진리를 찾기 위해 한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코데모는 참으로 열려있는 율법학자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스승인 가말리엘은 사도들을 보호해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다가온 율법학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보여준 말투나 태도는 다른 율법학자들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복음서에 통상적으로 등장하는 다른 율법학자들은 떠보기 위해, 논쟁하기 위해, 사슬에 얽어매기 위해 악의적인 마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율법학자는 여러모로 달랐습니다. 다른 스승과는 확연히 다른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고 싶어 좋은 의도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가 던진 질문은 참으로 기본적인 질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정말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당시 유다교에는 총613개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계명이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가 하는 것은 당시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어떤 계명은 굉장히 무겁고 부담스런 계명이 있었는가 하면 어떤 계명은 가볍고 지킬 만 했습니다. 적극적인 계명이248개였고 소극적인 계명이365개였습니다.
첫째 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착한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신명기6장 4절을 인용하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그냥 말로만, 입술로만, 기도문 만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함에 있어 적당히,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해, 모든 에너지를 다 투자해서 성심성의껏 사랑하라는 당부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조금은 불성실하고 미온적인 태도, 소극적이고 미지근한 신앙에 일침을 가하는 따끔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은 세상에 반은 하느님께 걸쳐놓은 우리 삶의 모습을 반성케 합니다.
친절하게도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가 묻지도 않았는데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시면서 두 번째로 중요한 계명을 가르쳐주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사실 당시 유다인들에게 있어 이웃은 절친한 친구들, 동료들, 좋은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은 보다 보편적이고 확장된 의미의 이웃입니다.
착한 사람뿐만 아니라 악한 사람들,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의롭고 깨끗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죄인들과 부정한 사람들, 아군뿐만 아니라 적군, 원수들조차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이 얼마나 보편적이어야 하는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듯 관대하고 폭넓은 이웃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을 뒷받침하는 토대입니다.
그간 할례나 안식일 규정, 정결례와 관련된 율법에 목숨을 걸어왔던 율법학자들에게는 뼈아픈 일이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이자 최우선 순위는 사랑이라는 진리를 명명백백하게 만천하에 선포하십니다.
사랑의 계명과 관련된 예수님의 가르침은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든다든지, 율법의 근본을 흔든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계명을 원래의 자리로 환원시킨 너무나도 합당하고 당연한 조치였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2uEE8j-ov4A
++++++++++++++++++
<이웃보다 하느님을 먼저 사랑해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에게 율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알려주십니다. 계명은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그러면 계명은 왜 주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자녀들에게 이런저런 것을 가르치는 이유와도 같습니다. 그래야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알아야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할 수 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2023년 38년 동안 중증 장애인인 딸을 돌보다가 수면제를 먹인 뒤에 살해한 60대 어머니에게 법원이 실형 대신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선처했습니다. 검찰은 징역 12년을 구형했는데, 어머니는 최후 진술에서 “버틸 힘이 없었고 끝내자는 생각이었다.”라면서, “딸과 같이 갔어야 했는데 혼자 살아남아서 정말 미안하다.”라고 오열했습니다.
분명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사랑이 저절로 솟아나면 부모에게 키워질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사랑은 실체가 없고 개념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더라도 그들도 부모에게 사랑받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성장할 수 없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받아야만 줄 수 있는 실체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실 때 중요한 부분이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입니다.
