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만난 사람들(5)
(개가 된 들 어떠랴
–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
이현주 생활성서사 2001년
삶이 이미 죽음과도 같았던 이들, 날마다 고통과 절망에 허덕이던 사람들! 예수를 만나고 송두리째 인생이 바뀐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절박하게 그를 만나고 싶어하는 우리의 갈증을 대신해 준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딸아이가 악령에 사로잡히고, 그 때문에 울부짖어야 했던 날들! 개가 된 들 어떠랴?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아이가 나을 수 만 있다면! 그 다섯번 째 이야기를 들어본다.
내가 살고 있는 바닷가 한 작은 도시 이름은 ‘티로’ 이며 그 뜻은 ‘바위’ 다. 해변에 커다란 바위가 둘 있는데 그것이 천연 방파제를 마련해 주고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은 옛날부터 항해술로 이름을 알려온 ‘시리아 페니키아’ 선원들의 기항지요 요람이다. 나의 고향은 ‘시리아 페니키아’, 그리스인의 핏줄을 이어받아 태어났다.
나를 일컬어 ‘시리아 페니키아 과부’이라 불렀고, 나는 일찍 남편을 잃고 어린 딸과 함께 험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참 쉽게도 살아가던데 나에게는 사는 것이 온통 가시밭길이었다. 마을에서 나는 돈벌이가 되는 곳이라면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는 극성스러운 여자였다. 고깃배들이 돌아오는 부둣가에서 나는 가장 큰 목소리로 떠들며 돌아다녔지만, 겉으로 나타난 극성스러움 뒤에 얼마나 약한 심장이 가까스로 팔딱거리고 있는지 알만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사람이 산다는게 뭘까하고 생각에 잠겨봐도 알 수가 없었다.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났는지? 도대체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나의 인생은 어디에서 어떻게 끝날 것인지? 아무도 시원하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인생이란 알 수 없는 순간에 빛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현실로 돌아오면 그 순간 나에게 있어 너무나도 지루하고 오랜 세월 뿐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귀엽게 자라나는 어린 딸이 있었다. 이 아이 얼굴만 보면 모든 괴로움과 피곤이 사라져 버리니 그것 또한 신기한 일이었다. 아이는 아직 어려서 겨우 자신의 뜻을 말로 나타낼 만큼 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를 받쳐주고 있는 단 하나의 기둥이었다. 나에게 그 아이마저 없었다면 벌써 이 세상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나를 버리지 않는 대신 어린 딸을 내 품에 빼앗아 더러운 악령의 품에 던져버린 것이다. 나는 미칠것만 같았다. 나를 보며 천사 같은 얼굴로 웃으며 반기던 아이가 어느날 갑자기 작은 이리처럼 이빨을 들어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사정없이 나의 팔뚝과 어깨를 물어뜯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메마른 울음으로 밤을 지새며 울부짖었다. 이 참담한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하늘을 처다보았지만 어디에도 하늘은 없었다. 땅을 내려다 보았지만 땅도 보이지 않았다. 나의 발은 어두운 암흑 속에서 허둥거릴 뿐이었다. 아무데서도 빛 한줄기 나에게 비춰 오지 않았다. 거기는 바로 죽음의 한복판이었다. 이제 악령에 사로잡힌 불쌍한 딸아이의 모습마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 가라앉은 먼지처럼 나는 끝도 모를 죽음의 심연으로 자꾸만 떨어지고 있었다.그러던 어느날 나는 그분을 만났다. 갈릴래아 출신인 그분은 악령을 한마디로 굴복시키는 분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그분을 위대한 예언자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놀라움이 있어 못된 악령이 벌벌 떤다고 했다. 그분의 이름은 나자렛 사람 예수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다윗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분이 다윗인지 솔로몬인지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선은 어떻게든 그분을 만나야만 했다.
그분이 묵고 있다는 집을 찾아가니 문간에서 힘센 남자들이 나의 길을 막았다. “누구를 찾아왔소?” “다윗의 아드님, 하느님의 사람, 위대한 예언자를 뵈러 왔습니다. 그분을 뵈어야만 합니다” 그들은 “그런 분은 여기없소!” 하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분이 집안에 계시다는 분명한 느낌을 받았다. 여기까지 왔다가 어찌 문밖에서 돌아갈 수 있으랴?
“다윗의 아들 이시여! 불쌍한 여편네올시다! 날 좀 만나 주셔요!” 나는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다윗의 아들이시여! 죄도 없는 어린 것이 죽어가고 있어요!” 이상하게도 소리를 지르면 지를수록 속으로부터 영문모를 힘이 솟구쳤다. 누구의 이름을 마음껏 불러 본 적도 없었다. 속에 맺힌 아픔과 한을 시원하게 토해 본 적도 없었다. “다윗의 아들 예수여! 이 불쌍한 여편네를 좀 살펴 주소서!” 나는 갑자기 허허벌판 사막 한 가운데 있는 느낌이 들었지만 사막 한 복판이면 어떤가? 이렇게 온몸으로 부르면 여기가 사막이든 산꼭대기든 바다 한 가운데 든 그분은 나에게 아니 오실 수 없을 것이다. 하늘인들 어찌 나의 부르짖음을 막을 수 있으랴! 내가 쉬지 않고 불러 대자 마침내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며 “무슨 일이요? 당신은 누군데 이처럼 시끄럽게 울고 있는 거요?”
