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 소작인, 마태오 21장 33-43절

나의 것, 주님의 것

(강론 주제:초심 15:50 ~ 41:40)

마진우 겸손신부님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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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주인은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33-43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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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불편한 진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실이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비유에 등장하는 소작인들이 바로 이런 불편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포도밭 주인이 소출을 받으려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는데, 소작인들에게는 그들이 눈엣가시였습니다. 자신들이 차지할 소출을 빼앗아 간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종들 가운데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여 버리고 맙니다. 불편한 존재들을 없앤 것입니다.

이제 주인은 아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에게는 이 아들이야말로 가장 불편한 존재입니다. 아들만 없으면 포도밭을 아주 차지할 수 있는데, 아들은 가장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들 또한 죽여 버립니다. 이렇듯 소작인들은 자기들에게 불편한 존재들이 나타났을 때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없애 버리는 쪽을 선택하였습니다.

여러분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불편하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들을 여러분의 삶에서 제외하지 마십시오. 그 사건들을 치워 버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들과 그 사건들을 보내시면서 여러분을 바르게 이끄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불편한 것들을 감수하고 인내하는 과정에서 조개는 진주를 만들어 냅니다. 불편한 사람들, 불편한 사건들은 나를 고쳐 나가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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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보거나 다음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 소작인들의 입장

         – 아들의 입장

         – 주인의 입장

2. 내가 생각하는 “내 것”에는 무엇이 있나요? “내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을 주님이 다시 가지고 가셨을때 나는 어떻게 행동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나의 신앙적인 잘못을 지적하는 말씀을 듣고 즉각적으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경험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만약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면…남을 단죄하지 않으면서 좋은 길로 인도할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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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포도밭 소작인에 관한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과 성전에서 논쟁을 벌이시는 상황을(21,23-27 참조) 고려하였을 때, 오늘의 비유는 예수님의 반대편에서 그분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종교 지도자들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비유의 의미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비유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고 비난하였으며, 예수님을 정치적 이유로 모함하여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들이 보여 준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위는 하느님의 뜻에 어긋납니다. 둘째, 비유는 예수님의 반대자들에게 하느님의 신적 능력을 알려 주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정치적 누명을 쓰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셔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편 118(117)편 22-23절을 인용하여 예고하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셨습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거부와 회복, 죽음과 부활이라는 주제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는 이사야 예언자 시대에 예고된 바 있습니다. 제1독서의 포도밭 노래는 정의와 공정, 곧 좋은 열매 맺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기대와는 달리, 나쁜 열매로 은유된 불의와 폭력을 일삼는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는 포도밭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 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는 자녀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좋은 열매를 많이 거두는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약속된 선물입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3637
10월8일[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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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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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jELlsb2das?si=XIOzp0GZ8we9zPIw
[서울대교구 홍성학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집전(한국가톨릭군종후원회 지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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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선수 교체당한 이스라엘 백성>

축구 시합을 관전하다 보면 팀의 승리를 위해 탁월한 기량의 선수들도 중요하지만, 감독의 용병술도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독은 냉철하고 객관적이어야 하고, 사사로운 개인적 감정이 휘말리지 말아야 합니다.

전반전을 뛰고 나서 그 결과에 따라 라커룸을 향하는 감독의 머릿속에는 벌써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됩니다.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은 선수, 그래서 최대한 빨리 교체해줘야 하는 선수는 누구인지? 그 포지션에 누구를 투입하면 좋겠는지, 등등.

그리고는 계획한 대로 가차 없이 교체를 실시해야 합니다. 교체 대상인 선수의 성격이 아주 과격해서, 아무런 죄도 없는 물병을 발로 걷어차거나 욕을 해도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때로 팀워크 상승을 위한 선수 길들이기 차원에서 일부로 빼버리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낡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옛 백성과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어떻게 교체되는지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반전에 출전했던 과거의 옛 백성들의 처신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참다 참다 인내심에 한계에 도달한 하느님께서 즉시 선수 교체를 단행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으로부터 좋은 포도밭을 선물로 받았으나, 흥청망청 놀고먹고 마셨으며, 엉뚱한 곳에 신경 쓰느라 포도밭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밭은 정직합니다. 주인이 조금도 관심도 가지지 않는데, 풍성한 소출은 절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버린 포도밭의 소작인들은 이중적인 처벌을 받게 됩니다. 자신들이 임대한 포도밭은 다른 소작인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아들을 죽인 결과로 주인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충실하신 하느님을 향한 반역과 불충실의 역사였습니다. 그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이 부분에 대해 깊은 탄식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너희에게 보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예레 7,25-26)

하느님의 말씀도 무시했던 그들은 메시아로 보내신 당신의 아들 예수님 역시 무시했습니다. 사악한 소작인들이 한 것처럼 아들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죗값을 톡톡히 받을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선물은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백성들의 손에 넘어갈 것입니다.

오늘의 비유 말씀은 심판의 말씀인 동시에 희망 가득한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불의한 옛 백성들에게는 심판의 말씀이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새로운 백성들에게는 구원과 기쁨을 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옛 백성의 실패와 멸망은 새로운 아들이신 예수님을 처형함에서 절정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계약의 피로 인해 새로운 백성이 출범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의 불충실과 실패로 인해 무산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영광스러운 부활로 인해 새로운 백성이 탄생한 것이고, 그 백성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영광과 구원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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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오늘 이 아침 주님께서는 새로운 하루와 더불어 또 다시 건너갈 것(Pascha)을 바라십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힘겨운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습니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현실과 암담하고 불투명한 미래 사이에서 겪게 되는 근심과 걱정,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런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형제 여러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피서 4장 6~7절)

