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머튼의 영적일기
(The Sign of Jonas)
토마스 머튼/오지영 옮김 바오로딸 2009년
단조로워 보이는 수도 생활의 일상이 머튼에게는 온통 깊은 기도가 되고 명상이 되고 아름다운 한 편의 수필이 된다. 하느님 안에서 자기 삶을 읽어내는 사람의 하루는 이렇듯 새롭고 풍요롭다. 일상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삶이 지치고 힘들 때 토머스 머튼이 남긴 일기를 읽으면 하루의 단조로운 일과 사건 안에서 더욱 섬세하고 깊은 삶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토머스 머튼의 영적 일기”는 머튼이 수도원에서 쓴 개인 일기와 묵상을 모은 것이다. 그가 메모해 둔 소박한 생각들이 그의 경험이나 주변에 대한 깊은 반추와 함께 어우러진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고 이 일기를 통해 자신 안에 그리고 모든 것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열망으로 추구하는 머튼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우리에게 머튼을 만나고 그의 내면세계를 발견하면서 그와 통교하는 기쁨을 선사한다. 그의 진솔한 자기 나눔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은 머튼만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것이며 이미 우리 안에도 있는 것임을 말해 준다.

토머스 머튼은 1915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무명 화가였던 영국 태생의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와 영국을 오가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1938년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1939년 컬럼비아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화려한 작가 생활을 했다. 그는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은 신자였으나 회의에 빠져 무신론자로 지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내밀한 변화를 겪고 1938년 가톨릭으로 개종, 1940년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하여 1968년 태국 방콕에서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칠 때까지 수사와 영성 작가로 살았다. 1948년 자전적 일기 『칠층산』을 시작으로 70여 권의 책을 출간, 20세기 가톨릭 영성 작가로 자리 잡았으며, 침묵과 고독, 자연 속에서 기도하고 명상하며 관상하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그의 작품은 30여 개 나라에서 번역되었다. 국내에도 『칠층산』『가장 완전한 기도』『명상이란 무엇인가』『고독 속의 명상』『침묵 속의 만남』『새 명상의 씨』『묵상의 능력』『인간은 섬이 아니다』『평화론』 『토마스 머튼의 단상』을 비롯한 다수의 서적이 소개된 바 있다.

하느님이 니네베로 가라고 명령하신 요나 예언자처럼 나도 반대 방향으로 가려는, 거의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느님이 한 길을 가리키면, 내 생각은 온통 다른 곳을 향했다. 그 기적은 당신 자신의 부활의 징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요나의 기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간다. 내 삶은 특별히 위대한 인호로 봉인되었다고 생각한다. 내 존재의 뿌리에 찍혀 있다. 요나처럼 나도 역설의 고래 배 속에서 내 운명을 향해 여행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모든 것 위에 있다. 우리가 창조된 목적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완덕이며 성화이다. 사랑만이 필요하다. 사랑은 모든 규정과 법을 뛰어넘는다. 사랑은 우리를 하느님과 직접 묶고 우리 서로를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묶는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사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바로 그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나는 하느님이 나를 고독으로 이끄시기 위해 모든 방법을 활용하신다는 것을 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일에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찾을 수 있게 될 때까지, 내 삶의 모든 순간에 개입하는 것은 무엇이나 부족한 세상을 일깨워 나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그때 모든 것은 또한 나에게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기도의 위로, 지성의 빛, 의지와 사려 깊은 열정은 나를 사로잡는 모든 것을 불태워 나를 가볍게 한다. 나는 아무것도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없다. 이런 모든 것 안에 있는 고통은 지금처럼 내 영혼이 나약할 수록 나에 대한 하느님 사랑을 보증한다. 고통은 고독을 약속한다.

우리에게 대단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가엾은 존재들이다. 우리가 죽어야 한다면 초라하게 죽을 것이다. 우리에게 위대함이란 어떤 것도 없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 우리가 바치는 희생은 아마 단조롭고 불쌍하고 품위 없는 것이리라. 그런데도 그것은 결국 가장 위대한 영광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우리를 통해 악에서 승리하시려면, 현세의 부당하고 어리석은 세력에 의해 우리가 더욱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일은 나약하고 마음이 산란하고 분별력이 없으며 실수를 계속한다는 이유로 걱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내 힘으로, 내 방법으로 성인이 되지 못했다고 하느님께서 나를 덜 사랑하실까? 내 옆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서툴고 무기력해질 때 하느님은 나를 더 많이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내가 진심으로 순수한 은총의 하루를 보내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어여삐 보신다.

