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말씀>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 18,15-18,35)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마태 6, 9-15)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라 그러면 네가 기도할때에 네 죄도 사해질 것이다. 자기 이웃에 분노를 품고있는 자가 어떻게 주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으랴? (집회 27,30)

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
송봉모 바오로딸 2010년

이 책은 ‘상처와 용서’ 문제를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다루어 용서에 대해 더욱 깊고 넓게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용서란 무엇이며, 왜 용서해야 하는지를 먼저 밝히고, 용서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효과적인 용서 방법, 사소한 상처에서 헤어나는 방법이 무엇이며 용서의 열매를 맺는 법은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설명하며 일상 가운데 서로 용서하는 법을 훈련하고 실천하도록 초대합니다.

송봉모 신부님은 예수회 신부로 서강대학교를 졸업하고 예수회에 입회하였으며, 로마 그레고리안대학 신학과(BA) 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교수 자격증을 받고, 미국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에서 신약주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약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지은 책에 성서와 인간 시리즈, 성서 인물 시리즈, 요한복음산책 시리즈와 「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 「예수-탄생과 어린 시절」, 「예수-새 시대를 여심」, 「예수-우리의 발걸음을 아빠 하느님께로」, 등이 있다

바람을 멈출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풍차를 만들 수는 있다. 파도를 멈출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배 돛을 조종할 수 는 있다.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용서하는 법을 배울 수는 있다 (폴 마이어). 짧고 귀한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서로에게 도움과 위로가 되는 관계를 우리는 얼마나 원하고 있는가? 이런 바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자주 관계의 단절을 느끼는가? 나를 이런 궁지에 몰아넣은 그 사람을 용서할 수만 있다면,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 삶의 기쁨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천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특별히 치유되지않은 지난날의 상처가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삶에 파괴적 영향을 주지않도록 상처에 대한 정성어린 돌봄이 있어야하고 치유하시는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쳐주신 다음 ‘네 병이 나았다’는 말대신 네가 ‘구원’ 되었다는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이 점에서 ‘구원’은 ‘치유의 과정’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자연 그대로 살다가 아무 원한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데, 오직 인간만이 용서할 수 없는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다가 그 한을 그대로 안고 죽어간다고 합니다.
어느 도시에 경쟁관계에 있던 두 사람의 가게가 서로 마주보고 있었는데 아침에 눈 뜨고 밤에 잠들때까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망하게 할까 하는데만 신경을 썼습니다. 보다 못한 하느님께서 천사를 한 쪽 상인에게 보내셔서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선물을 내릴 것인데 재물을 원하면 재물을, 장수를 원하면 장수를, 자녀를 원하면 자녀를 줄 것이오! 단, 조건이 하나 있소! 그대가 무엇을 원하든 상대방은 두 배를 얻게 될 것이오! 그대가 금화 10개를 원하면 상대방은 금화 20개를 얻게 될 것이오!“

“하느님은 이런 방법으로 그대에게 교훈을 주려는 것이니 이제는 제발 화해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천사의 말을 들은 상인은 한 참 생각하더니, “제가 무엇을 바라든지 다 그렇게 이루어진다는 말씀이지요?”하고 물었다. 천사가 그렇다고 하자 상인은 크게 숨을 쉬고는 결심한 듯이 말하였다. “그럼 제 한쪽 눈을 멀게 해주십시오.”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려 해도 힘든데, 하물며 내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 사람, 나에게 원수가 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라는 자아를 철저히 죽이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악을 선으로 갚는 일’은 ‘하느님’다운 일입니다, ‘선을 선으로 갚는 일’은 ‘인간’다운 일입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일’은 ‘악마’다운 일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은 ‘짐승’다운 일입니다. 용서가 그토록 어려운 것임에도 용서하라는 것은, 용서가 주님의 ‘지상명령’ 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면서도 하느님께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슴에 가득차 있는 적개심과 분노는 몸과 영혼을 죽이는 독소들입니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가득차게 되면 무엇보다도 우리 몸이 견디지를 못합니다. 더 억울한 것은 우리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이들 중 많은 이가 자신의 잘못을 ‘기억’조차 못하고 용서를 청해야한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잘 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용서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 순간부터 용서는 ‘시작’됩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 나를 치유시켜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평생 상처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용서를 결심한 다음에는 구체적으로 하느님과 예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원수를 용서하게 해 달라고, 상처의 아픔을 낫게 해 달라고 도움을 청해야합니다. 가슴의 응어리를 주님의 ‘자비’와 ‘관대함’으로 바꾸어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내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과 ‘하느님’뿐입니다

나늘 아프게 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은 용서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나도 상대방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을 대할 때 우리 자신은 철저히 잘못이 없는 존재, 잘못을 아예 저지르지 않는 존재처럼 행동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사람들에게 주었는지, 상대방이나 나 자신이나 모두 용서가 필요한 존재임을 받아들인다면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입니다.
‘값싼 용서’와 ‘섣부른 용서’는 또한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값싼 용서’란 나에게 잘못한 이를 ‘애써 좋게 봐주는 것’으로 저질러진 악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를 하려면 내가 상대방한테 상처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에게 상처 준 상대방을 향한 ‘유죄판결’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을 용서해 줄 수 는 없기 때문입니다.