자신을 사랑할 수 없으면 이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만큼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그 부족한 부분을 이웃에게 채우려 해서 나중에 본인은 사랑했다고 말하겠지만, 자녀들에게나 이웃에게 원망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최고야 원장의 『벼랑 끝, 상담』에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20대 중반에 무역회사에 다니며 이미 팀장의 자리까지 오른 능력 있는 여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이 자매는 어렸을 때 항상 부모의 싸움만 보며 자랐습니다. 그중에서도 피해의식이 컸던 엄마가 큰 문제였습니다. 엄마는 모든 분풀이를 딸에게 해대고 있었습니다. 딸이 수학 95점을 받아 반에서 1등을 하고 기뻐서 엄마에게 내밀었을 때 엄마는 그 시험지를 찢어버리며 “내가 이런 점수 보자고 이 고생하며 키웠냐?”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딸은 엄마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죽도록 공부만 해야 했습니다. 엄마는 직장에 취직해서 독립했을 때도 딸을 찾아와 괴롭혔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런 스트레스가 폭발할 때면 자해하며 풀었습니다.
그녀는 얼굴도 예쁘고 능력도 있어서 남자친구는 쉽게 사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마가 하던 똑같은 방식으로 남자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했고 그렇게 많은 남자가 떠나갔습니다. 남자가 떠나려는 기미가 보이면 자해하며 피 흘리는 모습의 사진을 보냈습니다. 유일하게 지금 이 남자만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었기에 여자는 이 남자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최고야 원장은 그녀에게 남자를 위한 공간을 제공해 달라고 했습니다. 집 안에 텐트를 하나 마련해서 그 안에 남자친구가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자유를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잘 됐을까요? 나중에 다 부숴버렸습니다.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면 남자친구에게 사랑받아야 합니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이것에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과이고 지금으로 말하면 ‘십일조’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자녀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행복한 아내가 되어야 가정이 천국이 됩니다.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아내의 겨울’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막노동으로 하루살이 하던 정호는 경기 침체로 넉 달째 일을 못 나갑니다. 그 남편을 위해 고깃집에서 일하다가 사장이 줬다며 아내가 불고기를 해 주었습니다. 아이들보다 먼저 남편에게 주었고 그 안에 씹다 버린 껌이 노란 종이에 싸여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와 자녀 몰래 그 껌을 집어삼켰습니다.
남편은 숫기 없는 아내가 몰래 남들이 먹다 남긴 고기를 모으느라 고생했을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배부르다며 밖으로 나온 남편은 아내의 구두를 닦아주었습니다. 그렇게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받는 존재로서 자녀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사랑이기에 순수한 사랑이고 그 사랑은 자녀들의 자존감을 높여줄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이고 그 나라의 행복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레바논에 ‘UN 평화유지군’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평화유지군은 레바논과 이스라엘이 서로 싸우지 않도록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군대라고 합니다. 절대적인 강자인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함부로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도 했다고 합니다. 최근에 이스라엘은 평화유지군을 향해서 공격했고, 탱크로 진격했다고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평화유지군이 부상했다고 합니다. 유엔은 이스라엘에 강력하게 경고했고, 평화유지군에게 속했던 나라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레바논에서 철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일랜드의 군인들은 평화유지군에 남아서 끝까지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해서 책임을 다하겠다고 했습니다. 위험할지라도, 전투 중에 목숨을 잃을지라도 레바논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유엔에 보고하겠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아일랜드 군인들이 레바논에 남도록 했을까요? 그것은 아일랜드도 영국으로부터 침략받았던 약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가정 방문 중에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청년은 3년 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청년은 우크라이나로 가서 봉사하겠다고 했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말렸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청년은 우크라이나로 떠났고, 안타깝게도 청년은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한 후에 사망했습니다. 무엇이 청년을 우크라이나로 떠나게 했을까요? 미국에 있으면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죽음의 덫이 놓여있는 우크라이나로 떠나게 했을까요? 그것은 더 높이 날아오르려는 갈매기의 꿈과 같은 겁니다. 그것은 벗을 위해서 목숨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야 했던 부모님도 이제는 슬픔을 딛고, 아들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은 목숨을 바쳐서 이웃을 돕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는 신앙이기도 합니다.
