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하느님을 바라보다
일상에서 발견하는 나의 영성

윤주현 지음 가톨릭출판사2020년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하느님께서 씨앗처럼 선물해 주신 내 존재의 고귀함을 발견하고 진정한 내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각자의 고유한 길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고 자신만의 영성을 완성해 나아가야 합니다.

윤주현 신부님은 가르멜 수도회 소속 사제로 1987년에 입회해서 1995년 서울가톨릭대학교 졸업 후, 1998년에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로마 그레고리아눔에서 영성 신학을, 테레시아눔에서 신학적 인간학을 전공하고 2001년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2006년 아빌라 신비신학대학원에서 가르멜 영성을 전공하고 동同대학원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현재 가르멜 수도회 한국 관구 관구장이며,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교의 신학 교수로, 문화영성대학원과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영성 신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번역서 ‘그래도 희망’, ’갓 이즈 영’, ‘신학사3’, ‘나는 성령을 믿나이다3’, ‘신학적 인간학’,’아버지처럼 자비로워지십시오’, ‘성녀 데레사의 영성’, ‘프란치스코 생명’, ‘프란치스코 자비’, ‘신학적 인간학’ ‘교회론’ 등 33권의 저서와 역서를 출간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양적성장도 한계에 도달하고 세례받은 신자의 상당수가 냉담자이고 노령화로 접어들며 젊은이의 수가 감소하여 성소자의 부족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 난국을 헤쳐나갈 해답이 다름아닌 ‘영성’입니다. 교회와 수도공동체가 천상을 향한 비전을 갖고 천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간절히 염원하는 가운데 이 비전과 열망을 세상에 과감히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먼저 ‘영성적인 비전’을 갖고 그 비전을 몸소 살아갈 때, 사람들은 바로 그 비전을 보고 다시 교회의 문을 두드릴 것이며, 성소자들도 하나 둘 씩 수도공동체를 찾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를 통해 교회와 수도공동체가 쇄신되고 질적으로 더욱 깊어질 때 우리에게 미래도 열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성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헌장 40항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기 업적 때문에 하느님께 불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계획과 은총에 따라 부름받고, 예수님 안에서 의화되고 믿음의 세례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 본성에 참여하였기에 참으로 거룩하게 된 것이다”라고 세례를 설명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처럼 거룩하고 완전한 자가 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카톨릭 신자로서 받은 근본 성소인 성인이 되는 것에 대해 함께 나누며, 이 소명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 대해 배우게 되는데, 이 보편 소명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 다름 아닌 ‘영성생활’입니다.
‘영성’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성을 표현한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우리 각자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우리 각자가 그 분께 드리는 고유한 사랑의 표현 방식으로 고유한 사랑의 색깔을 뜻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독특한 나를 이루는 차별화된 요소이고 자신의 독특함을 바탕으로 하느님과 맺는 나만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나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영성생활이란 무엇일까?
평신도의 영성은 참으로 많은 색깔을 품고 있기에 서로 조합을 이루어 무궁무진한 색채를 만들어내는 무지개색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평신도들은 이처럼 다양한 자리에서 복음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사랑하며 세상 곳곳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평신도들이 받은 소명입니다. 마치 하나의 모자이크를 이루는 수많은 조각이 각각 가치를 지니듯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유일무이한 인격성과 존재 자체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에 보답하는 가운데 그분과의 관계를 완성해 갈 때 더욱 더 충만하게 하느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도 각자의 길을 찾아야 하는데 그 길은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미리 준비하신 여러분 각자를 향한 원대한 계획이 실현되는 길이자, 이승의 삶을 마치고 천상에서 하느님 곁에 머무를 때 여러분의 고유한 모습을 만들어 가는 길입니다.

영성생활이란 무엇일까?
영성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응답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향해야 합니다. 영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죄인에서 의인으로 거듭나는 ‘의화(義化)’,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아가는 ‘성화(聖化)’, 그리고 성화과정 중에 절정인 하느님 사랑에 ‘합일(合一)’은 하느님과 인류를 잇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됩니다.
결국 그리스도교 영성은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성을 우리 각자의 삶에서 얼마나 잘 구현해내는가 하는 문제로 집약됩니다. 영성생활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맺음과 연관된다면, 영성생활의 진보는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가, 얼마나 그리스도를 잘 따르는가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신학의 꽃 영성 신학

‘영성신학’이란 말은 ‘영성생활’, ‘신심생활’, ‘초자연적 생활’, ‘내적생활’, ‘신비적 수련’ 그리고 그리스도교적인 ‘완덕의 신학’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로 ‘수덕신비신학’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모든 것, 삶속에서 실천하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최고의 단계를 제시한 학문이라 ‘영성신학’을 ‘신학의 꽃’이라고들 합니다. 영성신학은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계시’에서 출발하며 신앙에 바탕을 둔 신앙 진리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여정의 목적은 무엇일까?

