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자비와 용서

제1독서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받아 주소서.>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25.34-43 그 무렵 25 아자르야는 불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입을 열어 이렇게 기도하였다. 34 “당신의 이름을 생각하시어 저희를 끝까지 저버리지 마시고 당신의 계약을 폐기하지 마소서. 35 당신의 벗 아브라함, 당신의 종 이사악, 당신의 거룩한 사람 이스라엘을 보시어 저희에게서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마소서. 36 당신께서는 그들의 자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37 주님, 저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저희의 죄 때문에 저희는 오늘 온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38 지금 저희에게는 제후도 예언자도 지도자도 없고 번제물도 희생 제물도 예물도 분향도 없으며 당신께 제물을 바쳐 자비를 얻을 곳도 없습니다. 39 그렇지만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 주소서. 40 이것이 오늘 저희가 당신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 되어 당신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하소서. 정녕 당신을 신뢰하는 이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41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얼굴을 찾으렵니다. 저희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42 당신의 호의에 따라,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희를 대해 주소서.

43 당신의 놀라운 업적에 따라 저희를 구하시어 주님,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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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35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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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이 주는 선물은 자비다 -전삼용신부-

유태인의 전설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바로 전에 천사들의 의견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먼저 정의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만들면 그가 동료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사악을 자행할 것이고, 또 사람은 강퍅하고 잔인하고 부정직하여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진리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사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거짓되고, 그의 형제들을 속일 것이며 심지어 하느님 당신도 속일 것입니다.”
거룩함의 천사도 거들었습니다.
“사람을 절대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의 이름을 더럽힐 것입니다.”

그러자 가장 마지막으로 자비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사람을 만드십시오. 다른 천사들의 말대로 사람은 죄를 짓고 정의와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 거룩함을 잃게 될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사람을 만들지 않으신다면 다른 천사들이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오히려 그들의 나약함을 알면서도 그들을 천사들보다 높게 끌어올리실 수 있다면 그것이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길일 것입니다.”

자비는 내가 힘이 없어서 상대의 잘못을 묵인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는 참아낼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힘이 없으면 오히려 자비롭지 못하게 됩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용서는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라고 여쭈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매정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임금에게 만 탈렌트를 탕감 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감옥에 가둡니다. 이에 임금도 화가 나 그 종도 만 탈렌트를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백 데나리온은 약 천만 원 정도 되고 만 탈렌트는 6조 원정도 됩니다. 6조 원을 가진 사람에게 천만 원은 돈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가 자신이 가지게 된 6조 원의 가치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죄를 용서받았다면 그리스도의 피는 6조 원의 가치를 지닙니다. 그런데도 천만 원정도 되는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떤 자비를 받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닌 무한한 능력을 모를 때엔 가지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1조 원을 가진지 모를 때 3천만 원을 꿔 간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주님께로부터 무엇을 받았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1조 원이 있어도 있는 줄 모르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은총도 용서로 드러나지 않으면 받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상 하느님께서 가장 무능하게 보였던 순간이 바로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을 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이 무능하심은 가장 큰 전능으로 드러났습니다. 참아낼 수 있는 것이 곧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강하셔서 약해지심을 감당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날 능력이 없으셨다면 죽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실 수 있으셨기에 당신 안에 생명이 충만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자비는 하느님께서 전능하시다는 증거입니다. 그 전능하신 분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은 우리들 또한 당연히 자비로워야 합니다. 용서 때문에 죽어야한다는 것을 알아도 용서할 수 있다면 그 안엔 영원한 생명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자비롭지 못합니다. 약한 사람이 강요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은 용서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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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아야 할 죄인 -반영억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능한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어느 한 순간 걸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아무의 도움도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넘어지는 이유를 보면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야고보사도는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야고4,1-2).하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도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이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독이라고 가르칩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화를 내고 다투는 일이 없을 텐데 욕심 때문에 남과는 물론 심지어 형제와도 등지게 되기도 합니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서로를 힘들게 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담을 높이 쌓게 됩니다.

얼마 전 한 어르신이 자녀들에게 유언으로 유산을 분배하고 세상을 뜨셨는데 자녀들에게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자녀들은 모두 내로라할 만큼 큰 재산을 가진, 그야말로 살만한 사람들이었는데 서로 서운함을 가지고 등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재산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재산은 분명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데 재산이 사람을 죽입니다. 그 담을 허물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담을 허문다는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라는 것이 말같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듯이 하느님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성찰해 볼 때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을 살아온 날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음을 다잡으려 하지만 인간의 연약함에 넘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왔고 앞으로도 분명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는 더욱 크게 필요합니다.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나의 의지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어야 합니다.

용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용서 덕분에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당신을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60). 하고 애원하였던 스테파노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용서는 선물로 주어졌지만 만약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담고 있게 되면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고립되게 되고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건강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용서는 결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선행도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만큼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설령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이라도! 어느 날, 내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가슴깊이 느낄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3,9).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살면서 나에게 용서받기 어려웠던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 해보고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때 주님이 나에게 어떤 은총을 허락하셨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우리는 어디까지 용서가 가능한가요? 나의 가족에게 해를 끼였쳤거나 나의 재산을 다 잃게 한 사람도 용서가 가능할까요? 만약 내가 용서를 하기 전에 그 사람이 “나는 이미 하느님께 용서를 받았습니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할 수 있을까요?

4.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이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독”이라고 말하였는데 내가 생각하는 또다른 “독”은 무엇이 있으며 어떻게 하면 이런 “독”을 해독할 수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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