사랑에는 4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랑을 받는 단계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랑을 받는 것에 익숙합니다. 들숨이 있어야 날숨이 있습니다. 한동안 많이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사람이 되셨습니다. 흙 속에 있는 씨앗은 물과 햇빛을 받아야 싹이 나옵니다. 사랑받는 아이는 면역력도 강해지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생깁니다. 두 번째는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기가 남을 생각하며 감동할 수 있고, 자신의 애정을 특별한 존재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느낌은 사랑받는 것보다 한결 흐뭇합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그것에 엄청난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도, 역경도, 굶주림도, 죽음까지도 이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자신의 애정을 남에게 투사하고 나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쏟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단계의 사랑은 받는 사랑과 주는 사랑과 비교할 때 한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사랑을 주기 위해서든, 받기 위해서든, 남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주거나 받는 존재에게 실망하거나 배신당할 염려도 없습니다. 네 번째 보편적인 사랑의 단계입니다. 이는 무제한의 사랑입니다. 애정을 받고, 남에게 투사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나면, 사랑을 자기 주위의 사방팔방으로 전파하기 시작하기도 하고 사방팔방에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이 보편적인 사랑을 부르는 이름은 생명, 자연, 대지, 우주, 기, 하느님처럼 문화와 민족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합니다. 지금 나의 사랑은 어떤 단계의 사랑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부족해도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식어 하느님 아버지를 잠시 외면한다고 해도 끝내 우리를 버리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면 기다리지 못하곤 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식어 버리면 그들 역시 사랑이 식어 버리곤 합니다. 2024년도 이제 2달 남았습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미워한 이웃을, 나를 미워한 이웃을 용서하고 넓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느님 아버지께 용기와 힘을 청합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 십자가로 하느님과 우리를 화해시키셨고, 우리의 이웃과 이웃을 화해시키셨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28-34: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인간에 대한 사랑의 동기와 이유로 제시하실 만큼 밀접히 결합하신다. 인간이 위대한 존재로서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존재가 필요하다. 하느님이 죽는 곳에서는 인간도 죽게 된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신명기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그 무엇보다도 그들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의 백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찬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데 있다. 예수께서는 어떤 계명이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인지 묻는 율법 학자에게 신명기의 말씀을 상기시키시면서, 그 계명에 다른 계명, 즉,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가까이 놓으신다. 이 계명도 구약성서에 나타나지만 동족만을 가리킨다.(레위 19,18) 마태오는 첫째 계명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한다.(22,39) 루카는 두 계명을 종속관계로 보지 않고(10,27),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모두 이웃으로 간주하고 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10,30-37) 마르코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첫 자리에 놓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두 번째 자리에 놓은 것을 보면 유일신론적 배경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항상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에 첫 자리에 계셔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위대성이나 품위도 올바로 갖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두 사랑이 서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두 사랑은 서로 교차하며 서로를 요청한다. 즉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내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 종교이다. 오로지 이웃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통해 사랑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1절) 하시고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40)라고 하신다. 이 두 계명은 다시 율법 학자의 말로써 강조되고 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32-33절) 즉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을 다 같이 사랑할 때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잘못하기 쉬운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전례 행위가 하느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국한해 그 의미를 빈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형제들에게 펼 때, 하느님은 사회적인 분이시며 위대한 창조를 하시는 분임을 증거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저절로 형제들에 대한 봉사가 되고, 또한 구체적인 필요에서 구현되기에 참된 예배가 된다. 우리가 주일을 지내는 의미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주일미사는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바쳤던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제대에 봉헌하는 것이다. 봉헌예물은 바로 우리의 삶인 것이다. 이것을 항상 잊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알아들은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라고 칭찬을 듣는다. 율법 학자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충만히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의 나라는 현재 이 자리에서 가까이 할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실체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가까이 와 있다. 예수께서는 누가 당신 가까이 있는지를 아시고 또 명백하게 규정하신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대한 신학적 사고가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제직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자발적으로 봉헌하신 당신의 희생으로 무엇이 참된 예배인지를 확실히 가르쳐 주셨다.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내용이다.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본성이며,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요청이다. 