하느님의 은총이 사람들 안에서 작용하는 것을 보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이에 대해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의 열정이 은총과 조화를 이루어 거룩한 것들이 그에게 자연스럽게 그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창조하시려는 것이다. 하느님의 생명이 온전히 우리 것이 되고 우리 생명은 하느님의 것이 되는 놀라운 자발성을 하느님은 우리 안에 창조하신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처럼 행동하도록 타고났으며, 하느님의 빛이 우리 눈에서 빛난다.

하느님 사랑의 이끄심을 받고 행동하는 것 이외의 모든 것에는 무관심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기쁨의 원천이다. 많은 전리품을 찾아낸 사람처럼 나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기뻐할 것이다. 어떤 것을 원하고 찾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뜻을 열망하고 찾는 데 의미가 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은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과 같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 세상을 천국으로 바꾸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천국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전부다. 사랑만으로 충분하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되고 고결하게 되는 것 외에 더 값진 것은 없다.
어떤 때는 내 의지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어리석은 갈망은 나의 깊은 내면을 흔들어 하느님한테서 멀리 떨어지게 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하도록 방향을 바꾸려 한다. 나는 내 마음 한가운데 있는 불로, 사람들을 어루만지려 한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 자신을 버려야 한다. 나는 결코 나의 것이 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부끄러움과 외로움과 무기력을 느낀다. 피조물들은 순수하고 완전하며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의 아름다음을 보여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햇빛이 맑은 물에 반사되듯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서 거울처럼 비추어진다. 그러나 내가 물에 비친 빛을 마시려고 하면, 나는 그 반사를 흐트러뜨릴 뿐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외로움과는 다른 외로움으로 이 세상에 홀로 있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모든 것이었기에 혼자이셨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혼자다. 나는 부족해서 혼자다. 의존적이고 무력하고 우연적이어서 나는 혼자다. 그리스도께 온전히 신뢰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것이어서 죽음을 의미한다. 나는 이런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나의 두려움이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온전하게 살기 위해 죽어야 하는 내 죽음의 한 부분이게 하는 것이다.
내가 하느님의 것이 되려면 먼저 나의 것이 되어야 한다. 나는 적어도 내적으로 혼자여야 한다. 이것은 결심을 계속해서 새롭게 해야 한다는 의미다. 나는 사람들의 소유가 될 수 없다. 나의 어떤 부분도 하느님 외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나는 모두를 사랑하며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누구에게 묶이지도 않고 얽매이지 않아 하늘처럼 순수하고 자유롭다. 바람은 내가 걷는 들판을 차지한다. 나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그 어느 것도 나를 소유하지 않는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할 것이기에 나는 절대로 잊혀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는 무한한 신뢰의 원천이다.

모든 슬픔의 근원은 우리가 먼지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환상이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모든 기쁨이다. 하느님 안에서 먼지인 우리는 아름다운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류의 큰 슬픔이 기쁨으로 바뀐다. 행복의 비밀은 슬픔을 이긴 그리스도의 빛으로 볼 때 이외에는 어떤 슬픔도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슬픔은 어떤 모양으로든 우리의 행복에 도움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 특히 관상 생활은 새로운 곳과 예상하지 않은 곳에서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가까이 계시는데 우리가 그분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그런 깨달음은 더 순수하고 그 결과는 더 강렬하다.