살아서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투신했던 사람들, 이승에서 이미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고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하늘나라를 이승에서 살 수 있는가를 터득했던 분들을 우리는 ‘증거성인’라고 부릅니다. 한국 교회는 아직 살아서 하늘나라까지 가는 영적인 길을 뚫은 ‘증거성인’이 한 명도 없습니다. 수많은 사업이다 사도직이다 떠들어 대지만 정작 교회를 질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은 영적인 비전입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는 너무 활동, 이벤트 같은 것들 위주로 돌아간다 느낌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지복직관(至福直觀), 즉,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즉 그 분을 관상하는데 우리의 참된 행복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존재의 시작이자 궁극적인 목적은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인간은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에게 준비된 존재입니다. 인간은 존재하기 전부터 하느님의 심중에서 계획된 존재로 그 분과 인격적인 통교, 더 나가서는 그 분과 사랑으로 하나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이 현세에서 영적여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입니다.

영적여정의 목적은 무엇일까?

1)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관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영원한 진리이신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을 보는 것은 단순히 육안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하느님의 깊은 신비를 꿰뚫어보는 것을 말합니다. ‘지복직관’이란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영적인 차원인 영혼이 지닌 두 가지 근본적인 능력, 즉 ‘지성(知性)’과 ‘의지(意志)’ 가운데 ‘지성의 관점’에서 표현된 말입니다.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육체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 하느님의 본질을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2)  하느님과 사랑의 합일을 이루는 것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은 ‘인격적인 하느님’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면서 동시에 한 분이신 하느님은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어떤 비인격적 실재거나 저 멀리 하늘에 옥좌에 그저 관망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영적여정의 목적은 무엇일까?
우리가 이승에서 걷는 영적인 여정은 다름 아닌 삼위일체의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소명은 아버지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 있습니다. 영성 생활을 통해 지향하는 근본 목표는 ‘하느님과 사랑의 합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성에 작용해서 하느님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덕이 ‘믿음’이고 하느님을 바라고 사랑하도록 주어지는 것이 ‘희망’과 ‘사랑’인데, 이 두 가지 덕은 인간의 ‘의지’에 자리해서 뿌리를 내림으로써 하느님의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도록 도와줍니다.

3)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죽고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대한 희망을 갖고 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영성생활을 통해 완덕에 이르는 것은 특별한 도를 닦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여정의 출발점은 바로 우리가 거저 받은 ‘세례’입니다. 세례야말로 그분을 우리의 유일무이한 “너”로, 우리 삶의 ‘주인’이자 ‘목적’으로, 우리의 궁극적인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며 영적여정은 세례 받은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영적여정에서 만나는 3가지 길

1) 정화의 길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서 인간이 첫 번째로 거치게 되는 단계를 통상 ‘정화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은 인격적인 하느님이며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완성해야 할 것은 그분과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두 인격체가 서로를 받아들여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여정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과 진정 충만하고 완전한 사랑을 이루려면 그분을 향하지 않는 사랑의 에너지를 거둬들여서 하느님께로 몰아가야 하는데 이를 ‘회심’이라고 하고, 이기적이고 세속적이었던 삶의 방식을 바꾸고 주님을 향해 걸어가겠다고 하는 메시지가 담겨있는데, 이것을 신학적으로 ‘사랑의 정화’라고 합니다.
신앙에 입문을 했지만 신앙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제대로 감을 잡지 못하며 그렇게 살고 싶은 원의도 많이 부족한 사람들이 정화의 단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초보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크게 몇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째, 신앙생활에 미지근한 사람으로 처음에는 열심히 입문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신앙이 식고 나태함과 미지근함에 빠져 신앙생활과 관련된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거나 뜻이 없는 ‘무늬만 신자’인 사람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들은 자연적 본성과 이기적인 욕심을 거슬러 싸우는 가운데 하느님을 향해가는 ‘영적전투’를 벌여야합니다.

둘째, 크게 회심한후 하느님을 향해 성실히 걷기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종종 소죄에 떨어지지만 더 이상 하느님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하는 대죄에는 빠지지 않으려 의지적으로 노력하며 틈틈이 시간을 내어 기도하기도 하며 주님을 좀 더 알기 위해 성경을 펼쳐보게도 하며 꾸준히 노력하며 나름대로 성실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가장 열심인 사람들로서 진심으로 진보하기를 갈망하는 순수한 원의를 간직하고 적극적으로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 구체적인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합니다. 시간을 쪼개 성심껏 봉사하기도 하고 성사생활을 충실히 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좋은 영적 지도자를 만나면 일취월장(日就月將)할 수 있는 잠재성이 많습니다. 이 시기에 있는 사람은 성경을 자주 읽고 예수님과 친숙해지는 시간을 가져야 하며 신앙의 여정을 함께 걸으며 좋은 자극이 되어 주는 벗이 있다면 큰 힘이 됩니다.