이 요청은 이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의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작은 일에서부터 이러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참된 예배를 우리도 이제 이 미사를 통하여 하느님께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미사가 더 기쁘고 하느님 앞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몸만 왔다 갔다 하는 타성적인 신앙생활 그래서 아무 맛이 없는 신앙생활, 전례 생활이 아니라, 기쁘고, 감사하며 더 앞으로 나아가는 적극적이고 활기찬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는 사랑의 이중 계명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내가 중심이기를 멈추고, 상대가 나의 중심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향한 이기주의적 움직임을 포기하고, 다른 이를 향하여 내가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민범식, 『하느님 길만 걸으세요』, 156-165면 참조) 그래서 만일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가 나에게 있다면 그 사랑은 아직 성숙한 사랑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내가 기쁘기 때문에, 내가 충만해지기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면 아직도 내가 중심에 있고 그 사랑은 나를 향한 움직임입니다. 반면에 사랑하는 상대의 행복을 바라고, 상대의 완성을 위하여 기꺼이 나를 희생할 마음이 있다면, 진정으로 성숙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자신의 중심이 되고 자신이 상대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생애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보다 하느님께서 먼저이시고, 이웃이 먼저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당신을 바치신 것은 참으로 하느님과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포기하신 ‘너-중심적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이것은 분명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상대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진정한 사랑 안에서는 상대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됩니다. 상대가 불행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고, 상대가 행복하면 내가 불행해진다는 사고로는 이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상대가 중심이 되는 진정한 사랑 안에서 아주 쉽게 이해되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이웃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 여기는 사랑이 우리 안에 깊게 자리하기를 주님께 청합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랑은, 이미 받은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2-33)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
1) 사랑은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전에’ 했었다는 말이나, ‘나중에’ 하겠다는 말은 아무 의미 없는 말입니다. ‘전에는’ 사랑했는데 어떤 이유 때문에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너 하는 것을 보고, 사랑하겠다.” 라고 말한다면, 지금은 사랑하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일 뿐입니다. 어떤 조건을 걸고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참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사랑 말고는 다른 이유나 목적이나 조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바로 이곳에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특정한 장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을 사랑하는 생활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은 성당에 있는 동안에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에는 “지금은 먹고 살기가 너무 바빠서 여유가 없다. 나중에 시간이 좀 나면 그때 신앙생활을 하겠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말은, 주님에 대한 사랑도 없고 자신의 영혼에 대한 사랑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일 뿐입니다. 지금 없는 사랑이 나중에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또 사는 것이 너무 편하고 좋아서 주님을 아쉬워하지 않고, 아예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랬다가 사는 것이 힘들어지면 그때서야 잘못했다고 주님께 빌면서 도와달라고 애원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신앙도 아니고, 미신과 다르지 않은 기복신앙일 뿐입니다.
2) 사랑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하는 일입니다. 남에게 시켜도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대사제 카야파가 이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49-50)
이 말은, “민족을 위해서 예수를 죽입시다.” 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그가 참으로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내 목숨을 바치겠소.”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목숨을 바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고, 남을 희생시킬 생각만 했습니다. <그는 민족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판관 입타’의 경우도 같은데, 그가 정말로 하느님을 믿고 사랑했다면,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남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했습니다(판관 11,31).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도 아니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그 서약 자체가 무효입니다. 사랑은, 목숨도 포함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아낌없이 내주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ㄱ)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하느님과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은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뒤로 물러나 계시면서 당신의 아드님만 희생시키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사랑 실천이 ‘계명’으로, 또 ‘해야 한다.’로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하기 싫어도 하여라.” 라는 강제 명령은 아닙니다. 만일에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면,ㅠ그것은 계명 실천도 아니고 사랑 실천도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큰 기쁨’과 ‘행복’과 ‘평화’를 우리에게 주기 때문에,ㅠ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계명이어서 의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쁘고 행복하니까, 또 내가 원하는 일이니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너희도 나를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고,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그러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5,9-17)
형제를(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로 실현되고, 이웃 사랑은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한다는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1요한 4,20).
