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_깨끗한 마음

깨끗한 마음 더러운 마음

190213 황창연신부 매일미사 강론 : 깨끗한 마음 더러운 마음

우리 안에 있는 좋은 것들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데려다 에덴 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돌보게 하셨다.>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4-9.15-17 4 주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 5 땅에는 아직 들의 덤불이 하나도 없고, 아직 들풀 한 포기도 돋아나지 않았다. 주 하느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흙을 일굴 사람도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땅에서 안개가 솟아올라 땅거죽을 모두 적셨다. 7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8 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당신께서 빚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9 주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15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 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 16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4-23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16) 17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물었다. 1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19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 20 또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바리사이들이 정결례의 세부 규정에 얽매여 율법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을 꾸짖으시는 내용입니다. 사실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의 율법 규정에서는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사이들은 정결례에 대한 관심으로 이 구분을 더 강화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부정한 대상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도록 금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먹는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하시며 이 음식에 대한 금지법을 폐지하십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 보듯이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 보시기에 좋게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특정 피조물을 부정하다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녕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내면에 지니고 있는 악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물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선행과 악행을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생각과 지향을 선하고 올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마음 안에 담아 두고 있는 것이 말과 행동으로 옮겨지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심어 주신 선함과 이성 그리고 양심을 올바로 보존하며, 신앙 안에서 배우고 다짐한 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오늘의 묵상 II (마음을 정결하게 지키는 방법)

유기성 목사님의 설교에서 한 권사님의 사례가 있어 인용합니다. 그 권사님의 간증이라고 합니다. 그분은 교회에서 매우 인정받는 신도입니다. 매일 새벽예배에 빠지는 적이 없고 단식과 기도를 철저히 수행하는 분이셨습니다. 일어나기 싫어도 매일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깨워주었다고 합니다.

그날도 한 존재가 자신의 방에 들어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분은 얼른 일어나 앉아 “저기 혹시 누구세요? 예수님이세요? 천사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존재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합니다. 마귀의 얼굴을 한 이가 자신을 보며 웃고 있더랍니다.

‘마귀가 왜 매일 새벽예배에 가도록 나를 깨웠을까?’

그 이유를 그날 새벽예배에 가서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분은 지금까지 ‘나는 매일 새벽예배를 거른 적이 없는데, 새벽 예배에 한 번도 안 나오는 장로들은 뭐야?’, 혹은 ‘나는 자주 단식하는데 단식 한 번도 하지 않는 목사님은 뭐지?’라며 자신도 모르게 판단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새벽예배 나오는 것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줄 알았더니 결국 자신을 교만하게 만들어 더럽히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면서 외적인 모습에만 치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판단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외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속은 썩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음’이 더러우면 다 더러운 것이고, 마음이 깨끗해야 다 깨끗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마음’을 건드릴 수 없기 때문에 손을 씻고 먹던 안 씻고 먹던 우리를 더럽힐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더러우면 다 더러운 것이고 마음이 깨끗하면 다 깨끗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더럽혀지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이 말씀은 모든 악은 인간 ‘마음’에서 나온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인간 마음 안에 악의 원천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악의 원천은 뱀과 파라오로 상징되는 ‘자아’입니다. 그 자아로부터 나오는 나쁜 욕구가 사람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모든 악행은 다 자아의 욕구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자아의 세 욕구가 ‘세속-육신-마귀’인데 예수님께서 나열하신 저 모든 것들은 이 세 욕구에 다 포함됩니다. 우리 마음을 정결하게 지키는 방법은 자아의 욕구들이 올라오지 않게 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정결해지려면 자아가 ‘욕구’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욕구는 이미 우리 안에 넣어져있기 때문에, 그 욕구를 발로 밟고 다른 욕구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의 가장 상징적인 모습이 바로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것입니다.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물속에 빠져들게 되어 있습니다. 자아의 욕구에 오염된다는 뜻입니다. 그 자아의 욕구가 원죄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태어났기에 자신의 힘만으로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자아의 욕구와 반대되는 욕구를 받아들여야하는데 그 욕구를 우리는 ‘신성(神性)’이라 합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이신데 사랑도 욕구입니다. 자아의 욕구와 반대되는 욕구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아의 욕구에 빠지지 않고 그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그도 자아의 욕구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니 다시 자아의 욕구에 빠져듭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을 우리는 ‘기도’라 합니다. 저는 신학교 때에 성무일도 하는 시간이 즐겁지 않았습니다. 기도시간이 끝나도 어깨가 뻐근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저는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은 것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그 바라보는 대상과의 대화의 시작이기에 생각도 그분에게 머물러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기도한다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육체-영혼-영(마음)’입니다. 이는 마치 ‘개울-강-바다’처럼 서로 영향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개울이 오염되면 강이 오염되고 강이 오염되면 바다가 오염됩니다. 그런데 바다가 오염되면 그 오염된 것을 먹은 물고기를 또 인간이 먹기 때문에 인간이 비록 땅에 살기는 하지만 역시 오염될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는 감각입니다. 우리가 감각으로 안 좋은 것들을 들여보내면 그것들이 영혼을 오염시킵니다. 영혼은 이성이 작용을 하는 부분인데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에 의해 생각이 오염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오염되면 마음이 오염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마음이 오염되면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들은 오염된 것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말과 행위, 생각과 욕구가 모두 더러운 것들이 나와 자신만이 아니라 이웃에게도 해를 끼치게 됩니다.

