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저렇게 지는구나

삶이 이미 죽음과도 같았던 이들, 날마다 고통과 절망의 한숨을 토해 내야 했던 사람들! 그들이 예수를 만난 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삶은 예수의 특별한 관심사였다. 예수가 살아가던 당대의 사람들 중 억압받고 핍박받던 이들의 삶이 예수와 만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예수를 만나고 송두리째 인생이 바뀐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절박하게 그를 만나고 싶어하는 우리의 갈증을 조금이라도 풀어준다. 글쓴이 이현주는 1944년 충주에서 태어나 충주고를 졸업하고 서울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64년 조선일보에 동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많은 이들이 이 시대의 멘토로, 영성가로 꼽고 있으며, 글이 모이면 책을 내고, 부르는 곳이 있으면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모든 것에 자신을 활짝 열어둔 채 사랑을 배우며 사랑 그 자체이길 희망하며 목사, 동화 작가, 번역 문학가로서 동서양을 아우르는 글을 쓰면서 대학과 교회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알게 뭐야>,<날개 달린 아저씨>등의 동화집과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사람의 길, 예수의 길> <젊은 세대를 위한 신학강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 <호랑이를 뒤집어라> 등의 저서가 있으며, 번역서로는 <예수>, <민중의 복음>, <흔들리는 세대의 성인들> 외 다수가 있다.

참 재수 나쁜 날이었다. 그러나 돌아가 생각하면 얼마다 고마운 날이었던가? 나는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가 그들을 만났다. 로마인들이 창과 채찍을 휘두르면서 세 사람의 사형수를 끌고 형장으로 가고 있었다. 그 뒤를 아이들과 여자들 그리고 바리사이 복장을 한 무리들이 따라갔다. 또 십자가 처형이 벌어지는군! 나는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된 죄수들을 바라보았다. 그 세 죄수들 중 하나가 특별히 눈에 띄었다. 긴 머리카락이 이마와 뺨을 덮고 있었는데 몸에는 붉은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마에는 가시나무로 만든 커다란 관이 씌워져 있었다. 가시들이 머리를 찔러 거기에서 흘러내린 피가 얼굴과 목덜미를 붉게 물들였고 굵은 나무 기둥을 어깨에 메었는데 한쪽 끝이 메마른 땅에 닿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의 몸은 나무 아래로 깔리고 말듯 하였다. 로마 군인들이 비틀거리는 그에게 가죽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입에서는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직, 아침 햇살이 천지 사방에 고루 퍼지지도 않은 때였건만 마른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 오르고 세상은 온통 아우성이었다. 나는 한쪽 길가에 서서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죽음의 형틀을 메고 가는 저 세 사내는 무슨 죄를 졌기에 인간들의 미친 듯한 증오와 매질 속에서 무덤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건가? 사람이 형틀에 달려 목마르게 말라 죽는 모습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었건만, 그날 아침의 장면은 차마 태연스럽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인간들은 서로 사랑하며 감싸 주며 살아가는 일보다 서로 미워하고 죽이는 일에 저토록 몰두할 수가 있는 걸까?
일행의 저만큼 뒤에서 울며 따라오는 여자들이 보였다. 죄수들의 가족이 분명했다. 여자들은 큰 소리로 울지도 못했다. 그저 말없이 비통한 얼굴로 눈물을 뿌리며 비틀거리며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한쪽에 비켜서서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들은 천천히 내 앞을 지나갔다. 가시관을 쓴 사내의 가쁜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의 숨소리를 들었다. 들이마시기도 힘에 겹고 내쉬기도 힘에 겨운 숨소리였다. 그는 나무에 달리기 전에 이미 반쯤 죽어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가 기우뚱하더니 나의 예측대로 무거운 나무에 깔리면서 쓰러졌다. 쓰러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로마 군인들의 채찍이 바람을 가르면서 쓰러진 몸뚱이에 떨어졌다. 그러나 날카로운 채찍 소리만 들렸을 뿐 그의 몸뚱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순간 그의 눈을 보았다. 아무런 표정도 남지 않은 그냥 눈이었다. 다만 흰자위에 붉은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일 뿐이었다. 로마 군인들이 다시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채찍이 살갗을 찢을 적마다 그 부분이 약간 떨리다가 다시 멎었다. 아무리 채찍으로 갈겨도 쓰러진 그의 몸뚱이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의 피투성이 육신은 생명의 어머니인 대지의 품에 안겨 차라리 이제부터 시작되는 긴 안식을 즐기려는 것 같았다.