우리의 진정한 위대함은 살아 있는 더욱 겸손하고 순수한 믿음에 있다. 믿음이 단순하고 순수할수록 믿음은 그만큼 가까이 우리를 무한히 위대하신 하느님께 인도한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지고, 더 큰 영광과 예외적 체험과 느낌과 신비한 위로를 얻으려는 욕심에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질 것이라고 한 이유이다. 이런 것들로 더 부자가 되려는 사람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더 가난한 사람이 될 것이다. 하느님은 모든 위대함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시는 까닭이다.
나의 새로운 사막은 무엇인가? 그것은 연민(compassion)이다. 연민 또는 동정의 황무지만큼 지독히 아름답고 무미건조하고 결실이 풍부한 사막은 없다. 연민은 백합처럼 번성하는 유일한 사막이다. 연민은 작은 못이 될 것이다. 이곳에서 싹이 돋아나 꽃을 피우고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다. 바로 이 사막에서 메마른 땅이 샘으로 변하고 가난한 사람이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다. 모든 이의 양식, 모두에게 속하면서도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제대 위의 성체처럼 격리되어 혼자 사는 그런 은수생활을 나처럼 하는 사람들은 끝이 없을 것이다.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부서진 내 마음에 앉아 당신 복음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설파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을 기다리기에 그분을 환영한다. 그러나 그분은 도착하시기도 전에 지나가셨다. 오시기도 전에 가버리셨다. 영원히 돌아가셨다. 그분은 지나가시기도 전에 벌써 영원으로 사라지셨다. 그분은 현존하시며, 현존하지 않으시기도 한다. 그분은 모든 것이며 아무것도 아니다. 빛도 어두움도 아니다. 높지도 낮지도 않다. 이쪽 편도 저쪽 편도 아니다. 오로지 영원하시고 영원하시다. 그분이 지나가는 바람에 천사들이 외친다. “거룩하신 분이 지나가신다.” 그래서 나는 생명과 밤, 낮과 어두움, 삶과 죽음 사이에 날갯짓이 내는 바람속에 죽은 듯 누워 있다. 이는 내 육신의 거룩한 땅이며 하늘로 가는 문을 열어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은 많은 사람들은 요나와 고래를 구별하는 어려움 없이 심연에서 깨어났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고래다. 요나는 바다 한 가운데 버려진 채 헤엄치고 있다. 그러나 죽어야 할 것은 고래다. 요나는 죽지 않는다. 우리가 그 둘을 구별할 줄 모른다면, 우리가 고래를 더 좋아해 요나를 바다에서 건지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고래와 예언자는 곧 돌아와 헤매다 다시 만날 것이다. 또다시 고래는 예언자를 삼킬 것이다. 죽음이 다시 생명을 삼킬 것이다. 이 마지막 상황은 첫 번째보다 더 나쁠 것이다.

우리는 요나를 고래한테서 구해야 한다. 요나가 자유로워져 열심히 기도하며, 올바른 정신으로 자유롭고 거룩해져 바닷가를 걸을 때 고래는 죽어야 한다. 건전한 무지에서 오는 죽음에 대한 열망의 의미, 맑고 깨끗함에서 찾는 평화의 의미, 별빛을 따라 걷는 것, 하느님의 타고난 버팀목으로 들어올리는 것, 하늘나라의 기쁨, 흔치 않은 지혜의 순간에 찾아오는 평화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지성적이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필연코 죽어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 천국에서는 내가 바라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원한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게 될 것이다. 그대의 입이 잠잠하면 그대는 고요한 숲에서 쉴 수 있다. 그대의 상상력이 잠잠하면 숲이 그대에게 말을 건네며 그 비현실성과 하느님의 실재에 대해 말한다. 그대의 미움이 침묵하면 숲은 갑자기 장엄한 현실이 되고 하느님의 실재로 투명하게 타오른다. 창조는 처음에 개념으로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 같고, 그 다음에는 개념으로 하느님을 숨기는 것 같고, 마지막에는 하느님 안에서, 성령 안에서 그분한테서 나오는 모든 것과 함께 밝혀진다는 것을 이제는 내가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도다! 이것이 영광이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지만 탐하시지는 않으신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 사랑과 같지 않다. 그분의 사랑에는 소유욕이 없다. 그분의 사랑은 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에 순수하다. 그분에게는 배고픔이 없다. 즐거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그분을 모른다.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갈망하시지 않는 하느님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빚지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갚을 수 없다. 그들은 거룩하고 순수하며 무한히 그들 위에 있는, 창조되지 않은 존재로 계시는 하느님 안에 현존한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과 접촉하거나 섞이지 않고, 그들 기쁨의 단계로 내려가시지 않고도 당신의 비밀, 당신의 순결, 당신의 존재, 당신의 자비를 그들과 나누신다. 그것이 우리가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분의 피조물이 그분에게 드려야 할 영광이다. 하느님의 영광은 피조물을 어루만지지 않고서도 그들 안에 현존하신다. 그들의 손에 만져지지 않고 그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면서도 무한히 떨어져 계시는 하느님이며 그들과 관계를 갖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이다. 그러나 그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께 그들은 가까이 가지 못한다.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수줍음은 하나다. 하느님의 영광은 그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알려지지 않은 채 그들 가운데 계신다.