탈출구도 없을 뿐더러, 사방이 높은 담으로 가로막혀, 밤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께서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랍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현실 앞에, 입만 열만 불평불만이 폭포수처럼 터져나오는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께서는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랍니다.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현실 앞에, 마냥 주저앉아 있는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께서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간구하며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랍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바오로 사도의 권고는 지극히 현실성이 떨어져 보이고, 대책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께서 걸어가신 전도 여행길을 생각해보니, 권고 말씀이 절대로 헛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깊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찬미의 송가를 불렀습니다. 혼절할 정도로 심한 매를 맞으면서도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고 있다는 마음에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토록 공들였던 초기 교회 공동체들이 수시로 흔들리고 분열되었으며 삐그덕거렸지만,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희망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몸소 겪은 바를 가르쳤고, 당신이 직접 사신 바를 권고했습니다. 그러니 2천년 세월을 건너와 오늘 우리에게까지 그분의 말씀은 생생한 설득력과 호소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편지를 끝맺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또한 감동적입니다.“끝으로, 형제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필리피서 4장 8절)

풀잎끝에 맺힌 이슬방울처럼 순식간에 지나가고 사라지는 대상들, 헛되고 무의미한 대상들, 속되고 천박한 대상들에 자신도 모르게 깊이 함몰되어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는 참되고 고귀한 대상들, 의롭고 정결한 대상들, 사랑스럽고 영예로운 대상들을 선택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오늘 이 아침 주님께서는 새로운 하루와 더불어 또 다시 건너갈 것(Pascha)을 바라십니다. 천박한 삶에서 품위 있는 삶으로, 지극히 본능적인 삶에서 지성적 삶으로,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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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d8qGBMJqOI?si=JHe_Qm2jN7FsK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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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감사하는 이만 파견한다>

이탈리아 카시아에서 성체 기적이 있었습니다. 성체가 종이에 피로 변해서 스며든 것입니다. 그 종이는 감실에 모셔져 있습니다. 감실은 하느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성체가 그 사람 안에 살아있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인간은 종이가 아니기에 성체를 모셔도 그분을 우리 안에서 죽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그렇습니다. 포도밭 소작인들은 주인의 외아들을 죽였습니다. 만약 우리도 못된 소작인들처럼 소출의 일부를 주인에게 바치지 않으면 우리 안의 그리스도를 그렇게 죽이게 됩니다. 소출의 일부를 바치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이 주인이 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두 주인을 모실 수는 없습니다. 자기를 자기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면 아무리 성체를 영해도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살아 계실 수 없습니다.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에서 자기 원수 같은 후배 직장 상사와 바람을 피우는 아내에게 주인공 남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그랬니? 너 지석이 엄마잖아. 애 엄마잖아. 너 그 새끼랑 바람피운 순간 너 나한테 사망 선고 내린 거야. 박동훈 넌 그런 대접 받아도 싼 인간이라고.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그냥 죽어버리라고!”

아내는 남편에게 파견받습니다. 자녀를 잘 키우라고. 물론 파견할 때 그 능력도 함께 받습니다. 남편은 밖에서 돈을 벌어 아내에게 다 가져다줍니다. 파견 받음은 나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그 파견을 거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물을 던지는 어부를 생각해 봅시다. 그물은 어부에게 파견 받습니다. 그래서 그물이 조금이라도 뜯어지면 어부는 고이 손질합니다. 물고기가 거기로 빠져나갈 수도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물이 자신에게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파견 받았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그러나 그 파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자녀에게 아버지의 사랑이 흐를 수 없게 합니다. 그러면 사랑해도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돈을 벌어다 주며 파견하는 남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구약과 신약에서 다 하느님께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먼저 에덴 동산에서 감사의 마음으로 땅 소출의 일부, 곧 선악과를 바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로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라고 파견 받을 수 없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걸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전히 파라오의 종살이 하던 때를 그리워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소출의 일부를 받아오라고 보낸 주인의 외아드님도 죽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계속 주님께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결국 서로를 사랑할 능력도 잃고 주님의 것이 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사육』에 그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2차 세계 대전 중 한 일본 산골 마을에 미군 비행기가 추락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흑인 병사 한 명을 끌고 와 지하 창고에 가두고는 짐승처럼 묶어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소년은 흑인 병사의 살갗이 벗겨져 염증이 생긴 것을 보고는 덫을 풀어주었습니다. 소년의 도움으로 흑인 병사는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청에서 흑인 병사를 끌고 오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흑인 병사는 지레 겁을 먹어 소년을 인질로 잡아서 난동을 벌입니다. 결국, 흑인 병사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소년의 아버지가 휘두른 도끼에 맞아 죽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도 감사의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으며 그렇게 주님을 내 안에 인질로 잡아 놓고 있을 수 있습니다. 성체를 영해도 구원 받지 못하는 이들이 이와 같습니다.

