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아침 속에서
(The Risen Christ)
캐릴 하우스랜더 성바오로 출판사 1993년
그분은 그 옛날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다시 부르셨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 삶 깊숙이 들어오셔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부활은 믿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 매일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부활하신 그분을 삶의 터전에서 늘 만나뵙게 될 때 우리는 충만한 기쁨으로 덩실덩실 춤추며 살 것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비를 보다 더 새롭고 감동깊게 묵상하기를 원하는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그 행복한 삶으로 그들을 초대하는 책이다.
캐릴 하우스랜더 는 1901 년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1954년 53 세를 일기로 짧은 생애를 마감하기까지, 그녀는 교회에 많은 영성적인 글을 남겼다. 그녀는 타고난 직관력으로 우리 주위의 일상과 영적인 것들을 접목시켜 이를 아주 생생하고도 감동적인 글로 표현해냈다. 캐릴 하우스랜더는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우리와 함께, 우리와 똑같이 현대를 살아온 여성이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별거하는 아픔을 겪고 자랐으며, 신앙생활을 중단하기도 했고, 20 대 초반까지 자유분방한 보헤미안의 생활을 추구하며 술과 담배와 애정행각 속에 파묻혀 지내기도 했다. 그녀가 신앙을 다시 되찾은 때는 그녀가 20 대 중반에 들어설 무렵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연일 나치 독일의 런던 공습이 계속 되는 동안, 그녀는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전쟁이라는 극도의 공포와 혐오감 속에서도 아무런 계급의식 없이 서로를 의지하며 서로를 돕고 살아가려는 사람들 사이의 아름다운 삶을 발견하는 인상 깊은 체험을 하게 된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려는 가치관과 이웃 사람들의 삶에 대한 예민한 관찰을 통해 “일상의 영성”을 글로 옮길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캐릴 하우스랜더는 신경정신과 환자들과 지체장애아를 돌보는 일에 몰두했다. 비록 그녀가 정식으로 교육받은 의사나 심리학 박사도, 사회사업가도 아니었지만, 그녀에게는 이들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녀는 유머도 뛰어나 주위 사람들에게서 “날카로운 혀를 가진”(sharp tongue)으로 불렸고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온갖 질병을 가지고 살아가듯, 그녀 역시 일생을 현대의 많은 유행병들 속에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하느님의 갈대‘, ‘흔들리는 말 가톨릭’, ‘우리 안개속에 그리스도‘, ‘아기 예수의 수난‘, ‘십자가의 길‘, ‘아기 예수의 작은 길'등이 있다.
온종일 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부활’이다. 작은 갓난 아기가 세례를 받는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새로운 생명 안에서 다시 살고 굳건해 지신다. 오랜 세월 자신의 회심문제로 고민한 끝에 정신적 공허감에 부대끼고 시달렸던 사람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으로 되돌아오신다. 소년 하나가 좁다란 고백실에서 단조롭기 짝이 없는 죄 이야기를 웅얼거리고 나면 사죄의 말씀이 뒤따른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마음속에 다시 생활하시기 시작한다. 의지할 때 없는 노파 하나가 양로원에서 숨을 거둔다. 그녀의 눈을 감기고 평온한 얼굴을 천으로 덮어주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특별한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원하신 아버지의 눈에는 그리스도께서 ‘죽음’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고 계신다.