저는 낮에 생각과 지성을 가지고 당신께 기도했습니다. 밤에는 당신께서 제 생각과 지성을 흩어 놓으십니다. 저는 아침 마다 지성과 열정을 가지고 당신께 나옵니다. 당신은 형언할 수 없는 이 밤에 고귀한 관대함과 감당할 수 없는 침묵으로 저에게 오시어 지성을 흩어 놓으시고 모든 열정을 좌절시키십니다. 제가 수도원에 들어온 동기를 백 번이나 주님께 설명했습니다. 당신은 들으시더니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모든 동기가 무의미하다는 것인가? 내 열정이 모두 환상이라는 말인가?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지 않는 질문을 내가 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내가 대답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한 질문을 하십니다. 나는 그 질문을 알아듣지 못한다. 오, 하느님, 저의 하느님! 밤은 낮이 꿈도 꾸지 못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깨어 있든 자고 있든 밤에게 활력을 받으며 자신의 파멸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람만이 자기가 건실하고 영원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희가 저희 자신에게 질문을 하고 결정을 내리면 하느님은 저희 결정을 날려 버리시고, 저희 집 지붕은 저희 위에 무너져 내리며, 높은 탑의 기초는 개미들에게 침식당합니다. 벽은 갈라져 무너져 내립니다.
지금 나의 온 존재는 종루로 불어오는 바람을 들이쉰다. 나는 문을 잡고 있다. 그 문을 통해 천국을 바라본다. 문은 암흑과 기도의 거대한 바다를 향해 밖으로 열린다. 죽는 순간에도 이럴까? 주님은 넓은 숲 쪽으로 문을 열어, 달 아래 있는 사다리를 오르게 하여 별들이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시려는 걸까? 아직 해답을 듣지 못한 같은 질문을 마주한다. 거기에는 당신이 돌보시지 않는 잎은 하나도 없습니다. 소리를 내기도 전에 당신이 듣지 않는 외침은 없습니다. 혈암에 흐르는 물마다 당신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당신은 모든 샘을 감추어 놓았습니다. 당신이 계획하지 않은 외딴집이 들어설 골짜기는 없습니다. 당신이 만들어 놓지 않은 드넓은 숲을 소유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이 낙원에서 들린다. 한때 하찮았던 것이 지금 소중한 것이 되었다. 지금 소중한 것은 하찮았던 적이 없다. 나는 하찮은 것을 늘 소중한 것으로 여겼다. 나는 무엇이 하찮은 것인지 모른다. 한때 잔인했던 것이 자비로운 것이 되었다. 지금 자비로운 것은 잔인했던 적이 없다. 나는 나의 자비와 나도 모르는 잔인함으로 요나를 어둡게 했다. 내 자녀 요나여, 나를 본 적이 있는가? 자비, 깊고 깊은 자비! 나는 우주를 끝없이 용서해 왔다. 나는 죄를 모르기 때문이다.

