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나눔32_s

32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20.91-92.95 그 무렵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14 물었다.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 너희가 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또 내가 세운 금 상에 절하지도 않는다니, 그것이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뿔 나팔, 피리, 비파, 삼각금, 수금, 풍적 등 모든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너희가 엎드려, 내가 만든 상에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이 일을 두고 저희는 임금님께 응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17 임금님, 저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구해 내실 수 있다면,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님의 손에서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 18 임금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 상에 절하지도 않을 터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19 그러자 네부카드네자르는 노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보며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가마를 여느 때에 달구는 것보다 일곱 배나 더 달구라고 분부하였다. 20 또 군사들 가운데에서 힘센 장정 몇 사람에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묶어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지라고 분부하였다. 91 그때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깜짝 놀라 급히 일어서서 자문관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진 사람은 세 명이 아니더냐?” 그들이 “그렇습니다, 임금님.” 하고 대답하자, 92 임금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95 네부카드네자르가 말하였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31-42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39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40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41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

-오상선신부-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대화는 계속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대목에 등장하는 대상은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요한 8,31)입니다. 믿지 않는 바리사이들이나 최고의회 의원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들에게 제자가 되는 길을, 그것도 “참으로” 제자가 되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기만 하면 된다네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육화하신 말씀이시기에, 말씀에 머무르는 이는 그분에게 깊이깊이 젖어들게 됩니다. 그러면서 말씀의 근본 정신과 뜻하시는 바와 말씀께서 나아가시는 방향을 감지하며 어렴풋이나마 진리를 인식하고 물들어 갑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진리 그 자체이십니다.

그렇게 진리를 접촉하고 맛보며 걸어가는 이는, 살고 사랑하고 일할 때 어느 조항 어느 규정 무슨 판례를 일일이 들춰가며 제 생각과 행동을 규제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되신 분, 진리의 주인이시며 사랑이신 분의 무한한 품 안에서 마음껏 헤엄치듯 살아도 됩니다. 그것이 자유입니다.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마음껏 사랑하고 또 사랑을 누릴 자유! 그것 말고 피조물에게 더한 행복이 있을까요!

그런데 그나마 당신을 믿던 유다인들마저 발끈하네요. 제자가 되라고 했더니 오히려 “자유”라는 말씀이 몹시 거슬린 듯합니다. 자신들이 따라가는 존재가 누구인지 모르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부끄럼 없이 산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요한 8,41)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만 불쏘시개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요한 8,41)

놀랍게도 그들 입에서 엄청난 고백이 흘러나오네요. 그들이 자기 선조, 조상이라는 의미에서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하는 수준을 넘어, 하느님을 직접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하실 때의 관계성과 상호 이해, 친밀함에 못 미치고, 그동안 예수님께서 설파하셨으나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가르침과 별반 다른 이야기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들이 하느님 백성을 넘어 하느님의 자녀라고 임기응변이든 진심이든 스스로 선포한 겁입니다. 참 놀랍지요?

독서에서는 자기를 신(神)으로 섬겨 경배하기를 거부하다가 불가마에 던져진 세 유다 청년이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말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다니 3,95)라고요. 놀라운 기적 앞에서 외친 이방인의 이 고백이 비록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앎과 사랑을 전제로 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입을 빌려 찬송을 마련하시는 하느님의 힘이고, 때가 차면 이루어질 하느님 나라를 위한 실마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복음에서 비록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나 스스로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라 시인하는 유다인들의 고백에서처럼 말입니다.

갑자기 등장한 이 “사생아”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미스테리한 출생에 대한 비아냥일 수도 있고, 과거 우상숭배로 불륜을 저지르면서 혼인 관계로 표상되는 하느님과의 계약을 번번이 깨뜨린 조상들에게서 근본도 없이 태어난 후손이 아니라는 항변이기도 합니다. 지금 당신 백성 한가운데 오신, 자기들 눈 앞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자기들의 하느님께 충실한 것이라고 믿고자 오히려 더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게지요.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에 이처럼 믿지 않을 자유, 거부할 권리도 인정하십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그래도 믿어드렸던’ 일부 유다인들은 오늘부로 마음을 돌릴 것 같습니다. 감히 자신들을 아브라함이나 하느님의 자손이 아닌, 죄의 종으로 규정하다니… 근본도 모르는 떠돌이 망상가 설교자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느님이 아버지시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다니…