=====================
[대구대교구 박상혁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하여야 한다(마르코 12,30)>
로마 유학 시절, 학교에서 사순 특강으로 생태 영성 세미나를 수강하였습니다. 당시 교수님께서 학생들에게 방 안에 살아있는 식물을 키우는 과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신 가르침이, 대상에게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식물을 사랑한다고 해서, 물을 많이 주거나, 혹은 물을 조금 주거나, 햇빛을 많이 쫴 주거나, 혹은 너무 적게 쫴 주거나, 내 방식대로 사랑하면 식물에 따라 그것이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할 때, 사랑하는 법은 그 대상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대상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을 재인용하신 예수님의 대답은 그야말로 정답(正答)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첫째요 가장 큰 계명으로 지켜야 할 사랑입니다.(마르 12,30-31)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안다’는 것은 하느님이나 혹은 상대방과의 ‘인격적인 진실한 만남(체험)’에서 비롯됩니다. 특별히 하느님에 대한 앎은 바로 당신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하신 성경을 읽고 깊이 묵상하는 데서 옵니다. 또한 그 믿음은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천적 사랑, 곧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사랑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방식대로의 사랑이 아니라, 그 대상에게서 사랑하는 법을 제대로 알고 배워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과 그리고 이웃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나의 시간과 공간을 내어줄 때, 이웃에게 나의 시간과 공간을 내어줄 때,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계명(엔톨레 ἐντολή)
계명의 첫째와 둘째를 아우르는 말마디는 ‘사랑 실천’입니다. 통상 ‘계명’으로 번역하는 ‘엔톨레’는 왕이나 권력자의 ‘명령’을 가리키는 말마디였습니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 계명은 누군가의 요구나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을 촉구하는 초대의 말마디 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시지 않고 우리 스스로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원의’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며 살아갈까요.
=====================
[광주대교구 이창훈 베드로 신부님]
<“신앙 안에서 안녕하기를…”>
여러분 본당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 그리고 교리교사들의 신앙은 안녕(安寧, 아무 탈 없이 편안함, peace, well)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그들의 신앙의 척도를 숫자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숫자가 늘어나면 잘 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숫자가 줄어들면 청소년 사목이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이 말도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청소년 사목국으로 발령을 받고 처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은 그 숫자를 먼저 언급하십니다. 그래서 청소년 사목이 잘된다는 것을 숫자로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서울대교구 햇살 사목센터에 계시는 조재연 신부님은 “청소년 사목은 관계 사목(Relational Ministry)으로부터 시작되며, 관계 사목이 곧 청소년 사목의 핵심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렇다면 청소년 사목을 잘하는 것, 다시 말해 관계 사목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는 과정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라는 글을 가톨릭 신문에 남기셨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며 숫자도 중요하지만, 관계 형성이 우선되어야 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두 가지 관계에 대한 물음을 던집니다. 하나는 하느님과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들과의 관계입니다. 분명 하느님과의 관계가 우선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이웃들과의 관계가 더욱 중요하게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 중에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무겁게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처음에 하는 말은 “안녕하세요”와 “사랑해”입니다. 서로의 안녕과 사랑은 참 좋은 말이지만 억지로 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사랑은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나와 실천으로 결심을 맺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수용이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약 이해와 수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많은 갈등을 겪게 됩니다. 서로의 다름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랑을 놓고 고민하게 됩니다.
이웃 사랑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우리들이 신앙 안에서 안녕하기 위해서는 이웃에 대한 이해와 수용을 통해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방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변화를 통해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은 참 어렵고 힘들지만, 함께 노력한다면 아무 탈 없이 편안한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안녕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멘.