한때 가난했던 것이 무한한 것이 되었다. 무한한 것은 가난 했던 적이 없다. 나는 언제나 가난을 무한한 것으로 여겼다. 나는 부(富)를 좋아하지 않는다. 감옥 속 깊이 있는 감옥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현혹되지 마라. 세상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타락하고, 분(分)은 더 작게 쪼개져 남몰래 도망간다. 내 아들 요나여, 강물이 너를 멀리 쓸어가지 않도록 시간에 매달리지 마라.
내 품에서 주무시는 주님은 말로 만나는 것이 아니다. 생명에서 태어나는 생명, 지혜에서 태어나는 지혜로 만난다. 주님은 일치 안에 계신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주님은 사람들 안에, 사람들은 내 안에 살아 있다. 포기 안에서 포기, 공평 안에서 공평, 비움 안에서 비움, 자유 안에서 자유를 이룬다. 나는 혼자다. 주님도 혼자시다. 아버지 하느님과 나는 하나다.
한때 나약했던 것이 힘 있는 것이 되었다. 가장 나약한 것을 나는 사랑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나는 올려다보았다. 실체가 없는 것을 만졌다. 없는 것 안에 내가 존재한다. 거대한 태양이 떠오르고 사파이어 같은 이슬방울이 풀잎에 맺혀 있다. 날아가는 비둘기의 조용한 날갯짓에 잎새가 흔들린다.

<끝>
<묵상나누기>

하느님을 피해서 멀리 도망가려던 요나 예언자처럼 나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피해 멀리 달아나려고 하지는 않나요? 내가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기를 주저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신앙인은 ‘고독’속에서 하느님과의 ‘친밀’과 ‘하나됨’을 찾아야 하는데, 나에게 이를 방해하고 있는 것 중 가장 큰 것은 어떤 것일까요?

내가 ‘소유하려’ 하고 ‘속하려’ 하는 것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나의 어떤 부분도 하느님 외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고 순수하고 자유롭게 살려면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할까요?

내가 나약하고 마음이 산란하고 분별력이 없고 실수를 계속한다는 이유로 하느님께서 나를 덜 사랑하실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 잡힌 적이 있나요? ‘있는 그대로의 나’로 하느님께 나아가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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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저렇게 지는구나

삶이 이미 죽음과도 같았던 이들, 날마다 고통과 절망의 한숨을 토해 내야 했던 사람들! 그들이 예수를 만난 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삶은 예수의 특별한 관심사였다. 예수가 살아가던 당대의 사람들 중 억압받고 핍박받던 이들의 삶이 예수와 만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예수를 만나고 송두리째 인생이 바뀐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절박하게 그를 만나고 싶어하는 우리의 갈증을 조금이라도 풀어준다. 글쓴이 이현주는 1944년 충주에서 태어나 충주고를 졸업하고 서울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64년 조선일보에 동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많은 이들이 이 시대의 멘토로, 영성가로 꼽고 있으며, 글이 모이면 책을 내고, 부르는 곳이 있으면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모든 것에 자신을 활짝 열어둔 채 사랑을 배우며 사랑 그 자체이길 희망하며 목사, 동화 작가, 번역 문학가로서 동서양을 아우르는 글을 쓰면서 대학과 교회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알게 뭐야>,<날개 달린 아저씨>등의 동화집과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사람의 길, 예수의 길> <젊은 세대를 위한 신학강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 <호랑이를 뒤집어라> 등의 저서가 있으며, 번역서로는 <예수>, <민중의 복음>, <흔들리는 세대의 성인들> 외 다수가 있다.