이미 빛과 어둠이, 생명과 죽음이, 선과 악이 제 자리를 잡아 갈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온전한 자유로 제 길을 택한 것입니다. 자기들을 움직이는 것이 누구의 힘인지, 어디로 향해 가는지 모르면서 그동안 지켜온 율법과 신념을 고수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자유,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가 주는 자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단서를 독서에서 만났습니다. 불가마에 던져지기 직전 세 유다 청년이 임금의 마지만 회유를 거부하면서 한 말, “그분께서 … 저희를 구해내실 것입니다. …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다니 3,17-18)라는 부분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제 안의 모든 바람에 대해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관대한 의탁과 허용의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겼으니 결과가 어떻든, 자기가 바라던 것이든 아니든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가장 좋은 걸 더 잘 알고 계시니 그분께서 해주시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고 나도 그게 좋다는 마음가짐입니다.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청하되 결과에 집착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무르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진정한 자유란, ‘내 맘대로 할 자유’가 아니라, ‘하느님 맘대로 하시도록 나를 활짝 펼쳐놓고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일 겁니다. 이 자유는 말씀에 머물러 진리와 접촉하는 이에게 가능합니다. 이런 이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그분께서 가슴이 터지도록 기쁘고 행복하시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벗님 여러분은 자유로우십니까? 아니면 이런저런 굴레에 얽매여 있습니까? 언제 자유로운 영혼으로 훨훨 날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자유롭지 못함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요한 8,32) 테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진리를 찾아 누릴 수 있을까요? 수많은 현자(賢者)들이 이 진리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이 진리에 도달한 사람들은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하며 웃고 맙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너무도 쉬운 곳에, 너무도 가까운 곳에 있었음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기 때문이랍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멀리서 진리를 찾는 헛수고를 하지 말고, 내가 곧 진리이니 나에게서 진리를 찾고 깨달음을 얻으라 하십니다. 저는 말씀 묵상을 하면 할수록 진리가 아주 가까운데 있음을 더욱 느낍니다. 그 말씀이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 줍니다. 언젠가 이 말씀마저도 필요없이 “나는 이미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다. 나는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하고 고백할 날이 오기를 염원합니다. 말씀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8,31-42: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안에 머무르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31절) 우리가 그 말씀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진리와 자유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것이 바로 믿음과 희망으로 사는 이들이며, 진리와 자유를 얻기 위해서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2절) 이 때에 우리는 진리 자체를 향해 가는 것이며 그 진리는 참된 자유를 주시는 분이시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된다.

이 자유는 우리가 진리에 우리 자신이 온전히 따를 수 있을 때 얻을 수 있다. 이 진리는 우리를 죽음, 곧 죄의 노예상태에서 자유롭게 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평화 속에서 진리를 누리지 못하는 한 어떠한 자유도 누리지 못한다.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죽음으로부터, 부패로부터, 변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는 의미이다. 진리는 그 자체가 죽지 않고 썩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죽지 않고 썩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이시다.

이 말씀에 유대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33절) 라고 한다. 이 말이 이미 진실이 아니다. 요셉이 팔려갔고(창세 37,28 참조), 예언자들이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는가?(2열왕 24 참조) 또한 400여 년 동안 이집트에서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들며 이집트인들을 섬기지 않았는가?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종살이하던 집에서 구해내시지 않았는가?(참조: 탈출 13,3; 신명 5,6) 그리고 지금도 유대인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34절) 어떤 문제 어떤 상황에서든 악에 의지할 경우 그는 죄의 종이 되는 것이며, 죄로 인해 생긴 상처와 낙인은 그 도망친 종이라는 드러내 준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들과 딸의 참된 자유를 주신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머무른다.”(35절) 죄의 종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영원한 벌을 받지만, 자유를 얻을 자격을 받은 아들딸은 언제나 하느님의 호의를 받고 결코 그것을 빼앗기지 않는다. 아들을 통하여 자유롭게 되고 아들의 자격을 얻으면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37절)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도 게으름으로 소홀한 실천으로 그의 자손이라는 지위를 잃어버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을 알려주신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즉 그들의 마음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씀이 그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39절)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말하고 있다. 전 생애를 통하여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가졌던 관계를 말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그러한 신앙으로 살아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40절)고 하셨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41절) 하시니까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41절)라고 한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42절) 하느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의 아버지가 아니시다. 예수님께서 사랑받으셔야 하는 이유는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셨고, 그 하느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아들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또한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이 순간 이후 진정 우리는 하느님 앞에 그리고 다른 사람 앞에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하면서, 이 사순절을 통하여 나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 앞에 새로이 태어나는 기회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도 게으름으로 소홀한 실천으로 그의 자손이라는 지위를 잃어버릴 수 있다”에서 가톨릭 신자여도 게으름으로 소홀한 실천으로 주님의 은총(지위)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는 그런 은총을 간직(게으름과 소홀한 실천이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고 있는지)하며 살고 있는지 묵상해보고 그 은총을 간직하기 위해 부지런함과 실천 이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활동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3. 우리는 늘 죄의 종으로 살면서 회개를 하고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나의 회개를 방해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묵상해보고 어떻게 하면 주님 안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유다인 제자들처럼 내가 가지고 있던 신념이 한순간에 무너진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무너진 이후에 좌절을 했나요 아니면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갔나요? 신앙 안에서 무너진 경험이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보너스). 봉사를 하다보면 사람들과 부딫치거나 같이 봉사하기 꺼려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약 신부님이나 다른 봉사자에게 사람들 앞에서 훈계를 들었다면 어떻게 하는게 주님의 자식으로써 옳은 행동인지 이야기 해봅시다.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가톨릭 카톨릭 복음나눔 복음말씀 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말씀나눔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 기독교