아기 돼지가 엄마를 잃었습니다. 오갈 데 없는 돼지의 엄마가 되기 위해 코끼리 아줌마가 엄마로 불러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기 돼지는 코가 긴 코끼리 아줌마를 엄마로 믿을 수 없었습니다. 코끼리 아줌마는 자기 코를 잘라 돼지코로 만들었습니다. 아기 돼지는 피가 뚝뚝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기 모습과 같은 아줌마를 엄마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기 돼지가 엄마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하며 파견하신 분께 감사의 봉헌을 조금이라도 드릴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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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소작인이 주인이 맡겨주신 포도원을 잘 돌보지 않으면 주인은 다른 소작인에게 포도원을 맡긴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소작인의 비유를 들으면서 저의 경험이 생각났습니다. 1986년에 저는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자대배치를 받기 위해서 기다리는데 인사담당 장교가 저를 불렀습니다. 제가 신학생인 것을 알았습니다. 인사담당 장교는 자신의 아들도 신학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저는 군종성당이라는 포도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덕함과 잘못으로 저는 3개월 만에 군종성당이라는 포도원에서 쫓겨났던 적이 있습니다. 군종신부님은 1년 뒤에 다른 병사에게 군종성당이라는 포도원을 맡겨 주셨습니다. 제가 부족했기에, 제가 잘못했기에 저는 군종신부님을 원망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저를 따끔하게 혼내 주었기에 제가 남은 군 생활을 잘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군종신부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선량한 소작인들이 불의한 힘에 의해서, 독재자들에 의해서 포도원에서 쫓겨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나봇’의 이야기입니다. 나봇은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포도원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이 좋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돈을 주고 사려고 했지만 나봇은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포도원을 팔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합 왕의 아내 이사벨은 거짓과 선동으로 나봇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포도원을 빼앗아 아합 왕에게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봇의 억울함을 아셨고, 아합 왕과 이사벨에게 벌을 주었습니다. 해병대 수사단장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고 채 상병의 사망사고를 조사했고, 경찰에 이첩하는 과정에서 ‘항명’이라는 죄목으로 보직 해임되었습니다. 억울함을 호소한 수사단장은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수사단장은 경찰에 이첩하는 과정에서 부당한 외압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수사단장의 해임을 주도하였던 국방부 장관은 해임되었습니다. 아직 결론이 나지는 않았지만 억울하게 포도원에서 쫓겨나는 사람이 없도록 철저하고도, 명확한 조사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9년 교구에서는 제게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라는 포도원을 맡겨주었습니다. 어느덧 4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직원들과 함께 매주 신문을 발행하는 것이 주된 업무입니다. 미주 지역의 한인 성당을 다니면서 신문홍보를 하는 것은 저의 업무입니다. 무탈하게 신문 발행을 하고 있지만 구독자의 감소는 큰 고민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2년 동안 신문홍보를 다니지 못한 것도 원인입니다. 종이 신문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것도 원입니다. 구독자의 감소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초래하게 됩니다. 직원들의 근무일수 조정과 저의 급여 삭감으로 재정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청하며 좀 더 많은 곳으로 신문홍보를 다니려고 합니다. 후임 신부님에게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라는 포도원을 잘 넘겨주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브루클린한인성당’이라는 포도원도 맡겨 주셨습니다. 2020년 8월부터 미사를 하였으니 어느덧 3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제가 도움을 주려고 다녔지만 오히려 저는 공동체와 함께 지내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포도원에는 때로 원하지 않는 일들이 생기곤 합니다. 분열의 씨가, 두려움의 씨가, 갈등과 걱정의 씨가 들어오곤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 했습니다.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면, 우리가 사랑한다면 그 어떤 시련도, 고난도, 아픔도 우리를 하느님과 맺어주신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포도원 소작인의 자세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끝으로, 형제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맡겨 주신 포도원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 가족, 이웃이 포도원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포도원을 잘 가꾸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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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33-43: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오늘의 포도밭은 하느님께서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로 보살펴주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호세 10,1; 예레 2,21; 5,10; 6,9; 12,10; 에제 15,1-8; 17,3-10). 포도밭이라는 상징적 개념은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맺어지는 혼인의 상징적 개념도 있다. 이사야서(5,1-7)는 상처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이 표현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불의를 행하여 그 포도밭이 좋은 포도를 내지 못하고 들 포도를 즉 불의를 내고 말았음을 개탄하는 것이다.

이 포도밭 노래의 내용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 거듭 강조하신다. 마태오는 이스라엘을 주님의 포도밭이라는 문학 형식으로 구원의 역사의 어떤 단계를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주인의 가장 사랑이 충만한 극적인 구세사의 마지막 여정은 상속권을 가진 당신 외아들의 파견이다. 아버지께서는 끝까지 구원을 위해 애쓰신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리렷다.”(39절) 그래서 모든 것이 헛되이 되고 만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예고로, 그 죽음이 도시의 성 밖에서 이루어지리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되었을 때 그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듣는 사람들이 이 극적인 사건과 연루되게 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과는 무관한 사건으로 생각하면서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41절) 대답한다.

이제 이 구원의 역사는 그리스도 자신은 통해, 그리고 불충실한 이스라엘 대신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말은 “집 짓는 자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42절) 라는 시편 118,22-23을 인용하시어 하느님의 구원계획 중심에 당신이 계심을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계획을 무시하시며, 집 짓는 데에 쓸모없는 돌로서 버려진 그리스도를 당신의 새로운 구원의 건축에 쓰일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신다. 이것으로 그리스도의 죽음뿐 아니라, 부활의 승리를 예고하며 구원의 역사가 십자가를 통해 여정을 계속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원의 역사는 교회라는 새로운 구원의 공동체를 통하여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43절).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마태 3,8) 능력을 상실한 옛 계약의 백성 대신에 풍성한 열매를 맺을 하느님의 새 백성이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중단될 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한 교회를 통하여 계속 전진한다. 악한 소작인들은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아들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시고 그 포도원을 되찾으셔서 새 소작인들에게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충실이 하느님의 위대한 승리로 되고 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본질적 특성은 행동하는 데 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정통교리는 불충실한 이스라엘과 다를 것이 없다. 하느님의 나라는 올바른 실천적 행위 속에 현존한다. 주님 교회의 본체에 대한 믿음은 행동적 증거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 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된 구원의 은총은 새로운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풍성한 믿음의 결실을 내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기를 요구한다.”(G. Barbaglio, I Vangeli, Assisi 1975, p. 472)

바오로 사도도 이 믿음의 행동적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신자들은 본성적으로 진실한 것, 올바른 것, 고상한 것들을 실행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을 평가할 수 있는 사고능력을 갖춰야 하며, 이는 기도로부터 얻을 수 있다.(필리 4,6-7 참조) 그리스도인의 행동적 신앙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한 행동적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형제들과 더불어 인간 공동생활의 삶의 공통적인 가치와 요구를 실현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면서 이 구원의 사업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평가할 수 있는 사고능력을 갖춰야 하며, 이는 기도로부터 얻을 수 있다.(필리 4,6-7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행동적 신앙은 금욕주의 사상이나 순전히 인간주의적 사상이나 순전한 실천주의적 사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한 행동적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수많은 형제와 더불어 인간 공동생활의 삶의 공통적인 가치와 요구를 실현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면서 이 구원의 사업이 계속될 수 있다. 이러한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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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마태 21,33-35)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의 앞부분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소작인들’은 이스라엘이고, ‘종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입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혼인 잔치의 비유’도 내용이 많이 비슷합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마태 22,2-6)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도 ‘종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입니다. ‘초대받은 이들’은 이스라엘입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이스라엘 민족에 초점을 맞춘 비유이고, ‘혼인 잔치의 비유’는 개인의 응답과 구원에 초점을 맞춘 비유입니다.

