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계명에 충실한 것이 구원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35,1-15 1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제물을 많이 바치는 것이고 2 계명에 충실한 것이 구원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3 은혜를 갚는 것이 고운 곡식 제물을 바치는 것이고 4 자선을 베푸는 것이 찬미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5 악을 멀리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고 불의를 멀리하는 것이 속죄하는 것이다.6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타나지 마라.7 사실 이 모든 것은 계명에 따른 것이다.8 의로운 이의 제물은 제단을 기름지게 하고 그 향기가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올라간다.9 의로운 사람의 제사는 받아들여지고 그 기억은 잊히지 않으리라.10 기꺼운 마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네 손의 첫 열매를 바치는 데에 인색하지 마라. 11 제물을 바칠 때는 언제나 즐거운 얼굴을 하고 십일조를 기쁘게 봉헌하여라.12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네게 주신 대로 바치고 기꺼운 마음으로 능력껏 바쳐라. 13 주님께서는 갚아 주시는 분이시기에 일곱 배로 너에게 갚아 주시리라. 14 그분에게 뇌물을 바치지 마라. 받아 주지 않으신다. 15 불의한 제사에 기대를 갖지 마라.주님께서는 심판자이시고 차별 대우를 하지 않으신다.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복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8-31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31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오늘의 묵상
하나를 버리면 백을 얻는다
돈에 쫓기며 살던 여 사업가와 가난한 남자 화가는 한 스승에게 무언가를 배우고 삶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스승을 만난 5년 뒤 그 화가는 자기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자기만의 화풍을 구축해 자기 분야에서 대가가 된 것입니다. 허약체질이었지만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는 체력을 갖게 되었고 미루던 나쁜 습관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요들송을 하고 싶었는데 그것을 배울 시간적, 그리고 경제적 여유도 생겼습니다.
여 사업가는 자기의 회사를 해당 부분의 상징적인 회사로 성장시켰습니다. 엄청난 부를 가지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과거에 발목이 잡혀 거의 결정 장애와 같은 수준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그 다음에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같은 스승에게 배움을 받았던 화가입니다. 둘은 정원을 돌보며 화요일 저녁에는 노숙자를 위해 봉사를 합니다. 둘은 지금도 아들과 함께 스승이 가르쳐준 것을 실천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궁금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변화를 주었기에 사람의 삶이 저렇게 180도 바뀌었을까?’
먼저 이들의 스승은 ‘변화의 시작 5AM 클럽’을 쓴 로빈 샤르마입니다. 그의 지론은 아침을 지배하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기에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명상을 하고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별히 5시에서 6시까지의 시간을 놓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영과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영을 위해서는 기도나 명상이 좋고, 영혼을 위해서는 독서나 묵상, 그리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 좋으며 육체를 위해서는 운동이 좋습니다. ‘변화의 시작 5AM 클럽’은 이렇듯 신앙인들에게도 맞는 좋은 습관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이긴다는 것은 자신을 버린다는 것, 혹은 욕구를 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욕구는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66일간의 습관달력을 만들어 습관들이기를 해보라고 합니다. 처음 20일은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어려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음 20일은 그 습관이 몸에 익는 시간이며, 마지막 20일을 잘 버티면 나중엔 큰 어려움 없이 저절로 눈이 떠지고 저절로 운동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1년, 2년이 지나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자신과 다르게 바뀐 자신의 삶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결국 모든 자기계발서들은 자신을 이기지 못하면 세상에서도 패배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버린다’는 것은 ‘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끊는 것이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자신을 버릴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을 버릴 때 우리를 인정해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당신 복음 때문에 버릴 수 있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아기는 부모를 위해 살고 커서는 나를 위해 살며 신앙을 가지면 하느님을 위해 삽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해주셨으니 이 생을 헛되이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면 이제 이 생을 헛되게 만드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해야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교만의 욕구를 이기게 하고, 자선은 돈의 육구를 이기게 하며, 단식은 육체의 욕구를 이기게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도 자신이 버린 것의 백 배의 보상을 받게 됩니다. 물론 이것을 시작하지 못하면 영원한 생명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자신을 이기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며 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즐거움이 없는 것은 어쩌면 육체적인 즐거움을 끊지 못해서이고 돈이 부족한 것은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일 수 있으며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면 이는 애정에 너무 집착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조금은 역설적이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죽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다고 하신 것처럼 더 풍부해지기 위해 버리는 연습부터 해야 합니다. 습관달력을 만들고 은총을 더 풍부하게 받기 위해 비우는 연습을 시작해봅시다.
-전삼용신부-
——————————————————————–
비우는 만큼 채워주신다
세상 사람들은 소위 출세를 하려고 애를 씁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며 권력을 누리려고 합니다.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잇속을 챙기려 합니다. 그러나 그 출세라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랐습니다”(마르10,28).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구원 받는다는 것을 출세하는 정도로 생각하였나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렸다고 자랑 삼아 말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내가 모든 것을 버렸으니 한자리 주십시오.’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 예고하셨을 때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하는 문제로 길가에서 논쟁한 것에서 드러났고, 세 번째 예고를 하셨을 때에도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도록 해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린 이유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버려야지, 자신을 위해서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을 위해서 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하고, 자신을 위해서 살려면 예수님을 버려야 합니다. “사실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버린 사람은 그것을 버렸다는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좋아했던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함께야). 세상에서는 많은 것을 가진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권력을 지닌 것을 첫째로 여기지만, 하늘에서는 많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를 봅니다. 무엇을 위해 썼느냐가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내가 잘 먹고 잘 입고 편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느님 앞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영원한 생명, 구원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룰 수는 없지만 버려야 할 것을 하나씩 기쁘게 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고 내가 버린 것은 무엇인가요? 아니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요? 재물, 권력이나 명예. 자식이나 건강을 첫째라고 생각한다면 그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주님 마음에 드는 꼴찌의 자리를 차지하여 마침내 천상에서 첫째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인간관계나 소유물이 영원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말합니다. “모든 것에서 마음을 비우고 주님만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비우는 만큼 그분께서는 채워주실 것입니다.” 지상의 것들을 버리는 것이 그에 상응해서 천상의 것들을 채우는 것이라는 깨우침을 얻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베드1,13-15의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나누어 봅시다.
2. 우리가 채우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는 욕심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왜 욕심은 채워지지 못하는 걸까요? 욕심을 버리려 할때 세속에서 오는 충돌은 어떤게 있을까요?
3. 우리가 세속에 있는걸 버림으로써 주님께서 채워주신 경험이 있는지 나누어 봅시다.
4. 어느날 신앙에 대한 꿈이 커져 주님의 부름속에 종신 봉사자의 길을 걷기로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이해 못하는 가족들이 따가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어떻게 가족을 설득하겠습니까? 만약 가족이 반다한다면 봉사자의 기를 포기하는게 맞는건가요?
5. 왜 우리 종교에는 종신 봉사자가 많이 없는지, 그런 자리가 왜 없는지 편하게 이야기 해봅시다.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