그때 한 로마 군인이 나를 손가락질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나는 어디로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억지로 나를 끌고가서 그가 메었던 나무를 내 어깨에 메어 주었다. 참으로 재수 없는 순간이었다. 나무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나무에 묻어 있는 끈적끈적한 피가 내 목덜미에 묻었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나는 투덜거렸다. 망할 놈의 세상이 온통 나를 두고 비웃는 것만 같았다. 재수 없게 걸려든 한 어수룩한 사내에 대하여 그들은 틈만 나면 지껄이고 웃어 대고 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폭력의 희생물이 된 나는 사내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해골터를 항하여 올라갔다. 내가 발걸음을 때어 놓자 쓰러졌던 그도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따라 왔다.
처음에 나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십자기를 등에 질 기력조차 없는 자라면 십자가에 매달릴 짓도 하지 말 일이 아닌가? 이 고약한 로마놈들의 형틀에는 아무나 달리는 게 아니었다. 무슨 엄청난 짓을 했기에, 무고한 자들을 얼마나 죽였기에, 저 사내는 제 힘으로 옮기지도 못하는 십자기를 져야 했단 말인가? 그리고 그것 만으로도 부족하여 아무 상관도 없는 나로 하여금 이 터무니 없는 고역을 치르게 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런 따위의 원망이나 잡념은 해골터가 가까워질수록 나의 머리에서 사라져 갔다. 온몸이 땀으로 젖고 숨 또한 가빠졌다. 처형장에는 이미 도착해 있던 로마 군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나는 그들이 나를 죄수로 착각하여 나무에 매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처형장은 조용했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까마귀 떼만 구름도 없는 하늘에 떠돌고 있었다. 이윽고 준비된 처형장에 이르자 그들은 내 어깨에서 나무를 내려놓고는 뒤따라오던 사내를 그 위에 눕혔다. 작업은 마련된 순서에 따라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진행되었다.
다른 두 죄수에 비하여 가시관을 쓴 죄수는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 군인들은 다른 두 사내를 나무에다 팔을 벌려 비끄러매었다. 그런데 가시관을 쓴 사내는 손목을 나무에다 대고 거기에 기다란 못을 박는 것이었다. 두 번쯤 둔탁한 망치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나무에 박히는 경쾌한 못 소리로 바뀌었다. 피가 튀어 못질하는 군인의 손등을 적셨다. 그래도 못질은 계속되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떠오른다. 그 피투성이 손등의 모습! 갑자기 구역질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저 무서운 고문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가시관의 사내는 눈을 감고 어금니를 잔뜩 문채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그가 불쌍했다.

도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이런 꼴로 죽어 가야 한단 말인가? 그때까지도 나는 그가 누군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양 손목을 나무에 못질한 다음, 군인들이 죄목을 적은 나무 패를 그의 머리 위에 내다 거는 것을 보고 그가 ‘유다인들의 임금’ 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한 사내인 줄 알았다.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니? 그런 이름으로 무리를 이끌고 다니며 사람들을 학살하고 로마군과 싸우는 자들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듣던 바였다. 그렇다면 이 사내도 그런 자들 가운데 하나였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그의 얼굴에서 과거에 그가 지니고 있었을 난폭한 기질을 조금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만 지쳐 있었고, 자기 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놀라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의 광기어린 폭력 앞에서 그는 어쩔 줄 모르는 새끼 양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당하고만 있었다.
나는 피비린내 나는 현장을 두고 멀리 가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내 발은 그들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모두 끝까지 보아야 한다는 어떤 거역 못할 의지 때문에 우뚝 선 십자가 아래 조금 비켜선 곳에서 나는 죽어 가는 그 사내를 쳐다보았다. 군인들이 속옷까지 벗겼기 때문에 사내의 알몸이 땀과 피로 얼룩진 채 나무에 걸려 있었다. 내 눈에 그것은 피로 물든 거대한 깃발처럼 보였다. 해골터 꼭대기에서 온 세상의 인간들에게 무슨 엄청난 위험을 알리기 위해 나부 끼고 있는 경고의 깃발 같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웃기도 하고 떠들기도 하면서 수치스럽게 걸려 있는 그의 알몸을 구경하고 있었다. 할 수만 있었다면 나는 세상을 뒤집고 말았을 것이다. 숨죽여 흐느끼고 있는 여자들 곁에 서서 나는 이를 갈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분노가 내 몸을 활활 불태웠다. 이 무서운 죄악을 인간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용서받지 못할 폭력의 대가를 어떻게 지불하려는 것인가?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십자가에 매달린 가시관의 사내가 입을 열어 뭐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앞부분은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뒷부분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 사람들은 지금 자기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한테 용서를 빌고 있었다! 자기를 괴롭히고 형틀에 달아 죽이는 지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절하게 빌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금 자기에게 저지르고 있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짓인 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자기 혼자서 용서한다 해서 용서받을 수는 없는 일임을! 피해자가 자기라고 해서 자기 혼자 용서해 버리면 그것으로 해결될 그런 종류의 일이 아님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지금 자기에게 퍼부어지고 있는 폭행이 한 개인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두 인류에게 행해지고 있는 폭행인 것을. 그러므로 그것은 하늘이 함께 용서해야 할 일임을 그가 자기 아버지에게, 그를 세상에 탄생시킨 생명의 근원에게, 용서를 비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손과 발이 저려 왔다. 그것 이야말로 이 땅 위에서 있었던 가장 거대한 전쟁이었다. 생명과 죽음의 싸움이었다. 그 싸움판의 한 가운데서 나무에 매달려 죽어 가는 사내가 온 세상의 생명을 대신하여 최후의 일전을 감행하고 있었다. 어느덧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부딪쳤다. 그는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들리는 소리는 없었지만, 나는 그의 눈이 나에게 하는 말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형제여, 고마웠소. 나의 무거운 십자기를 대신 져 준 형제여. 나는 당신을 잊지 않겠소. 부디 형제도 저들을 용서하시오! 용서만이 끝내 생명을 지길 수 있다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잔잔한 미소의 물결을 훔쳐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앞으로도 그 든든한 어깨로 나의 짐을 져 주시오.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운 마음으로 사람이 사람의 짐을 져 준다면 그것을 이길 악마의 힘은 아무 데도 없을 것이오.” .
그때 그의 곁에 매달려 있던 두 죄수 중 하나가 소리를 질러 세상을 저주하더니 이어서 그에게 말했다. “여보게, 자네는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아닌가? 자네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 보게! 어쩌자고 거기 그렇게 매달려만 있는가?” 그의 소리를 듣고 모두 깔깔거리며 웃어 댔다. 호사스러운 웃을 입은 자들이 덩달아 떠들어 댔다 “이 사람이 죽은 라자로를 살렸다는 그 사람 아닌가? 어디, 자기 자신은 살려 내는지 지켜보세!” 그러자 군인들도 그에게 말했다. “네가 진정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먼저 너 자신을 살려 보아라!” 그러나 그는 이미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상태가 아니었다. 가까스로 고통을 견디며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맞아들이고 있었다. 지루하고도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러갔다.