정화의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성성을 향한 분명한 열망을 지녀야 하며 자신이 왜 영적인 여정에 들어섰으며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원의가 부족하면 성성(聖性)을 향한 원의를 일으켜 달라고 은총을 청하고, 원의마저 부족하다면 이를 허락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정화의 길은 하느님과의 충만한 사랑의 합일이라는 거대한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한 첫 걸음을 떼는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저 높은 천상의 정상에 이르겠다는 거룩한 ‘열망’을 품어야 하며 아주 큰 ‘성인’이 되겠다는 ‘원의’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원의가 부족하면 원의를 갖고자 하는 원의를 주님께 허락해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2) 조명의 길

조명의 길은 등산으로 비유하면 1차 베이스캠프를 지점으로 안정적인 능선을 타는 시기와 비슷합니다. 이들은 세속에 대한 애착과 이기심으로부터 어느정도 해방되었기 때문에 하느님을 향해 자유로이 날아갈 수 있습니다. 이를 세속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이탈’이라고 합니다. 이 길에서는 우선적으로 예수님과 닮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조명의 단계에서는 정화단계의 영적전투를 바탕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다양한 덕행의 고지들을 점령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주님을 더 깊이 알고 사랑하기 위해서 이전 단계보다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그분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지 성찰하고 식별함으로써 그분께 응답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중에 늘 염두에 둬야 할 묵상 주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 즉, ‘자아인식’(自我認識)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마음의 평화를 찾고 상처를 치유하는 데 있지 않고 예수님과 전인적인 ‘사랑의 교감’을 나누는 데 있습니다.

조명의 길을 특징짓는 요소로 사추덕(四樞德)이 있는데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는데 중심이 되는 기본적인 덕을 말하며 인간이 자연 본성적인 차원에서 성숙하기 위해서 지녀야 할 윤리적인 덕이기도 합니다. 이에는 현명(prudencia), 정의(justitia), 용기(fortitude), 절제(temperantia)가 있으며 ‘인간적인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며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들을 가능하게 해 주는 씨앗이며 열매입니다.

‘현명’은 모든 상황에서 우리의 참된 선을 식별하고 그것을 실행할 올바른 방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실천 이성을 준비시켜 주는 덕을 말합니다. 이 덕으로 우리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윤리적인 원칙을 오류 없이 적용하며, 이루어야 할 선과 피해야 할 악에 대한 의심을 극복하게 됩니다.

‘정의’는 마땅히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를 말하며 하느님을 향한 정의를 경신덕(敬神德)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의 각자의 권리를 존중하고 사람들에 대한 공평과 공동선을 촉진하고 그 조화를 인간관계 안에서 확립하게 하는 것입니다.

‘용기’는 어려움 중에도 단호하고 꾸준하게 선을 추구해주는 덕으로 어려운 장애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때 필요한 노력을 용감하게 실천하는 것을 말하며 그 하위의 덕인 아량, 관대, 인내와 연관됩니다.
‘절제’는 쾌락의 유혹을 조절하고 창조된 재화를 사용하는 데에 균형을 유지하게 해 주는 덕으로 생존을 위한 욕구인 식욕, 종족보존의 성욕과 연관되어 있으며 하위덕으로 정결, 겸손, 온유를 품고 있습니다.
향주삼덕(向主三德)

향주삼덕은 조명의 길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세 가지 덕인 신덕(fides), 망덕(spes), 애덕(caritas)으로 대신덕(對神德)이라고도 부르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가장 뛰어난 덕으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를 심화시켜주고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여정을 진보하게 해줍니다.

또한 하느님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덕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하느님께 이르기 위해서는 그분의 도움심이 필요한데 하느님께서 인간을 초자연적인 영역으로 들어 올려 주실 때 비로소 하느님을 인식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초본성적인 덕’이 바로 향주삼덕입니다.
‘신덕(信德)’은 인간이 하느님을 믿을 때 비로서 그분과의 관계가 열리기 때문에 가장 먼저 오는 덕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하신 것과 교회가 우리에게 믿도록 제시하는 모든 것을 믿게 하는 향주덕을 말합니다. 인간의 지성이 초본성적인 영역으로 들어 올려져야 하는데 하느님을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하느님 은총이 내려서 인간의 지성에 초본성적인 능력을 부여하는 덕이 바로 믿음입니다.