참 재수 나쁜 날이었다. 그러나 돌아가 생각하면 얼마다 고마운 날이었던가? 나는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가 그들을 만났다. 로마인들이 창과 채찍을 휘두르면서 세 사람의 사형수를 끌고 형장으로 가고 있었다. 그 뒤를 아이들과 여자들 그리고 바리사이 복장을 한 무리들이 따라갔다. 또 십자가 처형이 벌어지는군! 나는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된 죄수들을 바라보았다. 그 세 죄수들 중 하나가 특별히 눈에 띄었다. 긴 머리카락이 이마와 뺨을 덮고 있었는데 몸에는 붉은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마에는 가시나무로 만든 커다란 관이 씌워져 있었다. 가시들이 머리를 찔러 거기에서 흘러내린 피가 얼굴과 목덜미를 붉게 물들였고 굵은 나무 기둥을 어깨에 메었는데 한쪽 끝이 메마른 땅에 닿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의 몸은 나무 아래로 깔리고 말듯 하였다. 로마 군인들이 비틀거리는 그에게 가죽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입에서는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직, 아침 햇살이 천지 사방에 고루 퍼지지도 않은 때였건만 마른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 오르고 세상은 온통 아우성이었다. 나는 한쪽 길가에 서서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죽음의 형틀을 메고 가는 저 세 사내는 무슨 죄를 졌기에 인간들의 미친 듯한 증오와 매질 속에서 무덤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건가? 사람이 형틀에 달려 목마르게 말라 죽는 모습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었건만, 그날 아침의 장면은 차마 태연스럽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인간들은 서로 사랑하며 감싸 주며 살아가는 일보다 서로 미워하고 죽이는 일에 저토록 몰두할 수가 있는 걸까?
일행의 저만큼 뒤에서 울며 따라오는 여자들이 보였다. 죄수들의 가족이 분명했다. 여자들은 큰 소리로 울지도 못했다. 그저 말없이 비통한 얼굴로 눈물을 뿌리며 비틀거리며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한쪽에 비켜서서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들은 천천히 내 앞을 지나갔다. 가시관을 쓴 사내의 가쁜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의 숨소리를 들었다. 들이마시기도 힘에 겹고 내쉬기도 힘에 겨운 숨소리였다. 그는 나무에 달리기 전에 이미 반쯤 죽어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가 기우뚱하더니 나의 예측대로 무거운 나무에 깔리면서 쓰러졌다. 쓰러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로마 군인들의 채찍이 바람을 가르면서 쓰러진 몸뚱이에 떨어졌다. 그러나 날카로운 채찍 소리만 들렸을 뿐 그의 몸뚱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순간 그의 눈을 보았다. 아무런 표정도 남지 않은 그냥 눈이었다. 다만 흰자위에 붉은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일 뿐이었다. 로마 군인들이 다시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채찍이 살갗을 찢을 적마다 그 부분이 약간 떨리다가 다시 멎었다. 아무리 채찍으로 갈겨도 쓰러진 그의 몸뚱이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의 피투성이 육신은 생명의 어머니인 대지의 품에 안겨 차라리 이제부터 시작되는 긴 안식을 즐기려는 것 같았다.

그때 한 로마 군인이 나를 손가락질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나는 어디로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억지로 나를 끌고가서 그가 메었던 나무를 내 어깨에 메어 주었다. 참으로 재수 없는 순간이었다. 나무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나무에 묻어 있는 끈적끈적한 피가 내 목덜미에 묻었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나는 투덜거렸다. 망할 놈의 세상이 온통 나를 두고 비웃는 것만 같았다. 재수 없게 걸려든 한 어수룩한 사내에 대하여 그들은 틈만 나면 지껄이고 웃어 대고 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폭력의 희생물이 된 나는 사내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해골터를 항하여 올라갔다. 내가 발걸음을 때어 놓자 쓰러졌던 그도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따라 왔다.
처음에 나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십자기를 등에 질 기력조차 없는 자라면 십자가에 매달릴 짓도 하지 말 일이 아닌가? 이 고약한 로마놈들의 형틀에는 아무나 달리는 게 아니었다. 무슨 엄청난 짓을 했기에, 무고한 자들을 얼마나 죽였기에, 저 사내는 제 힘으로 옮기지도 못하는 십자기를 져야 했단 말인가? 그리고 그것 만으로도 부족하여 아무 상관도 없는 나로 하여금 이 터무니 없는 고역을 치르게 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런 따위의 원망이나 잡념은 해골터가 가까워질수록 나의 머리에서 사라져 갔다. 온몸이 땀으로 젖고 숨 또한 가빠졌다. 처형장에는 이미 도착해 있던 로마 군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나는 그들이 나를 죄수로 착각하여 나무에 매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처형장은 조용했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까마귀 떼만 구름도 없는 하늘에 떠돌고 있었다. 이윽고 준비된 처형장에 이르자 그들은 내 어깨에서 나무를 내려놓고는 뒤따라오던 사내를 그 위에 눕혔다. 작업은 마련된 순서에 따라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진행되었다.
다른 두 죄수에 비하여 가시관을 쓴 죄수는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 군인들은 다른 두 사내를 나무에다 팔을 벌려 비끄러매었다. 그런데 가시관을 쓴 사내는 손목을 나무에다 대고 거기에 기다란 못을 박는 것이었다. 두 번쯤 둔탁한 망치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나무에 박히는 경쾌한 못 소리로 바뀌었다. 피가 튀어 못질하는 군인의 손등을 적셨다. 그래도 못질은 계속되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떠오른다. 그 피투성이 손등의 모습! 갑자기 구역질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저 무서운 고문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가시관의 사내는 눈을 감고 어금니를 잔뜩 문채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그가 불쌍했다.