갑자기 누구도 거역 못할 무거운 정적이 천지를 눌러 덮었다. 바람도 멎었고 태양도 빛을 거두었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거대한 하느님의 침묵이었다. 창세이래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던 시간마저 정지한 듯 모든 호흡이 중단되었다. 이윽고 가시관의 사내는 쉰 목소리로 “아버지, 제 영혼을 맡깁니다.” 하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가 숨을 멈추었을 때 죽었던 천지는 비로소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어왔고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그러나 그 순간 죽은 것은 나무에 달린 그 사내가 아니라, 매를 맞아 퉁퉁 부은 얼굴로 죽어 간 그 사내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나를 비롯한 온 세상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를 나무에 달아 죽임으로써 자신을 죽여 버린 살인자요 또한 사형수였다.
허둥지둥 비틀거리며 나는 해골터를 내려왔다. 그러나 내 가슴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다. 십자가 형틀을 메고 올라갈 때보다 빈손으로 내려가는 길이 훨씬 더 힘에 겨웠다. 아마도 그 무거운 형틀이 내 가슴 속에 묻혔기 때문이었으리라. 과연 그 일이 있은 뒤로 나의 삶은 바뀌고 말았다. 사람이 태어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여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일을 해도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인간을 미워했고 나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적수에 대하여 앙갚음의 기회를 노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나의 양심은 괴로웠고, 그래서 다시 용서와 화해를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의 원수는 로마인이 아니었다. 그들을 우리의 영토에서 몰아내는 것이 곧 해방이라는 열혈당원들의 주장은 엉터리였다. 싸움도 싸움만이 평화를 보장한다는 주장은 거짓이었다. 무기만이 우리의 생명을 지켜 준다는 주장 또한 속임수였다. 우리의 할 일은 억압자를 몰아내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억압자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인간 세상의 모든 투쟁이라는 것이 아무리 성스러운 이름을 지닌 것이라 해도 인간의 문제를 최후로 해결해 주는 방편이 될 수는 없었다.
숭고한 것은 생명이요, 오직 그것 뿐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최후로 용서를 갈구하던 가시관의 사내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세상은 그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뒤죽박죽이었지만, 그가 가까스로 뚫어 놓은 한 가닥 살아남는 길을 막지는 못했다. 나는 그가 마침내 모든 생명 있는 자들의 그리스도로 되살아난 사실을 알고 있다. 두 번 다시 그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가 옛 무대인 갈릴래아 들판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고도 했다.
그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다가 억지로 그의 십자기를 져 주던 일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해골터에서 죽였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그는 생명 자체였고, 생명 자체가 생명을 지키고자 할 때 그것을 죽일 수 있는 힘은 어디에도 없었다. 증오와 저주 대신 용서를 빌었던 그 사람! 참으로 그는 최후의 승리자였고,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역사의 종착점에 이미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를 만났던 그날, 재수 없는 날이기는 했지만 참으로 나에게는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내 아들 ‘알렉산드로스’와 ‘루포스’, 이 녀석들이 말귀를 알아들을 만큼 자라면 맨 먼저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리라.(루카 23, 26-49)

묵상나누기
키레네 사람 시몬은 십자가를 대신 지어주는 체험후에 그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가장 필요할 때 예수께 도움을 주었던 시몬은 우연히 선택을 받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과연 ‘우연’이었을까요?

나에게도 이처럼 갑자기 십자가가 드리워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렇게 갑자기 드리워진 십자가를 지었던 적이 있었나요?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 어느 쯤을 걷고 있나요? 누구와 함께 걷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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