그래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는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강조되어 있고(43절),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는 초대에 응답하는 일과 응답하려면 예복을 갖춰 입어야 한다는 것이(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고는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는 구원이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합당하게 살아야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소작인들’로 표현하신 것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밭주인과 소작인들의 관계라는 뜻이 아니고, 소작인들처럼 살고 있는 이스라엘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또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주인과 소작인의 관계가 결코 아니고,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와 사랑받는 자녀의 관계’입니다.

소작인들은 남의 밭에서 ‘남의 일’을 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주인을 사랑하지 않아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소작인 같은 태도로 하느님을 대했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의, 즉 인류 전체의 아버지이신 분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과 생명을 받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남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을 하는 것이고,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대로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또 ‘내가 살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는 사람들이 ‘손님’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그것은 가르침을 좀 더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우리는 손님이 아니라 주인입니다. 아버지의 잔치이니까 자녀의 잔치이고, 그 잔치의 주인이 아버지이시니까 우리도 잔치의 주인입니다.

혼인을 하는 ‘임금의 아들’은 예수님이고(마태 22,2), 예수님의 ‘신부’는 바로 신앙인들, 즉 ‘우리’입니다.(요한 3,29) 신랑의 잔치는 예수님의 신부인 우리의 잔치입니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마태 21,37-40)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7-18)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은, 인간들에게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구원과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거나,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지 않겠다고 스스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심판 때에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들이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사도 2,38-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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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포도밭 소작인에 관한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과 성전에서 논쟁을 벌이시는 상황을(21,23-27 참조) 고려하였을 때, 오늘의 비유는 예수님의 반대편에서 그분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종교 지도자들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비유의 의미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비유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고 비난하였으며, 예수님을 정치적 이유로 모함하여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들이 보여 준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위는 하느님의 뜻에 어긋납니다. 둘째, 비유는 예수님의 반대자들에게 하느님의 신적 능력을 알려 주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정치적 누명을 쓰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셔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편 118(117)편 22-23절을 인용하여 예고하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셨습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거부와 회복, 죽음과 부활이라는 주제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는 이사야 예언자 시대에 예고된 바 있습니다. 제1독서의 포도밭 노래는 정의와 공정, 곧 좋은 열매 맺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기대와는 달리, 나쁜 열매로 은유된 불의와 폭력을 일삼는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는 포도밭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 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는 자녀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좋은 열매를 많이 거두는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약속된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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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이성용 바오로 신부님]

<나는 누구인가?>

예루살렘 입성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예수님을 향한 그 당시 지배계층의 견제, 오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그들을 향한 직접적인 비판이자 동시에 당신이 겪으셔야 할 구원의 길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수많은 예언자들을 몰라보고 그들에게 돌을 던진 조상들의 악행, 그것을 보시고도 아들만은 존중해 주리라는 희망으로 예수님을 보내신 하느님께, 소작인들로 대변되는 이스라엘은 또다시 같은 잘못을 반복합니다.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라는 소작인들의 말은 예언자들을,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불완전한 인간의 이기심을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을지 생각해 봅니다. 이미 다 가르쳐주었는데, 이미 다 보여주었는데 … 자꾸만 무엇인가 더 보여주기를 기대하는 사람들과, 반대로 보고 들은 것을 애써 뒤로한 채, 본인들이 누리고 있는 것을 잃지 않기 위해 무조건적인 반대를 하는 사람들을 보며 얼마나 억울하셨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당신이 가셔야 하는 길을 가실 때의 그 걸음걸음이란 … 가늠이 되질 않습니다.

지금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예수님을 답답하게 해 드렸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 보다도 그저 우리들의 이기심과 욕심에 하느님의 뜻을 애써 외면하는 것들 말입니다. ‘내 마음은 하느님을 믿고 있으니 매주 미사에 참여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아도 나는 괜찮아.’, ‘굳이 내가 봉사하지 않아도 누군가는 하겠지.’ 등등 …

군대에서 예비자 교리할 때, 마지막으로 힘을 주어 강조하는 부분이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세례를 통해 신앙인이 되어 누리게 되는 권리로 인해 주어지는 의무가, 그동안 그렇게 살아보지 않은 친구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기에 마지막 이마에 물을 붓는 순간까지 고민해 보라고 이야기해 줍니다.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던 친구들도, 얼마가지 않아 미사참석에 소홀해지는 모습을 볼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요.

그래도 다시 도전하고 나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마음가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계속되는 도전으로 주님의 포도밭에서 다른 것을 바라지 않고 제대로 된 소출을 내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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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박진호 사도요한 신부님]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기쁨, 하느님만이 채워주시는 행복>

병 복무 시절, 성당은 지친 영혼에 기쁨과 평화와 행복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열정적인 군종신부님과 따뜻했던 군 가족 신자들은 장병들을 한 명, 한 명 세심하게 챙겨주었고, 덕분에 신앙공동체가 만들어지고 활성화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당은 모든 이의 안식처가 되었고, 저희의 신앙과 열정은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자 한 분이 제 손을 잡으시며 군종 사제로 꼭 다시 와줄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군종 사제를 희망해서 오시는 신부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공동체에 큰 아픔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군종 신부님처럼 장병들과 신자들을 세심하게 보살펴주는 군종 신부님이 되어달라는 부탁이 ‘목자 없는 양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날부터 하느님께 ‘부족한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군종 사제의 삶을 살아가며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 싶다’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삶을 살아가게 되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군종 사제의 삶은 특별합니다. 성당에서 신자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활동을 보장받지 못하는 곳에서의 신자들을 위해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군종 사제는 사제의 역할뿐만 아니라 장교로서 요청되는 각종 업무와 교육 그리고 부대행사에 기쁘게 참여하며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활동합니다. 그래야만 장병들과 신자들을 위해 어떤 무언가를 부대에 요청했을 때 기꺼이 허락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무장님도, 봉사자분도 계시지 않아 그 모든 것을 혼자 관리하고 준비하고 나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로서 하느님을 위해서 누군가를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기쁨이,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행복이 군종 사제에게 힘을 매어줍니다.