=====================
[서울대교구 박규흠 베네딕토 신부님]
<하느님께 나아가는 두 날개>
우리는 꼭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꼭 1등이 누구인지 정해야만 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엄마와 아빠 중에서도 누가 더 좋은지 선택을 강요받으며 커온 우리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된 일인가 봅니다.
예수님 시대의 한 율법 학자도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마르 12,28) 하고 묻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도 하고 싶었던 질문을, 고맙게도, 이 율법 학자가 대신해 준 것이기도 합니다. 이 율법학자는 분명히 한 개의 정답을 바라고 질문했을 것입니다. 정말 첫째가는 1등 계명이 무엇인지 깔끔한 한 개의 정답을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답을 주십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는 두 개의 계명을 답으로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데 두 날개가 되어주는 가르침이 있다면, 하나는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요,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라 하겠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날개가 있어야만 하느님께 힘차게 날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어느 하나만 고집하고 어느 하나에만 치우쳐서는 결코 날아오를 수 없습니다.
전설의 새 비익조는 암수 각각 눈과 날개가 하나밖에 없는 새입니다. 그래서 둘이 몸을 꼭 붙여 껴안고, 하나 된 날갯짓을 힘차게 할 때만이 비로소 하늘을 향해 비상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어느 한쪽의 날개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이라는 날개와 이웃 사랑이라는 이 두날개가 마치도 비익조처럼 하나의 날갯짓을 할 때, 하느님을 향한 힘찬 비상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이웃 사랑이 없는 하느님 사랑은 공허할 뿐이고, 하느님 사랑이 없는 이웃 사랑은 요란할 뿐입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하느님을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에는, 쉽게 혹은 어느 정도 무책임하게 “네.”라는 대답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고민과 망설임을 동반한 깊은 반성과 사색이 요구될 것입니다. 아마도 “아니오.”라는 대답이 양심적이고 솔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날개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는 하나 됨의 조화를 이룰 때만이 하느님을 향한 힘찬 날갯짓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사 마치고 복사들과 함께 제의방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대복사를 선 아이의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오늘 너무 긴장해서 몇 군데 틀렸다는 것입니다. 전례 때 종종 틀렸다면서 찾아오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례는 ‘맞다, 틀리다’의 관점이 아닙니다. 바른 자세와 바른 순서에 따라 바른 전례 예식이 거행되는 것은 우리의 일치와 정성스러움이 드러나기에 좋습니다. 하지만 이것 자체가 전례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헌장 10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례에서, 특히 성찬례에서, 마치 샘에서처럼 은총이 우리에게 흘러들고, 또한 교회의 다른 모든 활동이 그 목적으로 추구하는 인간 성화와 하느님 찬양이 가장 커다란 효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엇이 맞는지 틀리는지의 관점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서 우리 존재가 진정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화되고 있는지 그리고 참되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기준만 기억한다면 틀린 것이 보이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만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판단도 맞는지 틀리는지였습니다. 이 판단이 예수님을 향해서도 이루어지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틀렸다’라고 말했고,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의 판단은 오로지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분명히 틀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오히려 그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종교적인 민족이었고 그들은 모세의 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계명을 인간 생활을 외부적으로 종교화하여 지켜야 할 계명 248개의 조항, 금기의 조항 361개 조항, 모두 합해서 613개의 조항으로 세분화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많은 계명을 다 지키는 것도 힘들었고, 이 조항들을 지키느라 다른 것들을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613개의 조항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단죄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생활하는 데 중요하고 본질적인 계명이 무엇이냐는 종교적인 질문을 예수님께 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야기하십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 계명의 핵심이고,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맞다, 틀렸다’라는 말로 상대에게 때로는 아픔과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 전에 사랑의 기준으로 따져보았으면 합니다. 사랑만이 가장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마르코 12,28ㄱㄷ-34 (가장 큰 계명)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루카 12,34)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한걸음 더 가까이
머리로 하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한걸음 더 가까이
마음으로 하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한걸음 더 가까이
손발로 하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한걸음 더 가까이