도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이런 꼴로 죽어 가야 한단 말인가? 그때까지도 나는 그가 누군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양 손목을 나무에 못질한 다음, 군인들이 죄목을 적은 나무 패를 그의 머리 위에 내다 거는 것을 보고 그가 ‘유다인들의 임금’ 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한 사내인 줄 알았다.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니? 그런 이름으로 무리를 이끌고 다니며 사람들을 학살하고 로마군과 싸우는 자들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듣던 바였다. 그렇다면 이 사내도 그런 자들 가운데 하나였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그의 얼굴에서 과거에 그가 지니고 있었을 난폭한 기질을 조금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만 지쳐 있었고, 자기 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놀라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의 광기어린 폭력 앞에서 그는 어쩔 줄 모르는 새끼 양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당하고만 있었다.
나는 피비린내 나는 현장을 두고 멀리 가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내 발은 그들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모두 끝까지 보아야 한다는 어떤 거역 못할 의지 때문에 우뚝 선 십자가 아래 조금 비켜선 곳에서 나는 죽어 가는 그 사내를 쳐다보았다. 군인들이 속옷까지 벗겼기 때문에 사내의 알몸이 땀과 피로 얼룩진 채 나무에 걸려 있었다. 내 눈에 그것은 피로 물든 거대한 깃발처럼 보였다. 해골터 꼭대기에서 온 세상의 인간들에게 무슨 엄청난 위험을 알리기 위해 나부 끼고 있는 경고의 깃발 같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웃기도 하고 떠들기도 하면서 수치스럽게 걸려 있는 그의 알몸을 구경하고 있었다. 할 수만 있었다면 나는 세상을 뒤집고 말았을 것이다. 숨죽여 흐느끼고 있는 여자들 곁에 서서 나는 이를 갈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분노가 내 몸을 활활 불태웠다. 이 무서운 죄악을 인간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용서받지 못할 폭력의 대가를 어떻게 지불하려는 것인가?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십자가에 매달린 가시관의 사내가 입을 열어 뭐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앞부분은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뒷부분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 사람들은 지금 자기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한테 용서를 빌고 있었다! 자기를 괴롭히고 형틀에 달아 죽이는 지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절하게 빌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금 자기에게 저지르고 있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짓인 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자기 혼자서 용서한다 해서 용서받을 수는 없는 일임을! 피해자가 자기라고 해서 자기 혼자 용서해 버리면 그것으로 해결될 그런 종류의 일이 아님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지금 자기에게 퍼부어지고 있는 폭행이 한 개인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두 인류에게 행해지고 있는 폭행인 것을. 그러므로 그것은 하늘이 함께 용서해야 할 일임을 그가 자기 아버지에게, 그를 세상에 탄생시킨 생명의 근원에게, 용서를 비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손과 발이 저려 왔다. 그것 이야말로 이 땅 위에서 있었던 가장 거대한 전쟁이었다. 생명과 죽음의 싸움이었다. 그 싸움판의 한 가운데서 나무에 매달려 죽어 가는 사내가 온 세상의 생명을 대신하여 최후의 일전을 감행하고 있었다. 어느덧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부딪쳤다. 그는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들리는 소리는 없었지만, 나는 그의 눈이 나에게 하는 말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형제여, 고마웠소. 나의 무거운 십자기를 대신 져 준 형제여. 나는 당신을 잊지 않겠소. 부디 형제도 저들을 용서하시오! 용서만이 끝내 생명을 지길 수 있다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잔잔한 미소의 물결을 훔쳐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앞으로도 그 든든한 어깨로 나의 짐을 져 주시오.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운 마음으로 사람이 사람의 짐을 져 준다면 그것을 이길 악마의 힘은 아무 데도 없을 것이오.” .
그때 그의 곁에 매달려 있던 두 죄수 중 하나가 소리를 질러 세상을 저주하더니 이어서 그에게 말했다. “여보게, 자네는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아닌가? 자네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 보게! 어쩌자고 거기 그렇게 매달려만 있는가?” 그의 소리를 듣고 모두 깔깔거리며 웃어 댔다. 호사스러운 웃을 입은 자들이 덩달아 떠들어 댔다 “이 사람이 죽은 라자로를 살렸다는 그 사람 아닌가? 어디, 자기 자신은 살려 내는지 지켜보세!” 그러자 군인들도 그에게 말했다. “네가 진정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먼저 너 자신을 살려 보아라!” 그러나 그는 이미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상태가 아니었다. 가까스로 고통을 견디며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맞아들이고 있었다. 지루하고도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러갔다.