오늘 제1독서 포도밭의 노래와 복음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주신 삶을 성실히 살아가며 지속적인 선행으로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을, 그리고 제2독서는 그 여정에서 맛볼 평화를 전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며 열매를 맺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기쁨과 평화와 행복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갑시다.

특별히 군인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나라를 지키는 장병들과 그 장병들과 함께하는 군종 사제를 위해 많은 기도와 후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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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소출을 내야만 하는 하느님 나라>

“너희에게서 하느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들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추석 명절은 잘 지내셨나요. 넉넉한 추석이 되었을까요?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자칫 탐욕으로 빠져들 수 있습니다. 소작인이 의당 내야 할 몫, 소출은 현대판 우리의 나눔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밭 소작인 비유입니다. 언뜻 지주에 대한 농민 봉기가 연상됩니다. 그러나 비유의 핵심은 더 본질적입니다. 포도원은 하느님이 만든 세상이고, 우리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피조물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소출을 내야 할 소작인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탐욕을 부린다면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겁니다. 마음을 바꾸어 먹지 않으면 망한다는 하느님 나라 비유입니다.

1. 사태 파악이 안 되는 주인
오늘 복음은 무섭습니다. 폭력적인 상황에 피비린내가 진동합니다. 소작인들의 탐욕이 부른 참극이지만 사태 파악이 안 되는 주인도 참 딱할 노릇입니다. 밭 주인은 누구 도움 없이 홀로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웁니다. 그리고 감독관도 세우지 않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납니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소출을 받아오라고 종들을 보냅니다. 소작인들은 소출은커녕 종들을 매질하고 죽여버립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면 사태 파악이 되어야 할 터인데, 주인은 더 많은 종을 보내 죽게 만들고 맙니다. 급기야는 자기 아들까지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바보 같은 주인입니다.

비유 말씀의 밭 주인은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당신이 창조한 세상 모든 것을 기꺼이 인간 손에 맡기십니다. 인간이 사악하게 놀아나도 믿고, 믿고 또 믿어줍니다. 믿는 것 외에 당신 사랑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으셨을까요. 어쩌면 그리도 인간들을 믿을 수 있는지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래서 아들까지 죽이고 맙니다.

2. 하느님은 무골호인이 아니다.
포도밭 유혈 참극을 벌인 소작인들을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대답합니다.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41절)

그러자 주님은 그들의 말 그대로 확증해주며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서 하느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43절)

이런 가정을 해봅니다. 소작인들이 일으킨 반란이 성공을 거두어 주인까지 내몰고 포도밭을 차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소출을 내지 않는 그만큼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아닐 것입니다. 그들의 탐욕은 끝이 없을 터, 더한 폭력성으로 소작인 서로를 향한 칼날은 여지없이 피를 불렀을 것입니다. 어느 면에선 하느님의 뜻을 도외시하고 하느님 없는 양 살아가는 그 자체가 징벌이 될 것입니다.

지금의 지구촌이 그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상황과 기후 위기도 그렇고 전쟁 상황과 거꾸로 가는 역사의식도 그렇습니다. 생태환경과 사회환경 모두가 두려운 징후를 보입니다. 그런데도 별문제 없는 듯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내야 할 소출은 결코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금전으로 본다면 보통 십일조가 기본입니다. 유다인은 회당 운영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몫으로 10분의 2 정도 한다고 합니다. 내 것으로 여겨지는 금전은 물론 시간이든 재능이든 일정 부분 내놓아야 합니다. 소출도 좋고 나눔이라 해도 좋습니다. 기꺼이 감사한 마음으로 기쁘게 나누는 겁니다. 작은 일이지만 소명이 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명이 될 수 있습니다.

더 가지려는 허기진 마음의 동료에게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소출을 내야 하는 인간 실존! 자존심 상해 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다만 주인 된 마음으로 주인의 뜻대로 포도밭을 가꾸고 돌보아야 합니다. 오늘 있다 내일 사라질 하루살이와 다를 바 없는 피조물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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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배은망덕하지 마라>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십니다. 넘치도록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라십니다.(요한 15,9) 그래서 하느님은 미리미리 사랑의 질타를 하십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가운데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기쁨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1독서를 보면, 포도밭을 가꾸는 주인의 노고와 정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인은 산등성이에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한가운데 탑을 만들고 즙을 짜는 포도 확까지 만들어 놓고 포도가 송이송이 맺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이사 5,1-2)

그러나 생각지도 않게 들포도가 열렸습니다.(이사 5,4) 온갖 정성을 다했건만 결과는 영 딴판이었습니다. 결국 주인은 울타리를 걷어내고 담을 허물어 망그러진 채 내버려 두게 됩니다. 순을 치지도 않고 김도 매지 않고 황폐하게 두어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덮인 채로 두게 됩니다.(이사 5,5-6)

이사야 예언자는 이 비유 말씀에서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고,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함을 지적합니다.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이사5,4) 하느님께서 사랑을 주시는 만큼 사랑을 열매 맺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황폐한 밭이라는 의미입니다.