날마다 무수한 사람들이 성체를 받아 모신다. 그때마다 제단에서 희생제물이 된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을 무덤삼아 드러누우신다.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못할 곳이란 없다. 그들이 이렇게 그분을 찾아오는 것은 감미로운 ‘위로의 향기’ 때문이 아니라 ‘끈질긴 사랑의 의지’ 때문이며, 실제로 그들 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 내보이는 양순하고 헌신적인 의지에 응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속에 생명으로 오시고 영혼 안에서 부활을 실현하고 계신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별 볼일 없지만, 실상 그들과 그들의 무감동적인 영성체 덕분에 세상이 증오와 오만에 휩싸여 끝난 것 처럼 보일 때에도 ‘사랑이신 그분’ 께서는 형언할 수 없는 ‘겸손’으로 다시 살아 오신다. ‘부활’은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다. 사랑은 창조하며, 사랑은 각각의 생활척도를 기쁨으로 세운다. 사랑은 빛이요 평화다. 사랑은 우리를 용서하고 치유하고 뒷받침하고 하나로 만든다. 사랑은 세상에 생명을 주고 생명에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사랑은 먹거리요 의복이며,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이 된다. 사랑은 빵이다.

그분은 그들의 귓가에 울리는 음성으로 다가올 뿐 아니라 그들의 영혼 속에 침묵으로 자리하신다. 그분은 암흑 속에서 태동하여 오만가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무수한 꽃들로 피어나는 바로 그 생명이 되어 주신다. 그분은 세상 끝날까지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두려움과 죄, 슬픔과 죽음을 물리쳐 주신다. 그분은 이 기쁨과 평화를 우리네 고통 한가운데 심어 놓아, 당신이나 우리 모두를 위해 고통과 기쁨이 서로 양립하는 두 가지 실재가 아닌 ‘단일한 실재’, 곧 ‘사랑’으로 피어나게 하신다. 그러면서 당신의 최고의 사랑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어, 서로를 사랑하고 위로하고 치유하는 데 활용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진실로 죄와 슬픔과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어 서로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시키는 신비로운 경지가 열린다.
우리는“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라는 이 사랑이 어떤 사랑 인지 안다. 이것은 십자가 위에서 절정을 이룬 바로 그 ‘극치의 사랑’이다 이것은 은총이 작동하는 신비로운 어둔 밤에 수난의 고통을 요구하신 아버지의 뜻을 혼연하게 받아들인 사랑이다. 이것은 순종하되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는 사랑’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을 포용하여 어느 한 사람 배제하지 않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를 모두 안아들이는 사랑이다. 우리의 사랑은 바로 이런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사랑이어야 한다. 우리의 사랑은 자기를 죽이고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로 흘러 드는 사랑이어야 한다.
우리의 눈앞에 누룩 없는 빵이 놓여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한다. 하지만 모양이나 감촉이나 맛은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다. 이 복되신 성사가 우리 일상생활의 일부로 완전히 굳어진 나머지 우리는 어떤 기적 보다 더 큰 기적이 날마다 우리 가운데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은총, 통회, 회심, 희망, 용서, 사랑 등을 수반하는 이런 기적들도 눈치채거나 짐작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인간의 영혼 속에서 날마다 은밀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런 참된 기적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는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들이다. 지금도 여전히 “하늘나라를 이야기해주고” 있는 참 ‘기적’들은 이 세상 것들이 아니라 변함없이 우리들 안에 내재해 있는 것들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 자리하는 모든 사람들을 “또 다른 그리스도”로 볼 때,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무르익은 존경심과 객관적 타당성을 지니고 대하게 되며, 그 당연한 귀결로 그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그리스도의 손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고 기쁨 또는 슬픔 까지도 나의 것으로 수용하게 된다. 아울러 그분의 손에서 나오는 것 치고 우리의 최고의 행복을 위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믿게 되고, 그들이 행하는 일들과 그들이 청하는 요구들 모두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분이라는 사실도 점차 터득하게 된다.