제가 첫 보좌를 할 때 주임신부님이 편찮으셔서 13,000명이 넘는 성당에서 혼자 미사를 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주일미사 여섯 대인데 제가 다섯 대를 했습니다. 고해성사는 미사 시작 전과 후에 계속 주어야했습니다. 주일 저녁쯤 되면 초죽음이 되고 이미 하루 종일 마신 성혈로 정신이 오락가락합니다. 그러다가 실수를 여러 번 했습니다. 제가 성찬례를 하면서 미사 끝나고 청년들과 술자리 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혈을 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말아 먹어라…”

국수 생각을 했나봅니다. 물론 신자분들은 신부가 고생을 하는 것을 다 아시고 계셨기에 잘 이해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겉으로 보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보고 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보고는 있지만 보고 있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을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그분을 본받으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결한 이들이었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술자리를 보고 있었고 그렇게 거룩한 순간에도 마음이 더러워질 수 있음을 느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항상 기도하라는 것은 자신의 모든 감각을 예수님을 바라보고 듣고 느끼는 데 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아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물 위를 걷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자신을 보며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자신의 생각이 모두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데 사용되어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기뻐지게 되는데 이것이 마음이 정결한 상태입니다. 마음이 기쁘지 않다면 그 사람은 부정한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께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고 예수님께로부터 오시는 성령을 육체로, 영혼으로, 영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지킬 수 있고 나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들이 거룩할 수 있습니다. 매 순간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께 모든 것에서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그렇게 마음을 기쁨과 평화로 유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죄로부터 구원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은 이야기 해봅시다.

2) 스트레스가 쌓이면 말을 거침없이 할때가 있습니다. 스트레스가 쌓여서 내가 조금 나아지는게 좋을까요 아니면 그 스트레스를 우리 안에서 해소하는게 좋을까요?  신앙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3) 심한 죄를 짓고 용서를 받지 못할거라 생각했는데 용서 받았을때의 느낌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남들도 하는데 잠깐, 아니 한번은 괜찮겠지 라고 생각하며 죄를 지은경험이 있나요? 무엇이 우리를 그런 생각을 갖게 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아이가 말을 안 들을때 목소리를 높인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목소리를 높이면 효과가 있었나요? 현명한 훈육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5) 우리를 더럽히는 요소가 주님과 어떻게 멀어지게 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