복음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한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훌륭하게 잘 가꾸어 소작인들에게 도지를 주고 멀리 떠났습니다. 그러고는 추수철이 되어 그 도조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이 소작인들이 간이 부었는지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마침내 간이 배 밖으로 나왔습니다.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이고 그 포도밭을 통째로 먹어버리려고 했습니다.(마태 21,33-38) 그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았습니다. 그러니 그 주인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 소작인들은 욕심으로 화를 자초하여 죽고, 새로운 소작인이 포도원을 경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종들은 예언자요, 아들은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의 포도밭을 잘 가꾸어 소출을 내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셨으니, 구원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아무리 귀한 은총을 주어도 관리하지 않으면 그 권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은 하느님의 심판이지만 자업자득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결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고 (예레31,3) 말씀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그리고 마침내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에페2,4)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에 대한 감사에 인색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두를 다 주셨음에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결국은 걸맞은 삶으로 감사할 줄 모르면 죽음에 이르고, 소출을 내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는 돌판에 새기고, 베푼 것은 모래에 새겨라’ 했습니다. 우리는 거꾸로 사는 것이 아닌지요? 늘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갚기는 고사하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루었다고 잘난 체하며 하느님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 4,6-7) 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면 그리스도의 평화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시편 50,14은 “사람이 하느님께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페 5,20)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면 감사할 수 있는 일이 생깁니다. 억지로라도 감사하십시오. 감사하면 감사할수록 감사할 수 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행실로써 감사드려야 합니다.”(성 필립보네리) “모든 일이 당신의 생각에 가장 좋은 방향으로 되기를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십시오. 그러면 혼란에서 벗어나 기도 중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교부 실루스)

성경에서 감사를 드린 인물을 몇 명 보면, 아브람은 자기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던 자리에 제단을 쌓아 바쳐 감사를 드렸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하느님께 바치며 기도를 올렸습니다. “내 마음은 주 하느님 생각으로 울렁거립니다. 하느님의 은덕으로 나는 얼굴을 들게 되었습니다. 이렇듯이 내 가슴에 승리의 기쁨을 주시니 원수들 앞에서 자랑스럽기만 합니다.”(공동번역. 1사무2,1)

다윗은 하느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옮겨 모시고 번제와 친교제를 바친다음 주 하느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복을 빌어주고 아삽과 그의 형제들을 시켜 감사를 드리게 하였습니다.(역대기 상16,7)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손을 들어 강복하시면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습니다.(루카 24,51-53)

예수님도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신 후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11,41)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감사할 일을 찾으십시오.

내가 숨 쉬고 있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공짜로 숨을 쉬고 있으니 많은 빚을 진 것입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각도 은총입니다.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은혜로움인지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감사해야 합니다. 이 순간 미사를 봉헌하며 주님을 찬미할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잔소리 많은 아내를 보고 남편이 말했답니다.
‘여보, 나 부탁이 있는데 당신 벙어리가 될 수 없겠소?’

그러자 아내가 대답했어요.‘나도 부탁이 있어요. 당신 귀머거리가 돼 줘요’ 벙어리가 되어달라는 남편이 있어서 감사하고, 귀머거리가 되어 달라는 아내가 있어서 감사하고요. 아내나 남편이 계시지 않는 분은 그런저런 부탁 받을 일 없어서 감사하고요. 자식이 말썽 피우지 않고 잘 자라주어 감사하고, 말썽 피우는 자식이라도 있어서 감사하고요. 무자식이 상팔자라 감사하고… 아픔을 느끼게 만든 자식이 있어서 가슴이 찢어졌지만 그래도 나를 철들게 하니 감사하고… 부모님이 계셔서 감사하고…… 감사합시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고 결코 배은망덕한 사람은 되지 맙시다. 무엇보다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하늘나라를 선물로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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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마크 배터슨(Mark Batterson)이 쓴 ‘올 인(All In)’이라는 책에는 선교사 밀른(A.W.Milne)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남태평양 뉴헤브리디스 제도의 원주민들이 사는 곳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사실 이곳은 원주민들이 앞서 파견했던 선교사 모두를 살해했던 곳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를 떠난 것입니다. 그에게는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개의치 않고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이미 죽었다면서 자기 관을 싸 들고 갔다고 합니다. 결과는 35년 동안 원주민에게 살해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함께 잘 살았습니다.

35년의 삶을 마치고 주님 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 후, 원주민들은 그를 마을 한가운데에 묻고 다음과 같은 비문을 남겼습니다.

‘그가 왔을 때 빛이 없었다. 그가 떠났을 때 어둠이 없었다.’

세상의 빛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은 세상에 주님의 빛을 비추고 있느냐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사랑의 대상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지 못한다면, 또 미워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면 빛이 아닌 어둠을 더 넓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선교사 밀른(A.W.Milne)의 35년 삶을 평가한 원주민들의 평가를 보며, 나의 삶을 모두 마치고 나서는 하느님께서 어떤 평가를 하실까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삶이 후회되지 않는 삶이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못된 포도밭 소작인들의 비유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맡겼지만, 소출을 주인에게 주지 않습니다. 소출을 받으러 온 종을 매질하고 또 죽이기까지 합니다. 더 많은 종을 보내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없으면 상속 재산을 차지할 수 있다면서 죽여버립니다.

이렇게 위험한 곳에 아들을 보내는 부모가 있을까요? 그리고 부모의 명령이라고 위험한 곳이라도 기꺼이 가는 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포도밭 주인도 또 그의 아들 역시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임금들과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맡기셨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계획을 거부하고 예언자들을 잡아 죽였지요. 심지어 외아들이신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듭니다. 결국 소작인인 임금들과 사제들과 원로들을 내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포도밭을 맡기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에 맞게 이 포도밭을 가꾸고 있나요? 혹시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는 생각에 주님의 사랑을 배신하고 못된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아버지의 뜻을 철저하게 따랐던 외아들 예수님처럼, 우리도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순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인이신 주님께 인정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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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직>

마태오 21,33-43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오직>

나를 향한
하느님의 믿음에
오직
하느님을 향한
나의 믿음으로

나를 향한
하느님의 희망에
오직
하느님을 향한
나의 희망으로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오직
하느님을 향한
나의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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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소작인들에게 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오게 종을 보냈다.”