온 삶으로 하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한걸음 더 가까이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한걸음 더 가까이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이 살아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17). 오늘 이 시간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가운데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사랑이 살아있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많은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사랑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랑은 어떻게 생겼을까? 사랑은 남을 돕는 손을 가졌으며, 가난한 자와 곤궁한 자에게 재빨리 달려가는 발을 가졌으며, 비극에 처한 자를 알아보는 눈을 가졌으며, 사람들의 한숨과 슬픔을 경청하는 귀를 가졌습니다.”“사랑에는 수고로움이 없습니다. 만일 수고를 느낀다면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탓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새기고 손발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사랑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마라스머스’ 라는 병을 아십니까? 이 병은 외롭게 자란 아이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병입니다. 증상은 신체 발육이 부진하고 온몸에 힘이 빠져 시름시름 앓는 증세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병은 영양결핍이나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결핍’이 원인입니다. 사랑을 한창 공급받아야 할 아이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랑을 표현하지 못할 때 이 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이병에 대한 의사의 처방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무엇일까요? 예, “매일 사랑을 고백하세요!”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좋은 약이랍니다. 사실 매일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부부간, 부자간에 고부간에는 물론 이웃간에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서로의 관계가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질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당신이 저를 사랑하듯“주님, 제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부간에도 “여보 사랑해!”라는 표현을 자주 하시길 바랍니다. 남자들은 대개 ‘그냥 눈빛만 봐도 알지, 그것을 꼭 표현 해야 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사랑한다”는 말을 꼭, 그리고 자주 듣고 싶어합니다. 사실 남자들도 “사랑한다”는 말에 무덤덤해 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기뻐합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자녀와 듣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들로부터 “사랑한다”는 표현을 듣게 될 때 모든 피곤이 풀립니다.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도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줄 때 삶의 활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합니다!”라는 표현을 자주 하시길 권합니다.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 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사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써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행위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테레사 효과를 아시지요?
미국 하버드 의대생들을 봉사 활동에 참여시킨 후 체내 면역 기능을 측정해 보았더니 면역 기능이 크게 증강되었답니다. 또한 마더 테레사의 전기를 읽게 한 다음 인체 변화를 조사했더니 그것만으로도 생명 능력이 크게 향상되고 인체에 도움이 되는 항체가 생기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연구진은 이렇게 봉사활동을 하거나 봉사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면역 기능이 높아지는 것을 두고 마더 테레사 효과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랑을 하면 할수록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고 사랑을 확산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주님을 차지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은 모든 계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선언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사랑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요한복음13장34절 이하에서 주님은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바로 우리가 따라야 할 사랑의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나의 벗이 된다.”(요한 15,13)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마태 5,46) 하시며 끼리끼리의 사랑을 경계하셨습니다.
1요한 3,14에 보면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말하고 있고 1요한4장20절에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적고 있습니다.
로마서 13장8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 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지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요, 사랑은 손발에서 열매 맺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랑에 대해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루카 12,34) 하고 이르셨습니다.
운동 경기에서 골인한 것과 골을 넣을 뻔한 것은 분명 다릅니다. 홈런과 파울은 같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과 가까이 있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그러므로 머리에 있는 사랑을 가슴으로 끌어내리고 가슴에 담긴 사랑을 마침내 손발로 행해서 풍성한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지식의 앎이 아니라 사랑의 구체적 삶이 살아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드시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아들아, 사랑한다!”“딸아,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한다는 이 한마디가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을 표현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어려움 안에서도 아버지의 사랑으로 여전히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언제나 주님을 향한 희망 안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에덴 동산에 사는 하와가 아담에게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아담에게 “자기 나 사랑해!” 하고 물었지요. 그러자 아담이 “그럼” 하고 대답했어요. 하와가 다시 “정말 나를 제일 사랑하는 거지?” 물으니, 아담이 “그렇다니까?” 하고 대답했어요. “내가 제일 이뻐?” 하와가 묻자 “야! 여기 너 밖에 다른 사람이 더 있니?” 아담이 대답했답니다.