‘섣부른 용서’란 서둘러서 ‘성급하게 해버리는 용서’를 가르킵니다. 친밀한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 관계가 소원해지면 우리는 그 불편함을 견디지 못해 즉시 갈등을 해소하고 싶어 상대방을 성급하게 용서해 버립니다. 특히, 그리스도적 가르침인 용서와 화해, 일치에 대해 잘못 이해하거나 강박관념을 갖는 이들이 많습니다. 서둘러 용서하면 내 안에 있는 분노와 아픔을 억압하게 되고 그 업압된 분노와 아픔은 나중에 더 강력한 파괴적 힘이 될 수 있으며, 서둘러 가해자를 용서해 주게되면 그는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반성하고 뉘우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됩니다.

용서에 대한 몇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첫째, ‘용서하면 몸과 마음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내게 상처준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하였다면 더 이상은 그 사람 때문에 괴롭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은 현실적으로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용서하고자 하는 ‘의지’는 ‘종교적 선택’이요 ‘결심’으로 용서는 신앙인으로서 주님의 지상명령에 따라 결심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느낌을 포함한 몸 자체가 용서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며, 상처준 사람을 갑자기 만나면 얼굴이 굳어지고 상처는 다시 도지게 됩니다. 상처가 큰 만큼 아무는 시간도 더 걸리기 마련이니 상처에서 자유로워지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둘째, ‘용서는 곧 화해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와 ‘화해’를 동일시합니다. 용서했다고 반드시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는 상대방과 관계없이 나와 나의 미래를 위해서 내가 하는 것으로 ‘나 혼자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화해’는 ‘쌍방의 행위’로 이루어집니다. 진정한 화해는 상대방이 진심으로 자기 행위를 뉘우치고 나에게 용서를 청하며 내가 그를 진심으로 받아줄 때 즉, ‘양쪽이 성실하게 노력할 때’만 가능합니다. 주님의 명령은 ‘용서’이지 ‘화해’가 아닙니다.

셋째, ‘용서했으면 다 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용서했다면 과거의 상처는 다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용서를 했다해도 과거의 상처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꼭 기억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공간적으로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억해야 합니다. 용서를 하지만 상처준 사건을 잊지않는 것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계단에서 넘어진 사람은 계단을 내려올때 조심하는 것은 또 다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과거 상처에 대한 기억은 같은 상처를 받지않기 위해 필요합니다. 정신의학자 사스(Thomas Szasz)는 “멍청한 사람은 용서하지도 잊어버리지도 않는다. 순진한 사람은 용서하고 잊어버린다. ‘현명한 사람’은 ‘용서하되 잊어버리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넷째, ‘중독자나 정신적 문제가 있는 병자와 관련된 오해’가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도박 중독자, 성 중독자 같은 정신적 문제가 있는 병자들한테는 용서가 아니라 ‘치료’가 필요합니다. 이를 신앙의 이름으로 참고 견딘다든가 묵인한다든가 하는 것은 올바른 행위가 아닙니다. 그런 ‘값싼 용서’로는 상대방을 용서할 수 없고 서로에게 불행만 자초합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느님의 도움을 청해야 하는가?

첫째, 베개를 가지고 싶자가 앞에 앉습니다. 구태여 적절한 말을 고르려고 애쓰지말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가슴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습니다. 욕을 해도 좋습니다. 먼저 우리안에 있는 화의 분노, 적개심을 모두 밖으로 끄집어 내어 표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노가 극에 달하고 참기 어려우면 주먹으로 옆에 놓아둔 베개를 치기도 합니다.

둘째, 증오심에서 벗어나 맺힌 한을 풀고 싶다는 바람을 말씀드립니다. 미움이라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결심을 표시하며 진정으로 미움의 운동장에서 벗어나고 싶고 더 이상 나의 억울함을 사람들에게 호소하면서 동정을 구하며 살고 싶지 않다고 주님께 말씀드립니다

셋째,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억울하게 돌아가셨지만 한을 품지 않고 사랑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당신의 억울함과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아무리 무고하게 배척받았다 해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큼은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어떠한 불의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사건보다 더 불의하지는 않습니다.