우리는 3주 계속해서 포도밭 비유를 듣습니다. 연중 25주일에는 포도밭에 일찍 나와 일한 사람에게나
늦게 나와 일한 사람에게나 하느님은 같은 일당을 주신다는 비유를 들었고, 지난주 26주일에는 포도밭에 일하러 가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가겠다고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가지 않은 아들과 안 가겠다고 했지만 뉘우치고 포도밭에 가서 일한 아들의 비유를 들었는데 오늘은 포도밭의 또 다른 비유, 곧 소작인의 비유를 듣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보아라.” 그러니까 앞의 두 주는 포도밭에 개인으로 가서 일하는 데 비해 이번 주는 개인이 아니라 소작인으로서 일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게 되었습니다. 나는 주님 포도밭의 단순 노동자/일꾼인가, 소작인인가? 단순 노동자와 소작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단순 노동자와 소작인은 차이가 없습니다. 포도밭의 소유권이 자기에게 없다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소작인이란 그야말로 소작인이고 일꾼이나 마찬가지로 소유권자가 아닌데 가끔 소작인이 자기 주제파악을 못하고 소유권자로 착각하거나 아예 자기 소유로 만들려고도 하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오늘 비유를 통해 소유권 없는 우리의 가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다른 한 편 내거로 착각하고 소유하려는 교만과 욕심을 버려야 함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기업과 하느님의 사업을
내 것으로 삼으려는 교만과 욕심을 버려야 함은 물론이고, 하느님 기업과 사업을 내 거로 여기는데서 오는 근심걱정도 버려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수도회가 자기가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상대로 가지 않는 것을 보고 생애 후반에 무척 고뇌하였습니다. 그때 프란치스코는 기도 안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 수도회를 누가 세웠냐? 너나, 나냐? 이 수도회가 네 것이냐 내 것이냐?”

그런데 오늘의 비유는 단순 일꾼과 소작인의 차이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단순 노동자/일꾼은 하느님의 기업이나 사업에 아무 책임이 없고 그저 시키는 대로 일하는 비해 소작인은 소출의 책임이 있는 존재지요.

그러면 소출의 책임이란 무엇입니까? 책임은 하느님께 지지만 책임의 내용은 하느님 백성에 대한 겁니다. 구약에서 포도밭이란 이스라엘 백성이고 그러기에 포도밭의 소출을 낸다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 백성답게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명을 누리며 잘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잘 살게 할 수 있습니까? 사랑이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책임을 다하면 백성이 생명을 누리며 잘살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책임지는 것, 이것이 버겁고 그래서 이 책임이 싫습니다. 내 것도 아닌 하느님의 포도밭을 버거운데도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니.

그래서 이것이 짐인지, 아니면 영광인지 모르겠는 때가 있는데 사랑이 없으면, 무엇보다 하느님의 사랑이 없으면 짐일 뿐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고, 지니고 있으며, 그리고 그 사랑이 넘치고, 그 사랑에 감사하면 소작인인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파트너가 되고 하느님 사랑의 공동경작자가 되는 것이니 그것이 무한 영광일 것입니다. 나를 당신의 파트너 삼고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큰 책임을 맡기시다니!

여러분의 기도와 도움 덕분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보살핌 덕분에 바자회가 잘 끝났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어제 바자회가 끝나기도 전에 피정 동반하러 이곳 제주에 와 있습니다.

오늘 너무  늦게 일어나기도 했고 피정 강의 준비를 해야 하기에 새로운 강론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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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는 모두 주님의 소작인이다>
-착한 소작인의 삶-

참 어렵고 힘든 것이 사람이, 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평생 공부가 참 사람이 되는 참내가 되는 공부입니다. 평생 공부해도 될까말까한 참사람되는 공부입니다. 새벽 인터넷 동영상 하나를 잠시 봤습니다. 장자 명언 8가지 이런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라, 뒷통수친다는 것입니다. 이간질하는 사람, 음흉한 사람, 단점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무례하고 불손한 사람, 자기 말만 하는 사람,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 아첨과 아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정말 공감이 가는 말마디 였습니다.

사람은 보통 살아온 대로 삽니다. 사람은 고쳐쓸 수가 없다고 합니다. 원판 불변의 법칙이란 말도 있읍니다. 어떻게 살아야하나? 어떻게 참사람으로 살 수 있나? 고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을 약육강식, 생존경쟁, 각자도생, 승자독식의 시대라합니다. 인간관계도 답이 없어 참 어렵습니다.

8월 중순부터 해온 제 영적습관도 도움이 될 듯하여 다시 소개합니다. 저는 기상하여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성호경과 주모경을 소리내어 바친 후 양손을 활짝 펴고 소리내어 만세육창 및 고백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세상이 하도 어지러우니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릅니다. 이 또한 참사람이 되기 위한 분투의 노력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만세-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이렇게 하루를 만세육창으로 시작하면 심신이 상쾌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하루중 삶이 무기력해질때 역시 만세육창을 하고 다시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여섯 번째 “우리 가정 만세!”로 바꿔부르면 됩니다. 그리고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다.” 라고 고백합니다. 좌우 이념이 너무 첨예한 대립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념보다는 민생에, 상식과 양식에 기초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신간 소개에 나온 책 제목과 일부 소개된 내용에도 공감했습니다.

“거룩하라, 세상적이지는 마라(Holy, not Worldly)”

책 제목입니다. 이래서 가톨릭 신자들의 평생교육에 평생성사가 되는 성체성사와 고백성사가 참 좋으니 책 제목대로 살 수 있는 은총을 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속에서 살지만 세상적으로 살지 않고 거룩하게 살게 하는 성사은총입니다. 참사람이 되는데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기도-회개-말씀-성체가 포함되어 있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면서 늘 새로워지면서 주님을 닮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교황님의 책 서문내용입니다.