‘망덕(望德)’은 “그리스도의 약속을 신뢰하며, 우리 자신의 힘을 믿지 않고 성령의 은총의 도움으로 우리의 행복인 하늘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게 하는 향주덕”(가톨릭 교회 교리서 1817)으로 신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적에 대한 열망을 우리 안에 심어주며 천상에 이르러서야 받게 될 한 상급을 현재화 하는 가운데 인간으로 하여금 그 상급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희망은 풍요로운 삶의 근원이 되며 이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결코 좌절하지 않고 모든 불가능을 넘어 마지막까지 희망할 수 있게 해줍니다.
‘애덕(愛德)’은 가장 으뜸이 되는 덕입니다. 하느님만을 위하여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며 하느님의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게 하는 향주덕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혼안에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열망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이 세상에 여정에서 인간이 이뤄야 할 근본적인 소명은 사랑이신 하느님, 자신을 찾아가는 내신 하느님께 사랑으로 응답하는 가운데 그분과 합일을 이루는 것인데, 그것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애덕을 통해 인간에게 이러한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해 줍니다. 따라서 애덕은 인간의 의지에 작용해서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의 합일’을 가능케 해줍니다

3) 일치의 길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영적 여정이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한 단계를 말합니다. 이 시기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의 관계가 완성되는 마지막 단계이며 신비가들은 ‘영적 약혼’, ‘영적 결혼’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온전히 지복직관하게 되므로 이 단계 이런 사람들은 오직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산다고 합니다. 사도 바오로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고 나 역시 그분 안에 온전히 사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뜻과 행위를 모두 하느님께서 다스리시고 성화하시며 인도하시도록 주님께 온전히 내어 맡기는 단계로 이 단계에서 이뤄지는 기도를 전문적인 용어로 ‘관상 기도’ 또는 ‘심리적인 기도’라고 합니다.

일치의 길을 특정 짓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성령칠은(聖靈七恩)’을 들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혜로운 선물, 은사를 말합니다. 덕을 실천하는 것이 노를 저어 항해하는 것이라면 성령칠은은 돛을 달아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칠은은 우리가 하기 어려운 일을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영혼안에 초자연적인 습성을 형성해 줍니다. 그것은 지혜(sapiential) 통찰(intellectus) 지식(scientia) 식견(consilium) 공경(pietas) 용기(fortitude) 경외(timore)입니다. 성령칠은은 조명의 길에서 드러나는 사추덕과 향주삼덕을 심화하여 완성시켜 줍니다.
‘지혜’는 사랑의 덕을 완성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사랑과 빛을 불어넣어 줍니다. 은사 중에서 가장 완전한 은사입니다.
‘통찰’은 마음을 비추는 성령의 빛 아래, 신비를 밝히지 않고서도 계시 진리를 꿰뚫어 보는 직관력을 얻게 해줍니다. 희망의 덕을 완성시켜줍니다.
‘지식’은 성령의 빛 아래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창조된 만물을 인식하게 하며 믿음의 덕을 완성시켜줍니다.
‘식견’은 영혼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하느님의 뜻에 비추어 상황을 올바르게 식별하게 함으로써 바르게 실천하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초자연적인 직관을 말합니다.
‘공경’은 주님을 공경하는 덕을 완성시켜주며 그럼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자녀 적인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신심을 갖게 해 줍니다.
‘용기’는 영혼의 의지에 힘과 자극을 불어넣어 준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기쁘고 대답하게 고통을 받아들여 용기의 덕을 완성하게 해 줍니다.
‘경외’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녀 적인 경외심을 말하며 절제의 덕을 완성시켜줍니다.

나가는 말
나만의 고유한 영성은 무엇인가요? 그 여정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함과 유일무이함을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했든 아니든 우리 각자는 고유한 길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도록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 길은 마침내 진정한 내가 되는 길이며 자신만의 영성을 완성하는 길입니다. 이제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길을 찾고 걸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준비하신 ‘원대한 계획이 실현되는 길’이며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꿈을 꾸십시오! 하느님에 대한 원대한 꿈을 품고 이를 이루기 위해 투신하는 사람은 천상의 멜로디를 배우기 위해 매일의 삶 속에서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바로 성인이며 이 시대가 가야 할 길을 비춰 줄 예언자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묵상나누기>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찾아 함께 나누어 봅시다!

우리 각자는 영적여정에서 만나는 ‘3가지 길’ 중에 어디쯤 와있나요?

우리 각자가 하고 있는 영성생활에서 ‘좋은 습관’이 되고 있는 것을 나누어 봅시다.

‘성령칠은’중 가장 받고 싶고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인가요?

영성생활에 보다 집중하여 ‘일치의 길’에 이르기 위해서 내가 지금부터 세워야 할 결심이나 계획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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