거듭거듭 확인하려는 하와나 그렇게 멋없이 대답하는 아담이나…
천생연분이야! ##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 31주일, 11월의 첫 주일, 늦가을입니다. 가을도 아름답게 익어가고, 단풍도 아름답게 익어가고, 사랑도 아름답게 익어갑니다.
“가을처럼 아름답고 싶습니다”(이채)
가을에 오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의 등불 하나 켜 두고 싶습니다/가을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진실한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가을엔/ 그리움이라 이름하는 것들을/깊은 가슴으로 섬기고 또 섬기며/ 거룩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싶습니다//
오고 가는 인연의 옷깃이/ 쓸쓸한 바람으로 불어와/가을이 올 때마다/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세월//
꽃으로 만나/ 낙엽으로 헤어지는/이 가을을 걷노라면/ 경건한 그 빛깔로 나도 물들고 싶습니다//
그대여!/ 잘 익으면 이렇듯 아름다운 것이/ 어디 가을뿐이겠습니까/그대와 나의 사랑이 그러하고/ 그대와 나의 삶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거룩한 말씀이라고 불리는 ‘셰마 이스라일’을 들려줍니다. 유다인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맨 먼저 배우는 것이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시작되는 바로 이 “셰마”라는 신앙고백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적어도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이 기도를 정해놓고 드린다고 합니다. 또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를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기 위해 이마와 왼쪽 팔에 경구갑을 부적처럼 붙들어 매고 다녔고(신명 4,8-9 참조), 옷자락에 술을 달고 다녔습니다(민수 15,37-39).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십계명에 6백 조항이 넘게 보태어져 실천할 수 없게 되었고, 또 어느 계명이 큰 계명인지 토론이 계속되었는데,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도 이 질문을 예수님께 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주었던 계명으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 29)
이 말씀은 먼저, ‘하느님의 존재’ 와 ‘우리의 존재와의 관계’에 대한 계시입니다. 곧 ‘한 분이신 우리 주님 하느님’과 ‘그분의 것, 곧 그분의 소유’의 관계를 드러내며, 바로 이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사랑’임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원천이요 근거요 바탕이 바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임을 밝혀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근거요 이유입니다.
그러니 이 관계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히:아헤브, 희:아가페오)은 본능적 호감과는 구별되는 ‘신실함’과 ‘충성’을 드러냅니다. 곧 ‘온 마음과 온 목숨과 온 정신과 온 힘을 다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12,34)고 할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근본적으로 <구약>의 ‘사랑의 계명’은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모세가 말한 ‘구약의 계명’과 예수님의 ‘새 계명’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사랑의 계명과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은 어떻게 다를까?
우선, <구약>에서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둘째 계명의 ‘이웃 사랑’은 제한적입니다. 곧 여기서 말하는 ‘이웃’이란 동포로 한정하거나 함께 사는 이방인들까지를 포함시킬 뿐입니다(레위 19,3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가 10,30-37)에서 보여주듯이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일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마태 5,44-48).
또한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완전히 바꾸어 새 계명으로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시하십니다.
또한, 나아가서,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신명 6,4-5)과 ‘이웃 사랑’(레위 19,18)을 한데 묶으시면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사랑의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이요,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인 셈이 됩니다.
물론, 이 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내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새 천년기](24항)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먼저 ‘형제의 일부’가 되어주는 일로 이루어져 갑니다. 마찬가지로, 좀 더 확장해서 표현해본다면, 내가 형제의 일부가 되고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은 곧 ‘하느님 사랑’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이중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곧 ‘남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