갑자기 누구도 거역 못할 무거운 정적이 천지를 눌러 덮었다. 바람도 멎었고 태양도 빛을 거두었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거대한 하느님의 침묵이었다. 창세이래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던 시간마저 정지한 듯 모든 호흡이 중단되었다. 이윽고 가시관의 사내는 쉰 목소리로 “아버지, 제 영혼을 맡깁니다.” 하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가 숨을 멈추었을 때 죽었던 천지는 비로소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어왔고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그러나 그 순간 죽은 것은 나무에 달린 그 사내가 아니라, 매를 맞아 퉁퉁 부은 얼굴로 죽어 간 그 사내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나를 비롯한 온 세상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를 나무에 달아 죽임으로써 자신을 죽여 버린 살인자요 또한 사형수였다.
허둥지둥 비틀거리며 나는 해골터를 내려왔다. 그러나 내 가슴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다. 십자가 형틀을 메고 올라갈 때보다 빈손으로 내려가는 길이 훨씬 더 힘에 겨웠다. 아마도 그 무거운 형틀이 내 가슴 속에 묻혔기 때문이었으리라. 과연 그 일이 있은 뒤로 나의 삶은 바뀌고 말았다. 사람이 태어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여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일을 해도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인간을 미워했고 나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적수에 대하여 앙갚음의 기회를 노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나의 양심은 괴로웠고, 그래서 다시 용서와 화해를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의 원수는 로마인이 아니었다. 그들을 우리의 영토에서 몰아내는 것이 곧 해방이라는 열혈당원들의 주장은 엉터리였다. 싸움도 싸움만이 평화를 보장한다는 주장은 거짓이었다. 무기만이 우리의 생명을 지켜 준다는 주장 또한 속임수였다. 우리의 할 일은 억압자를 몰아내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억압자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인간 세상의 모든 투쟁이라는 것이 아무리 성스러운 이름을 지닌 것이라 해도 인간의 문제를 최후로 해결해 주는 방편이 될 수는 없었다.
숭고한 것은 생명이요, 오직 그것 뿐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최후로 용서를 갈구하던 가시관의 사내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세상은 그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뒤죽박죽이었지만, 그가 가까스로 뚫어 놓은 한 가닥 살아남는 길을 막지는 못했다. 나는 그가 마침내 모든 생명 있는 자들의 그리스도로 되살아난 사실을 알고 있다. 두 번 다시 그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가 옛 무대인 갈릴래아 들판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고도 했다.
그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다가 억지로 그의 십자기를 져 주던 일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해골터에서 죽였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그는 생명 자체였고, 생명 자체가 생명을 지키고자 할 때 그것을 죽일 수 있는 힘은 어디에도 없었다. 증오와 저주 대신 용서를 빌었던 그 사람! 참으로 그는 최후의 승리자였고,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역사의 종착점에 이미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를 만났던 그날, 재수 없는 날이기는 했지만 참으로 나에게는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내 아들 ‘알렉산드로스’와 ‘루포스’, 이 녀석들이 말귀를 알아들을 만큼 자라면 맨 먼저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리라.(루카 23, 2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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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레네 사람 시몬은 십자가를 대신 지어주는 체험후에 그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가장 필요할 때 예수께 도움을 주었던 시몬은 우연히 선택을 받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과연 ‘우연’이었을까요?

나에게도 이처럼 갑자기 십자가가 드리워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렇게 갑자기 드리워진 십자가를 지었던 적이 있었나요?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 어느 쯤을 걷고 있나요? 누구와 함께 걷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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