“신자들의 삶은 전쟁입니다. 우리 자신을 닫아버리려는 유혹을 극복하려는 내적전쟁입니다. 우리의 행복을 갈망하는 우리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안에 사시도록 노력해야 하는 전쟁입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전쟁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우리 안에서 승리하도록 할 때, 우리는 완전히 고양되고 우리 존재는 무한한 분의 광채에 의해 빛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추종자로서 우리가 수행해야할 전쟁은 무엇보다 영적 세속성에 대한 전쟁입니다.”

이래서 우리 믿는 이들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거룩한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오늘 복음의 악한 소작인들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비유라기 보다는 우화라 함이 맞습니다. 포도밭이 상징하는바 세상이요 포도밭 소작인들이 상징하는 바,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니 그대로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오늘날 역시 복음의 악한 소작인들 같은 이런 배은망덕한, 무지막지한 제 분수를 모르는 무지한 탐욕의 사람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그대로 지옥도와 같은 복음장면이요 오늘의 세상같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을 무자비하게, 심지어는 주인의 아들까지 살해하지 않습니까! 이런 예언자들에 대한 박해는 예나 이제나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살해된 아들은 우리 구원자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악의 승리인 듯 하지만 궁극에는 하느님의 승리, 파스카 예수님의 승리입니다. 다음 예수님의 말씀이 답입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들어본 적이 없느냐?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줄 것이다.”

아, 바로 우리의 신원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임받은 착한 소작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기반基盤으로 하는 주님의 착하고 성실한 소작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랑스런 신원입니까! 파스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영적전쟁은 백전백승이요 언제나 주님의 착하고 성실한 소작인답게 살게 해줍니다.

이런 영적승리의 삶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그러니 이런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를 위임받은 우리 소작인의 우선적 책무責務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참사람의 참내가 되고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다음은 회개의 삶입니다. 끊임없이 선택하고 훈련하고 습관해야 할 회개입니다. 이런 참된 회개 없이는 살아온대로 삽니다. 사람을 고쳐쓸 수 없다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포도밭의 노래에 나오는 주님의 탄식에 대한 답도 회개뿐입니다.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들포도를 맺었느냐?…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요, 유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나무라네. 그분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흘림이 웬말이냐?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말이냐?”

그대로 오늘의 불평등과 불의가 만연된 포도밭 세상에 대한 주님의 탄식같습니다. 바로 이런 지옥같은 세상속에서 세상의 빛이 되어, 세상의 소금이 되어 천국을 살아가야 할 우리 믿는 이들에게 회개 여정의 삶은 절대적입니다. 바로 회개의 은총이 우리를 무지에서 벗어나게 하고, 세속적이 아닌 거룩한 삶을,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끊임없는 회개없이는 광야인생중 괴물이나 악마,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회개의 은총만이 용서받고 치유받아 건강한 정신, 건강한 마음, 건강한 영혼으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며 살게 합니다. 회개하라 연장되는 삶입니다. 회개없는 삶은 무의미합니다.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 찬미입니다. 오늘 주일 아침, 무려 한시간 동안 하느님 찬미기도를 목청껏 노래하며 새삼 찬미하라 연장되는 삶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 찬미없는 삶 참 무의미합니다. 회개의 기쁨 없이, 찬미의 기쁨 없이 무슨 기쁨으로 광야인생 살아갈 수 있을는지요. 구체적으로 바오로가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하늘나라 소작인들인 우리에게 참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바오로를 대신 하여 말씀드립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

자나깨나 우선적 할 일은 기도입니다. 끊임없는 한결같은 간절한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의 삶이 영적건강,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그리고 다음의 덕들을 간절히 추구하고 마음에 간직하는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바로 다음의 덕들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다음 권고 말씀도 고무적입니다. 용기와 힘을 줍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선택하여 마음에 품고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이래야 품격있는 거룩하고 고결한 인품의, 맑고 향기로은 참사람의 주님의 소작인들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거룩하고 덕스런, 착하고 성실한 주님의 소작인들로 살아가는데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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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마태21,38)

<성실한 일꾼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21,33-43)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의 악한 마음을 지적하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그들에게 들려주십니다.

‘포도밭’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포도밭의 소작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입니다. ‘울타리’는 ‘율법’이고, ‘탑’은 ‘성전’입니다.

그리고 ‘포도밭 주인이 소작인들에게 보낸 종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위해 파견되어진 수많은 예언자들’입니다. 그리고 ‘포도밭 주인의 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다른 소작인들’은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믿는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인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가 이 복음을 듣는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하나는, 선택되어짐(세례성사)이 구원의 절대적 보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례의 선택과 그에 따른 합당한 열매(사랑실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스라엘의 거부(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박해)로 인해, 구원의 대상이 유다인들에게서 이방인들에게로 바뀌었듯이, 구원의 문은 올바른 믿음과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이들에게로 끊임없이  열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포도밭 주인의 소작인들인 우리의 지금 모습은 어떠한가? 하느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사명에 충실한 소작인들의 모습인지? 아니면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모습, 불충실한 소작인들의 모습은 아닌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성찰해 보는 하루, 그래서 조금 더 가까이 구원자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필리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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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cTwD-y8tgf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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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마태 21, 39)

누가 포도밭의
주인인지를
묻습니다.

우리가 믿는
우리의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 묻습니다.

아직도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우리들 삶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들까지
붙잡아 던져
죽여 버립니다.

예수님의 운명을
우리들에게 미리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함정에 빠지는
것은 언제나
우리자신뿐입니다.

하나도 바뀐 것이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온 정성을
다 바치는
하느님까지
죽이려 합니다.

누가 하느님이지
알 수 없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하느님까지 밟고
우리의 뜻을
이루려 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생명의
주인이 불명한
삶은 언제나
위험하고
위협적입니다.
이제는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시고
하느님께서
주시고
하느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삶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디를 가고
어디를 바라보아도
내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임을
알게됩니다.

믿음이란
우리에게 오신
사람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섬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필요한 존중의
여정이
하느님 백성의
여정입니다.

그 여정에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애매모호한
믿음을 반성하는
주일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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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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