일단 이 점을 이해하면 우리가 또다시 어떤 사람에게서 맛보는 지독한 좌절감이나 실망 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상실하는 일은 있을 수 없게 된다. 게다가 다른 사람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기쁨을 절대로 잃어버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 안에 자주 찾아드는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심지어는 죽음에 의한 이별까지도 우리를 끔찍스러운 괴로움으로 몰아가진 않을 것 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이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사람들 안에 거처하시는 목적이 당신의 사랑으로 ‘온 세상을 두루 비추고 따뜻하게 감싸는 데 있다’면, 대단한 재능 이라고는 전혀 없고 중책을 담당하고 있지도 않고 이 제까지 한 일 가운데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아무런 영향 력도 없는 사람들, 더욱이 하느님 자신의 뜻에 따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답답한 환경에 묶인 사람들을 선택하여 그같은 사명을 맡기신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진솔한 사실로 굳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바로 이런 삶들을 통해서 빛을 발할 수 있고 실제로 빛을 발하는 것이 그분의 사랑이다.
우리는 그분의 인성에 대한 생각을 그분의 몸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그분이 인간으로서 지녔던 영혼과 정신, 인간으로서의 감정과 개성과 기질 등 실제로 그분의 인간적 특성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치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려면 그분이 행하신 일들만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또한 그분의 품성을 터득하고 그분이 어른으로 성장할 때 거치신 행로를 거쳐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성장함으로써, 저버리는 장미처럼 덧없고 사소한 우리의 체험들이 그분의 빛으로 영원불멸의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제껏 그리스도보다 더 완벽한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완성된” 인간이라는 표현은 이전에는 불완전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만큼 올바른 표현이 못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시종일관 ‘완성체’로서 언제나 당신 내부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계셨지만, 서로 간에 친교를 이루도록 되어 있는 인간의 경우는 누구나 혼자서는 ‘불완전’하다는 사실 또한 알고 피부로 느끼셨다. 그분은 피조물인 인간의 상호의존성을 간파하셨고, 작은 일에서나 엄청난 일에서나 이 점을 친히 감지하셨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우리의 삶이 바로 우리와 그분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우리들 상호간의 교류에 있다는 점을 너무나 자주 깨닫지 못한다. 사실 우리는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그분의 사랑의 힘 덕분에 이웃 안에 내재하시는 그분께로 향하게 된다. .

그리스도는 상처를 그대로 지닌 채 부활하셨다. 오늘날 상처인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상혼”들을 안고 있기에 늘 제대로 인정받지는 못하는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 존재한다. 사람의 ‘손’은 그 사람 자신을 표현한다.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손’이다. 그가 한 일의 윤곽과 색깔 과 질감은 손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리스도가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기 훨씬 전부터, 노동으로 단단해 진 그분의 손은 장인의 손 답게 주름과 근육과 힘줄로 가득하고, 나무망치로 잔을 만들고 못을 박느라 여기저기 못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당신을 온전히 내어 주시는 완성의 순간에는 갖가지 형태로 베풂을 주시던 그 ‘두 손’은 무력하게 널빤지에 묶여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바로 그 순간 그분의 몸은 부서지고 심장은 파열하고 살과 피는 갈라졌다. 그리고 주님의 몸이 겪은 이 고난은 날마다 ‘빵을 떼는 데’서 드러나고 있다.

모든 것이, 심지어 기억들까지도, 심지어 자기권태까지도, 모조리 우리에게서 사라져간다. 이것은 빵을 뗌이요, 육체의 기도가 완성되는 지고한 순간이자 유한한 삶의 전례가 마감하는 종말이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친교를 위해, 그리고 그 친교를 통해 세상으로 깨어져 나가는 시간이다. 우리의 몸은 먼지로 돌아간 후에도 영원한 부활의 새벽이 영광스럽게 변모한 우리의 육체를 깨울 때까지 하느님께 충성을 바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나는 세상의 빛이요, 너희는 이 빛을 반사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당신과 우리 모두가 ‘동일한’ 바로 그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손으로 노동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랑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세상을 환히 비추도록 그분의 손과 마음과 정신 모두를 부여 받고 있다. 우리는 개인적인 삶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을 서로 주고받고, 성사를 통하여 그분의 삶을 주고받으며, 그 분의 빛을 통하여서는 그분의 정신을 주고받도록 되어 있다.