넷째, 상처를 준 사건과 장소에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그 이유는 과거의 상처에서 치유되기 위해서 입니다다. 이렇게 상처의 기억을 치유할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마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우리의 과거 사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기도했는데 상대방을 증오하는 마음이 계속 남아있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디. 맺힌 한을 푸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상처가 클수록 더 그렇습니다. 그 상처로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될때까지 기도를 계속하면 예전보다 훨씬 더 상처에서 자유로워진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치유는 과정입니다. 상처가 하룻밤 사이에 깊어진 것이 아니라면 치유 또한 그렇치 않겠습니까?

이제는 우리의 미성숙함 때문에 관계안에서 흔히 받는 ‘사소한 상처’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아봅니다.

첫째, ‘기대를 하지마라.’ 상대방이 어머니처럼 나를 돌보아 주고 헤아려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기대는 우리 마음을 멍들게 하고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우리는 이 세상 누구에게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댈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과 하느님 뿐입니다.

둘째, ‘추측하지 마라.’ 추측하면서 상대방과 상황을 내 멋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다른 이들을 오해하고 멋대로 판단하고 상처를 받고 있습니까?. 내가 상대방을 오해하는 것은 많은 경우 나와 그 사람 사이의 행동양식이나 인지구조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몰라서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다른 이들을 오해하고 멋대로 판단하고 상처 받고 있습니까?. 내가 상대방을 오해하는 것은 많은 경우, 나와 그 사람 사이의 행동양식이나 인지구조가 다르다는 것을 몰라서 입니다.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치 않고, 내 입장에서만 추측하고 판단하고 상처받는다면 그 상처는 내가 자초한 것입니다.

셋째, ‘인정과 애정을 구하지 마라.’ 우리는 우리가 다른 이로부터 반드시 존경받고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본성적으로 원하는 것은 세상의 인정과 사랑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고 싶은 바람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신 것은 ‘자유’입니다. 죄에서 자유롭고, 죽음에서 자유롭고, 세상의 근심 걱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 한쌍이 어찌나 추운지 서로의 몸을 붙여서라도 몸을 따스하게 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가시때문에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서로 떨어져 매서운 추위를 견뎌야만 했습니다.(쇼펜하우어)
우리의 인간관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쓸쓸하고, 가까이 가면 상처를 받는 관계입니다. 친밀함은 곧 ‘상처가 자라나는 온상’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인정해 달라고, 사랑해 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넷째, ‘상처의 텃밭을 제거해라.’ 나는 완벽해야 한다’, ‘나는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된다’ 등의 태도는 모두 상처의 텃밭입니다. 예수도 나자렛 회당에서 말 한번 잘못해 매맞아 죽을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상처의 텃밭은 ‘나는 인정받아야 한다’ ‘나는 사랑받아야 한다’라는 기대일 것입니다.

다섯째,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면서 살아가라.’ 자기비하와 자기단죄는 파괴적이고 병적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덫은 자기비하입니다. ‘자기애’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보살피는 마음, 자기 존중, 책임감을 포함합니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려면 남의 기준에 맞춰 살면서 좋은 사람 소리를 들으려 하지 말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느낌, 판단,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 귀를 기울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아니오’라고 대답할 때에는 과감하게 ‘아니오’라고 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 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보다 더 우리의 행복을 원하십니다. 이렇게 저를 사랑하는 당신 앞에서, 특별히 당신 성체 앞에서 주님께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우리를 아프게 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간구하고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죄악으로부터 우리 자유롭게 해주시는 예수님께 감사하며 당신 성령의 거룩한 빛으로 우리 채워주시고, 우리의 마음속을 밝게 비추어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드 멜로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착한 이들을 만들려는 종교는 사람들을 나쁘게 만들지만, 자유로움으로 초대하는 종교는 사람들을 착하게 만든다. 그것은 자유로움이 사람을 악마로 만드는 ‘내적 갈등’을 다 부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착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기 보다는 주체성을 가지고 자유롭게 살아가려고 애써야 합니다“
묵상나누기

‘용서’와 ‘화해’를 혼동하거나 ‘용서’에 대해서 잘못 이해했던 경험이 있으면 나누어 봅시다.

내 기억 가운데 가장 아픈 상처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 상처는 극복되었습니까? 극복되었다면 어떻게 극복되었는지요?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용서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때 구체적으로 각자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는 ‘독특한 방법’이 있으면 나누어 봅시다?

‘사소한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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