그분은 엄숙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설레는 가슴을 두 손으로 진정시키며 그분의 한없이 커 보이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불쌍한 년입니다. 제발 저를 돌려보내지 말아주십시오.” 나는 몸을 던져 그분 발을 움켜잡았다.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려 그분의 발등을 적셨다
“도대체 무슨 일이요?” 그분이 다시 묻자 누군가가 대답하였다. “이 여자는 시리아 페니키아 과부댁인데 자기 딸이 귀신에 사로잡혀 죽어가고 있답니다.” 그러나 그분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지만 이곳은 이방인의 땅이 아니요? 이 여인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말이오? 어서 그냥 돌려보내시오”.
그러나 나의 입술이 나보다 먼저 말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럴순 없습니다. 선생님! 저는 이대로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그냥은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제발 제 딸아이를 살려주십시오!” 복받치는 설음으로 나는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분의 발목을 움켜 잡은 채 나는 벼랑에 매달린 불쌍한 짐승처럼 그렇게 울었다.
다시 그분의 음성이 들렸다. “그렇지만 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온 것이요! 먼저 이스라엘을 돌봐야 하고 당신은 이방인이니 어서 그냥 물러 가시오! 떼를 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잖소?” 누군가가 나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억지로 잡아 일으키려 했다. 나는 그 팔을 사납게 떨쳐버리며 “안됩니다. 이대로는 그냥 갈 수 없습니다.” “어허! 참 딱한 여자로군! 이봐요, 자식들 한테 줄 떡을 개 한테 주는 사람이 어디 있소?” 그분이 약간 짜증스러운 투로 말하였다. “좋습니다. 선생님. 이년은 개입니다. 개보다도 천하게 살아왔어요. 그러나 개도 주인집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살지 않던 가요?” 부스러기라도 좋았다. 개니 사람이니 그런 것을 가릴 틈이 나에게는 없었다. 그런 것이 문제가 되는 사람은 아직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그런 나한 테 한 치의 여유도 없었다. 이 손을 그냥 놔 버리면 그 순간 나는 끝장이었다. 깜깜한 절벽에서 절망의 끝가지에서 매달려 본 사람은 나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개가 된 들 어떠랴? 바퀴벌레가 된들 어떠랴?
죄 없는 어린 자식이 악령에 사로잡혀 이리처럼 신음하는 것을 멀쩡한 눈으로 지켜봐야 하는 이 사무치는 괴로움을 겪어보지 못한 자는 이러쿵저러쿵 하지마라! “개가 되어도 좋아요. 그렇습니다. 나는 한 마리 슬픈 개랍니다. 그러나 배가 고파요. 당신의 상머리에서 떨어진 부스러기 한 조각이면 나름 만족합니다. 제발 이대로 쫓아내지 마세요.”
그때 그분의 억센 손이 나의 어깨를 잡았고 나는 손을 마주 잡고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그분을 쳐다보았다. 떨리는 음성으로 그분이 나에게 말했다. “여인이여! 장하오! 당신의 믿음이 마침내 하늘을 움직였소.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오. 아이는 이미 깨끗 해져 있으니까.” 처음에는 그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분이 다시 말했다. “어서 이 길로 당장 돌어가요. 아이는 깨끗해 졌습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소.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시오” 나는 벌떡 일어섰다. 어디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내 온몸을 태워 버릴 듯한 불길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분은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지만 어떻게 내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숱한 구경꾼들 사이를 헤집고 나는 단숨에 집으로 달려갔다.
보금자리였으나 쉴 수 없는 보금자리였던 나의 집으로 정신없이 달려왔다. 컴컴한 방안에서 나의 귀여운 딸이 백합처럼 깨끗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꼭 껴안았다. 아득하고 먼 여행 길에서 이제 막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잃어버렸던 내 삶의 현실을 꿈결처럼 멀어져 갔던 나의 삶을 마침내 되찾은 것 같았다.
딸아이는 지난날의 모든 고통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 오히려 흐느껴 울고 있는 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그래, 모든 것을 모르는 게 낫다. 네 지난날 상처를 모르는 채 이제 시작되는 새로운 날들을 맞이하 거라’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아이의 마른 뺨을 자꾸만 쓰다듬었다. 무엇을 먹고 살까? 무엇을 입을까? 그렇게 걱정되던 것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 갔고, 나에게는 알 수 없는 용기와 자신감이 샘물처럼 솟구쳐 올랐다. 절망의 깜깜한 끝가지에 매달려 온 몸으로 그분의 이름을 불러 본 사람은 이 가슴 벅찬 감격을 함께 나눌 수 있으리라. <끝>
묵상나누기
예수님을 만나 딸을 살린 여인은 그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자유롭게 상상해 보십시요.
우리의 인생에서 ‘자신의 운명’ 이란 정해져 있는 것인가?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와는 어떻게 다른 가?
때로는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잃고 절망에 빠져드는 인생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때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요?
절망의 끝가지에 매달려 그분의 이름을 불러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용기와 자신감이 샘물처럼 솟구쳐 올라 가슴 벅찬 감격을 느낀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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