이 말은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가 삶 속의 모든 사물을 그분께서 바라보시듯이, 그분의 빛 속에서 그분의 마음으로 그분의 눈을 통해 바라본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는 물질주의적인 인간의 관점과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모든 사물을 바라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저주’로 보는 모든 것을 그분은 ‘축복’으로 보신다. 가난, 착취, 시련, 한탄, 박해와 욕설, 이 모든 것이 그분 보시기에는 ‘축복’이다.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오늘을 사고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2 천년 전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가시관을 쓴 채 살아간다는 의미다. 마음은 또다시 상처 입고 고통받고 생각에 골몰하게 될테지만 결국엔 ‘왕관’을 다시 쓰게 될 것이다.
세상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만큼 어두운 측면 또는 어두워 ‘보이는’ 측면은 여전히 중시되어야 하며,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모든 고통이 무슨 의미가 있고, 만일 고통이 겨냥하는 목표는 무엇이며, 고통이 허용되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를 묻기 마련이고 또 당연히 물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런 물음들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손수 짊어지기 위해 지상에 오셨고, 당신의 구원적 사랑으로 이룩된 영광을 인간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도록 하기 위해 “인간들 가운데 살고 계시다”는 관점에서 바라보여야만 해답이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수난 고통을 우리에게 ‘강요’하신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당신의 무한한 ‘사랑’인데 반해서 우리는 그분에게 ‘고통’을 안겨드렸다. 그러나 그분은 고통에다 사랑의 힘을 불어 넣으셨으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교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고통을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필요한 이상으로 고통에 깊이 침몰하지 않고 오히려 궁극에는 고통을 기쁨으로 변형시키는 어떤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 된다.
현재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부단히 ‘느끼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신심생활에서 끊임없는 감미로움을 체험하고 싶어하며 우리의 기도가 우리 안에서 한결같이 꽃으로 피어나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기도에서 감미로움을 얻지 못하면 낙담하고, 낙담한 나머지 아무런 ‘위로’가 없는 상태에서도 꾸준히 기도할 때 우리가 하느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리게 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계획에는 겨울이 있는가 하면 봄도 있고 꽃 피는 여름도 있으며 추수하는 가 을도 있다. 이 말은 우리가 불안을 떨쳐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그것을 우리가 믿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때도 있다.
그리스도는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다. 따라서 오늘날에 성령의 오심을 준비하는 일도, 그것이 혹독한 겨울을 맞고 있는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새로 태어나시는 탄생이 되었든 순교자들을 통하여 다시 피를 흘리시는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나오시는 부활이 되었든 간에, 2천 년 전이나 다름없이 똑같을 뿐이다. 마음을 차분하고 평온하게 유지하고, 순순히 받아들이고, “하느님 곁에 머무르면서” 세상의 생명이 그분 안에서 자라나 영원무궁한 기쁨으로 피어날 때까지 “그분과 함께 쉬는 것”이 곧 성령의 오심을 준비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묵상나누기>

각자가 생각하고 있는 ‘부활’에 대한 ‘고정관념’은 어떤 것이며, 이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새롭게 체험했던 또는 체험할 수 있는 ‘부활의 표징’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우리는 타인을 ‘또 다른 그리스도’로 보고 ‘사랑’으로 대할 때 비로서 서로를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시키는’ 놀랍고도 신비로운 체험을 할 수 있다. 나에게 이를 방해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살기위해서는 그분의 행적을 본받으려고 노력만으로 부족하고 그분이 지녔던 인간적 품성, 행로, 성장 등의 의미를 우리의 체험안에서 발견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우리는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끼고 싶어 부단히 노력하지만 때로는 현존을 느끼지 못하는 혹독한 ‘영적 겨울’을 겪게 되는데, 이를 잘 견디어 내었던 또는 견디어 낼 자신만의 방법이 있는가?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